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에는 여러 가지 대립이 있었고, 그 대립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비극을 낳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인류가 풍요로움을 목표로 노력해왔다는 사실 역시 인정해야 할 듯하다. 사람들이 사회에 존재하는 부당함과 불편함에 맞서온 것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 드러난다. 인류가 지향한 풍요로움이 달성되면 인간은 거꾸로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 1872~1970은 1930년에 《행복론》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 서양 여러 나라의 젊은이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을 수 없기에 쉽게 불행에 빠진다. 이에 비해 동양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또한 공산주의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에서 젊은이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청년보다 행복할 것이다. 그곳에는 창조해야 할 신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러셀이 말하는 바는 간단하다.
20세기 초반에 유럽에서는 이미 많은 것이 이루어졌다. 앞으로 젊은이들이 고생스럽게 만들어야 하는 신세계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그다지 해야 할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불행하다.
이에 비해 러시아와 동양은 아직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들고일어나서 힘써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젊은이들은 행복하다.
러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명감에 불타서 어떤 일에 전념하는 것은 훌륭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뜻이다. 반대로, 그렇다 할 만한 훌륭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은 사람들, 즉 몰두할 만한 일이 없는 사람들은 ‘불행’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딘지 이상하지 않은가? 정말로 이걸로 충분한 걸까?
사회적인 부정을 바로잡으려 들고일어나는 것은 더 좋은 사회, 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사회가 실제로 나아졌다면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러셀에 의하면 그렇게 되어도 그렇지 않다고 한다.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사회가 더욱 바람직해지고 윤택해진다면 인간은 해야 할 일이 없어져서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만약 러셀의 말이 옳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가. 사람들은 사회를 더 풍요롭게 만들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도 풍요로움이 실현되면 인간은 도리어 불행해진다. 그렇다면 사회를 더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사회적인 부정도 내버려두면 된다. 풍요로움을 지향하지 않은 채 비참한 생활이 계속되게 해도 괜찮다. 부정을 바로잡으면 사람들은 결국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러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역시 이상하다. 그리고 이를 아주 당연한 듯 말하는 러셀도 어딘지 이상하다.
러셀이 주장했듯, 전념해야 할 만한 일이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인간이 불행하다고 말한다면 이 상황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셈이 된다. 역시 이 지점에서 ‘왠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는 풍요로움을 지향해왔다. 그런데도 왜 그 윤택함을 기뻐할 수 없을까? 앞으로 이어질 고찰은 모두 이 간단한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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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풍요로움을 기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풍요로움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보자.
국가와 사회가 풍요로워지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여유가 새긴다. 이러한 여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물론 금전적이 여유다. 사람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보다 많은 돈을 번다. 벌어들인 돈을 모두 생존을 위해 써버리지는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시간적인 여유다. 사회가 부유해지면 사람은 생존을 위한 노동에 시간을 전부 할애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바꿔 말하면 한가함을 얻는다.
그렇다면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은 그런 여유를 어디에 써온 것일까? 그리고 어디에 쓰고 있는 것일까?
“부유해지기 전에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올 법하다. 과연 그렇다.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모든 활동은 생존을 위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일 말고는 거의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게 된 사람들이 그 여유를 활용해서 그때까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번에는 이렇게 질문해보자. ‘좋아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일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지금 여유로운 국가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여유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는 이제까지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좋아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단정할 수 있을까?
토요일에 텔레비전을 틀면 일요일에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를 쏟아 부을 만한 오락거리를 선전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곤 한다. 그러면 방송을 보고 방송에서 추천하는 장소에 가서 돈과 시간을 소비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을 한 셈일까? 그 일이 ‘바라고는 있었지만 이룰 수는 없었던’ 것일까?
‘좋아하는 일’이라는 표현에서 ‘취미’라는 말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취미란 무엇일까? 사전에 의하면, 취미는 “어떤 대상에서 아름다움과 재미를 느끼는가 하는 그 사람이 지닌 감각의 존재 양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요즘은 ‘취미’를 카탈로그로 만들어서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도구를 제공하는 기업도 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는 자녀는 모두 키웠고 남편도 퇴직해서 집에 있는 연령대의 주부를 연기하는 여배우가 “하지만 취미엔 돈이 들잖아요?”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면 즉시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그리고 카탈로그에서 ‘취미’를 고르면 그에 필요한 도구를 저렴한 가격에 바로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선전한다.
카탈로그에서 ‘그 사람이 지닌 감각의 존재 양태’를 고르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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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타계한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는 20세기 중반인 1958년에 쓴 《풍요한 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대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의식할 수 없게 되었다. 광고와 세일즈맨의 말에 끌려서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이 확실해진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광고회사에 의해 배우는 이런 상황은 19세기 초반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경제는 소비자의 수요에 의해 움직이고 그래야 한다는 ‘소비자 주권’이라는 개념이 경제학을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은 경제학자들에게 강하게 부정된다고 갤브레이스는 말했다. 즉, 소비자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하는 사실(수요)이 처음에 있었고, 그것을 생산자가 알아내서 물건을 생산하는 것(공급)이야말로 경제의 기초라고 여겼다는 말이다.
