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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을의 모든 새벽마다 안개는 무진霧津의 바다로부터 육지로 상륙했다. 모든 아침들은 해가 떠오르기 전에 빛을 은폐하는 안개에 둘러싸였다. 안개는 모든 빛을 빛으로부터, 모든 사물을 사물로부터, 모든 풍경을 풍경으로부터 차단했다. 해가 아주 높이 솟아오르고 안개의 입자들이 하나하나 데워져 수증기로 휘발되기까지는 해조차도 제빛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날 새벽안개가 바다로부터 무진으로 상륙을 시작했을 때 그 남자는 어둠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팽개쳐져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 지상에서는 천적을 가지지 못한 희고 긴 털을 가진 난폭한 짐승처럼, 혹은 오래되고 버려진 식민지에 상륙하는 점령군처럼 산만하고 무례하게 밀려들었다. 그 하얀 털에 점령당하듯 길이 사라지고 건물이 숨을 죽이고 가로등 빛이 힘을 잃었다. 땅에 이어 하늘이 그 거대한 짐승에게 가려지고 나자 세상은 완벽하게 안개의 것이 되었다.
남자가 누운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뿐인 작은 창은 촘촘한 창살로 막혀 있었고 방 안에 달린 손바닥만 한 화장실에는 금이 간 세면대와 물이 잘 빠지지 않는 수세식 변기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여기저기 깨진 타일 틈으로 붉은 곰팡이 자국이 가득했다. 남자는 고통스러운 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안개 자욱한 뜨락 건너 맞은편 건물에서 들리던 여자의 울음소리도 그친 지 오래되었다. 키가 작은 나무들은 보초들 손에 들린 창처럼 날카롭게 침묵하고 있었고 안개는 꼼꼼한 촉수로 그들을 꺾어버렸다. 아직 잎이 다 마르지 않은 가을 나무들은 그 안개의 포충망 속에서 작게 몸을 떨었다. 벌써 여러 시간 움직이지 않던 그의 몸이 약간 꿈틀거렸다. 아니, 그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움직인 것은 몸이 아니라 그의 입술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힘없이 눈을 떠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은 장벽 같은 안개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주 훗날 씌어질 보고서에 의하면 그의 눈은 잦고 심각한 구타의 영향으로 이미 빛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짐작건대 배고픔도 아주 오래전에 이미 멈추었다. 언제부터인가 온 세상이 그에게는 이미 안개처럼 하얀 벽이었다. 이제 그의 망막 안에서 세상은 극단의 흰빛으로 변해갔다. 화이트아웃……. 콜라 빛의 묽은 변이 그의 열린 항문을 통과해 바지를 적셨다. 이어 엄청난 악취가 방 안 가득 퍼졌다. 곧 날이 밝으면 그는 이 방에서 주검으로 발견될 것이었다. 안에서는 열지 못하는 손잡이가 달린 이 작은 방에 그가 들어온 지 37일째였다.
그는 요 며칠째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는 손잡이를 붙들고 여기요, 여기 좀요, 하고 괴성을 지르지도 않았고 철창이 쳐진 창문에 매달려 창밖을 향해 “여기 사람 있어요! 잘못했어요” 하고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울지도 않았다. 벽을 긁다가 찢어진 손톱 사이로 배어나온 붉은 피가 누런 벽지를 적시지도 않았다. 그 방에 들어간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그는 드디어 그 방의 누런 벽지처럼 변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제 아침이 오면 사람들이 출근을 하고 이 방문을 열고 그의 생사를 확인할 것이다. 그가 죽은 걸 발견했다고 해도 놀랄 사람은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슬퍼할 사람도 없었다. 고통스러워할 사람도 물론 없었으며 누가 이 사람을 죽게 했냐고 항의할 사람도 없었다. 이 지상에 살아 있었으나 이제 죽어 있는 그를, 죽어 있으나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하게 살펴보고 악취 때문에 코를 그러쥔 직원은 서둘러 방문을 닫고 여느 때처럼 전담 의사를 부를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는 하루나 이틀 만에 화장되어 빵가루처럼 곱게 빻아질 것이다. 아무도 그를 위해 울지도 않고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왜 그가 거기, 아무도 없는 곳에,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로 40일 가까이 갇혀 있어야 했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침구도 없고 신문지 쪼가리 하나 없고 오직 벽만이 존재하는 그 방에서 그가 40일이 다 되는 시간을, 오직 벽처럼 변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도. 그리고 그날 일지에는 이렇게 적힐 것이다. 키 167센티, 몸무게 43킬로 남성 이 아무개 사망. 원인 심정지. 이상 무.
