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겪은 일을 다 알았으면 좋겠어.”
- 강덕경
1.
초등학생이 무슨 시험공부를 한다고 다섯 시 반에 일어났나 싶지만 그때는 나름 진지했다. 잠을 깨러 대문 밖으로 나갔다가 우연히 새벽의 시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숱하게 마주할 일이었지만, 그때는 내 의지로 일찍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새로웠다. 그리고 상쾌함, 쾌적함, 그 모든 기분 좋은 감각이 단 몇 초 만에 부서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같은 행동을 반복한 지 사흘 정도 되던 날은 유난히 안개가 짙었다. 여느 때처럼 대문께에 선 채 기지개를 펴고 있을 때, 1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헤치고 한 여자가 나타났다. 처음 내 눈길을 끈 것은 커다란 솜사탕처럼 부푼 치마였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옷을 이십대 초반의 언니가 입고 있는 것이 묘하게 느껴졌다. 흰 치마와 흰 스타킹,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간 듯 웨이브를 풍성하게 살린 퍼머 머리에는 커다란 리본까지 달려 있었다. 그녀가 내 앞으로 스쳐 지나간 시간은 20초 남짓. 한참 뒤에야 그녀가 정말 미스코리아 진만큼 예뻤다고 깨달은 것은 다른 데 신경을 빼앗겼던 탓이었다. 치마는 한쪽 단이 뜯어져 무릎 아래로 내려와 있었고, 얇은 천으로 된 소매 한쪽도 찢겨 너덜거렸다. 파란색 눈 화장조차 아파 보였다. 눈은 초점을 잃었고, 입은 벌어진 채 그녀는 절뚝거리면서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녀가 몸을 돌린 지점을 한참 쳐다보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고 책상 앞에 앉아 외울 것이 가장 많았던 사회 교과서를 폈다. 두 시간 뒤 엄마는 언제나처럼 도시락을 싸주셨고 동네 친구들이 학교에 가자고 내 이름을 불렀다. 모든 것이 평소와 똑같았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그녀들을 만났다.
2.
나는 그때 어렸지만 그녀에게서 나타난 폭력의 흔적, 게다가 그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그날 새벽 집 안으로 숨어버리면서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먹은 탓인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씩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걸어 나왔다. 늘 대여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하얀 치마에 화사한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은 채 절뚝거리는 그녀를 바라본다. 연인의 배신 때문에 충격을 받아 입을 벌린 채 물속으로 빠져 죽어가는,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볼 때도, 안개가 내려앉은 새벽 강가를 운전하면서도 그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은 지난해 봄날, ‘나눔의 집’에서 오랜만에 그녀를 떠올렸다. 그날은 역사관 안에서 작가와의 인터뷰를 채록하는 일을 돕기로 되어 있었다. 1995년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설립된 일본군 위안부의 보금자리인 나눔의 집을 20년이 지나서야 처음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는 다른 일정 때문에 여유 시간이 20분 정도밖에 없었다. 역사관에는 이미 여러 책과 매체를 통해 봐왔던 일본군 위한부가 그린 크고 작은 그림이 두 줄로 걸려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지나 강덕경의 <빼앗긴 순정> 앞에 섰다. 그림 중앙에 모자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보였다. 나무의 형체를 한 남자는 수많은 다리를 단 채로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대지에는 화사한 분홍빛 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희생 혹은 근본이라는 주로 긍정적인 상징성을 지닌 뿌리. 하지만 이 그림에서 뿌리는 그녀를 강제로 범했던 수많은 남자들의 다리다. 뿌리가 튼튼해서 잎사귀에 윤기가 돌고 꽃이 탐스러울수록 나무 아래 알몸으로 누운 여자는 얼굴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이 그림을 그린 강덕경은 1929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열여섯이 되던 해 일본인 담임교사는 우수한 학생이었던 그녀에게 ‘여자근로정신대’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일본에 도착해서는 공장에서 비행기 부품 깎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일이 너무나 힘들었다. 무엇보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도망을 쳤지만 곧 잡혔고, 그 자리에서 강간당한 후 위안소로 끌려갔다. 나무 아래, 그날의 소녀가 된 그녀는 그림 속에 차마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지 못했다.
3.