갤브레이스는 이런 생각이 경제학자의 확신에 지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가 말하는 ‘풍요한 사회’, 즉 고도 소비사회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앞선다. 아니, 오히려 공급하는 쪽이 수요를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라고 권해서 그것을 사게끔 만드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갤브레이스의 주장은 누가 봐도 사실이다. 소비자 중에 욕망이 자유롭게 결정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욕망은 생산에 의존한다. 생산은 생산에 의해 충족되어야 할 욕망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것’이 소비자가 자유롭게 결정한 욕망에 따른다고는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란 생산자가 자신의 편의에 의해 광고나 그 밖의 수단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일요일에 할 일을 토요일에 텔레비전에서 알려주겠는가? 왜 취미를 카탈로그에서 고르는 것일까?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풍요한 사회’, 즉 여유 있는 사회에서 여유는 여유를 얻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은 ‘바라고는 있었지만 이루지 못했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다. 애초에 우리에게는 여유를 얻은 순간 이루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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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관점을 넓혀보자.
20세기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문화산업이라는 영역이 매우 커졌다는 것이다. 20세기 자본주의는 새로운 경제활동 영역으로서 문화를 발견했다.
물론 문화와 예술은 그 이전에도 경제와 분리될 수 없었다. 예술가도 빈둥거리며 먹고살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귀족의 의뢰를 받아 초상화를 그리거나 작곡을 했다. 이렇듯, 예술이 경제로부터 독립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20세기에는 문화 영역이 대중에게 폭넓게 개방되면서, 대중을 대상으로 작품을 조직적으로 만들어내어 대량으로 소비하게 함으로써 이익을 창출하는 방법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방식에 의해 수익을 올리는 산업을 문화산업이라 한다.
문화산업에 대해서는 방대한 연구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와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1903~1969가 1947년에 펴낸 《계몽의 변증법》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현대에는 문화산업이 지배적인 성격을 드러내며, 제작 프로덕션이 소비자의 감성 그 자체를 먼저 지배한다고 말한다.
무슨 뜻일까? 이들은 철학자이므로 철학적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해보자.
그들은 18세기 독일 척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철학을 이용한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이라는 구조가 어떻게 가능한지 고찰했다. 인간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 것일까? 인간은 이미 선험적으로 갖고 있던 어떤 틀(개념)에 맞추어 세계를 이해한다.
예를 들어, 모닥불에 가까이 가면 뜨겁다고 느낀다. 이때 인간은 “불꽃은 뜨겁기 때문에, 가까이 가면 뜨겁다”라는 인식을 얻는다. 여기서 ‘때문에’에 해당하는 것이 인간이 이미 지니고 있는 틀(개념)로, 원인과 결과를 엮어주는 ‘인과관계’다. 인과관계라는 틀이 머릿속에 이미 있으므로, 인간은 “불은 뜨겁기 때문에 가까이 가면 뜨겁다”라는 인식을 얻는다.
만약 이런 개념이 없다면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다는 지각과 뜨겁다는 감각을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단순히 “아, 모닥불이 타고 있구나”라는 지각과 “아, 왠지 얼굴이 뜨겁네”라는 감각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세계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를 자기 나름의 틀에 맞춰 주체적으로 정리한다. 18세기의 철학자 칸트는 인간에게 주체성이 당연히 있다고 생각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칸트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주체성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산업에 의해 미리 준비된다. 산업은 주체가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먼저 알아차리고, 미리 수용자에게 맞춰 결정해놓은 것을 제시한다.
물론 뜨거운 것을 뜨겁지 않게 느끼게 할 수는 없다. 하얀 것을 검게 보이게끔 할 수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뜨겁거나 흰 것이 아니라 ‘즐겁다’는 어떨까? 지금은 “이런 것이 바로 즐거움입니다”라는 이미지와 함께 ‘즐거운 것’을 제공한다. 예컨대 텔레비전에서 게임을 ‘즐기는’ 연예인의 영상을 내보내고, 그다음 날 시청자가 돈과 시간을 들여 그 게임을 ‘즐기게’ 한다. 우리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손에 넣고 돈과 시간을 들이며, 이를 제공하는 산업은 이익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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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이란 ‘전부터 바라고 있으면서도 아직 이루지 못한 어떤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여유를 지닌 사람들이 이제는 문화산업에 의해 ‘좋아하는 것’을 제공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앞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를 통해 설명했던 문제는 결코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새롭기는커녕 대중사회를 분석하는 사회학 서적에서는 반드시 등장하는 진부한 주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 진부한 주제를 다루려 한다.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전개되면서, 적어도 선진국의 사람들은 여유로워졌고 한가함을 얻었다. 그러나 한가함을 얻은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알지 못한다. 무엇이 즐거운 것인지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자본주의는 이 틈을 파고든다. 문화산업은 이미 만들어진 즐거움, 산업에 유리한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이전에는 노동자의 노동력 착취를 이야기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노동자의 한가함이 착취되고 있다. 고도 정보사회라는 말조차 사어가 될 정도로 정보화가 진행되고 인터넷이 보급된 오늘날, 한가함의 착취는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힘이다.
왜 한가함은 착취되는 것일까? 인간이 지루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가함을 얻었지만, 한가함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모른다. 그 상태로 한가함 속에서 지루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제공된 즐거움, 준비되고 마련된 쾌락에 몸을 맡기고 안도감을 얻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왜 인간은 한가함 속에서 지루해하는 것일까? 도대체 지루함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해서 한가함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지루함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은 바로 이 문제를 묻는 책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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