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규율 권력에서 환경 개입 권력으로
우리는 1장에서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사회체의 구석구석까지 경쟁 원리를 퍼뜨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경영의 주체, 즉 시장 원리를 내면화한 주체를 형성하는 통치라고 정의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규율 권력 개념을 제기하고, 그 특성을 개개인의 신체에 대해 작동함으로써 규범을 내면화시키고,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감시할 수 있는 자기 감시의 주체, 즉 규율적 주체를 형성하는 권력이라고 정식화했다. 18세기에 등장했던 규율 권력이 20세기에서 복지국가적 통치와 밀접하게 결합되는 형태로 규율적 주체를 생산했다고 한다면, 복지국가의 ‘종언’과 더불어 등장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에서 권력은 어떤 기법에 기초해 행사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물음에서 출발해, 우선 푸코가 『생명 정치의 탄생』에서 다뤘던, 범죄와 그 처벌을 둘러싼 미국 신자유주의의 이론들을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토대로 좀 더 구체적으로 밀턴 프리드먼이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제시했던 교육을 둘러싼 신자유주의 이론을 다룬다. 범죄와 교육이라는 문제는 특히 규율 권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주제에 관한 신자유주의 이론을 분석함으로써 규율 권력과 신자유주의 권력의 차이를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석으로부터 명확해지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권력이 규율 권력과는 아주 상이한 ‘환경 개입 권력’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장에서 『생명 정치의 탄생』에 기초해 범죄와 그 처벌에 관한 신자유주의 이론을 분석하고, 이어서 그 분석을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에서의 교육 바우처 제도 논의와 접합함으로써 ‘환경 개입 분석’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 특유의 기법을 분명히 한다.
1. 환경의 설계
푸코는 『생명 정치의 탄생』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 즉 시카고학파의 이론들을 분석하면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특성을 분명히 한다. 거기서 그가 다루는 것은 게리 베커, 조지 스티글러 등 시카고학파의 이론, 즉 범죄와 그 처벌에 관한 이론이다. 이들 이론의 특징은, 단적으로 말하면 경제학적 의미에서의 호모 이코노미쿠스, 즉 이득 계산의 주체라는 점에 입각해 범죄를 생각한다는 점이다.
베커나 스티글러 등 신자유주의자는 범죄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푸코는 베커의 논고 “범죄와 형벌: 경제적 접근법”에 의거해 이들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개인으로 하여금 형벌에 처해질 수 있는 위험을 야기하는 모든 행동을 범죄라고 부른다.” 이 정의는 얼핏 보기에 기묘하게 비쳐질지도 모른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우선 첫째, 이 정의에서 범죄는 그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규정되는 게 아니라, 범죄를 행하는 행위 주체의 측면에서 정의된다. 즉, 이 경우 ‘범죄’에는 교통 위반 같은 경범죄부터 살인 같은 중범죄에 이르는 것들이 모두 포함되며, 이것들 사이에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둘째, 이 정의에서 범죄는 개인이 형벌을 부과 받을 가능성, 즉 리스크와의 관계에서 규정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경우 범죄자란 어떤 행위로부터 어떤 이득을 기대하는 동시에 어떤 리스크를 예상하면서 그 행위를 저지를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행위 주체이며, 이것은 일반적인 호모 이코노미쿠스, 즉 경제 주체의 정의에 다름 아니다. 바꿔 말하면, 여기서 범죄자란 단순한 경제 주체에 다름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될 수 있는 일반적 행위 주체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벌 체계가 몰두해야 하는 것은 더는 범죄와 범죄자로 이중화된 현실이 아니다. 형벌 체계가 몰두해야 하는 것은 하나의 행동conduite, 일련의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행위자에게 이익이 기대되는 동시에 특수한 위험을 야기하는 행동action, 즉 경제적 손실의 위험뿐만 아니라 형벌의 위험, 더욱이 형벌 체계에 의해 부과되는 경제적 손실의 위험을 수반하는 행동을 산출한다. 따라서 형벌 체계 자체가 관여하게 되는 것은 범죄자가 아니라 그런 유형의 행동을 산출하는 사람들이다. 달리 말하면 형벌 체계는 범죄의 공급에 대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형벌 체계가 대상으로 삼는 것은 범죄 성향을 지닌 ‘비정상인들’로서의 범죄자와 범죄 사이의 이중성이 아니라 경제 주체와 같은 일반적 행위자에 의한 일련의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형벌 체계가 대처하는 것은 일반적 행위 주체에 의한, 경제학적 의미에서 범죄의 ‘공급’인 것이다.
