공주를 바꾼 사건&인물 8
우금티에서 스러진 후천개벽의 꿈
동학농민군은 왜 우금티를 넘으려 했나
1894년은 20세기 조선의 운명이 결정된 해였다. 2월, 전라도 고부의 농민들이 관아를 들이치면서 시작된 제1차 동학농민전쟁은 주로 전라도에서 벌어졌다. 동학군이 영향을 미치던 100여 고을에서는 관의 행정력이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충청도의 동학 기세도 1893년 보은집회 이래 갈수록 커졌다. 전라도와 달리 무장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농민들이 다투어 입도하면서 관아가 대처하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거세져 갔다. 양반과 향리 등 향촌사회의 지배층은 동학을 사교邪交로 규정했다. 이념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본격적 침략이 현실화되는 데도 이렇게 민족 내부 갈등은 깊어만 갔다.
동학농민군을 제압할 능력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1894년 6월 1일 청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 군사 2,800명이 아산만에 상륙했다. 1885년 청-일 사이에 맺은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도 군대를 파견할 구실이 생겼다. 바로 다음 날 일본군 4,500명이 득달같이 제물포항으로 밀고 들어왔다. 일본군은 한양으로 직행해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겁박해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김홍집·박정양 등으로 친일 내각을 출범시켜다. 새 내각은 조-청 간에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1952~1957년 왜란 이후 300년 만에 일본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다시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일본군은 예상외로 막강했다. 청의 해군을 황해에서 격파하고 육군을 평양에서 무찔렀다. 일본군은 랴오둥반도까지 진출해 중국 본토까지 노렸다. 청은 더 큰 피해를 보지 않으려 불평등 조약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을 서둘러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경군을 무장해제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충청도의 동학조직은 무장궐기에 들어갔다.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를 청소하고 신분제를 타파하며, 밖으로는 외세 침략을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7월 이후 충청도 상당 부분이 동학의 세상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지역사회 분위기가 들끓었다. 노비가 스스로 상전 집에서 나오고, 지역사회에서 지탄받던 양반과 하급관리를 징치懲治하는 일이 잦아졌다. 억울하게 빼앗긴 땅과 재물을 되찾는가 하면 사적 분풀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관아와 지주들의 농민에 대한 무소불위의 탐학 행위는 자연히 중지되었다.
읍내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는 기존의 행정·사법권이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주 최시형의 지도를 따르던 충청도의 북접北接은 읍내와 관아를 들이치는 일은 삼갔다. 무장을 하거나 교단에 알리지 않고 집회를 하지 말라는 교단의 지침을 따른 것이다. 충청도의 동학지도자들은 대부분 최시형이 포덕한 사람들이었다.
일어서는 공주 일대 동학농민군
1894년 6월 말부터 공주 인근 지역에서도 봉기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일부 농민군은 일본군 철수를 요구하며 한양으로 향하겠다는 기세를 드러냈고, 회덕과 진잠에서는 무기고를 탈취하기도 했다.
7월 3일, 공주의 대교장기, 공수원우성 등지에서 농민군 1,000여 명이 모여 ‘위국위민’을 외쳤다. 이인에서는 7월 초 임기준의 주도하에 도회소都會所가 설치되어 돈과 곡식을 모으는 등 집강 활동이 활발했다. 이인반송의 농민군접주 김필수은 “지금 외국이 내침해 종사가 매우 위급하니 군대를 일으켜 한번 토벌해 환난을 평정하고자 한다”며 군량과 마필, 총 등을 거두었다.
7월 12일, 우선 동천점에서는 ‘도인道人을 자처하는 자’들이 ‘보국안민’과 ‘척화거의斥和擧義’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을 배척하는 창의에 나서겠다고 충청 감사에게 통지하는 동학 지도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8월 1일, 정안 궁원운궁리에 동학교도 1만여 명이 모여 창검으로 무장하고 이튿날 공주 부내로 진입했다. 이들은 충청감영 비장 출신인 대접주 임기준의 주도로 시위를 벌이다가 8월 3일에 물러나 금강 주변을 휩쓸고 다니며 감영군과 전투를 벌이기 직전 상태로 대치했다.
