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도덕성은 아래에서 위로 왔다
(...)
하찮은 시작들
진흙 웅덩이에서 나오는 동물들은 인간 역시 하찮은 기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모든 것은 단순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손은 앞지느러미에서 유래했고 폐는 부레에서 진화했다. 신체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도 마찬가지다. 종교는 인간의 도덕성이 특별한 기원에서 유래했다는 믿음을 주입해왔고 철학은 그 생각을 포용했다. 그러나 이는 도덕성을 직관과 감정의 최상위 형태라고 가르치는 현대 과학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한 다른 동물들에 관한 지식과도 모순된다. 흔히 사람들은 동물이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정체되어 있는 반면 우리 종은 이상을 좇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인간에게 이상이 없다는 게 아니라 다른 생물들도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왜 거미는 자신의 거미줄을 수리할까? 거미가 내면에 이상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거미줄이 그 이상에서 벗어나면 거미는 원래대로 되돌려놓기 위해 애를 쓴다. 왜 어미 회색곰은 새끼를 안전하게 지킬까? 누구든 암컷 곰과 새끼 사이에 들어갔다간 곰이 마음속에 이상적인 환경을 설정해놓고 있으며 그것이 교란되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동물들의 세계는 수리와 교정의 연속이다. 비버는 댐을 고치고 개미는 개미언덕을 보완한다. 이는 영역 방어와 서열 유지로도 이어진다. 한 원숭이가 위계 서열에 복종하지 않고 질서를 어지럽히면 무리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교정은 그 정의상 당연히 규범적이다. 교정은 동물이, 사물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바를 반영한다. 사회적 포유류들은 조화로운 관계를 위해 노력한다. 도덕성 역시 규범적이므로 이들 사회적 포유류들의 행동은 도덕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포유류들은 가능한 한 갈등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자연 상태를 검투사들 간의 대결로 보는 시각은 잘못이다. 한 실험에서 두 마리의 어른 암컷 비비원숭이는 그들 사이에 놓인 한 알의 땅콩을 건드리길 거부했다. 그들 모두 땅콩이 발치에 떨어진 것을 보았는데도 말이다. 평생 동안 야생 망토비비원숭이를 연구한 스위스의 영장류학자 한스 쿠머는 두 무리의 우두머리 암컷이 그들 모두를 먹이기엔 작은 과일나무에서 서로를 발견했을 때 벌어진 일을 기록했다. 두 암컷은 과일은 내버려두고 각자 자기 무리를 끌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침으로써 싸움을 피했다. 비비는 커다랗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졌지만 식량을 두고 싸우는 일은 매우 드물다.5 수컷 침팬지들도 같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종종 나의 연구실 창을 통해 몇몇 수컷이 생식기가 부풀어오른 한 암컷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장면을 보곤 했다. 하지만 수컷들은 경쟁하기보다 평화를 유지한다. 가끔 암컷을 흘낏 보지만 그들은 서로 털 고르기를 해주며 하루를 보낸다. 모두의 흥분이 충분히 누그러졌을 때 한 마리가 짝짓기에 나선다.
싸움이 멈추면 영장류들은 거미가 찢어진 거미줄을 고치듯 ‘수리’를 시작한다. 그들이 집착하는 사회적 관계가 화해를 이끌어낸다. 다양한 종들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면 갈등을 일으킨 개체들이 가까운 사이였을수록, 함께 무언가를 해온 경험이 많을수록 갈등 이후에 관계를 보완하려는 시도를 더 많이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행동은 동물들이 우정과 가족 유대의 가치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동물들은 두려움을 내려놓고 공격성을 억압하게 된다. 유인원들은 방금 전까지 싸우던 상대와 입 맞추거나 껴안는다. 싸움을 끝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그럴 경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더 영리한 행동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도덕성이 ‘아래에서 위로’ 출현했다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도덕법칙은 하늘에서부터 또는 탁월한 이성적 원칙으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다. 고대부터 몸에 뿌리 깊게 밴 가치들로부터 솟아났다. 그것의 근본에는 집단생활에서의 생존이라는 가치가 있다. 어딘가에 속하고, 함께 생활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우리의 욕구는 우리가 의지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을 촉구한다. 다른 사회적 영장류들도 이 가치를 우리와 공유하며, 우리처럼 감정과 행동 사이에 여과 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 덕분에 그들은 상호 동의할 수 있는 ‘신사협정’에 도달한다. 수컷 침팬지들이 암컷을 두고 격투를 벌이지 않는 것도, 비비원숭이들이 가운데 떨어진 땅콩을 못 본 체하는 것도 이 여과 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과 장치로 인해 어떤 행동은 금기가 된다.
