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란 지식이 없는 무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가령, 혐오 발화자들을 보면 그들은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쓴다. 혐오 발화를 하는 이들도 나름 지식으로 무장한다. 이 책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세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진지함과 생각에 대한 혐오,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과 결합하는지, 표현의 ‘자유’와 저항할 ‘권리’의 관계를 살핀다.
들어가며
: 진지충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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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벌레들의 시대. 죄 없는 벌레들에게 미안하다. 온갖 ‘충’이 득실거린다. 혐오 발언이 놀이처럼 입에 들러붙은 혐오 발화자들은 각종 ‘충’을 창조하고 있다. 인간이 특정 집단을 배척하고 조롱하기 위해 그 대상을 ‘벌레화’ 시키는 전략은 나름 역사가 있다. 나치는 유대인을 벌레나 쥐로 여겼다. 벌레는 징그럽지만 대체로 작고 약해서 쉽게 짓밟아버릴 수 있는 대상이다. 인간의 기준에서 벌레들은 인간을 귀찮게 하고 해로운 병을 옮길 수 있기 때문에 박멸의 대상이 된다. 반려동물인 개를 죽이면 그 잔인함을 쉽게 인지할 수 있지만 발밑을 꾸물꾸물 기어가는 그리마 한 마리를 쿡 밟아버린다고 심하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으며 주위에서 비난이 날아오지도 않는다. 벌레를 죽이기 위한 화학약품도 시중에 판매되고 있으니 벌레를 내쫓고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종종 사회에서 어떤 이들을 향해 벌레라고 부를 때, 벌레가 된 이들은 미개하고 인간적이지 않아 혐오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된다. 흉악한 사람이나 인정 없는 사람을 두고 흔히 ‘인간적이지 않다’고 표현한다. 이처럼 혐오하는 대상에 대한 비인간화 전략은 혐오하는 ‘나’의 행동을 정당하게 만든다.
오늘날 창궐하는 각종 벌레 중에서 ‘진지충’은 조금 다른 위치에 있다. 사회적 위치와 역할, 정체성, 출신 성분 등으로 혐오의 대상이 된 많은 ‘충’들과 달리 ‘진지충’은 태도로 인해 혐오를 받는다. ‘쓸데없이’ 진지한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개그를 다큐로 받는다.’ 이럴 때 실패한 개그를 돌아보기보다는 ‘왜 웃자고 한 소리에 죽자고 달려드냐’며 도리어 화를 낸다. 유머를 생산하는 행위도 일종의 권력행위다. 유머에 대한 진지한 반응은 어느 정도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된다. 지루한 ‘부장님 개그’에도 직원들이 웃음으로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
진지함이 조롱받고 ‘세 줄 요약’을 권장하는 시대에 ‘생각하기’에 대해 생각한다. 반지성적 사회현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지나간 뒤 1963년 출간된 리처드 호프스태더의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기업 사회, 복음주의 종교, 실용주의 사상, 평등주의 정신 등을 들어 지성에 적의를 가진 사회를 분석했다. 미국에서 지식인을 비하하는 ‘고수머리 지식인’이나 ‘계란머리egghead’라는 말이 있었듯이 한국에도 여전히 ‘먹물’, ‘책상물림’처럼 지식인을 조롱하는 정서가 팽배하다. 비단 한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지식인 조롱과 비난은 언제 어디서든 있기 마련이다. 1965년 장폴 사르트르는 일본에서 지식인에 관한 강연을 했고 1972년 이 강연 내용을 정리해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는 “어느 나라에서고 지식인에 대한 비난이 동일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오늘날 이 말은 더는 충격적이지 않다. ‘지식인intellectual’이라는 언어를 널리 쓰게 된 계기가 드레퓌스 사건임을 고려할 때, 지식인의 실체와는 별개로 ‘지식인’이라는 호명은 그 태생부터 대중과 권력 양쪽에서 조롱과 비난을 받는 운명이다. 이는 지식인의 책임이기도 하다.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지적으로 게으르고 당파성에 붙잡힌 지식인은 지식을 도구로 사회를 해롭게 한다.
