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권력
어떤 지식이 생산되는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지식에 대하여
: 여성의 몸이 사라진 과학
우리의 손발을 묶고 있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침묵입니다. 그리고 깨져야 할 침묵은 너무나 많습니다. ―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같은 증상, 다른 진단
똑같은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 두 명이 병원에 왔습니다. 한 사람은 남성이고, 다른 사람은 여성입니다. 의사는 두 사람을 각각 어떻게 진단할까요?
조지타운대학의 캐빈 슐만Kevin Shulman 박사 연구팀은 연기자를 고용해서 가상의 심장병 환자 역할을 하게 합니다. 55세, 70세인 흑인 여성과 남성, 그리고 같은 나이의 백인 여성과 남성, 이렇게 8명의 연기자가 세 가지 유형의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담습니다. 즉, 인종, 성별, 나이가 다른 사람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몸짓과 말투로 연구진이 지시한대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역할을 연기한 것입니다. 의사들에게는 이 비디오와 함께 혈압, 콜레스테롤, 흡연 경력 등은 물론 직업과 보험 가입 여부까지 포함한 진단과 치료 과정에 참고가 될 수 있는 여러 정보가 제공됩니다. 미국의 한 학술대회에 모인 일차진료를 담당하는 의사 720명에게 이 환자들 중 한 명의 정보를 무작위로 배정하고 그 환자를 어떻게 진단하고 치료할지를 결정하라고 요구하는 실험을 진행한 것입니다.
1999년 『뉴잉글랜드의학저널The New England Jornal of Medicine』에 출판된 논문 「인종과 성별이 의사의 심도자술 권유에 미치는 영향The effect of race and sex on physicians’ recommendations for cardiac catheterization」은 성별에 따라 병원의 진단과 처방이 달라지는지를 질문합니다. 연구 결과 의사들은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를 진단할 때 남성 환자의 경우 69.2%가, 여성 환자의 경우 64.1%가 관상동맥질환의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환자가 정확히 같은 문장으로 증상을 이야기하고 검사 수치가 모두 동일한 경우에, 의사들은 남성 환자에 비해 여성 환자가 관상동맥질환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낮게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험성을 확인하기 위해 검사를 시행할 확률 역시 더 낮게 나타났습니다.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 필요한 심도자술cardiac catheterization을 시행할 확률이 남성 환자에 비해 여성 환자는 40%가량 낮게 나타난 것입니다. 연구팀은 이러한 결과가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환자의 성별에 따른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편견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심장병에 대한 또 다른 연구에 대해 이야기해보지요. 협심증은 관상동맥이 좁아져서 생기는 질병으로 흉부 불편감이나 통증을 동반한 경우를 전형적 협심증typical angina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성 환자의 협심증은 이런 전형적인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질병이지만 증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2003년 학술지 『순환Circulation』에 출판된 논문은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관상동맥이 완전히 막혀 급성심근경색으로 치료받은 여성 환자 515명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는 질병이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전에 나타나는 전조증상prodromal symptom을 조사했습니다. 가장 흔한 증상은 비일상적인 피로70.7%, 수면장애47.8%, 호흡곤란42.1%이었고, 남성 환자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흉부 불편감chest discomfort을 호소한 사람은 29.7%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서 마이크 크릴리Mike Crilly 박사 연구팀은 남성 협심증 환자에게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흉부 통증을 전형적인 증상이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비전형적인’ 증상으로 주로 내원하는 여성 환자의 심장병은 조기에 발견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을 합니다.
이러한 연구들은 의학에 스며들어 있는 남성중심적인 시각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유방암이나 전립선 질환 같은 성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는 질병만이 아니라 심장병과 같은 일반적인 질환을 다루는 경우에도 여성과 남성의 신체를 구분해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해줍니다.