8월부터 공주 달동의 접주 장준환이 동학교도 700여 명을 거느리고 부여와 광천을 넘나들었다. 이들은 나중에 효포와 이인전투에 참여했다. 감영만 점령되지 않았을 뿐이지 공주부내 대부분 지역을 농민군이 장악하거나 활보했다. 동학농민군이 활동하는 인근 지역의 양반부호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거나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유회군儒會軍을 조직해 스스로 방어활동을 하기도 했다. 유림에서는 동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동비東匪’ ‘동적東敵’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사태를 불러온 조정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내 북접에 내려진 기포령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9월 10일 ‘척왜’를 내세워 재봉기를 선언했다. 무장활동을 반대하던 교주 최시형도 9월 18일 총기포령을 내렸다. 기호와 영남, 강원, 황해도와 함께 충청도 동학조직은 일제히 각지에서 봉기했다. 10월 23일, 손병희가 지휘하는 충청도 북동부지역 농민군은 전봉준의 남접군이 집결한 논산으로 향했다. 반면 전라도의 김개남부대는 금산을 거쳐 진잠과 회덕 일대로 올라와 청주성으로 진격했고, 손화중과 최경선의 부대는 나주 일대에 머물러 있었다.
4만에 이르는 대대적 연합부대를 형성한 동학농민군은 충청감영이 자리한 공주를 공략하기로 했다. ‘호서의 요충’이자 ‘호남의 관문’인 공주를 장악하면 한양으로 진격하는 데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1차 봉기 때 전주성을 점거하고 중앙정부와 화약을 맺은 것처럼 협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전봉준은 공주의 감영에 글을 보내 충청 감사 박제순나중에 을사 5적이 됨에게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임금을 핍박하고 국민을 어지럽게 하는 것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라며 일본군을 함께 몰아내자고 요구했다. 2차 봉기에 즈음해서 전봉준은 “동족끼리 싸우지 말고 관과 농민군, 유생들이 힘을 합쳐 일본군과 싸우자”는 제의를 해서 호응을 얻고 있었다.
이때 종5품 도사 벼슬을 지낸 공주 건평탄천 남산리의 유생 이유상李裕尙이 유회군 200여 명을 이끌고 논산의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 그는 “유도儒道 수령으로 동학당을 치고자 왔으나 장군전봉준을 만나보니 감동되는 바 있어 협력하기로 했다”라고 피력했다.
이유상은 공주 대전투에서 선봉장으로 맹활약했다. 공주 인근 지리를 잘 알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부여의 민준호가 유회군을 조직해 농민군을 토벌하자고 권유하자 “왜를 토벌해 나라에 충성하자”라고 만류하고, 전봉준을 만난 뒤 형제 결의를 맺었다. 그는 전봉준을 은밀히 해치려고 한 강경의 전임 여산 부사 김원식을 처단하기도 했다. 10월 15일, 공주창의소 의장 명의로 충청 감사 박제순에게 “청을 막자는 것은 대의大義를 멸시하는 것이고, 의병을 막자는 것은 그 계책이 잘못되었으며, 일본을 막자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 누군들 이러한 마음이 없었겠는가?”라고 통박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 남쪽의 경천남접과 이인북접, 금강 북쪽의 대교와 궁원, 유구를 군사적 거점으로 삼았다. 논산·부여·유성·청주·천안·예산·정산 등에서 쉽게 넘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유구·신풍·사곡 등 서삼면西三面과 우성·정산 지역 농민군은 금강을 건너 이인에 전진기지를 둔 북접군손병희·이용구 주도과 함께 공주 대회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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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어떻게 뭇사람을 모았나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1824~1864는 1860년철종 11, 유불선儒佛仙의 교리를 종합해 동학을 창시했다. 서학과 이양선 등 서양세력의 위세와 삼정문란三政紊亂이라는 중첩된 위기에 놓인 민중을 구제하자는 뜻이었다. 최제우는 자신의 노비들을 해방해 자식으로 삼았고, 신자들에게는 신분을 뛰어넘어 맞절을 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혹세무민’ ‘사도난정邪道亂正’ 혐의로 1864년 대구감영에서 처형되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탄압과 감시를 피해 전국 각지를 신출귀몰하며 경북 경주 일원에 한정되었던 동학의 교세를 더욱 넓혔다. 혹독한 탄압에도 동학이 확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동학은 ‘사람이 본래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을 섬기듯이 하라人是天 事人如天’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輔國安民’ ‘널리 민중을 구제하라廣濟蒼生’ 등을 중심 교리로 가르쳤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누구나 자기 안에 천주, 즉 한울님을 모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신분과 계급이라는 기준이 하늘이 내린 평등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는 말에 신분이 천한 자, 가난한 자, 양반에게 핍박받고 천대받던 자들이 몰려들었다.
