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의 소년이 광야의 울음을 찾아서
소년의 고향은 충북 진천군 초평면이다. 초평草坪은 ‘풀이 무성한 넓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들판에는 식물, 동물, 흙, 물과의 만남이 있다. 들판에서 태어난 소년은 수많은 동식물을 만나고 자연의 언어와 접속하는 삶을 살았다. 소년은 들판에서 미친 듯이 걷고, 뛰어놀며 들판의 남자로 자라났다.
들판에는 에로스가 넘쳐났다. 우주의 태초적 공허인 카오스의 아들 에로스. 성애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에로스. 에로스는 정열의 신일뿐만 아니라 풍요의 신이기도 했다. ‘풍년’은 농작물의 건강한 에로티시즘을 의미했다. 바람과 곤충들은 꽃의 암술과 수술의 만남을 돕고 꽃의 향기와 씨앗과 과즙을 풍성하게 한다. 가축들의 교미와 짝짓기. 풍년은 들판이 동식물의 러브호텔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들판에서 자라난 소년은 야생화, 개똥벌레, 염소, 물고기라는 에로스의 후예들과 뒤섞여 건강한 에로티시즘을 배웠다.
들판은 광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광활한 시공간,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과 적멸을 지닌 광야. 광야는 순례의 길이며 구도의 길이다. 광야는 로고스의 품성을 지녔다. 광야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광야는 속세와 탈속의 경계마저 넘나든다. 광야는 땅과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짐승과 인간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광야는 시련과 고행을 감내하는 곳이다. 광야는 원시의 과거로부터 먼 미래까지의 시공간이 섞여있는 아득한 길목이다. 들판의 에로스는 광야의 로고스에 닿아 있다. 들판에서 태어나 자라난 소년은 종종 광야의 로고스를 느끼면서 영혼을 길렀다.
들판을 흐르는 시간에는 탄력성이 있다. 멈칫멈칫 느리고 길게 흐르다 가속을 붙여 쾌속으로 흐르기도 했다. 가끔은 시간이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노출과 체험 없이는 들판의 깊은 속성을 파악하기 어렵다.
들판은 다양한 속성을 지녔다. 들판은 힘들다. 들판은 아프다. 들판은 늙었다. 들판은 쓸쓸하다. 들판은 따분하다. 들판은 가난하다. 들판은 불편하다. 들판은 어울려 살아야지 혼자서는 살기 어렵다. 들판 인심이 더 지독하다. 인심이 좋은 들판도 있지만, 인심이 나쁜 들판도 있다. 이웃과 사이가 좋아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경치와 공기가 맑은 들판도 있지만, 매우 탁한 들판도 있다. 기업형 축사가 들어서서 정화되지 않은 가축의 분뇨가 도랑과 시냇물로 흘러 역한 냄새가 진동하는 들판도 많다. 하지만 들판은 즐겁다. 들판은 도시보다 전원에 가깝고, 아늑하고, 평화롭다. 들판은 낭만적이고, 인정이 있고, 포근하다. 들판에는 에로스와 관능이, 생명력이 넘친다. 들판은 순례와 구도의 길이다.
무엇보다도 들판 사람치고 탁월한 이야기꾼 아닌 이가 없다. 한동네에서 태어나 별일 없으면 평생을 이웃에 살고, 매일 반복되는 논밭일이 전부인데 도대체 무에 새로운 얘깃거리가 있어 웃고 떠든단 말인가. 그래도 마주 앉으면 박장대소하며 서로 웃기고 웃는다. 들판의 사람들은 논밭일을 통해서도 웃음을 만들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쏟아낼 수 있는 재주꾼이다. 늙을수록 말재주가 늘어나 사소한 일상에서도 재미와 통찰을 길어 올린다. 들판에서 자라난 소년은 시골 이야기꾼들과 대화하고 일하는 동안 그들의 웃음을 이 책으로 남기기로 했다.