올해 가을, 나눔의 집을 다시 한 번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경기도 퇴촌으로 가는 방법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우연히 일본 아사히신문에 난 기사를 읽었다. “위안소에 갔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처자식에게도 폐가 될까 봐”라는 제목을 클릭하자 기사와 사진이 한 장이 나왔다. 오사카에 산다는 90대 남자. 신변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사진에서 얼굴은 잘려 나갔고, 두 손만 보였다. 노인의 집에서 촬영한 것인지 손을 올린 상 위에는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검버섯이 핀, 가지런히 포갠 손에서 노인의 복잡한 마음이 읽혔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1941년 만주의 국경수비대에 배속됐다. (중략) 매달 한 번 외출이 허용되면 위안소에 갔다. 건물의 특징상 ‘하얀 벽의 집’으로 불렸다. 언제나 순서를 기다리는 젊은 병사가 줄 서 있었다. 상대해주는 여성은 조선인이었다. 시간은 10분 정도. 마음의 평온함도 찾지 못한 채 사무적으로 마친 뒤에 밖으로 나왔다. 위안부와 일본어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러나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나 자신도 매일 죽음을 각오하며 살았다. 그녀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우리들도 소모품, 자유를 빼앗긴 새장 속의 새들끼리의, 동병상련과 같은 마음이었다.”
노인의 마음속에 숨겨둔 기억을 끄집어낸 것은 “위안부가 필요했다는 점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고 말한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의 발언이었다. 연일 위안부 문제가 보도되면서 마치 전쟁을 보고 온 것처럼 가볍게 말하는 그에게 분개했고, 위안부의 잔혹한 인생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고백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말한다 한들 세상은 자신들을 질책할 것이며 처와 자식, 손주에게도 폐를 끼치게 될 것이라는 말로 기사는 끝이 났다.
며칠 뒤 나눔의 집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찾아갔다. 강변역 앞에서 1113-1번 버스를 타고 50분 남짓, 인터넷에서 검색한 대로 파라다이스 아파트 정거장에서 내린 후 택시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친절했다. 어디서 무얼 타고 왔는지, 왜 이 먼 곳까지 혼자 왔느냐고 연거푸 묻더니 사무실부터 들려 관람료를 내라고, 또 돌아갈 때는 요금이 비싼 택시 대신 버스를 타라고 자세히 일러주었다. 사무실 앞에서 문을 열어야 할지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안에서 기척을 느꼈는지 금세 사람이 나와 역사관이 있는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사무실 오른편에는 이미 세상을 뜬 위안부들의 추모비가 서 있었다. 돌 위에 쓰인 글을 하나씩 읽고 난 후 역사관으로 향했다.
유리문을 열자 좁은 입구에 걸린 큼지막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모아 쥔 손 위에는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두어야 한다.”라는 문장이 보였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위안부였던 사실을 알린 김학순의 말. 커다란 사진의 주인공은 두 손이었다. 손에 패인 주름에 시선이 머무르자 며칠 전 아사히신문에서 본 일본인 노인의 손이 떠올랐다. 어느새 그가 나타났고, 나와 함께 유리문을 닫았다. 실내로 들어가자마자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가 보였다. 지하라고 해도 노르스름한 조명등이 켜져 있어 어둡지 않았지만, 그 앞에서 노인이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다리가 불편한 노인은 난간을 잡고 다소 가파른 열네 개의 층계를 조심스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층계 아래에는 구부러진 좁은 통로가 펼쳐졌고, 오른편 벽에 넉 장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흰 저고리, 까만 치마의 소녀가 숲 속에 앉아 홀로 버섯을 캐는데(김순덕, <버섯 공출>), 누군가에게 팔이 잡힌 소녀는 화면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끌려간다. (김순덕, <끌려감>) 너무 놀라 벌어진 입에서 외마디조차 나오지 못하고, 눈 주위로 번져 나가는 붉은 물감이 그녀가 얼마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새 커다란 배에 오른 소녀들의 모습. 역시 흰 저고리, 검은 치마를 입은 소녀들이 삼삼오오 갑판에 서 있다(이용녀, <끌려가는 조선 처녀>). 거대한 바다에 가로막힌 소녀들은 도망칠 곳이 없다. 이미 결말을 아는 나는 어두워진 마음으로 마지막 그림 앞에 섰다. 그보다 더 어두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네 번째 그림은 아무 그림도 걸리지 않은, 반질반질한 검은 돌이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를 그릴 수 없는 마음. 그 속을 짐작하면서 앞에 서 있는데, 텅 빈 그림 속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마주 잡은 흰 손이었다. 깜짝 놀라 손을 풀고 나서야 돌에 비친 내 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다가가서 방금 전에 본 김학순의 손처럼 맞잡아 보는데 그 위에 검버섯이 난 노인의 손이 겹쳐졌다.
그림을 뒤로하고 조그만 유리 진열장 앞으로 다가갔다. ‘삿쿠’라고 쓰인 물건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노인이 말을 걸었다.
“군인들은 삿쿠(콘돔)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성병에 걸렸다. 술에 취한 군인들이 위안부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죽기 전에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아마도 나는 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식에게 그 사실을 들킬까 봐 두렵다.”
