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집을 짓는 일이지만 사람이 만드는 다른 구조물과는 다른 바가 많다. 건축은 기술을 사용하되 사람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묻는다.(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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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창가의 빈 병
건축은 혼자 있지 않다
건축이 무엇인지, 사람에게 어떤 것인지는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노르웨이 건축가 스베레 펜Sverre Fehn이 설계한 헤드마르크 박물관Hedmark Museum. 1979은 고대 로마의 유적을 담고 있으며 노르웨이 농가의 도구 등을 전시하는 곳이다. 새로 지은 것이 아니고 예전부터 써오던 집을 고쳐 지은 것이다. 벽돌로 창문 안쪽을 깊이 있는 볼트vault로 만들었다. 창대window sill 아래로는 투박한 돌이 쌓여 있고, 위가 둥그스름한 창으로 빛이 들어온다. 창틀도 오래전부터 사용해오던 것이다. 이 벽돌과 돌과 유리는 단순히 조합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말해주고 있다.
이런 박물관의 창가에 농가에서 담아 마시던 와인병이 놓여 있는 한 컷의 장면은 건축에 관한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말해준다. 어디에 버려도 아깝지 않은 병 하나가 운 좋게 뽑혀 창가에 전시되어 있다. 같은 병이라고 해도 땅에 굴러다닐 수도 있고 방바닥에 놓일 수도 있지만 이 병은 이 ‘자리’에, 두툼한 벽으로 만들어진 창가에 특별히 놓였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창가의 벽면과 바닥을 비춘다. 빛은 빈 병을 투과하며 유리가 지닌 본래의 성질을 드러내고 있다.
이 병은 혼자 있지 않다. 창가의 돌, 벽돌, 와인병, 창문, 빛, 마당, 돌담, 이 집과 이어진 다른 건물, 하늘, 나무와 함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물질세계와 관계하며 풍경 안에 놓여 있다. 병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창가에 노출되며, 바깥 풍경을 향해서도 열려 있게 된다. 창가에 그냥 놓여 있지 않고 접어놓은 철판 위에 얹혀 있으며, 주둥이에 철봉을 꽂아 가볍게 잡아주었다. 그러나 이것도 잘 보면 빈 병의 일부이며 병이 확장된 것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Der Ursprung des Kunstwerks, 1952》에서 이렇게 썼다.
“신전은 그곳에 그렇게 서 있음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사물들에게는 그 자신들의 모습을 건네주고, 인간들에게는 자신의 참모습을 돌이켜보게 한다.”
그의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창가의 빈 병은 창가에 그렇게 서 있음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창가와 유리창과 바깥의 여러 유적들에게는 그 자신들의 모습을 건네주고, 인간들에게는 빈 병의 참모습을 돌이켜보게 한다.”
이런 장면, 즉 창가의 빈 병은 박물관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농기구가 있는 다른 방에는 곡식을 빻는 기계 같은 것이 전시되어 있다. 지붕의 한 부분을 유리창으로 만들어 여과된 빛이 이 농기구를 비추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곡식 낟알을 조금씩 떨어뜨리는 철판 역시 오래전부터 이 농기구에 붙어 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창가의 빈 병을 받치던 받침대처럼, 이 철판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병은 농기구로 바뀌었고, 밖을 내다보던 창은 지붕의 천창으로 바뀌었으며, 창가에 있던 물체는 이제 방 위에 놓였다. 그러나 변한 것은 별로 없다. 창가에 놓인 빈 병이나 전시장에 놓인 농기구나 공간 안에서는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빈 병 주위의 창대와 두툼한 벽과 둥그스름한 곡면은 농기구가 놓인 전시장의 바닥, 벽, 지붕과 같다. 창가를 확대하면 방이다. 운 좋게 뽑혀 자리 잡은 위치는 고유한 장소다. 창에 비친 빛은 곧 방에 비친 빛이다. 빛을 받아 자기만의 고유한 빛깔을 내는 것은 공간의 고유성이고, 창과 그 밖의 나무며 하늘이 만들어준 것은 풍경이다. 흔하고 이름도 없는 병은 익명적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병은 오랫동안 농민들이 만들고 사용하던 것이며, 익명의 농민을 대변하고 있다. 건축은 사물의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이 창가의 병은 이름 없는 농민의 삶을 대신 말해주고 있다.
이 병이 나라면, 그리고 우리 가족이라면 어떻게 될까? 나는 두툼한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있고, 바닥과 벽과 천장으로 덮인 어떤 공간 안에 있다. 이 안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는 않지만, 매일매일 내가 살아가고 머물고 다른 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곳이기에 특별하다. 이처럼 빈 병을 나로 바꿔놓아도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내 집은 생활의 보물 상자여야 한다”고 했다. 두툼한 창가는 와인병에게 보물 상자와 같고, 내 집도 내게 보물 상자와 같다. 창가가 확대되어 방이 되듯 이 ‘방’이 점점 더 커져서 집이 되고 커다란 홀이 된다. 평범하고 흔한 빈 병이 빛을 받아 자신을 주변에 드러내듯 나의 생활이 방에도, 집에도, 마당에도, 동네에도 그리고 더 큰 도시의 한 부분에도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이 생활의 보물 상자는 모두 물질로 이루어진다. 물질과의 대면과 타협 없이 이 병이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병은 크고 작은 사물들의 관계와 풍경 안에 존재한다.
