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글쓰기를 묻다
짧게는 6주, 길게는 12주 동안의 강연이 이제 마지막입니다. 원래는 제가 쓴 글들을 다시 한 번 뜯어 읽어보며 자기비판을 한 차례 더 하는 것으로 마지막 강연을 갈음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 어떤 두 분이 제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글쓰기와 관련해서 여러 질문을 하셨는데, 이 질문들에 대해 제 나름의 답변을 드리는 게 마지막 수업에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같이 살펴보려 합니다.
Q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모든 게 어렵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에요. 사실 직업적 글쟁이들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을 때마다 ‘아, 이 하얀 공간을 어떻게 메우나’하는 생각을 누구나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책 하나 쓰는 걸 산고産苦에 비유하기도 하겠습니까? 책 한 권 써놓고 ‘이건 내 자식이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잖아요. 특히 소설가 이문열 선생이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건 물론 과장이겠죠. 여성 분들이 아이 낳을 때 겪는 진통이 얼마나 힘든지는 제가 직접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글쓰기가 설마 그렇게 고통스럽진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비유가 생길 만큼 글쓰기가 어렵다면 또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막막한 건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막막한 감정 자체가 비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 힘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리고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글쓰기가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글을 안 써도 사는 데 지장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글을 쓰겠다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든 세상에 대해서 든 생각을 좀 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생각하는 과정이죠.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가는 게 아득해 보이지만, 아무튼 간에 ‘하다보면’ 점점 익숙해집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등산이나 마라톤과 같은 이치죠. 사실 저는 흔히 말하는 ‘귀차니스트’여서 비탈길 올라가는 것도 굉장히 싫어하고 운동에도 취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달리기 좋아하는 분들 얘기 들어보면 이런 말을 하잖아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하이’라는 건 마리화나나 헤로인, 코카인 같은 마약을 복용했을 때 기분이 극도로 좋아지는 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는 물론 경험해보지 못했죠.(웃음) 달릴 때에도 그와 같은 순간이 있다는 겁니다. 처음 달릴 때는 막 힘들고 그만두고 싶지만, 달리다보면 엄청난 쾌감의 순간이 온다고 합니다.
저는 라이터스 하이wirter’s high라는 말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좀 힘들고 시작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쓰다보면 즐거워지거든요. 그렇게 글을 쓰는 데 쾌감까지 느끼게 되면 결국 직업적 작가가 됩니다. 직업적 글쟁이가 되는 거죠. 저자는 자기 텍스트에 대한 첫 번째 독자이기도 합니다. 글을 쓴다는 건 곧 글을 읽는 것이기도 한데, 자기 글을 읽으면서 리더스 하이reader’s high까지 한번 맛보면 계속 쓰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중독이 되는 거죠. 사실 모든 사람이 글을 쓰면서 하이 상태가 되진 않을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글을 쓰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일단 그냥 컴퓨터 앞에 앉으세요. 달릴 때도 처음엔 숨이 가쁘다가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보면 호흡이 편안해지듯이, 몇 마디라도 적으면서 글을 쓰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어쩌면 쾌감의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이’라고 말할 만한 극도의 쾌감이 오는 순간이요.
Q “글의 주제를 어떻게 잡아야 하나요?”
저는 보통 청탁을 받아서 글을 써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쓸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문기자 할 때야 세상만사가 주제였고요.(웃음)
그런데 그렇게 주제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누가 ‘한번 이것에 대해 써봐라’가 아니라 ‘아무 글이나 써봐라’ 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는 자기가 자발적으로 글을 쓰고자 할 때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할까요?