표정이 어두워진 노인으로부터 몸을 돌리자 나무 벽에 달린 작은 유리창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지나칠 뻔했지만 벽 사이로 난 좁은 복도 끝에 열린 문이 보였다. 처음에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지만 노인은 금세 눈치를 챈 듯했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노인을 뒤로하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컴컴한 작은 방 안에는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당시의 위안소를 본따 만든 곳이었다. 침대 위에는 이불 한 장이 흐트러져 있고, 한 귀퉁이에는 작은 메모지 몇 장이 보였다. 봉사활동을 하려고 온 중학생이 쓴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 정말 힘들었겠어요. 저라도 울겠어요”로 시작하는 쪽지와 함께 일본어로 쓴 편지도 있었다. 내가 한 장 한 장 다 읽을 때까지 노인은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문 밖에 서 있었다. 방에서 나오려는데 작은 창이 하나 더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창을 가린 흰 천을 들춰보니 바로 앞에 벽이 서 있었다. 위안소 모형 중에서 그때의 상황을 가장 제대로 재현하고 있는 벽이었다. 군인들이 작전을 끝내고 돌아온다는 소문이 돌면 무서워 떨면서도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었던, 자궁내막염과 방광염 등의 후유증을 남긴, 위안부의 삶이 그 안에 갇혀 있었다.
나눔의집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입구계단 역사관 내부 위안소 모형 |
위안소 모형에서 나오자 다시 층계가 보였다. 계단을 다 오르자 지하 특유의 싸늘한 기운이 사라지고 따뜻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알록달록한 물체들. 이미 세상을 뜬 위안부의 영혼을 위무하는 윤석남의 여인상과 촛불, 그 주위에는 일본인 관람객들이 사죄의 의미로 걸어놓은 종이학들이 가득했다. “JR(동일본철도) 여성협의회, 진실을 후배들에게 전해줍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하루라도 빠른 해결책”을 기원하는 글귀가 그 위에 쓰여 있었다. 벽 한 모퉁이에 여고 후배들이 붙여둔 노란 종이가 보여 까치발로 서서 기웃거리는 사이, 옆에서 노인은 초에 불을 붙이고 고개를 숙였다.
한쪽 벽면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네덜란드, 필리핀 등의 여성들의 증언이 걸려 있었다. 그녀들의 얼굴이 찍힌 사진을 보면서 “생리도 시작하지 않은 나이”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그네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전시장 한켠에는 “낙원 같은 곳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위안부 생활을 시작하게 된 배봉기가 쓰던 그릇도 진열되어 있었다. 해방 후에 고향 사람을 볼 낯이 없다며 오키나와에 남은 그녀는 늘 살림살이를 윤이 나게 닦아두고, 머리에는 항상 수건을 쓰고 지냈다고 한다. 위안부 생활에서 얻은 결벽증 때문이었다.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사회와의 접촉도 끊고 살던 그녀가 겨우 마음을 연 것은 말년이 되어서였다. 진열장 앞에는 그녀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헤드폰이 걸려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오게 된 경위 등에 대한 질문이 오고 갔다. 그녀는 오랜 타지 생활에서 길이 잘 든 일본어로 답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던 일본인 여성이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그녀는 지명을 댄다. 정확한 일본어 발음에서 빠져나온, 전혀 다른 억양과 리듬의 신례원. “신. 례. 원”이라고 몇 번이고 꼭꼭 눌러 발음하는 그녀의 마음이 잠시 그곳으로 다녀왔다는 것을 안다.
또다시 우리 앞에 좁은 계단이 놓여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그림이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올라가자 또 다른 전시 공간이 나왔다. 이미 세상을 뜬 할머니들이 썼던 신발과 시계, 그림도구들이 유리장 안에 진열되어 있었다. 노인은 유품뿐만 아니라 고개를 들어 그림 한 점 한 점을 유심히 보았다. 강덕경의 <빼앗긴 순정> 앞에 선 노인은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비틀거렸다. 수많은 뿌리가 달린 나무 남자를 가리키며, 그 다리 중 두 개가 자신의 것이라고 했다.
노인은 친구와 술을 먹다가 자신이 위안소에 갔던 사실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싶다는 속내를 밝히자 그들은 하나같이 말렸다. 그 역시 전쟁이 시켜서 한 짓이었을 뿐, 어쩔 수 없었다며 망각하고자 노력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죄를 인정한 자는 평생을 죄의식 속에서 괴롭게 살지 않는가. 자신은 쉬운 길을 택했고 아직까지는 성공했노라며 나를 바라봤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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