그렇다면 범죄에 관한 이런 정의에서 처벌은 어떻게 정의될까? 푸코는 신자유주의자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처벌이란 “어떤 종류의 행동에 의해서 초래된 부정적 외부성[외부 효과]을 제한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다. ‘외부성’이란 피구가 후생 경제학 분야에서 제기했던 개념으로, 어떤 행위자의 행위가 제3자에게 초래하는 영향을 가리킨다. “부정적 외부성”이란 어떤 행위가 제3자에게 초래하는 부정적 영향이며, 예를 들어 생산 활동에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공해가 이에 해당한다. 범죄도 물론, 그것이 범죄 주체에 의해 제3자에게 부정적 영향을 초래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 외부성에 상당한다. 그런 부정적 외부성을 제한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자는 두 가지 수단을 구별한다. 하나는 금지의 체계로서의 법률이며, 다른 하나는 법률의 집행enforcement이다. 법률의 집행이란 단순히 법률의 적용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법률의 적용을 위해 활용해야만 하는 일련의 도구다. 집행의 예로, 각 범죄에 대해 정해진 형벌의 양, 범죄 조사 기구의 활동이나 능력, 재판의 신속성, 재판관의 엄격함, 처벌의 효력 등이 거론된다. 처벌 기구는 이런 법률의 집행을 통해 온갖 범죄의 공급을 ‘부정적 수요’, 즉 범죄의 억제와 대립시킨다. 그러나 법률의 집행은 제한 없이 확대 가능한 게 아니다. 그 이유를 푸코는 두 가지 거론한다. 첫째로, 범죄의 공급은 무제한적으로 탄력적인 게 아니다. 즉, 집행을 강화하면, 범죄를 일정 정도까지 감소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집행을 제한 없이 강화하더라도, 결코 범죄를 0으로 할 수는 없다. 둘째로, 집행에는 비용이 든다. 이 점에 관해 스티글러는 “법률의 최적 집행”이라는 논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가정하고 싶은 것은, 집행의 목표는 사회가 스스로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리 정해진 (혹은 금지된) 행동의 규칙을 어느 단계까지 준수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가 규칙의 ‘완전한’ 집행을 포기해야 할 어떤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그건 집행에는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법률 집행에는 비용이 드는 까닭에, 집행에 드는 비용은 그것이 제한해야 할 범죄성의 비용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사회는 법률의 ‘완전한’ 집행을 단념해야만 한다. 바꿔 말하면, 형벌 정책은 범죄의 완전한 해소라는 목표를 내던질 필요가 있다. 이 점에 관해 푸코는 벤담식의 규율 권력 모델과 비교해 이렇게 말한다.
벤담이 꿈꿨던 형벌 법규 및 형벌 메커니즘 전체는 결국, 설령 그것이 현실에서는 무리일지라도 범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관념이 존재했다. 판옵티콘이라는 관념, 투명성이라는 관념, 개인들 각자에게 던져지는 시선이라는 관념, 형벌을 충분히 세세하게 가감하면 개인들 각자가 계산·내심·경제학적 계산을 함으로써 만일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로 인해 받을 형벌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범죄를 일으키지 않아야겠다고 말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관념. 이런 식으로 범죄의 전반적 해소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 18세기 개혁가들의 머릿속에 있었던 합리성의 원리, 형벌 계산의 조직화 원리였다. 이에 반해 여기서[신자유주의]는 거꾸로, 형벌 제도가 범죄의 그런 일소, 철저한 제거라는 목표를 완전히 포기해 버릴 필요가 있다. 형벌 정책은 범죄 시장에서 범죄의 공급에 대한 단순한 개입을 그 조정 원리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의 공급을 부정적 수요를 통해서만 제한하는 개입이며, 이 부정적 수요에 드는 비용은 당연히 공급을 제한해야 하는 범죄성의 비용을 결코 초과해서는 안 된다. …… 따라서 좋은 형벌 정책은 결코 범죄의 근절을 겨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범죄의 공급곡선과 음(-)의 수요곡선 사이의 균형을 겨냥한다. 더 나아가, 사회는 순응의 무한정성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는 철저한 규율 체계를 따를 필요가 전혀 없다. 한 사회에 일정 비율의 불법행위가 있어도 별 문제가 아니며, 불법행위의 비율을 무한정 감소시키려 한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형벌 정책의 본질적 물음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 물음이란, 범죄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느냐 또는 어떤 행동을 범죄로 봐야 하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범죄로서 무엇을 용인해야 하느냐, 더 나아가 용인하지 않는 것을 용인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규율 권력은 판옵티콘으로 대표되는 감시 장치와 개개인에 대응하는 자세한 처벌에 의해 개개인의 내면에 대해 작동하여 개개인에게 규범을 내면화시키고 범죄를 0으로까지 해소하고자 했다. 그에 반해, 신자유주의 권력은 범죄를 0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비용과 그것을 제한하는 집행 비용의 균형을 목표로 한다. 즉, 신자유주의에서 권력은 철저한 규율 체계를 통해 개개인에게 규범을 내면화시키고 ‘순종적인 신체’를 형성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범죄의 공급과 그것을 억제하는 집행, 즉 부정적[음(-)의] 수요와의 균형을 확보해야 하며, 범죄 시장이라는 ‘환경’에 대해 작동을 가하는 것이다.