신문사 논설위원이 개인 칼럼을 쓸 때는 사설과 달리 보통 스스로 주제를 정해서 씁니다. 사설은 논설위원들이 회의를 해서 주제와 필자를 정하죠. 방향까지 대개 정해지기 때문에 사설 쓰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필이 데스크를 보니까 필자가 사설에 대해 최종 책임은 안 져도 되죠. 그렇지만 개인 칼럼의 최종 책임자는 필자입니다. 제가 어느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 개인 칼럼을 쓸 차례가 오면 일단 그 당시에 시사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먼저 둘러보곤 했습니다. 요즘처럼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시끄럽다면 ‘공무원의 직업윤리란 무엇일까?’라는 주제를 잡을 수 있겠고, 지금 시리아에서처럼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면 ‘도대체 평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를 주제로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또 며칠 전에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그런 위대한 사람의 죽음은 충분히 글의 주제나 소재가 될 수 있죠. 아니면 사람들이 굶어죽는다거나 대규모로 해고가 된다거나 한다면 ‘복지사회란 무엇인가’ 같은 게 주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악플 때문에 자살을 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인터넷 예절’이나 더 일반적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주제로 삼을 수 있고, 원전 비리 사건 같은 게 일어났다면 ‘공무원의 청렴’이나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을 주제로 삼을 수 있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사건이 불거졌다면 ‘교육이란 과연 무엇인가’ 같은 걸 주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 꼭 공적 사건에서 주제의 실마리를 잡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사적으로 최근 겪은 일들, 사적 경험에서 주제의 실마리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저번 일요일에 어떤 분의 주례를 섰습니다. 제가 절필을 해서 글을 쓰고 있진 않지만, 만약 지금 글을 쓴다면 그것도 주제가 될 수 있겠죠. ‘결혼생활이란 무엇인가’ ‘결혼생활과 독신생활 중 어느 쪽이 좋을까’, 그런 것들이요. 만약 가족이나 친척 누가 죽음을 당했다면 ‘삶의 의미’ ‘죽음의 의미’ 같은 게 주제가 될 수도 있겠고, 자기가 연애중이라면 사랑에 대해서 쓸 수 있을 겁니다. 친구랑 절교를 했다면 우정에 대해서, 이혼을 했다면 독신생활에 대해서 쓰는 거죠.
저는 그런 식으로 주제를 잡아왔습니다. 그때 일어난 공적 시사, 아니면 저 자신의 경험이죠.
제가 강좌 첫 시간에 조지 오웰의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글을 소개하면서 글쓰기의 동기 네 가지를 간략히 정리해 말씀드렸습니다만, ‘나는 왜 이 글을 쓰려고 하는가?’ 하는 걸 생각하면 주제가 그리 어렵지 않게 나옵니다. 글쓰기의 목적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라면, 예컨대 동성애자들의 핍박 문제에 대해서 글을 쓸 수도 있겠죠. 동성애에 대한 이성애자들의 생각을 변화시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죠.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에 관심이 많다면, 그것의 탐구를 글쓰기의 목적으로 삼아 자기의 인생관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 관심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하거나 정리를 하기 위해서 글을 쓸 수도 있죠. 개미의 생태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개미가 주제가 될 수 있는 거고, 자기가 만난 사람에 대해 기록해두고 싶다면 또 그게 주제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어떨 땐 삶이 너무 권태로워서 삶의 활기나 생기를 찾으려는 목적에서 글을 쓸 수도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래요.
혹은 좀 지사志士적 태도로 세상의 부조리와 비참함을 널리 알리려고 글을 쓸 수도 있습니다. 보통 이런 글을 쓰는 이들을 논객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세상은 부조리하고 아주 비참합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이북 사회나, 지금 내전중인 시리아나 이라크, 데모를 하면 총으로 쏴 죽이기도 하는 이집트나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 전체의 식량생산량은 지구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리고도 남는데, 한쪽에선 음식물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아프리카 같은 데선 아이들이 굶어서 죽고 하는 것도 참 부조리하죠. 이런 것들에 생각이 미치면 그게 또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특이하게는 나르시시즘에서 글쓰기가 시작될 수도 있어요. ‘나는 왜 이렇게 예쁘지?’ ‘나는 왜 이렇게 행복하지?’ 이런 주제로 글이 나올수도 있습니다.(웃음) 지금 여러분이 웃었듯이 사람들을 웃기려고, 혹은 울리려고, 혹은 무섭게 하려고 글을 쓸 수도 있습니다.
주제를 어떻게 잡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도처에 있는 게 글감이거든요. 사실 여기 이 전기코드부터 저 전등, 마이크, 아니면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의 사소한 행동 이런 게 다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저께 마음산책이라는 출판사에서 제게 책을 보내줬는데, 권혁웅이라는 시인이 쓴 에세이집 《꼬리 치는 당신》이었습니다. 책이 퍽 두툼한데, 포유동물과 곤충의 구애나 생식, 생존 방식 같은 걸 사람의 생태와 겹쳐놓으며 글을 써놨어요. 한 종에 한 페이지씩 해서 아주 여러 종에 대해 썼는데, 이런 것도 사실 책 한 권의 주제가 충분히 될 만합니다.