의학적인 생산 과정에서 배제된 여성의 몸
기존의 의학 연구는 성인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농약과 같은 화학물질이 몸에 들어와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지 검토한 연구에서 생리주기에 따라 변화하는 여성 호르몬이 그 물질과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지는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자동차 충돌사고 등을 인체공학적으로 시뮬레이션할 때도, 여성의 신체적 특성은 고려되지 않고 남성의 몸이 연구 대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인 남성의 몸을 표준화된 인체로 여겼던 사고방식은 여러 문제점을 낳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사율, 피부와 조직 두께 등을 감안해 사람이 가장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무실 온도는 섭씨 21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연구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선호하는 실내 온도를 물었습니다. 남성은 평균 22도를 말하고 여성은 평균 25도라고 답했습니다. 남성은 기존에 체온 유지의 측면에서 가장 효과적인 업무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진 실내 온도와 가까운 답을 했고, 여성은 더 따뜻한 사무실에서 일하길 원했습니다.
이러한 차이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 적정 사무실 온도로 알려진 21도는 1960년대 측정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몸무게 70kg 40세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표준화된 신체’를 가진 남성의 대사율은 여성의 평균적인 대사율과 다르고, 당연히 체내 열 생산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에서 보리스 킹마Boris Kingma 박사는 실내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여성의 대사율을 감안한 최적의 온도를 다시 계산합니다. 여성 사무직 노동자에게 가장 좋은 실내 온도는 현재 권고되는 21도가 아니라 평균 23.2도와 26.1도 사이였던 것이지요.
2013년 미국 식품의약청FDA은 중요한 권고사항을 발표합니다. 다름 아닌, 불면증 치료제로 널리 쓰이고 있던 졸피뎀Zolpidem의 처방 용량을 10mg에서 5mg으로, 즉 현재 사용하는 용량의 절반으로 낮춰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정이 화제가 된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권고사항이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연구에서 10mg 졸피뎀을 먹고 8시간 수면을 취한 사람들의 혈액을 검사한 결과, 여성 중 15%, 남성 중 3%가 운전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수준의 양이 혈액에 남아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에 따라, 식품의약청은 성인 여성과 남성의 졸피뎀 투약 용량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남성의 경우도 용량을 줄이는 것을 향후 고려할 필요가 있지만, 여성의 경우는 투약 용량을 반드시 줄여야 한다고 발표한 것이지요. 1992년 사용하기 시작한 수면제의 효과가 성별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결론을 2013년 발표하기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시간 동안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여성의 몸이었겠지요.
의약품 연구에서 이러한 결과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2001년 미국 보건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서는 1997년 1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미국 식품의약청에서 판매를 허가했지만 그 약의 효과로 인한 이득보다 부작용이 크다는 것이 밝혀져 시장 판매가 취소된 약 10개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10개의 약 중 8개는 남성보다 여성이 복용했을 때 부작용이 더 크다고 보고합니다. 그중 4개는 주로 여성에게 더 많이 처방되는 약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복용할 경우 부작용이 더 큰 것으로 보고된 것이지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다수의 연구자는 신약 개발 과정에서 사용되는 세포나 동물, 사람 등의 샘플에서 성별 차이에 대해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여성과 남성은 유방, 난소, 자궁, 고환 등과 같은 생식기관의 존재 여부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세포는 성별이 있다는 점에서 그 차이는 훨씬 더 광범위한 것인데, 그동안의 의학 연구는 그 차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정규직이 된 여성의 우울증상이 증가한 이유
이러한 관점은 일하는 여성이 살아가는 환경을 분석할 때도 유효합니다. 2012년 한국복지패널 데이터를 분석해 고용형태 변화에 따른 우울증상의 변화를 연구해 출판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되거나 실업을 하게 되면 우울증상의 위험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담은 논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별에 따라 데이터를 나눠 분석했더니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결과가 나왔습니다.
