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시인의 탄생
1930~1945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태어난 공간과 태어난 시기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다. 시인 신동엽이 바로 그러하다. 그가 부여에서 태어나고 1930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사실은 그의 삶에 결정적인 동기를 준다.
그가 태어난 해는 만주사변 1년 전이기도 하다. 그는 태평양 전쟁 때 배고픈 학생 시절을 보내고, 한국전쟁 때는 군인의 신분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지루한 식민지 시절과 두 번의 전쟁, 혁명을 겪으면서 그는 역사의 흉측한 내장을 들여다 보았다. 시인 신동엽은 세계사의 거센 파도와 곡절 많은 현대사 속에서 역사적 존재로 거듭났다.
그의 시는 조선과 고구려를 넘어 상고시대의 옛날까지 펼쳐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아주 먼 과거를 ‘그 옛날’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생활 이야기와 함께 극적으로 살려낸다는 점이다. 그의 ‘옛날 이야기’는 단지 과거로 돌아가자는 회고주의가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여는 옛날’이다. 그의 시는 ‘과거의 읽을거리’가 아니라, ‘내일을 위한 잠언’이다.
그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신동엽과 그의 가족의 삶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한국의 현대사와 맞물려 있다. 그의 삶을 읽을 때는 항상 그의 고민이 늘 미래로 열려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열쇠로 그가 살아온 삶의 문을 열면, 그의 작품을 보는 눈이 새로워진다. 이제 침묵하고 있던 그의 생애에 수굿이 귀를 열어 주시기 바란다. 그의 삶을 만나고, 다시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돌연 상상력의 융기를 체험하는 더없는 행복의 순간이 있기를 바란다.
한때 부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백제의 도읍지였다. 지금도 부여에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백제의 향기가 곳곳에 남아 있다. 부여 한가운데에 흐르는 금강은 백제의 젖줄이자 대동맥이다. 이 강을 따라 중국 문화가 들어오고, 백제 문화는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백제의 도읍 부여읍 가운데에 있는 동남리라는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을 조금 벗어나면 초록으로 눈부신 금강의 물줄기가 넉넉하게 흐르고, 야트막한 산등성은 어머니가 아이를 안은 것처럼 참으로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로 이 마을, 충남 부여읍 동남리가 큰 시인을 만들었다. 저 옛날 백제의 도읍이던 이곳에서 우리는 시인의 탄생, 신동엽 시의 기원起源을 묻는다. 서둘러 말하자면 동엽은 부여에서 태어남으로 평생 그의 정서적인 조국은 백제가 되었다. 국가로서의 백제가 아니라, 백제가 가진 평화공동체가 그의 정서적인 조국이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는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가난한 농부 신연순申淵淳과 어머니 김영희 사이에서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김영희는 신연순의 둘째 부인이다. 첫째 부인은 딸 신동희와 아들 하나를 낳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이 겨우 돌을 넘기고 죽은 까닭에, 둘째 부인의 아들로 태어난 동엽은 어버지에 이어 2대 독자로 태어난 셈이 되었다. 동엽에게는 위로 배다른 누이 신동희申東姬, 1928년생, 아래로는 여동생 4명이 있었다. 어머니는 동엽 밑으로 아이를 여덟이나 낳았지만 모두 딸이었고, 그중 넷은 어려서 죽었다. 동엽의 누이동생이 4명이나 죽은 것은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몹시 가난한 데다가 의료 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작은 병치레만 해도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일본 식민지 시대, 더욱이 동엽이 태어난 1930년은 일본이 중국에 싸움을 건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1년 전으로, 일제는 바야흐로 조선에 있는 모든 것을 긁어 가 무기를 만들던 시절이다. 숟가락, 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하는 식민지의 기막힌 현실은 동남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주로 지었지만 수확물은 일본에 강제로 다 빼앗겨 쌀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고, 사람들은 대부분 콩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동엽의 집도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소학교초등학교 성적표를 보면 동엽이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1년에도 여러 날 병가를 얻곤 했다. 동엽이 어려서부터 허약한 이유는 어머니가 동엽을 임신했을 때부터 제대로 배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엽이 아홉 살이 되던 1939년에는 큰 가뭄까지 겹쳐 몇 달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물놀이 하던 금강은 물이 말라 강바닥까지 드러났고, 미꾸라지가 뛰놀던 논물도 바싹 말라 논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먹을 것이 없어 어린아이건 늙은이건 쓰디쓴 풀로 죽을 쑤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입에 대기도 싫은 풀죽을 억지로 먹어야 했다. 당시에는 초가집 옆을 지나다 보면 쇠여물을 끓이는 무쇠 솥에다 풀죽을 쑤는 아낙네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동엽은 그때의 참담한 풍경을 이렇게 기록한다.