아른험 동물원의 침팬지 무리 가운데 가장 어린 타라는 고약한 장난으로 나이 든 암컷들을 화나게 만들곤 한다. 타라는 울타리 밖이나 쥐구멍에서 죽은 쥐를 찾아내 자기 몸에 닿지 않도록 쥐꼬리를 잡은 채 돌아다닌다. 타라는 졸고 있는 침팬지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죽은 쥐를 그들의 등이나 머리에 올려놓는다. 침팬지들은 죽은 쥐를 느끼거나 냄새를 맡으면 놀라서 펄쩍펄쩍 뛰고 소리를 지르면서 쥐를 떼어낸다. 어떤 침팬지는 풀을 한 움큼 쥐고 쥐와 닿은 부분을 박박 닦기도 한다. 타라는 재빨리 쥐를 들고 다음 목표물로 다가간다. 신기한 일은 어떤 침팬지도 타라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희생자들은 몹시 화를 내지만 타라에게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타라는 어른 침팬지들이 새끼에게 보이는 놀라운 인내심의 덕을 누리는 것이다.
시드니의 타롱가Taronga 동물원의 수석 사육사 앨런 슈밋의 이야기처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에서는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 타롱가 동물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침팬지 관람 시설이 있는데, 하루는 두 살 된 침팬지 셈베가 로프를 타고 놀다가 고리가 져 있던 로프에 몸이 걸렸다. 셈베가 소스라쳐서 소리를 지르자 그녀의 엄마인 시바가 도와주러 왔다. 시바는 가까스로 고리를 벗겨내고 딸을 땅으로 데리고 내려와 안고 달래주었다. 셈베가 안정을 찾자 시바는 다시 로프를 기어 올라가 말썽이 된 고리를 때렸다. 시바는 미래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고리를 끊으려고 했다. 시바가 그 몹쓸 로프로부터 셈베를 구해내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생각해보자. 처음엔 말할 것도 없이 로프나 새끼를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사태를 악화시켰을 것이다. 어미는 대신 고리를 느슨하게 푸는 올바른 해결 방법을 찾았다. 이것은 그녀가 고리를 잡아당길 때의 위험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후속적인 안전조치를 취하려고 한 것도 그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감정에 민감한 무리 동물인 포유류다. 나는 영장류의 사례를 선호하지만 내 설명은 다른 포유류들에게도 대부분 적용된다. 미국의 동물학자 마크 베코프는 놀이하는 개, 늑대, 코요테의 비디오를 분석했다. 그는 개과canid 동물들의 놀이는 새끼들에게 규칙 준수, 신뢰 형성, 상대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는 기능을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 동물들의 놀이에서 ‘절하기’ 동작은 빈번하게 나타난다. 엉덩이를 들어올리고 몸을 앞다리 쪽으로 깊이 낮추는 이 동작은 놀이 중에 벌어질 수 있는 섹스나 싸움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놀이 중에 잘못을 저지르거나 상대를 다치게 하면 놀이는 중단된다. 그때 위반한 쪽은 ‘절하기’ 동작으로 ‘사과’를 한다. 그러면 상대는 ‘용서’하고 놀이는 계속된다. 역할의 반전은 놀이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서열 높은 동물이 강아지처럼 구르거나 항복의 표시로 배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는데, 약한 쪽이 ‘이기게’ 해주는 것이다. 실제 관계에서는 허용되지 않을 일이다. 베코프는 이러한 관계를 도덕성과 관련지어 해석한다.