특별할 것은 없었다. 이것은 지난 6년 통산 312번째, 최근 2년 간 일어난 129번째의 비슷비슷한 죽음이었다.
0.1
즐거운 노래는 그치지 않았다. 입에 부담감을 주지 않는 투명한 생선회도 송이버섯도 만족할 만했다. 하지만 그것이 제주산 다금바리회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그리고 그 옆의 접시에 담긴 것이 개당 이만 원에 육박하는, 봉화에서 난 송이버섯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그의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벌써 세 병째 양주가 따졌을 때 그는 이제 그만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들이 내미는 잔을 잠깐씩 요령껏 물리며 그는 룸 밖으로 나왔다. 손을 닦고 잠깐 화장실 창으로 내다보니 안개가 자욱했다. 지독한 안개였다.
그는 그들이 무어라고 하든 그만 이 자리를 뜨고 다시는 여기 합류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룸으로 돌아가자 한 여자가 긴 다리를 꼬며 테이블에 올라가 춤을 추고 있었다. 순간 그는 짧은 치마 사이로 아슬아슬 보이는 그녀의 다리 사이를 주시하고 말았고 그 다리 사이에는 그 다리 사이를 가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며 온몸으로 오싹한 기운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머리와 몸으로 만 원짜리, 오만 원짜리 지폐들이 떨어져 쌓이기 시작했다. 그가 방으로 들어선 후 그녀의 춤이 끝났을 때 지폐는 탁자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는 여자의 짧은 스커트 사이로 드러난 맨가랑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독한 술을 조금 더 마셨다.
일행 하나가 일어나 그 지폐를 한 움큼 잡아 방금 노래를 마친 여자의 가슴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다른 일행이 그런 그를 만류했다. 그리고 그런 촌스러운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익살스레 충고하면서 보란 듯이 탁자 위의 지폐들을 둘둘 말았다. 정돈되지 않은 채로 둘둘 말린 지폐들은 길고 엉성한 빨대처럼 말려졌고 이어 익숙한 솜씨로 이미 비워진 양주병에 꽂혔다. 만 원짜리 초록빛 지폐와 오만 원짜리 노란 지폐는 푸른 잎사귀 사이에 핀 노란 꽃 같았다.
“야……. 정 양아, 이리 와봐……. 어서 말해봐라.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은 무슨 꽃?”
“돈꽃.”
아까 탁자 위에 올라가 춤을 추던 여자가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빈 병에 꽂힌 돈꽃들이 여자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지자 여자들이 환성을 올렸다. 악사는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하루 이틀 이곳에 드나든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이 자리가 시작된 직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는 어디서든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고 대놓고 누군가와 맞서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약혼자인 처녀가 자기도 모르게 임신한 것을 알아차린 이천 년 전 사람 요셉이 그랬듯이 조용히 혼자서 그들과 멀어짐으로써 이 사태를 마감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들도 그가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랬기에 그를 여기 초대했고 그가 얇은 외투를 걸치고 나가도 만류하지 않았다. 그는 룸의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와 천천히 안개 속을 걸어갔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안개 때문에 모든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겨우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편의점 간판을 발견하고 그리로 들어갔다. 편의점 로고가 새겨진 자주색 조끼를 입고 있던 앳된 얼굴의 소년이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어서 오세요” 하고 상냥하게 인사했다. 언뜻 보니 소년은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있던 중인 것 같았다. 그는 담배를 한갑 청하고 라이터도 샀다. 거스름돈을 받으려는데 문득 방금 탁자 위에서 보았던 그 돈꽃 병이 떠올랐다. 마침 틀어놓은 24시간 뉴스에서는 시간당 만 원의 최저임금은 시기상조라는 말을, 서너 명의 훌륭하고 학식 높은 사람들일 나와 문제의 핵심만 빼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담배를 사고 거스름돈을 봉사료로 이 소년에게 다 주어버릴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돈꽃이 핀 병이 떠올라오자 그 갑작스럽고 가벼운 선의조차도 스스로에게는 너무 희극적으로 느껴져서 그는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거스름돈을 받아 그냥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신부님이시죠?”
