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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스펙’과 탈학벌, 노동 시장의 변화
탈학벌의 원인
세 가지
탈학벌의 원인 하나,
정부는 더 이상 갑이 아니다
(중략)
이제 경제에서 정부에 요구되는 역할은, 무슨 산업이 어려우니 정부가 나서서 뒤치다꺼리하라든가, 성장하는 신생 산업에 투자 펀드를 조성하라는 정도지요. 정부가 주도해서 뭘 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본 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정부가 ‘간섭’을 많이 하는 분야가 남아있긴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금융업이에요. ‘관官피아’관료와 마피아가 합쳐진 은어라고 들어 보셨죠? 이들의 간섭이 제일 심한 곳이 금융업입니다. 금융계의 ‘관피아’는 하도 심해서 ‘모피아’재무부 출신을 가리키는 말라고 아예 별도의 은어가 있을 정도예요.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계속 ‘배 놔라 감 놔라’ 하는 거죠.
얼마 전에 보니 우리나라 금융업 경쟁력이 세계 100위 밑으로, 아프리카 우간다 수준이다 하는 기사가 나왔더군요. 왜냐? 우리나라 금융업의 사업 모델이 ‘땅 짚고 헤엄치는’ 식이거든요. 예를 들어 담보가 없으면 대출을 안 해 줍니다. 담보를 확보해야만 대출을 해 준다면, 세상에 이렇게 쉬운 사업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 경쟁력이 좋을 리가 없지요. 이런 기득권 구조를 지탱하고 보호해 주는 게 관치, ‘모피아’의 힘이에요. 이 ‘모피아’들은 어느 대학 출신일까요? 고시 합격자들일 것 아니에요? 대체로 ‘스카이’ 출신이에요. 그래서 금융업계에서 은행장까지 올라가려면 가능한 ‘스카이’ 대학을 나와야 해요. 여러분도 은행에 취직하려면 명문대를 나와야 확실히 유리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금융업이 아니잖아요? 삼성 그룹에서 제일 큰 회사는 삼성전자, 즉 제조업이지요. 현대차 그룹에서도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모비스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제조업이고요. LG 그룹도 LG전자, LG화학 등 제조업이지요. SK 그룹은 SK텔레콤이 서비스업으로 분류되어서 그렇지 SK케미칼, SK하이닉스, SK에너지 등 주력이 제조업입니다. 우리는 재계서열 1등에서 4등까지가 제조업을 주력으로 해요. 5등에 가야 주력이 유통·서비스인 그룹이 나오는데 이게 롯데죠.
우리나라도 총 규모는 제조업보다 서비스업이 더 큽니다. 하지만 생산성 격차가 아직 많이 나요. 오랫동안 제조업의 경쟁력이 서비스업보다 높았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럴 겁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의 재계순위를 보세요. 매출액 기준으로 회사들의 랭킹을 매겨 보면 상위에 있는 회사들은, 제조업도 있지만 주로 유통·서비스업이에요. 우리는 잘 실감을 못 하지만 월마트는 정말 큰 회사입니다. 구글이나 아마존도 제조업이 아니라 유통·서비스업이잖아요.
여러분이 지금 우리나라 주력 산업인 제조업계의 사장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옛날이 아니라 지금요. 그러면 정부가 계속 ‘갑’일 것 같습니까? 이젠 기업이 정부에게 ‘그냥 방해나 하지 마.’ 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예전에 비하면 완전히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었죠. 정부가 갑, 기업이 을인 관계가 해체된 겁니다. 그러면 학벌 구조의 변화는 정부에서 일어나겠어요, 아니면 민간에서 일어나겠어요? 당연히 민간에서 일어납니다. 정부 고위 관료들이 ‘스카이’ 출신이더라도 이들이 민간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민간에서 학벌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거죠.
2014년 삼성 그룹 사장 승진자 명단을 살펴보겠습니다. 왜 2015년 이후가 아니라 2014년이냐면 2015년부터는 삼성 그룹에서 정상적인 승진 인사가 이뤄지지 못했어요. 삼성 그룹이 워낙 크다 보니 원래 1년에 6~8명 정도가 사장으로 승진하는데, 2015년부터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다든가 이재용 부회장이 구치소에 간다든가 하는 일로 인해서 제대로 승진 인사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년보다 적게 발표하거나 심지어 승진 인사를 아예 못했어요. 정상적인 승진 인사가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해가 2014년입니다.