요즘 소년에게는 부모님과의 대화가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부모님의 말 속에서는 낯설고 소소한 어휘들이 별안간 땅강아지나 벼룩처럼 툭 튀어나온다. ‘첫물떼기, 물걸러대기, 혼수, 땅심, 놀란흙, 새끼칠거름, 똘물, 바심, 눈꼽재기창’ 같은 어휘는 물수제비처럼 자연과 삶의 파문이 되어 내 영혼의 수면을 치고 간다. 평소 나는 결코 쓸 일이 없는 어휘들이지만 부모님의 생소한 어휘들이 풍기는 매력을 조금씩은 알아가고 있다. 부모님의 언어는 농사꾼의 언어요, 길바닥에 너부러진 자갈 같은 언어요, 패랭이꽃 같은 언어다. 풀의 언어이며 가축의 언어다. 질경이와 바랭이와 망초가 자라는 곳에서 길어 올린 어휘들이다. 부모님이 쓰시는 속담이나 사투리는 대자연의 순연純然한 거름냄새며, 이슬이고, 야생화의 향기라고나 할까. 고등학교에서 27년 남짓 국어를 가르치는 들판 소년의 언어보다 폭넓고, 향기롭고, 쓸쓸하고, 재치가 넘친다.
소년은 서울 강남에 직장이 있고 분당의 아파트에 산다. 고층 빌딩이 번화한 도심에 살고 있지만 소년은 촌놈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어느새 쉰이 넘고, 27년을 교사로 밥을 축내고 있는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교양 있는 언어보다 시골 부모님이 사용하는 들판의 언어가 더 멋지다. 소년은 그 언어들을 받아 적어 이 책을 엮었다.
부모님은 자상하고 부지런하셨다. 나무와 짚으로 늘 무언가를 만들고, 숫돌에 식칼을 갈아 물고기와 닭을 능숙하게 잡으셨다. 아버지는 『동몽선습』과 『채근담』, 『소학』을 읽고 명리학에 밝으셨다. 『채근담菜根譚』을 특히 좋아하셨는데, ‘사람이 나물뿌리를 맛있게 씹을 수 있다면 능히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 ‘쓴맛 단맛 모든 것을 맛보다.’와 같은 구절이 담긴 ‘감자나 무 뿌리맛처럼 재밌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는 24절기를 다 외고 그와 관련된 수백 가지 속담을 일상에서 술술 사용하셨다. 어머니는 일을 하면 더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늘 쾌활했다. 농사꾼에 촌사람인 부모님은 종종 인간이 서야 할 자리에 다른 생명들을 주체로 세우는 어법과 행동을 보이셨다. 소년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사소한 가르침들을 바탕으로 들판의 사유를 펼쳤다. 들판의 인문학!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 중심의 학문이 인문학이지만, 들판에서는 오히려 사람 중심을 버리는 학문의 속성을 지니기도 한다. 들판에서 나고 자란 소년은 들판에서의 체험과 방황과 사유를 밀고 나가 들판의 인문학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들판에는 풍성한 ‘취趣’가 있다. 늘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 뭔가 재미난 일이 없나 하고 눈동자를 뱅글뱅글 굴리는 마음! 세상에 대한 순순한 호기심! 사물의 변화에 매 순간 자신을 열어놓는 자세! 사물을 취하되 사물의 변화와 더불어 놀고 싶은 마음! 대상을 만져보고 창조적으로 사용하며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을 드러내는 시선! 그것이 취趣였다. 들판은 온갖 취趣로 가득했다. 하루 종일 꽃만 바라보아도 좋은 곳이 들판이었다.
쑥부쟁이와 새팥과 유홍초와 부처꽃이 까르르 웃는 들판. 꽃을 유난히 좋아하는 염소가 꽃향기에 취해 키득키득 나무에 박치기하고 뿔질하는 모습. 아담하고 초라한 벼꽃네 집, 쑥부쟁이네 암자, 구절초네 별서別墅, 바랭이네 오막살이, 여뀌네 여염집 메뚜기네 움막, 붕어네 나루터. 그것이 들판의 살림살이다. 그 안에는 취趣가 흘러넘쳤다.
취趣는 흥興의 발현. 홀연 무한 자유를 추구하는 광기狂氣롤 나타나기도 하는 취趣! 고된 일상과 노동에 지칠 때, 삶이 외롭게 느껴질 때면 소년은 들판의 흥취興趣와 정취情趣에서 신선한 에너지를 충전하고는 했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들판의 속살을 만지며 그 정취定聚와 흥취興趣를 조금이라도 누리시기를 바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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