남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고용형태가 변할 경우 우울증상 발생 위험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직장에서 일하게 된 경우, 계속 정규직이었던 여성 노동자에 비해 우울증상이 발생할 위험이 2.57배가량 높게 나타난 것이지요. 계속 비정규직인 상태의 여성 노동자와 비교했을 때도 통계적으로 유의할 만큼의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우울증상이 높게 나타났습니다. 데이터를 몇 번이나 다시 분석해봤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여성이 더 나은 고용형태인 정규직이 되었는데, 우울증상 발생이 더 높아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래 〈그림1〉은 1989년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프랑켄하우저Marianne Frankenhaeuser 교수가 《조직행동연구Journal of Organizational Behavior》에 출판한 논문 결과를 재구성한 그림입니다. 정규직 전환 이후 여성의 우울증상이 높아진 이유에 대해 실마리를 제공하는 연구입니다. 연구팀은 회사에서 중간 매니저로 일하는 여성과 남성 각각 15명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하루동안 계속해서 측정합니다. 〈그림1〉은 그중 하나인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의 농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Y축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농도이고, X축은 시간입니다.
여성과 남성 모두 아침 10시에 일을 시작하면 스트레스가 증가했다가 오후 4시가 되면서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스트레스가 감소합니다. 그러나 오후 5시 이후 집으로 돌아갔을 때 두 집단의 스트레스 호르몬은 다르게 변화합니다. 귀가한 남성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수치가 급격히 감소해서, 밤 8시에는 하루 중 최저치를 기록합니다. 그러나 여성은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귀가 후 급증합니다. 밤 8시가 되자 여성의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는 최고조에 달합니다.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 가정은 쉼터가 아니라 또 다른 노동의 장소임을 명확히 드러내는 그림입니다.
논문을 쓸 당시 저는 미국에서 박사과정 학생으로 공부 중이었습니다. 여성 정규직 노동자의 우울증상에 대한 제 연구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때, 아이를 키우며 박사과정 공부를 하던 미국인 여학생이 제 이야기를 듣더니 당연한 결과라는 듯이 물었습니다. ‘네 연구에서 비정규직에는 파트타임도 포함되지만 정규직은 모두 풀타임으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했지. 그럼 집에서 육아와 가사는 그대로 하면서 직장일만 늘어나는 거 아냐?’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처럼 남성이 가사와 육아 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더욱 가능성이 높은 말이었지요.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가사·육아로 인한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가정에서의 일로 인해 직장 일이 방해를 받거나, 반대로 직장 일로 인해 가사·육아에 제한을 받는 일-가정 충돌Work-family conflict은 중요한 건강 위해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우울증상이 증가한다는 결과를 해석하는 또 다른 중요한 방법은 이 여성 노동자가 일하게 된 정규직 일자리가 과연 양질의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과연 이 여성의 노동조건은 좋아졌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작업환경, 임금, 고용안정의 측면에서 정규직 일자리는 더 나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국가기관이 정규직으로 분리하는 범주에 들어간 것과 실제 그 일자리가 반드시 비정규직보다 더 나은 일자리인지 여부는 다른 문제입니다. 2007년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과 노동패널 데이터를 분석해 발표한 논문 「고용형태의 변화에 따른 건강불평등」에서 여성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정규직이 되었을 때, 노동조건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이동한 여성 중 55.3%는 사무직이 아닌 생산직, 청소 노동자 등과 같은 육체노동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계속 정규직으로 일하는 여성 중 23.1%, 계속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여성 중 48.8%가 육체노동자로 일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우 높은 수치입니다. 일주일에 50시간 이상 일하는 여성의 비율도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이동한 여성이 가장 높게 나타났습니다. 또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이동한 여성의 직업을 구체적으로 살펴봤을 때, 생산직, 판매원, 청소부, 기능공 등이었으며, 사무직의 경우에도 직위가 사원 이상인 응답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 결과를 두고서 여성에게 정규직 노동이 건강에 나쁘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정규직 일자리가 과연 양질의 것인지를 물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한국처럼 가사·육아노동에 대한 부담을 여성이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사회에서 가정이 여성 노동자에게 어떤 공간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