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서문
한국은 오늘날 아시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로, 이 성공과 더불어 소비문화와 관련한 새로운 유형의 불안들이 출현하고 있다. 소비 지상주의가 기대고 있는 선택의 독재는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불만족을 증가시킨다. 사람들이 삶의 모든 것을 합리적 선택의 문제로 인식할 때 삶의 정서적 측면들 또한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최근에 나는 어느 결혼식 피로연에서 미모의 젊은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는 이내 자기 삶에서 끊임없이 감당해야 하는 선택과 관련한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드레스 한 벌을 고르는 데도 한 달이 필요했고, 호텔을 찾는 데도 온라인에 있는 리뷰를 죄다 읽고, 매일 이랬다 저랬다 갈팡질팡하면서 몇 주를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는 요즘 자신에게 가장 큰 걱정은 정자 기증자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놀라서 이 젊은 여성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그리 급해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년이면 마흔인데 도무지 짝을 못 고르겠어요.”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여성들은 특히 선택의 문제에 포위되어 꼼짝도 못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이 매일 마주하는 풍부한 소비 선택지들 가운데서 더 이상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 이를테면 어떤 샴푸를 살지, 어떤 옷을 고를지, 어떤 요가 수업에 등록할지─몰라서가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완벽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 정서, 몸과
건강 문제 또한 우리에게 선택의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선택은 오늘날 합리적 선택의 문제로 그려진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계속해서
찾다 보면 완벽한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택에는 상실이 수반되기 마련이고─인생에서 한 방향을 선택하면 또 다른 가능성은 잃게 된다─또 선택은
생각보다 예측 가능하지 않음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리곤 한다.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흔히 무의식적 환상과 욕망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가족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남들이 내리는 선택을 고려해 선택하고, 또 남들이 내 선택을 어떻게 판단할지 추측한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곧잘 우리는 친구들에게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묻고, 웨이터에게 추천 메뉴를 묻기도 하며, 리뷰에서
사람들이 선택한 것을 따르기도 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라면 주방장이 추천하는 메뉴를 그냥 선택할지 모른다. 선택지가 무수히 많은 중화요리집에서라면 그냥 늘 먹던 대로 주문할 것이다. 그러나
요리가 나오면, 남들이 주문한 요리가 탐나고 또다시 잘못 선택했다는 느낌이 든다. 레스토랑에서의 메뉴 선택과 같은 단순한 선택조차도 그런 불안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런던의 어느 유명 레스토랑이 한 가지 메뉴만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현재 그 레스토랑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선택지에 압도되어 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레스토랑에서 경험하는 이런 선택의 독재는 한국에서도 특유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화요리집에서
손님들은 흔히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이 늘 못내 아쉽다. 그래서 중화요리집은 두 가지가 반반
들어간 ‘짬짜면’을 만들어 냈다. 이에 따라 이 둘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는 비교적 수월해졌다.
왜 선택 앞에서 사람들은 그토록 무력해지는 것일까? 문제는 단순히 선진국 소비자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물품이 지나치게 많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오늘날 만연한 선택 이데올로기가 점점
소비자들의 불안감과 부족감[부적절하며 남보다 못하다는 느낌]feeling
of inadequacy을 증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심히 계획한 뒤 선택을 내리면 기대한 결과─행복, 안전, 만족─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상실, 리스크, 불확실성을 다룰 때 우리가 갖게 되는 외상적 감정들도 더 나은 선택을 하면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날 정신분석가들은, 그간 인생의 매 순간마다 올바른 선택을
하면서 살아 왔지만 공허함을 느낀다고 불평하는 환자들을 많이 본다. 그런 환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신중하게 선택한 대가는 대체 어디 있는 거죠? 평생 그토록 신중하게
선택을 해왔는데, 왜 전 행복하지 않은 거죠?” 일류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탄력 있는 몸, 자기 집, 심지어는 근사한
남편까지 있는데 몹시 불만족스럽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다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못 잡겠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여성도
있다.
리스크, 상실, 불확실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가 선택이란 관념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우연이란 관념은 차치해 두어야 했다. 시장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그것이 상당히 통제할 수 없는 것임을 잊곤 한다. 단지, 리스크를 다루는 법과 수익을 예측하는 법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기제들을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을 내릴 수 없을 때는 간혹 우연에 기대는 것이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된다. 최근 나는 바로 우리 집에서 선택에 대한 불안을 목격했다. 십대인
우리 아들에게는 또래들이 몹시 가고 싶어 하는 콘서트 티켓 여분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 친구 둘이 그
티켓을 간절히 원했다. 친구들은 아들이 그 티켓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도 결정해 주길 원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친구가 아닌 자신이 그 티켓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기준─이를 테면 누가 가장 오래된 친구인가, 의지가 많이 되는 친구는 누구인가, 콘서트에 가고 싶다고 먼저 말한
친구는 누구인가 등─도 찾았다. 아들은 선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티켓을 받지 못하는 친구와의 우정은 약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법이 나왔다. 할아버지가 애들에게 주사위로 결정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주사위로 결정을 내리자 애들은 공정하다고 여겼다. 주사위 게임에서
진 아이는 주사위가 흔히 스포츠에서 사용되는 것이고, 또 제대로 된 스포츠맨이라면 패배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상기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는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고, 삶에서는
부족감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오늘날의 소비 이데올로기를 조장하고 또 최종 심급에서는 사회
변화까지 가로막는다. 우리는 너무 많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또
자신을 개인적인 기획─나 자신의 삶─의 전적인 주인으로 여기면서
정작 사회를 변화시키는 선택들에 대해서는 잊고 만다.
어째서 우리는 사회 변화에 대해 그토록 수동적이 되는 것일까? 고도로 개인화된
우리 사회는 수백 년 전부터 자본주의 발전의 초석으로 존재해 왔던 ‘자수성가형 남성[인간]self-made man(뿐만 아니라 ‘자수성가 여성self-made woman’)’이라는 관념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관념은, 어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그저 남들 눈에 띄기만 하면 유명인celebrity이 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는 오늘날과
같은 유명인 문화의 시대에 더욱 급진화되었다.
이런 로또식 사고방식lottery mentality은 특히 미국에 만연해 있다. 미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조차 증세를 지지하지 않는데, 언젠가는 자기
자식이 부유한 인터넷 기업가나 유명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식에게 세금 폭탄을 때리고
싶은 부모가 누가 있겠는가?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될 경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미국인들도 순전히
선택이라는 관념에 대한 믿음에서 이를 반대한다. 정작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도 말이다.
선택 이데올로기의 역설은, 현실에서 선택의 여지가 점점 더 줄어든다 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자기 잘못이라고 믿어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 불안할 때 우리는 해야 할 것을
일러 주는 권위자에게 너무 빨리 선택권을 넘겨 버리고 그와 동일시한다. 코치를 고용하거나, 자칭 전문가 [구루, 힌두교에서
스승을 이르는 말]guru를 따르거나 불확실성의 시대에 넘치는 자신감으로 위로를 건네는 독재적 지도자에
동화되거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온통 불확실한 문제들, 리스크들, 예측 불가능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선택에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놀라운 잠재력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게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 이후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고, 선택과 더불어 오는 상실들을 피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을 피하고 싶다 하더라도 끝없이 연기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18세기 영국 지성을 대표하는 문인]의 명언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인생을 선택할까 궁리하느라 실제 살아가는 일 자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 2014년 4월, 레나타 살레츨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