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딸치노, 개에게 불성이라니
간요리에 대해 쓰면서 개고기 얘기를 얼핏 꺼냈었다. 본격적인 개고기는 나도 잘 모르겠거니와, 강호의 구육지존과 보신호걸들께 감히 필봉을 들이대는 결례를 범하고 싶지도 않다. 어쨌든 초라한 미식의 개인사에 간혹 개고기가 등장하곤 하니, 삼가 들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한 친구가 내 칼럼들을 읽고는 슬슬 시비를 걸어온 적이 있다. 그의 말을 옮기면 ‘개고기도 모르면서 음식 얘기를 쓰는 건 도리가 아니다’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왜 개 삼겹살은 따로 구워 먹지 않는지도 모르잖니, 라고 했다. 그렇군. 삼겹살을 그토록 좋아하는 한국인이 왜 개고기는 건드리지 않았을까, 하고 자문했다. 물론 개고기의 삼겹살에 해당하는 부위를 다들 좋아하기는 한다. 그렇다면 개 삼겹살을 따로 발라내어 굽는 방법도 생길 만한데 말이다. 개를 잡아보지는 않았지만 돼지와 염소, 양 따위를 잡아본 경험에 의하면 의외로 의문은 쉽게 풀릴 듯하다. ‘개에게는 삼겹살이 거의 없다’가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겹살이라고 불릴 만한, 비계와 살코기가 퇴적층의 단면처럼 교대로 쌓여 보기만 해도 식욕이 돋는 그런 부위가 적다는 뜻이겠다. 있다고 해도 구워 먹을 만한 양이 되지 않아서 상업적으로 팔기에는 부족할 것이라고 짐작되기도 한다. 3개월 정도 자란 돼지조차 삼겹살이라고 할 만한 부위가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삼겹살이 먹을 만하게 두드러지려면 6개월 정도는 길러야 하고, 결국 우리가 먹는 돼지는 대개 이 정도 연령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장안에서 제일간다는 천하의 ‘새김꾼’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김꾼이란 정육 기술자를 뜻하는 도축장 바닥의 땀 냄새 나는 용어다. 그의 대답은 좀 싱거웠다.
“개 뱃살 새길 게 뭐 있어. 그거 새겨봐야 칼만 쪽팔린다.”
척 하면 착 하고 알아듣는 내 해석으론, 개는 덩치가 작으니 정육 분할용 칼을 들이대는 것이 창피하다는 뜻이었다. 바야흐로 삼겹살이란 사료발이 팍팍 올라 더 이상 살찔 데가 없어 터져버릴 것 같은 한창 덩치의 돼지에나 생기는 부위가 아닌가. 그는 마장동 30년 새김꾼의 도톰한 기운이 가득한 양반이었다. 마장동 어느 집 누구 칼이 더 잘 드는지 뚜르르 꿰고 있을 정도였다. 그가 칼을 잡은 걸 언젠가 본 적이 있는데, 살코기 한점 허투루 날리지 않고 딱, 딱 근육과 근육 사이의 막에 칼을 넣었다. 힘들이지 않아도 근육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무게와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툭, 툭 끊어졌다. 고기가 갈고리에 걸려서 공중에 떠 있는 까닭이었다. 소 반마리가 금세 해체됐다. 칼날이 밑으로 가도록 세워 잡거나 바로 잡거나 고기 부위의 결에 맞춰 자유자재로 살덩어리들을 튕겨냈다.
그는 새겨서 사는 사람이다. 그가 새김질─이때는 소화작용이란 뜻이다─하는 소를 칼로 새김질하게 된 역사는 모르지만, 그가 천상 새김꾼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보통 20년 정도 새김질을 하면 지쳐서 직접 칼을 잡지 않는 게 보통인데, 그는 여전히 현장에 있다.
여하튼 개고기 논쟁이 이어진다. 누구는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자칭 개고기 전문가 K 형이다. 그는 진짜 전문가라고 불릴 만하다. 유명 개고깃집은 왜 하나같이 감나무집, 싸리나무집, 등나무집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 결과는 이랬다.
“과거 개고깃집은 번듯한 건물 대신 허름한 옛 주택을 개조해서 만들었는데 그 집들 마당에는 대개 무슨 나무가 한그루씩은 있었다. 무허가라 세무 등록이 없으니 정식 상호도 없어서 사람들이 그냥 나무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리되었다.”
양념장에 들어가는 들깨와 겨자, 기름과 식초의 황금비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그 황금비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들깨는 넣지 않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들깻가루가 개고기 맛을 해친다는 논리였다. 그는 간단히, 개고기 특유의 냄새가 구이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수육조차 된장과 깻잎, 들깨와 마늘 같은 온갖 향신료를 넣어 냄새를 잡는 판에 구이라니 얼토당토않다는 주석을 달았다. 그것도 맞는 말 같았다.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건 개의 어떤 부위든 구워 먹는 방법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개고기 요리에는 삶거나 찌거나 끓이는 방법이 적용된다. 무침이라는 것조차 결국은 삶은 고기에 양념을 한 것일 뿐이다.
