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칭의 묵시록
다만 우리의 시간 개념이 우리로 하여금
최후의 심판이라고 부르게 만들지만,
원래 그것은 즉결심판이다.
— 프란츠 카프카
1. 시계를 삼킨 자들
‘시간’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알람 기능을 내장한 시계나, 해야 할 일들과 만나야 할 사람들과 끝내야 할 작업의 마감 날짜가 기록된 타임테이블 없이는 일상의 나날들을 밀고 나아갈 수 없는 도시 사람들의 존재 양식은 오로지 시간, 더 정확히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는 시간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21세기의 도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낭만적인 분위기를 가졌을 것만 같은 19세기의 도시 파리에 대해서 놀랍게도, 발자크는 벌써 이렇게 썼다. “끝도 없이 행진하고 있고 절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도시의 삶에는 오로지 행진만이 있을 뿐, 절대로 휴식은 없다. 그렇다. 200년 전 시작된 도시의 행진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진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 행진의 진짜 가공할 만한 공포는 그것이 ‘거리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도시의 행진은 거리를 벗어나 담을 넘고 벽을 뚫어 ‘휴식’을 위해 마련된 집의 내부까지 침투해 들어간다. 거실의 소파 위에서도, 서재의 책상 앞에서도, 심지어 안방의 침대 위에서도 행진은 멈추지 않는다.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다.
반복하건대, 시간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모두가 외친다. “시간이 부족해!” “시간이 너무 빨리 가!” 10여 년 전 모스크바의 거리를 거닐며 대화를 나누던 두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지금 ‘흘러가버린 모든 것들’, 다시 말해 느리게 지나가버린 그 시간들을 벌충하느라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데, 기실 이건 시간의 상이한 체제 속에서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며, 시간을 하나의 상품으로 대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미하일 리클린).” “글쎄요. 당신들이 무언가를 벌충하고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무자비하게 착취당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미 당신들은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 덕에 사물에 대한 전유 가능성을 확장했다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사물의 대부분은 오직 광고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당신들의 것이 될 수 있으며, 시간의 경제학에 송두리째 종속되어버린 게 사실입니다. 악몽과도 같은 현실이 실현된 것이지요(수잔 벅-모스).”1)
그러니까 사정은 다음과 같다. 시간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그럼에도 시간성에 대한 사유를 절박한 요청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도시–세계에 사는 우리 모두가 ‘시계를 삼킨 자들’이기 때문이다. 도시에 태어난 우리는 모두 어느 새인가 시계를 하나씩 삼켰고, 삼켜진 시계는 배 속에서 끊임없이 끝없이 째깍거리며 시끄럽게 알람을 울려대고 있다. 거실에서, 서재에서, 심지어 침실에서마저 행진을 멈출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시계 소리 때문이다. 배 속에 삼켜진 시계가 내는 초침 소리와 알람 소리에 의해 우리의 신체는 마비—기이하게도 우리는 이것을 ‘적응’이라고 부른다—되었다. 시계를 삼킨 것은 우리의 신체였지만, 이제는 거꾸로 시계(의 리듬과 소리)가 우리의 정신을 집어삼키고 있다. ‘악몽과도 같은 현실이 실현’되었지만 놀랍게도, 아니 끔찍하게도, 우리, 시계를 삼킨 자들은 벌써 그 현실에 적응—이것은 사실 ‘마비 상태’에 불과하다—해버렸다. ‘시간’이 문제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 ‘시간성’에 대한 성찰과 숙고에 무관심한 것은 바로 이 ‘적응/마비’라는 마법적 메커니즘 때문이다. ‘문학과 정치’라는 실체적ㆍ이분법적 사유로부터 ‘문학의 정치’라는 관계적ㆍ접속적 사유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문제 파악을 선회축pivot으로 삼아 전방위적인 조망과 치밀한 탐문을 펼쳐야 한다. 다시 말해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무엇보다 ‘우리는 모두 시계를 삼킨 자들’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마음에 새김으로써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탐문 작업이 고통스러울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배 속에 들어 있는 시계가 유발한 치료 불가능한 질병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 병의 이름은 ‘조급함’이다. 끝없이 빨라지기만 하는 시계 초침의 리듬은 우리로 하여금 쫓기듯이 행진하게 만들고, 언제나 예상보다 빨리 울리는 알람 소리는 침대 위에서조차 행진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 바로 이 벗어날 수 없는 악몽과도 같은 질병을 카프카는 ‘조급함’이라 불렀다. “다른 모든 죄들이 파생되어 나오는, 두 가지 주된 인간적인 죄가 있다. 그것은 조급함과 태만함이다. 조급함 때문에 그들은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태만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지 한 가지라 한다면, 그것은 아마 조급함일 것이다. 조급함 때문에 그들은 추방되었고, 조급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2) 우리가 ‘문학의 정치’를 위한 가능성을 발견 혹은 발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조급함’이라는 근원적 죄악=질병과 싸워야만 한다.