그러나 지식인과 지성에 관한 거부는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지적으로 게으른 지식인을 비판하는 차원에만 한정되진 않는다. 문화예술계 탄압을 위해 제도적으로 광범위하게 조직된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부터 일상 속 진지함을 향한 경멸까지, 생각과 표현의 삭제는 늘 벌어져왔으며 여전히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진지함은 속 좁음, 과감하지 못함, 이해력 부족, 유머 없음, 사회성 부족, 옹졸함, 찌질함, 과격한 도덕주의자의 성질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파시즘이라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불편한’ 문제 제기를 불편해하는 정서가 만연하다. ‘프로 불편러’라는 조어는 불편해하는 사람을 낙인찍는 언어로 활용된다.
‘느낌적 느낌’이라는 조어처럼 느낌의 느낌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를 ‘합리적인 의심’이라 주장한다. ‘사이다’ 언어가 각광받고 촉을 향한 신뢰가 성장했다. 진지함이 조롱받을수록 생각하는 인간은 우스꽝스러워진다. 표현의 자유와 취향을 방패삼아 ‘생각하지 않음’을 정당화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자유와 지성은 적대적이거나 양립 불가능한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동반자 관계다. 자유를 빌미로 지성을 과감히 공략하는 방식을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진지충의 탄생은 반지성적 사회의 증상이다. 진지함을 ‘충’으로 업신여기기보다 진지함의 회복을 위해 지성의 복원, 상상력의 확장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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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과연 한국 사회에 반지성주의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높은 교육열은 말할 것도 없으며, 인문학 열풍이라는 말이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고 온갖 종류의 인문학 강의와 책이 팔리는 사회에서 지성은 오히려 넘쳐나고 있지 않을까. 2017년에는 1년에 출간되는 신간이 8만여 종을 넘었다. 2015년에는 7만여 종이었고 2013년에는 6만여 종이었으니 발행 종수만 기준으로 보면 출판계가 풍성해 보인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란 단지 무지나 무식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반지성적 면모를 보이를 사람 중에는 지식이 부족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식이 풍부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인물은 지식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인물은 지식을 탐독하는 적극적인 지식유통업자로 굉장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소설 『화씨 451』에서 책을 불태우는 데 앞장서는 방화서의 서장 비티는 결코 무식하지 않다. 그는 명문을 술술 외운다.
혐오 발화를 하는 이들도 나름 지식으로 무장한다. 19세기까지 서구에서 과학과 성경을 바탕으로 흑인과 여성 일반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었듯이, 오늘날 한국은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에게 그 화살을 겨냥한다. 적어도 무늬는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갖추고 나름 ‘합리적인 혐오’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편향적 사상을 아이들에게 주입한다는 명목으로 페미니스트 교사를 공격하거나, ‘나무위키’ 사용자가 ‘젠더 이퀄리즘’이라는 날조된 문서를 만들어 기존 페미니즘을 왜곡하는 선동을 펼치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현상을 보며 차별이나 혐오는 ‘지능의 문제’라고 농담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의 힘은 대단하다. 하지만 사람이 적극적으로 차별에 가담하는 이유는 지능이 낮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다. 지적 능력과 타인의 고통에 관한 서사적 상상력은 별개다.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는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위해 열정적으로 지식을 활용한다. 기존 질서의 변화를 두려워하기에 자신을 바꾸는 성찰과 반성을 거부한다. 또한 혐오는 열등감을 가득한 사람들의 배설이라기보다 하나의 놀이이자 또래문화로 자리잡았다. 혐오 표현은 초등학교 교실에까지 침투했을 정도다. 오늘날 하나의 교리처럼 퍼져나가는 ‘자존감을 높이라’는 구호는 이러한 태도를 더욱 부추긴다. 자신을 존중하고 아끼라는 말을 ‘나는 무조건 옳다’로 옮기거나, 체제에 저항할 줄 모르는 나르시시스트 인간됨을 권장한다. 성찰하는 의식을 가진 사람을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굴절된 상황이 펼쳐진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반지성주의는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다. 혐오 발화자들은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를 쓴다. 모르지만 규정하려 한다. 오늘날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거나, ‘귀족노조’ 때문에 기업이 힘들다거나, ‘종북’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거나,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는 믿음이 바로 그렇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마녀’인 ‘층’을 계속 만들어내 ‘인간’ 사회에서 몰아낸다. 혐오 대상은 언제나 비인간화되었다. 타인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듯 비인간화된 대상을 통해 자신이 ‘인간적인’ 인간임을 확인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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