소년이 문득 물었다. 이 지독한 안개가 낀 밤, 적막한 밤의 편의점에서 술 취한 손님과 아르바이트생이 나누기에는 생뚱한 단어였다. 소년의 표정은 환했는데 그때 그에게는 그 반가운 목소리가 문득 기습처럼 들렸다. 화들짝 놀란 그가 “어떻게……” 하고 묻다가 자기도 모르게 평소의 로만 칼라가 있는 옷의 목 부분을 더듬었다. 클러지 셔츠─성직자의 약식 제복, 하얀 로만 칼라를 빼거나 낄 수 있다─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흰 로만 칼라는 아까 식사가 시작될 때 빼버렸었다.
“저 요셉 유치원 때 신부님께 세례받았어요. 이 안토니오입니다. 기억 못 하시겠지만.”
소년은 밝게 웃었다. 그는 갑자기 곤혹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아까 그 룸에서의 소음과 여자들에게 배어 있던 지분 냄새가 자신의 옷에 묻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 독한 향기, 여자들의 향기, 돈의 향기. 악취처럼 자신에게 배어든 그 냄새가 이 소년에게 전달될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아, 그렇군. 힘들지 않아요?”
무안해진 그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어투로 물었다. 소년은 “할 만합니다. 괜찮습니다” 하더니 머리를 긁었다.
“밤참 먹는 중인 모양인데 어서 먹어요.”
그가 소년이 먹다 만 도시락을 가리켰다.
“아, 다 먹었습니다. 오늘 자정에 폐기된 음식이에요. 마음대로 먹어도 됩니다. 어차피 냉동 창고로 가서 폐기될 거니까요.”
소년은 명랑하게 대답하고는 얼른 뛰어가더니 바나나 우유를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신부님, 뭐 드릴 것도 없고 이거 가시면서 드세요. 의외로 술 깨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이 시간에 많이들 찾으세요.”
나에게 술 냄새가 많이 나는구나, 그는 생각했고 이어서 괜찮다고 몇 번 손을 저었지만 소년은 의외로 완강했다.
“고마워요.”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신부님, 실은 요 몇 년 너무 힘들어서 일요일이면 늦잠 자느라고 성당도 못 갔어요. 이제 열심히 가야겠어요. 진짜예요. 뜻밖에도 여기서 신부님 뵈니까 참 좋아요.”
묻지도 않았는데 소년이 말했다. 환한 웃음과 함께였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울컥 목울대로 취기가 솟았다. 솟아 나오는 취기를 감추지도 못하고 그는 허둥지둥 편의점을 나와 거리로 걸어갔다. 자기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져서 마치 안개 속으로 풍덩 하고 빠져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지만 그때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이 안개가 아니었다면 흰 수건으로라도 자신의 얼굴을 가렸을 거라고 문득 생각했다. 만일 열 살만 젊었다면 아마도 큰 소리로 울면서 이 안개 자욱한 새벽길을 걸어갔을 것이라고.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그의 안주머니에서 내일 아침 미사에서 강론할 주제가 든 종이가 만져졌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길 건너 무진 주교좌성당에서 종이 울리고 있었다.
그때 《무진매일신문》 윤전기는 중증 장애인 공동체 ‘나자렛의 집’을 찾아가 그들의 몸을 씻기며 지극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무진 주교의 사진을 1면으로 인쇄하고 있었다. 신문지 위의 주교는 팔을 걷어붙인 봉사자의 차림이었다. 인터뷰 말미에 주교는 말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너희 중에서 가장 낮은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내게 해준 것이다.” 때는 새벽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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