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겨울에 얻은 현명함
영국 문학은 추위에서 시작한다. 〈방랑자〉로 알려진 다음의 애가elegy가 쓰인 연대는 8세기나 9세기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에서는 고향에서 쫓겨나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라고 느끼며 얼어붙을 듯한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돌면서 지나간 삶의 추억에 사로잡힌 우울한 인물을 소개한다.
geond lagu-lade longe sceolde
hreran mid hondum hrim-cealde sæ
waden wræc-lastas [...]
그는 자신의 노를 저어야 하네.
차가운 물속으로, 바닷길을 따라
망명의 길을 따라야만 하네〔…〕
실제 먼 바다로 나갔든 아니든 그 방랑자는 어떤 피난처를 찾으리라는 가망도 없이 혼자 유일하게 노를 젓고 있는 이다. 그는 한때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의 군주에 충성을 바쳤고 군주는 그에게 따스함과 보호, 명예를 주었다. 그런데 군주는 지금 죽어서 ‘흙 속에 묻혔고’ 동지들은 전투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는 지금 집도, 위로가 될 만한 것도 하나 없이 홀로 적막하게 살아남은 듯 보인다. “나는 비참하게 그곳을 떠났네 / 마음속에 겨울을 품은 채, 얼음 섞인 파도를 가르며 나아갔네”
〈방랑자〉의 시적 효과는 대비를 통해 드러난다. 한때 그가 살던 곳에는 반짝이는 술잔과 영예로운 왕자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직 밤의 그림자만 남아있다. 이처럼 각각의 장면은 다른 장면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지금 그가 겪는 추위는 과거에 미드홀meadhall, 벌꿀 와인 ‘미드’를 마시며 주연이 벌어지던 대연회장에서 타오르던 불과 대비되어 더 쓰라리게 느껴진다. 눈부시게 빛났던 술잔들을 떠올리면 그림자가 훨씬 짙어 보인다. “그에게 추방의 길이란 결코 구부러진 황금 같은 게 아니라네 / 그에게 꽁꽁 얼어붙은 몸이란 결코 땅의 열매가 아니라네” 이런 두운체 시가詩歌 형식은 선사 시대부터 게르만 문화에서 활용되었고 계속 앵글로색슨족 시의 표준적 운율이었다. 두운체 형식은 간결한 대비를 보여주는 이런 시들에서 특히 잘 쓰인다. 하나의 시행에서 두 폭 제단화 같은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반복되는 음들을 통해 두 개의 이미지를 함께 떠올리거나 때로는 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꽁꽁 얼어붙은 몸은 땅의 열매라는 풍요로운 이미지에 집착한다. 또 빛나는 것인 구부러진 황금에도 집착한다. 서리와 황금은 방랑자의 마음을 정교한 금속 세공품의 가닥처럼 서로 휘감고 있다.
21세기의 심리학자들은 온도와 인간의 감정 사이에 어떤 상호 관련성이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배척당한 느낌이 들면 보통 체온이 내려간다. 달리 말해 추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따뜻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보다 사회적인 애착을 덜 느낀다는 것을 연구자들이 실험에서 밝혀냈다. 그러므로 앵글로색슨인들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즉 외로움과 추위 사이에 논리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생리학적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케빈 크로슬리 홀랜드는 ‘wintercearig’를 ‘내 마음속의 겨울winter in my heart’로 번역했다. 문자 그대로의 뜻은 ‘겨울의 근심the cares of winter’이다. 현대 영어와 달리 고대 영어에는 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대단히 효과적이고 잘 인지되는 하나의 단어가 있었다. 이밖에도 겨울과 관련된 앵글로색슨 단어 계보에는 ‘winterbiter겨울의 쓴맛’, ‘winterburner한겨울 급류’, ‘winterceald겨울 추위’, ‘wintergeweorpe눈 폭풍’처럼 읽기만 해도 몸이 오싹해지는 단어들이 있다.
앵글로색슨인들의 시에서 추위의 반대는 태양의 열기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둘러앉은 실내 난롯불의 온기이다. 태양이 빛나는 날은 그들의 시에서 특색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태양은 보통 ‘하늘의 촛불’로 언급되곤 한다. 그들은 태양이 지는 것을 힘이 서서히 스러진다고 표현하고 등잔 기름은 태양이 녹은 것, 지는 태양은 연약한 불꽃으로 비유했다. 이런 비유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앵글로색슨 문화는 통제 가능하고 인공적이며 난롯불이나 양초로 불 밝혀진 홀처럼 사회적인 공간을 기본적으로 더 선호했다. 그래서 방랑자들의 꿈에 등장하는 것은 바람 부는 들판이 아니라 오히려 불을 피워서 연기로 자욱한 실내 분위기였다. 추방된 사람들은 부드럽게 낡아가는 나무 의자들이나 빛을 붙잡아 두는 금속품들이 있는 실내를 그리워했다.