내 고향 사람들은 봄이 오면 새파란 풀을 씹는다. 큰 가마솥에 자운영·독사풀·말풀을 썰어 넣어 삶아가지고 거기다 소금, 기름을 쳐서 세 살 짜리도, 칠순 할아버지도 콧물 흘리며 우그려 넣는다. 마침내 눈이 먼다. 그리고 홍수가 온다. 홍수는 장독, 상사발, 짚신짝, 네 기둥, 그리고 너무나 훌륭했던 인생체념으로 말미암아 저항하지 않았던 이 자연의 아들 딸을 실어 달아나 버린다.
― 신동엽, 「나의 설계 – 서둘고 싶지 않다」, 『동아일보』, 1962.6.5.
어린 동엽은 굶주림과 홍수가 번갈아 휩쓸고 지나가는 궁핍한 땅에서 가끔 누나와 함께 찬이나 국거리로 쓸 만한 나물을 뜯으러 들녘과 산자락을 쏘다니곤 했다. 동엽은 나물을 뜯으러 다니면서 동희 누나에게 더덕, 돌나물, 달래, 딱쥐를 비롯해 삽주, 원추리 등 수많은 풀 이름을 배웠다. 물론 산에는 누나뿐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들이 함께 올라 나물을 뜯었다. 그때의 기억을 동엽은 시 「여자의 삶」에 생생하게 되살린다.
그리고 나는 보았지
송홧가루는 날리는데, 들과 산
허연 걸레쪽처럼 널리어
나무뿌리 풀뿌리 뜯으며
젊은 날을 보내던
엄마여,
누나여,
― 신동엽, 「여자의 삶」 중 36연, 『여성동아』, 1969.1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들과 산에서 허리를 굽히고 나무뿌리며 풀뿌리 뜯는 모습을 “허연 걸레쪽처럼 널리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 풍경이 시인에게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 인용 앞에 “여자는 집 / 집이다, 여자는 / 남자는 바람, 씨를 나르는 바람 / 여자는 집, 누워있는 집”22연이라는 시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을 두고 이동하는 여자는 “누워있는 집”이라는 한 구절을 들어 “꼼짝도 못한 채 한 자리에 붙박여 남자라는 이름의 바람이 찾아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이동아, 「신동엽론-역사관과 여성관」, 『한국현대시연구』, 민음사, 1989라고 비평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신동엽의 역사관은 여성억압적이고 반성 없는 농본주의적 성향이라고 결론 짓는다. 이러한 평가는 이 시의 “선택하는 자유는 저한테 있습니다 / 좋은 씨 받아서 / 좋은 신성 가꿔보고 싶습니다”13연라는, 여성의 자율성을 표현한 구절을 평자는 간과한 것이다.
시인은 다시 여자의 상징을 확장시켜서, 옥바라지하는 여자, 풀뿌리 뜯으며 가난 속에 살아가는 여자, 맨발로 삼십 리 길을 뛰는 한국 여인네를 말한다. 이러한 대목에서 위의 인용된 시 구절36연이 나온다. 결국 위의 인용 구절은 절망하고 숙명적인 여인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극한 상항에서도 평화를 일구어 내는 대지大地의 모성母性을 지닌 ‘위대한 어머니’를 표현하기 위한 시 구절이다. 이렇게 어떤 절망의 풍경도 신동엽의 언어가 놓이면, 시대를 극복해보려는 ‘낙관적인 비관주의’로 순식간에 역전되는 것을 그의 모든 시에서 경험하게 되는데, 이 시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그의 시에는 이렇게 낙관적인 극복의 의지가 발휘되곤 한다.
1938년 동엽은 여덟 살에 ‘부여 공립 진죠 소학교’에 입학한다. ‘진죠소학교’란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일본의 학제로, 1942년에 폐지되고 ‘초등학교’로 불리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이 시기의 신동엽을 연구할 수 있는 사진과 자료가 풍성하다. 특히 지금까지 신동엽의 소학교 성적표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보관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성적표를 통신부通信簿라고 하는데, 동엽의 소학교 시절 통신부를 보면 신동엽의 어린 시절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어린 동엽은 대단히 성실한 모범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성적표를 보면, 동엽이 2학년 때부터 늘 상위 등급을 차지했으며, 4학년 2학기 때 반장, 5학년 1학기 때는 부반장을 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1939년도 2학년 성적표를 보면, 그는 1학기 6/8080명 중 6등, 2학기 3/77, 3학기 4/77, 4학기 7/77로 늘 상위권을 유지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성적표에는 쉬거나 게으름을 피우거나 하지 않고 학업에 힘썼다는 ‘정근精勤’ 도장이 찍혀 있다. 다만, 동엽의 이 성적표에는 병으로 결석했다고 기록된 날이 잦다. 동엽이 어릴 적부터 그리 건강하지 않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 파시즘 시대에 들어선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볼 수 있다. 이 성적표 가운데서 특이한 점은 1940년 3학년 성적표부터 그 첫 장에 천황에게 충성을 강요하기 위해 1937년 10월에 제정된 ‘황국신민의 서사誓詞’가 적힌 점이다. 1938년 1월 이후 모든 잡지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게재하도록 하여 이를 실행하지 않는 잡지는 불온 문서 취급을 받았다.
1.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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