내가 개고기 요리에 대해 번민에 빠진 것을 눈치챈 한 친구는 제법 혁신적인 이론을 들이댔다. 개고기는 전통을 수호하거나 수구적 태도를 고수하는 애호가들이 많기 때문에 탕이나 찜으로 요리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진단이었다. 10대 어린이가 ‘엄마, 개고기 먹고 싶어. 3분개고기 해줘’라고 하지는 않는다, 20대 연인이 개고깃집에 와서 데이트하거나 소개팅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내가 아는 어떤 에디터는 자신의 전 남자친구가 개고깃집에서 이별 통보를 했다고 분개한 적이 있다. 정말 개새끼다─대개의 애호가들은 40대 이상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래서 전통 요리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나 프랑스 유학파가 개고기를 좋아해서 그 문화를 한국에 전파했다면 당연히 개고기구이가 있었을 것이다, 뭐 이런 주장이었다.
“그러면 개고기 쑤플레나 개 푸아그라 떼린, 개고기 오늘의 수프, 감자 밀푀유를 곁들인 부르고뉴식 개고기 스테이크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었을 것이야.”
이런 개고기 수프 같은 황당한 고민에 빠져 몇주일을 보내는 동안, 나와 개고기 동서인 소설가 K 군을 만났다. 그와 혓바닥 동서가 된 건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둘 다 개고기를 좋아하는 위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갑자기 개고기가 먹고 싶어진 또다른 동행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는 하다. 그것도 몬딸치노 와인과 함께 말이다. 개고기에 웬 몬딸치노 와인이던가. 그건 바로 우리가 몬딸치노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도착한 날, 곧바로 부평의 한 야산에 있는 보신탕집으로 직행하여 개고기 수육과 탕에 그 와인을 땄던 까닭이다. 개고기에 몬딸치노 와인이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거창한 마리아주를 고려한 건 물론 아니었다. K 군의 증언에 의하면 그냥 그러고 싶었던 거다. 어떻게든 우리가 또스까나의 몬딸치노에 있던 기분을 연장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비행기가 영종도 하늘을 빙빙 돌며 착륙을 준비할 때 하나같이 상한 개껍질 씹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린 가지고 있던 고가의 몬딸치노 와인을 모두 작살냈다. 그래서 지금도 K 군은 개고기에 그 와인 마신 얘기가 누설되는 걸 극도로 꺼린다. 그는 아내에게 선물로 줄 와인까지 마셔버렸던 것이다. 중국 속담에 ‘네가 먹는 건 너를 더럽히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먹어야 할진대, 그것에 우열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한동안 개고기는 절대 안 돼, 하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당시 내 친구는 내륙의 어떤 시골 마을에서 개를 기르고 있었다. 그의 가족의 생계였다. 당연히 그의 농장은 개판이었다. 연령별로 각기 다른, 그러나 비슷한 용모의─친구 말에 의하면 도사견과 한국 누렁이의 잡종인─개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렇다. 그건 개농장이었다. 나는 그 수백마리의 개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놀랐다. 비육하는 소가 그렇듯이, 케이지의 닭이 그렇듯이, 돈사에 바글바글 갇힌 돼지들이 그렇듯이. 워리든 해피든 쫑이든, 하다못해 누렁이도 아닌 그냥 한떼의 개였다. 짐승이 이름을 얻는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반려의 약속이니, 이름이 없다는 건 ‘출하’나 ‘비육’ 같은 수식어로만 남는다는 걸 뜻한다. 그들에게 ‘돈 워리 비 해피’라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 개들은 우울하게도 어느 누구도 짖지 않았다. 짐승은 두려우면 짖는다. 거기서 두려운 개들은, 늘 짖었을 것이다. 수백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는다는 건 농장을 꾸리는 친구로서는 매우 불행한 일일 수 있었다. 시끄러워 견딜 수 없다는 마을 주민들의 민원이 하늘로 뻗치기 때문이었다. 그 비육견들은 모종의 조치로 귀를 잃었고, 그리하여 소리도 잃었다. 요즘 아파트에서 고가의 성대 불용 수술을 받고 사는 개들은 누가 뭐래도 그 쓸쓸한 운명의 개들에 비하면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셈이다. 어쨌거나 녀석들은 이름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는 가족들의 돌림자까지 선사받기도 하고.
어쨌든 한동안 개고기는 먹어보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의 여름, 몇 년 만에 어찌어찌 개고기 수육에 소주를 돌리는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여지없이 개고기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세상에, 개고기처럼 끊임없이 먹는 이들의 화제를 모으는 안줏거리도 없을 것이다. 박지성의 개고기쏭에서 브리지뜨 바르도, 고야의 개, 한국인이 애완용으로 기르는 3대 지랄견의 만행─기억나는 건 ‘코커스패니얼종은 뇌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생각하기 전에 일단 저지르고 본다더군’이다─까지 줄줄이 술상에 올라왔다. 그러나 압권은 개의 불성佛性이었다.
“지랄견이라는 것도 다 주인의 성품을 따르게 마련이지. 한 친구는 지랄견 품종을 세트로 기르고 있었다네. 그런데 어떤 녀석도 지랄은커녕 점잖기가 소 같더군. 아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물었네. 그는 염화시중의 미소만 지을 뿐이었네. 그러고는 말없이 텔레비전을 가리키더군.”
출근하면서 개들이 보건 말건 늘 불교방송을 틀어놓길 어언 3년. 놀랍게도 개들에게 불성이 생기더란다. 관심있는 지랄견 소유자들은 새겨들으시길. 참, 평화방송이나 원음방송을 틀어놓으면 효과가 어떤지 실험해보신 분은 결과를 알려주시라. 3년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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