세상 도처에 있는 것이 글감입니다. 그게 곧 글의 주제가 됩니다. 지하철 안에 있든, 산책을 하든, 아니면 그냥 멍하게 앉아 있든, 햇반을 한 2분 동안 데우며 서 있든, 그런 순간에 생각이 요렇게 조렇게 떠오를 거예요. 사람이라면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어요. 그게 다 글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글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걸 다 스쳐 보내고 곧 잊어버립니다. 그걸 글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제가 권하고 싶은 건, 이를테면 걷다가 무슨 생각이 탁 떠오르면 그걸 메모해놓으세요. 특히 나이 든 사람들은 그게 꼭 필요합니다. 제 경험인데 마흔이 넘어서부터는 뭘 잘 잊어버리게 되더라고요. ‘아, 이거에 대해 글을 쓰면 재밌겠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 주제가 뭐였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수첩에 메모를 하든, 아니면 요새는 IT기기들이 있으니까 거기에 메모를 하든 적어두시길 바랍니다. 글의 주제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도처가 다 글감이고 글의 주제입니다.
Q “글의 구성과 전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여러 구성 방식들이 있습니다. 서론-본론-결론, 기승전결 이런 것 많이 들어봤을 거예요. 또 자잘한 걸 묶어가지고 결론을 내느냐, 아니면 연역적으로 주장을 먼저 들이밀고 그 예를 드느냐에 따라 두괄식, 미괄식, 쌍괄식 같은 것으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결과를 먼저 제시하고 원인을 뒤에 배치할 것인가, 아니면 원인을 먼저 제시하고 결과를 뒤에 배치할 것인가에 따라서도 분류됩니다. 또 시간적 순서로 배치할 수도 있고 공간적 순서로 배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과서적으로 기승전결이니 서론-본론-결론이니 말은 하더라도 사실 글의 구성이나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가 정답이에요. 왜냐하면 글에 따라서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글을 하나의 건축물이라고 본다면 용도에 따라서 짓는 법이 다 다릅니다. 그게 주택인지, 체육관인지, 음악당인지, 또 같은 집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침실인지, 거실인지, 서재인지, 주방인지에 따라 공간 구성이나 건축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글의 구성이나 전개 방식에 대해서 하나의 정답이란 없는 겁니다.
저는 글을 쓸 때 ‘미괄식으로 쓸까, 쌍괄식으로 쓸까? 아니면 병렬식으로 쓸까?’ 이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대충 밑그림을 그려보기는 해요. 대단할 건 없고 막막할 때 그냥 떠오르는 단어 몇 개를 끼적여보는 거죠. 아주 간략하게 자기가 선택한 주제에 대해서 관련된 말 몇 가지만이라도 써놓으면 일단 시작이 됩니다.
글이 안 써진다고 그냥 포기하지 말고 일단 앉아서 뭐라도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두커니 있다가도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 탁 올 때가 있거든요? 그게 아주 세속적인 지혜라고 하더라도 ‘삶이란 이런 거 아닐까?’라는 그런 게 있으면 일단 메모한 상태에서 끄적끄적 적다보면 글이 써집니다. 제 경우는 그랬던 거 같아요. 글을 써보시면 알겠지만, 쓰다보면 한 단어가 또다른 단어를 불러내 문장을 만들어내고,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을 다시 자연스럽게 불러냅니다. 그렇게 해서 얼개가 짜이는 거죠.
만약 막연한 밑그림도 안 그려진다, 시놉시스조차 안 그려진다 할 때는 일단 거기에 관련된 단어라도 몇 개씩 이렇게 적어보세요. 그러고는 다짜고짜 쓰세요, 그냥.(웃음) 별거 없습니다. 말이 되든 안 되든, ‘내가 첫 문장을 잘 쓴 건가, 못쓴 건가’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하여간 써보세요. 그러면 얼마만큼 분량의 글이 생기잖아요? 물론 굉장히 거친 글이겠지만 그중에서도 건질 게 있을 겁니다. ‘이건 좀 괜찮네?’라는 생각이 들 때, 그렇게 마구 채집한 말들을 이제 잘 다듬어보는 겁니다.
소설가 최일남 선생은 글쟁이를 단어의 채집가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말을 채집해서 잘 벌여놓는 사람입니다.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길바닥에 떨어진 비둘기 깃털, 아니면 생쥐의 시체…. 하여간 그렇게 단어를 모으다보면 뭔가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이 올 거예요. 말에는 어떤 생명성이 있어서 자기 친구들을 불러냅니다. 그렇게 문장이 만들어지고, 그 문장이 또다른 문장을 끌어냅니다. 그러니까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을 안 해도 될 거 같아요.