실내와 대조적으로 바깥의 겨울 세상은 몹시 험악하다. 하지만 〈방랑자〉를 쓴 시인은 바깥세상에도 매혹을 느낀다. 그래서 시의 주제로 바깥의 겨울 세상을 선택한 것이다. 방랑자는 잠든 동안에 옛 군주와 함께인 꿈을 꾸지만, 잠에서 깨면 실상을 알게 된다.
Donne onwæcneð eft wineleas guma
gesihð him biforan fealwe wegas
bapian brim-fuglas brædan fepra
hreosan hrim and snaw hagle gemenged[.]
그런 뒤 의지할 곳 없는 남자는 다시 깨어났고
그를 에워싼 채 출렁이는 어두침침한 파도를 보았네.
바닷새들은 목욕하며 깃털을 활짝 펼치고
우박 섞인 서리와 눈이 쏟아지네.
물과 얼음과 눈으로 가득한 바다를 배경으로 활짝 펼쳐지는 갈매기의 날개라니, 이 얼마나 적막하고 쓸쓸한 광경인가. 지금 이 세계는 한 가지 색만 존재하고, 세차게 요동치는 어두침침한 물을 암시하는 ‘어둑함realwe’만이 더해져 있을 뿐이다. 시인은 차갑고 광활한 망망대해에서 최면이 걸린 상태이다. 시인의 힘겨웠을 체념과 공포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토록 수준 높은 추위의 미학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훨씬 놀랍다.
다른 앵글로색슨인이 쓴 작품에는 추위에 대한 시각적 감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방랑자〉는 가장 방대한 앵글로색슨 작품집인 《엑서터 서》에 실려있다. 《엑서터 서》에는 90여 편이 넘는 수수께끼 같은 시들도 함께 들어있다. 그중 한 편은 빙산을 묘사하는 시인데, 그 시는 빙산의 마력적인 위협과 ‘끔찍한 웃음소리얼음이 내는 소리가 울려 퍼짐’의 느낌을 특별히 잘 표현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몹시 기묘하게 생긴 매끄러운 생물체가 둥둥 파도 위를 떠내려오고 있네[…]”와 같은 표현으로 빙산의 위험스러운 매력을 불러일으킨다. 8세기나 9세기의 작품인 ‘룬 문자고대 북유럽 문자로 쓰인 시’에서는 얼음이 보석과 같다고 정의한다. 시인은 이 시의 구절들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고 있다.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기쁨glisnap glæshlutter gimmum gelicust”과 같은 시구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얼음 땅은 서리에 덮여 “아름답게 보이는 얼굴fæger ansyne”처럼 시인의 마음속에서 매력적으로 반짝인다.
〈방랑자〉의 이 애가는 추위 때문에 더 낮고, 더 느리고, 더 어두운 음조로 들린다. 그는 수정처럼 반짝이는 얼음 너머로 펼쳐진 회색빛 바다 풍경 속에서 중요한 것을 이해한다. 겨울 때문에 족쇄가 채워진 자연얼어붙은 바다. 포박된 파도waþema gebind과 내적으로 속박된 자신의 비탄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fæste binde’ 슬픔에 대해서는 계속 침묵을 지킨다. 오히려 자신의 내적 감정을 위엄이 넘치는 바다 풍경이라는 외적 이미지를 채택해서 표현한다. 이 이미지는 원래 춥고 냉랭하므로 시인은 냉정한 자기 단련의 의무를 스스로 부여한다. 물과 감정은 모두 얼음에 사로잡혀 응결해 있다. 그렇지만 방랑자는 ‘시’라는 개인적인 표현으로 자신을 표출한다. 그의 독백은 비록 억제된 상태이지만 얼음이 녹는 해빙의 과정이자 마음의 ‘해방’ 과정이다.
이렇게 해방되고 풀려난 슬픔은 개인적이면서 또한 보편적이다. 방랑자는 자신의 행복이 지속되지 않고 앞으로도 행복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기보다 앞서 그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의 흔적을 바라본다. 한때 그들이 세웠던 견고한 공동체 사회는 점차 침식되어 무너졌다. “벽들이 세찬 바람을 맞으며 서 있네 / 회색빛 서리로 감싸인 집들은 황폐해졌네” 이렇듯 방랑자 개인의 곤경은 더 큰 공동체 사회의 운명을 보여주는 단편일 뿐이다. 친구들은 죽었고 난롯불도 꺼져 서서히 회색빛 재로 변했다. 비를 막아주었던 집들도 버려지고 남은 것은 겨울의 황량함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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