인간이 함께 살면서 풍경과 대면하며 갖게 되는 깊은 의식을 창가에 놓인 병 하나가 다 보여준다. 그 의식은 시공을 가로질러 한국에 살고 있는 나에게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다.
집, 사물과 함께 있는 세계
건축물은 정해진 기능을 갖게 되어 있다. 그리고 특정한 구조로 지어진다. 기계도 기능을 갖고 구조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건축과 같다. 그렇지만 건축에는 기계와 다른 점이 있다. 건축은 환경 안에 놓이고, 환경을 형성하며, 환경과 대화한다. 빛과도 만나고 벽돌과도 만나며, 창가와 창밖의 다른 구조물이나 자연과도 늘 만나는 관계 속에 있다. 더구나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 들어가 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간다. 건축은 우리를 에워싸고 받아들이고 품고 있는 존재다.
건축물은 공간 안에 홀로 서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건축공간은 크건 작건 그것이 서 있는 주변과 거리를 두고 대립하고 있다. 겉으로는 우뚝 서 있는 듯이 보여도 물질들의 무게를 견디려 애쓰고 있고, 비나 바람과 열심히 싸우고 있는 중이다. 이것만으로도 건축물은 혼자 아무 일 없이 그곳에 서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의 몸이 밖에서 오는 여러 자극들을 피부와 근육을 통해 안으로 전달하고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밖으로 표현하듯이, 건축도 빛과 바람과 시선이 창과 문을 통해 드나들며 이어지게끔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 레스토랑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뒤를 돌아보니 헤드마르크 박물관의 창가에 있던 빈 병과 다름없이 다 마셔버린 와인병이 빛을 투과하고 있었다. 빛을 받아 스스로를 현상하며 유리병이 본래 가지고 있던 고유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푸른색, 녹색, 노르스름한 색……. 이 벽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모양이나 재질이 아니라, 그것들이 현상하고 있는 고유한 빛깔이었다.
빛을 이용해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기로 유명한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작품도 이 빈 병에서 현상하는 빛보다 아름답지는 못할 것이다. 터렐이 만든 빛의 공간은 환상적이다. 거기에 들어서면 바로 옆인데도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다. 드러난 그 빛은 인공의 빛이다. 그 공간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가 레스토랑에서 체험했던 소박하고 생동감 있는 빛은 보여주지 못한다. 레스토랑 와인병의 빛은 다른 사물들과 함께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빛이다.
물질은 사물을 이루고 우리는 사물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내 작은 방에는 벽과 바닥과 천장 그리고 많은 책과 가구와 도구들이 있다. 이 방 안에서 나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많은 사물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나아가 창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사물과도 함께 살고 있다. 건축을 공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이다. 이런 감각 없이 “건축은 공간이다” “건축은 땅이다” “콘텍스트다” “무슨 양식이다”라고 백날 배워봐야 소용이 없다.
건축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건축 안에 있는 우리와 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요 나다. 현대문명은 지리적인 한계나 경계 없이 계속 밖으로 밖으로 펼쳐져 나간다. 기계는 대량생산되어 보편적인 가치를 중시한다. 하지만 건축은 비싼 집이든 싼 집이든 유명한 사람의 집이든 평범한 사람의 집이든 모두 일단은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귀속되는 개별적인 존재다.
이런 상태를 두고 하이데거는 사물이 “그 현전現前, presence에 이르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 사물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앞에 드러나 있다고 말한다. 거주한다는 것은 나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물物 옆에서bei Dingen” 이루어진다. 이런 상태를 후설Edmund Husserl은 ‘생활세계Lebenswelt’라고 부른다. 생활세계란 실제로 체험함으로써 지각할 수 있는 세계다. 개인은 외부와 관계없이 생활할 수 없으므로 개인과 관계가 있는 사람, 사물, 사회가 모두 이어져 있다고 본다. 그렇게 보면 이런 사소한 건축적 풍경 안에 하이데거가 있고 후설이 있다.
건축은 창가에 놓여 있는 빈 병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건축물이 그 장소에 서 있고, 그렇게 서 있음으로써 다른 사물들에 자신을 드러내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물 중 건축이 없다면 인간은 어디에서 자신의 기억을 담고 남기고 나눌 수 있을까? 건축이 없다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을까?
내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존재라는 것 이상으로 소중한 것이 있을까? 자기만의 개별성을 인정받기 위해 다들 얼마나 애를 쓰는가? 이 고유성과 개별성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장 가까이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건축이다. 건축을 전공하는 이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실에 터 잡아야 하고, 건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건축의 본질을 보여주는 가장 근본적인 사실이라면 건축은 현대문명에 대하여 참 이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대상을 바깥쪽에서 바라보며 바깥쪽에서 조작해온 근대문명과 기계문명에 대한 반성을 건축에 대한 사고에서 시작할 수 있다. 대상의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고유성과 개별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신체를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것, 또 고유성과 개별성을 위해 환경을 꾸리고 그것과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다름 아닌 건축에서다.
창가의 빈 병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진정한 삶의 모습인지를 살펴보는 중요한 통로로서의 ‘건축’ 이야기로 계속 이어진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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