이 사회적 놀이를 하는 가운데 개체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환경에서 재밌게 놀면서 상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 규칙을 배운다. 어느 정도 세게 물어도 되는지, 어느 정도로 거칠게 몸을 부대껴도 되는지 등을 말이다. 또 그들은 문제 해결 방법을 배운다. 페어플레이를 하고, 상대도 그럴 거라고 믿는 것은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면서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는지 규제하는 사회적 행동의 약속이 생겨난다. 이러한 약속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도덕성의 진화에 대해 무언가를 암시한다.
작은 개를 쫓아가는 큰 개는 자기 힘을 억제해야 한다. 개들은 무는 힘을 조절해야 한다. 이런 규칙들은 ‘일대일 도덕성’을 이룬다. 그러나 놀이에서 공정성이 보장되는 또 다른 방법은 자원의 분배이다. 분배의 정의에 대한 고상한 원칙들을 모르더라도 우리에겐 공정성과 직결된 기본 감정이 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자기가 받은 피자 조각이 형들 것보다 작으면 “불공평해!” 하고 소리치며 자기 피자 조각을 내던진다. 이것이 원초적인 공정성이며 남들보다 적게 가질 때 생기는 분노다. 이 감정이 없다면 자원이 어떻게 분배되든 사람들이 무슨 관심을 가지겠는가?
수렵채집인들에게서 나타나는 평등주의는 인간이 오랜 세월 자원 분배에 집착해왔음을 보여준다. 사냥꾼들에게는 잡은 것을 직접 나누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다. 자기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유리하게 나누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인류학자들은 지구 곳곳에서 최후통첩 게임을 해보았는데, 모든 곳에서 인간은 공정성에 신경 쓴다는 것을 발견했다. 최후통첩 게임은 두 플레이어가 일정한 금액을 그들 사이에 분배하는 게임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받은 돈에서 원하는 만큼 떼어 상대에게 줄 수 있는데, 상대가 자기에게 돌아온 몫을 받아들일 때만 양쪽 모두 돈을 가질 수 있다. 우리 종은 보편적으로 동등한 분할을 좋아했다. 그건 아마도 몫을 제안한 쪽에서 혼자서는 더 큰 몫을 챙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상대로부터 불공평한 금액을 제안받은 플레이어의 뇌를 스캔해보니 경멸과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나타났다.
인간이 최후통첩 게임을 하는 방식은 상당히 복잡하다. 우리는 상대보다 적게 가질 때 저항하는 원초적 공정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다른 이의 반응을 예상하여 미연에 방지하려고 한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평등성을 촉진하며 2차적 공정성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모두에게 공정한 결과를 낳는다. 토머스 홉스는 이러한 인간의 갈등 회피 본성을 암시한 바 있다. “모든 사람은 천성적으로 자기에게 좋은 것,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우연히 찾아내는 듯하다.” 나는 이 정치철학자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우연히’라는 말은 쓰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어떤 성향이 보편적이라면 반드시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이런 성향이 과거로부터 진화한 것인지는 내가 세라 브로스넌과 꼬리감는원숭이를 상대로 실험했을 때 분명해졌다. 이 실험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어떤 과제를 수행한 원숭이에게 오이 조각을 준 뒤 같은 과제를 수행한 다른 원숭이에게는 포도를 주었다. 