2. 문학의, 문 앞에서
조급하기 때문에 추방되었고, 조급하기 때문에 되돌아가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학’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이가 있다면, 그의 믿음만큼 터무니없는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문학’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의 생각은 돌이킬 수 없이 사태를 호도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문학—그것이 ‘문단 문학’이든 ‘근대 문학’이든—이 끝났다고 성마르게 외쳐대는 행위는 죽지 않은 몸으로 천국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학은 우리 곁에 존재하거나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종언’을 맞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문학 그것이야말로 참된 ‘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끝’이라는 사태는 우리가 경험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며, 따라서 끝의 끝이라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다. 시를 쓰는 한 사회학자는 이와 동일한 인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그것은 의미의 ‘무’이기도 하고, 진리의 ‘무’이기도 하고, 메시지의 ‘무’이기도 하다.” 문학 “그것은 이념의 부재, 사유의 결락, 독트린의 쇠망, 진리의 파락을 하나의 비어 있는 공간으로서 인정하고, 그 ‘무’를 일러주는 덧없는 몸짓이다.”3)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가졌던 우리에게 존재했던 문학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모종의 병적 증세라고 할 수 있다. 즉 ‘조급함’이라는 죄악이 우리의 발뒤꿈치에 숨겨놓은 병균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면서 생긴 증상인 것이다. 이 증상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처방전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문학이라는 이 시대착오적이고 어떠한 명예도 가지지 않는 말, 전적으로 개론서용으로 혹사되고 산문작가의 점점 더 압도적이 된 발걸음을 추종하고 있는 말, 문학 그 자체가 아니라 문학의 뒤틀림이나 과도함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마치 이러한 성질이야말로 문학의 본질적인 것이기라도 하듯), 이러한 말이, 문학에 대한 이의 제기가 한층 더 심해지고 장르가 세분화되고 형식을 잃어버리고 있는 시기에, 글을 쓰는 사람들의 감추어져 있지만 점점 강하게 현전하는 관심으로 변한다는 것, 이 관심 속에서 그 ‘본질’의 상태로 공공연하게 드러나야 할 것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 이것은 주목해야 하지만 난해한 것이 아닐까?”4) 그러나 아마도 저들의 의도와는 현격히 다른 관점에서라면, 저 종언 테제는 확고부동한 최종 판결로서 효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도시–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조급함’이라는 치명적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한 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간 개념을 단념한다면, 인간 발전의 결정적인 순간은 영속 적이다. 그래서 이전의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표명하는 혁명적 정신적 운동들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세속–역사적 차원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의 경험 지평에서 보자면,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또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좁고 낮은 경험 지평을 떠나서 ‘우주적 연대기’의 차원에서 볼 경우, 사태는 완전히 뒤집어진다. 즉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차원에서 는 세상의 시간이라는 것도 지극히 짧은 한순간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런데 우주적 연대기의 차원에서 본다 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다시 말해 인간의 역사 전체가 말 그대로 ‘끝’에 내속되어 있음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 우주적 연대기의 인식 지평에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조급함’이라는 질병/죄악이 생겨나는 것은 다름 아닌 ‘미래’ 때문이 아닌가. 좀더 나은, 좀더 멋진, 좀더 행복한 ‘내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 때문에 ‘조급함’이라는 악마가 우리의 발목을 채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 악마는 인간들에게 기대에 따른 실망과 실망에 따른 더 큰 기대를 무한대로 제공하면서 그들을 몰아세운다. 그러나 “미래가 터부라면 비관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미래가 없는 곳에는 비관이든 낙관이든 ‘관vision’ 자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파국이 항시적인 한에서 일상은 성립될 수 없다. 언제나 최후의 날이 입을 벌리고 있다면 안정적인 일상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아는 것.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가슴에 또렷이 새기는 것. 언제나 이미 도래해 있지만, 동시에 마침내 도래할 ‘문학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절망=희망을 품는 것뿐이다. 우리는 아직, 그리고 언제나 문학의, 문 앞에 서 있다. 문학의, 문은 열려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를 위해 열려 있다. 문 앞에서, 문지기 곁에서 평생을 서성이다 죽어간 시골 사내처럼 우리도 문학의, 문 앞을 서성이고 있다. 어쩌면 죽음을 눈앞에 둔 시골 사내에게 비쳤던 바로 그 빛이 예측하기 힘든 어떤 순간에 돌연 우리를 향해 비쳐올지도 모른다. 저 빛을 기다리며, 아니 기다리지 않으면서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며 다만 ‘끝’일 뿐인 문학 앞에서 서성이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문학의, 문 앞, 그곳은 비인칭의 목소리가 출현하는 장소이다.
1) 미하일 쿠지미치 리클린 지음, 『해체와 파괴—현대 철학자들과의 대담』, 최진석 옮김, 그린비, 2009, p. 317.
2) 프란츠 카프카, 『전집2: 꿈같은 삶의 기록』, 이주동 옮김, 솔, 2004, p. 411.
3) 김홍중, 「카프카와 손담비」, 『문학동네』 2009년 가을호, pp. 376~77.
4)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심세광 옮김, 그린비, 2011, p. 377.
5) 프란츠 카프카, 같은 책, p. 412.
6) 김항,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새물결, 2009, p. 147.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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