이때 승진한 8명의 출신 대학을 보면 꽤 인상적입니다. 서울대, 성균관대, 중앙대, 한국외대, 숭실대, 성균관대, 서강대, 그리고 이건희 회장의 둘째 딸이 나온 미국 대학, 둘째 딸은 어느 대학 출신인지에 상관없이 우리나라와 같은 재벌 체제에서는 사장이 될 운명이잖아요? 그러니 예외로 치고, 나머지 7명의 출신 대학을 보면 ‘스카이’ 출신은 단 1명이에요.
전체적인 통계를 볼까요? 우리나라 1000대 상장사의 시이오CEO 중에 ‘스카이’ 대학학부을 나온 사람의 비율입니다. 유니코써어치라는 조사 전문 기업에서 발표한 건데요. 2007년에는 59.7%이던 것이 불과 6년 만에 뚝 떨어져서 2013년에는 39.5%가 됩니다. 3분의 1이 감소해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리나라가 강력한 정부 주도 경제에서 자유 시장 경제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 중요한 계기가 있었어요. 바로 1997년의 외환 위기입니다. 흔히 ‘IMF 사태’라고 불리는 이 사건 이후에 한편으로는 비정규직이 늘어난다든가 하는 일이 벌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에서 정부의 영향력이 상당히 줄어요. 이후 기업에서 승진 가도를 달리던 사람들이 사장이 되면서, ‘스카이’의 비율이 뚝 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쟤들이 더 이상 갑이 아닌’ 상황이 벌어지니까, 그들과 동문이라는 점은 덜 중요해지고 그 대신 실적 좋은 사람이 승진하게 되는 거지요. 사실 기업 문화에 밝은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 학벌주의를 가장 먼저 내버린 그룹이 바로 삼성이라고 봅니다. 삼성이 ‘스카이’를 배척했다는 뜻이 아니라, ‘스카이’ 출신이라고 해서 연줄로 인해 유리해지거나 프리미엄이 얹어지는 일이 없어졌다는 거죠. 그리고 다른 그룹들도 시차를 두고 이를 따라가는데, 상당히 극단적인 경우도 발생해요. 제가 3~4년 전에 롯데 그룹의 임원 승진자 명단을 본 적이 있는데 ‘스카이’ 출신이 10% 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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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학벌의 원인 둘,
정기 채용에서 수시 채용으로
우리나라 대기업이나 중견 기업에서 사원을 채용하고 관리하는 방식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일단 우리의 통념 속에 들어 있는 표준적인 고용 형태가 사실 상당히 특이한 형태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일본에서 배워 온 형태인데, 채용을 ‘정기적으로’ 하는 거죠. 1년에 한 번 아니면 두 번만 뽑습니다. 이런 방식이 왜 특이할까요? 기업에 사람이 1년에 한두 번만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학교라면 1년에 한 번 사람을 뽑는 것을 이해할 수 있죠. 그런데 기업은 학교가 아닌데, 왜 1년에 한 번 뽑느냐는 겁니다. 지금도 큰 회사는 1년에 한 번 수백 명씩 뽑잖아요? 그 수백 명을 교육·훈련을 시킨 다음에 너는 뭐하고 너는 뭐하고 하는 식으로 배치합니다. 뽑을 때에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고 뽑아요. 참 특이한 방식이에요.
이 방식은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기에 굳어진 채용 방식입니다. 당시에는 경제 성장이 워낙 빨라서 구직난이 아니라 구인난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기업들이 앞다투어 대졸자들을 뽑았어요. 서로 경쟁적으로 일찍 뽑다 보니 나중에는 대학 4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취업할 회사를 정하게 됩니다. ‘입도선매’라는 말이 있죠. 벼가 아직 논에서 자라고 있는데 미리 거래해 버리는 식이에요. 한국도 고도 경제 성장기에 기업들이 대졸자들을 앞다투어 뽑으면서, 일본 방식이 그대로 굳어집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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