원숭이는 동료와 자신이 같은 오이 조각을 보상으로 받았을 때는 오이의 질에 상관없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보상이 동등하지 않자 격렬하게 거부했다. 이 반응만으로도 그들의 감정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강연할 때 원숭이들의 반응을 청중들에게 보여주는데, 청중들은 의자에서 쓰러질 정도로 웃는다. 나는 사람들이 원숭이의 반응에 놀란 것으로 이해한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과 원숭이의 감정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 원숭이는 오이를 받고 만족스럽게 먹지만 동료가 포도를 받는 것을 목격하자 짜증을 부린다. 원숭이는 자신의 조그만 오이 조각은 던져버리고 실험용 우리를 부숴버리겠다는 듯 흔든다. 그러한 감정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실업이나 저임금에 항의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2011년에 일어난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오이밭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포도 위를 뒹구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다른 원숭이가 더 나은 것을 받은 걸 보고 자기의 먹이가 나쁘지 않아도 거부하는 원숭이의 행동은 인간이 최후통첩 게임에서 보이는 행동과 비슷하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반응을 ‘비합리적’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것보다 뭐라도 가지는 게 더 낫다는 얘기다. 경제학자들은 원숭이들이 어쨌든 먹이를 거부하면 안 된다고 한다. 인간도 아무리 적은 액수의 제안이라도 받아들이는 게 낫다. 돈은 돈이니까. 그런데 이러한 반응들이 비합리적이라면 이러한 비합리성은 종을 초월한다. 원숭이들은 이러한 비합리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한편으로 인간의 공정성 감각이 아주 기초적인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공정성은 많이 과장되어온, 인간의 합리성의 산물이 아니다.
나는 원숭이 실험이 2차적 공정성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고 밝혀야겠다. 포도를 가진 원숭이가 오이를 가진 원숭이에게 자기 것을 나누는 데까지 가야 2차적 공정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진화된 공정성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특성이라는 걸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 우리는 가까운 친척인 유인원을 관찰해야 한다. 유인원들은 자기 것이 아닌 먹이로 인한 분쟁을 해결하곤 한다. 한번은 잎이 붙어 있는 나뭇가지를 놓고 두 새끼 침팬지가 싸우고 있었다. 그러자 젊은 암컷이 싸움을 중지시켰다. 그녀는 나뭇가지를 빼앗아 둘로 부러뜨리더니 둘에게 한쪽씩 주었다. 그녀는 그저 싸움을 멈추게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분배에 관한 무언가를 이해했던 걸까? 서열 높은 수컷들은 문제가 되는 먹이를 빼앗지 않고도 싸움을 멈추게 한다. 보노보 판바니샤는 특혜받기를 꺼렸다. 실험 도중 판바니샤는 꽤 많은 양의 우유와 건포도를 받았다. 하지만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와 가족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자 잠시 후 보상을 거부했다. 판바니샤는 실험자를 향해 다른 보노보들을 가리키는 몸짓을 했다. 그녀는 다른 보노보들도 보상의 일부를 받은 뒤에야 자기 몫을 먹었다. 유인원들은 앞일을 생각할 줄 안다. 다른 보노보들이 보는 앞에서 혼자만 실컷 먹었다면 실험 뒤 무리로 돌아갔을 때 거북한 결과가 그녀를 기다렸을 것이다.