아까 주제를 찾기 위해서 메모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메모는 구성을 하는 데에도 아주 중요합니다. 어떤 주제가 잡혀 있는 상태에서 일상생활을 하다 문득문득 구성의 밑그림이 되는 단어나 문장들이 떠오르거든요. 양치질을 할 때, 아침밥을 먹을 때, 패스트푸드점을 서성거릴 때 ‘아, 첫 부분에는 이걸 쓰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납니다. 카페에서 무슨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데 음악 소리를 듣고 불현 듯 ‘폴 매카트니의 노래가 나오네? 이걸로 글을 시작하거나 마무리하면 되겠구나’ 하는 식입니다. 그럴 때 굉장한 기쁨이 느껴지죠. 자릿한 쾌감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기뻐서 좋아하지만 말고 메모를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주제로서든 소재로서든 구성 방법으로서든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를 해라,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특별한 방법론에 몰두하기보다 일단 밑그림이라도 그려보기 바랍니다. 실제로 글을 쓸 때에는 이론에 따라서 쓰는 게 아닙니다. 몇 개의 단어라도 나열해보세요. 그러면 그게 연결이 됩니다. 물론 거친 상태로 글을 내보내면 안 되고 퇴고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앞문장과 뒷문장, 또는 앞문단과 뒷문단이 논리적으로 모순은 아닌가, 수사는 너무 지나치거나 부적절하지는 않은가 그런 걸 생각하면서 고치는 거죠. 일필휘지로 글을 쓰고 나서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쓴 다음에 많이 고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쓰거나 완벽한 구성, 얼개를 짜려고 하기보다는 일단 뭐라도 적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Q “작가로서의 노하우나 철학이 있다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노하우나 철학? 글쎄, 제게 무슨 노하우가 있는지 잘 모르겠군요. 철학이란 말은 더 거창하고요.(웃음) 그냥 저는 글을 쓸 때 원칙적으로 표현적 기능보다는 의사소통 기능을 중시합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아름답게 쓰려는 노력보다는 명료하게 쓰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름다움을 소홀히 하지는 않아요. 글의 쾌감이라는 건 명료함이 주는 쾌감도 있지만, 주로 아름다움이 주는 쾌감이거든요. 글을 쓰면서 자기도 쾌감을 느끼고 그걸 읽는 사람도 쾌감을 느끼게 하려면 어느 정도의 수사가 문장에 필요합니다.
제가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짧은 글을 하나 쓰더라도 한 문장 정도는 약간의 수사법을 동원해서 독자들이 인상 깊게 그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왔습니다. 제가 10년쯤 전에 어떤 정치 칼럼을 쓰면서 그런 말을 쓴 적이 있어요. “인간의 어떤 무능도 부끄러움의 능력을 잃은 것만큼 부끄럽지는 않다.” 그 문장을 쓸 때 저도 생각을 좀 했는데, 그 뒤 사람들이 그 문장이 인상적이었는지 그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저는 글에서 저만의 스타일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스타일, 곧 문체는 결국 수사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 스타일 때문에 똑같은 의미의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달리 쓰이게 되는 거죠. 만약 제 글에서 제 이름을 지운다고 할지라도, 제 글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제가 쓴 거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이건 고 아무개라는 사람이 쓴 글이 분명해.’ 그런 부분에서 저는 약간 성공한 것 같아요.
만약 조금이라도 직업적 글쟁이가 되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스타일의 확립은 아주 중요합니다. 자기 문체가 생겼을 때 비로소 글쟁이가 되는 거죠. 물론 아주 표준적이고, 문법에 딱딱 맞아떨어지고, 명료한 글도 좋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까지의 강연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익혀주려 애썼던 건 그런 표준적 문장이었죠. 하지만 제 나름의 수사나 자기 특유의 말버릇이 없다면, 그 사람을 작가라고, 글쟁이라고 부르기는 힘들 겁니다.
처음부터 스타일을 확립할 수는 없겠죠. 남의 글을 모방하고 베끼고 그러다가 차츰 형성될 겁니다. 뭐, 똑같은 얘기인데, 스타일을 갖기 위해서도 메모가 필요해요. 자기 오감으로 세상을 느끼면서 뭔가가 떠오르면 메모를 해놓는다는 것, 이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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