조선의 집권층에 동학은 주자성리학적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종교였다. 조정은 동학을 이미 가혹한 탄압을 가하던 서학그리스도교의 변종으로 취급했다. 서학은 1880년대 초 열강들과 연이어 수교를 맺으면서 합법화되었지만 동학은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공주와 최시형, 손병희의 인연
1880년대 이후 최시형은 여러 차례 공주를 찾았다. 유구·마곡의 십승지, 이른바 유마지간과 무성산 인근에 상당한 교세를 형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첫 번째는 공주 대회전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인 1884년 10월, 마곡사에 부속된 북가섭암에서 손병희·박인호 등과 함께 49일 기도를 올렸다. 두 번째는 1885년 6월, 관군의 추적을 피해 장한주 등과 함께 마곡으로 재차 숨어들었다. 세 번째는 1890년 12월부터 1년간 사곡 신평리신영리 윤상오의 집과 정안 운궁리에 은신 겸 기도처를 마련하고 손병희·김연국·손천민 등과 함께 수련하며 포교활동을 벌였다. 이렇게 공주가 포교 중심지 역할을 한 데는 1881년에 최시형을 찾아가 입도한 공주 최초의 동학도 윤상오의 역할이 컸다. 그는 1891년에 호남우도 편의장 겸 도접주에 임명된 동학교단의 유력 인물이었다.
1892년 10월 동학의 교조 신원운동이 공주에서 처음 시작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최시형은 “교조 신원의 대의에 적극 참여하라”는 요지의 입의통문立義通問을 전달한 후 공주의송소公州議送所를 설치했다. 이곳에 집결한 서병학·서인주 등 각 지방 접주들과 교도 1,000여 명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의송단자를 작성해 충청 감사 조병식에게 보냈다. 조병식은 신원 요청은 거부했지만 동학도를 단속한다는 핑계로 불법적 수탈을 하지 말라고 각 고을 수령에게 지시했다.
1894년, 황해도 팔봉의 동학접주로 황해감영을 공격한 선봉장 김창수金昌洙, 1876~1949, 김구金九로 개명도 이 무렵 공주 마곡사에 숨어들었다. 그는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쳐죽이고 인천 감옥에서 사형수로 복역하다 탈옥해 1898년 늦가을 공주까지 온 것이다. 그는 마곡사 백련암에서 머리를 깎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8개월 동안 은신하다가 이듬해 고향 해주로 돌아갔다.
동학농민군의 원혼이 떠도는 우금티 옛 싸움터에는 1973년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세워졌다. 그 비문 가운데 “삼가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품신하였더니…” “빛나는 시월유신의 한 돌을…” “혁명 이래의 신생조국…” 등 일부 구절의 글자들은 으깨져 알아보기 힘든 채 남아 있다. 이곳은 우금티전투가 벌어진 때부터 100년이 지난 1994년에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사)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이사장 박남식가 매년 11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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