유인원도 2차적 공정성을 의식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세라 브로스넌의 침팬지 연구에서 나왔다. 세라는 대규모 침팬지 프로젝트를 설계했다. 우리는 공정성 감각이 그들이 들인 노력과 결합될 때에만 작동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단지 불공평하게 먹이를 주는 것만으로 거부 반응을 촉발하지는 못한다. 먹이는 과제 수행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침팬지들은 단순한 과제를 수행하고 포도와 당근 조각으로 보상을 받았다. 예상했던 대로 동료가 포도를 받았을 때 당근을 받은 침팬지는 과제 수행을 거부하거나 자기가 받은 먹이를 내던져버렸다. 여기까지는 원숭이 실험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도를 가진 침팬지도 화를 내는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세라는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동료 침팬지들이 낮은 가치의 당근을 받았을 때 높은 가치의 포도를 받은 침팬지들도 자신의 먹이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공정함과 정의의 감각은 오래된 능력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화합을 유지해야 할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유인원들과 공정성 감각을 공유하고 있으며, 원숭이와 개와도 첫 번째 단계를 공유하고 있다. 빈대학교의 프리데리케 랑게는 동료 개는 ‘악수’에 대한 보상을 받았는 데 반해 자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개는 사람과의 악수를 거부하는 걸 발견했다. 개의 이러한 반응은 협력하는 동물의 오랜 계보 속에 이어져온 반응이다. 타자가 어떤 보상을 받는지 신경 쓰는 일은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남에게 사기당하는 걸 막아준다. 이런 반응을 두고 비합리적이라고 하는 건 요점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내가 당신과 함께 사냥을 다니는데 매번 당신이 잡은 고기의 제일 좋은 덩어리를 독차지한다면 나는 다른 동료를 찾아야 할 것이다. 불공정함을 싫어하는 세 동물 종(침팬지, 원숭이, 개과 동물)이 모두 고기를 좋아하고 집단 사냥을 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보상 분배의 감각은 노력에 따른 보상을 확실히 하게끔 만드는데, 이는 사회적 협력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조건이다.
이로써 나는 도덕성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이 도덕성으로 인해 인간이 다른 영장류를 앞선 것이다. 인간은 집단 차원에 관심을 집중했고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옳고 그름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물론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유인원들을 전부 조사하지는 않았다. 내가 ‘공동체 생각하기’라고 이름 붙였던 감각이 유인원들에게 완전히 부재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공동체 생각하기에는 보다 큰 추상력이 요구된다. 누군가의 행위가 나에게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행위를 내버려둔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의 이익을 초월하는 더 큰 집단적 이익에 미칠 영향을 상상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기저에 깔린 가치관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집단의 기능은 구성원 모두의 이해관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인간의 이런 성향과 유사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정직함과 신용에 대한 평판을 형성하고, 남을 속이는 사람과 비협조적인 사람은 배척한다. 또한 우리의 목표는 모든 이가 규칙을 지키게 만들고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에 두게 하는 것이다. 도덕은 집단생활의 이익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며 권력 엘리트의 착취를 억제하는 역할도 한다. 나는 다윈까지 거슬러가는 생물학의 전통적인 관점을 따른다. 즉 도덕성을 내집단in-group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관점을 크리스토퍼 보엄은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의 도덕규범은 집단 내에서만 완전하게 적용된다. 이 집단이 언어 집단인지, 같은 땅덩어리를 공유하는 비언어적 집단인지, 동일한 민속적 정체성을 지녔는지, 같은 국민인지는 상관없다. 다시 말해 완전한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는 문화적 이방인에 대해서는 특수하고 경멸적인 도덕적 ‘할인’*이 있는 듯하다.
* 도덕규범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의미.
하지만 도덕성이 다수의 인류를 고려하지 않고 내집단의 목적을 위해 진화한 것이라고 해도 지금도 그 목적대로여야 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우리는 편협한 도덕성을 넘어서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을 더 넓은 세계에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그 세계는 이방인, 심지어 적까지 포함한다. 적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것은 고귀한 사고방식이다. 전쟁 포로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제네바 협정은 1929년에 와서야 겨우 맺어졌다. 도덕성의 적용 범위를 넓힐수록 우리는 지성에 더 많이 의지해야 한다. 도덕성이 인간의 감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해도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현대 세계의 규모에 맞게 설정하는 데 생물학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무리 동물로 진화했지 세계 시민으로 진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편적 인권 같은 주제를 반영하면서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설명한 자연화된 윤리학을 결코 탈출할 수 없는 감옥으로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이 학문은 현재 우리가 다다른 곳까지 어떻게 왔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인간은 낡은 토대 위에 새로운 구조물을 지어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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