이런 형벌 정책의 예로 푸코는 마약 시장의 문제를 다룬다. 1970년대 전반까지 마약에 대한 정책은 단적으로 마약 공급을 감소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때문에 [마약] 정제 조직망과 판매 조직망을 해체하는 것이 목표로 간주되었다. 이 정책의 결과는 어땠을까? 첫째, 소수의 정제·판매망에 의한 독점 또는 과점이 강화되고, 마약 단가가 대폭 상승했다. 둘째, 마약 중독자에 의한 범죄가 증대했다. 심각한 중독자에게 마약 수요는 비탄력적이며, 그들은 범죄를 일으켜서라도 고가의 마약을 손에 넣고자 했다. 이 때문에 마약의 공급 감소를 목표로 한 정책은 큰 실패였으며, 효과가 없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어덜리와 무어는 신자유주의적 접근법에 기반을 두고 이와는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어덜리는 1974년에 집행의 대상, 즉 단속 대상을 마약상이 아니라 그 소비자로 전환하자고, [공급 측면이 아니라] 수요 측면에 영향을 미치자고, 마약 가격을 낮추자고 제안했다. 또 무어는 1973년에 시장에 [신규로] 참여할 때의 가격(마약의 새로운 소비자가 지불할 가격)과 상습적 마약 소비자가 지불할 가격을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그 분석을 전개한다. 무어에 따르면, 마약 판매상들은 그 수요가 탄력적인 새로운 소비자에 대해서는 낮은 가격을 적용하고 이들이 상습적 소비자가 되어 그 수요가 비탄력적으로 되면 가격을 대폭 올린다. 따라서 집행 정책이 해야 할 것은 새로운 소비자를 위한 가격을 할 수 있는 한 높은 가격을 책정함으로써 새로운 소비자의 증대를 억제하고, 동시에 상습적 소비자에 대해서는 이들이 높은 가격의 마약을 구입하려고 범죄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낮은 가격으로 마약을 공급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1970년대 후반의 포드 정권, 카터 정권의 관용주의적 마약 정책(마약의 위험성을 그래프화해, 위험성이 더 높은 마약의 공급과 수요의 감소를 목표로 하며, 위험성이 낮은 마약에 대해서는 관용적으로 대처하는 정책)과 매우 가깝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범죄를 0으로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범죄 시장이라는 환경에 작동을 가함으로써 그 최적화를 꾀하고자 한다. 이런 통치 기법의 변화를 푸코는 이렇게 요약한다.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철저하게 규율적인 사회, 즉 그 내부에서 법률적 망이 개인들을 속박하면서 이른바 규범적 메커니즘 같은 것에 의해 내부로 중계되고 연장되는 사회의 이상이나 기획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일반적인 규범화의 메커니즘과 규범화 불가능한 것의 배제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는 사회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지평에 있는 것은 거꾸로, 다음과 같은 사회의 이미지, 관념, 테마, 프로그램이다. 즉, 차이의 체계가 최적화되는 사회, 그 장이 요동치는 과정에 자유방임되어 있는 사회, 개인들과 소수자들의 실천에 대해 관용을 보이는 사회, 게임의 참가자들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에 대해 작용하는 사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을 내적으로 복종화하는 유형의 개입이 아니라 환경milieu 유형의 개입이 행해지는 사회인 것이다.
규율 권력은 사회 곳곳에 규율화의 장치들(학교, 공장, 병원, 감옥 등)을 배치하고 개개인에게 규범을 내면화시킴으로써 그들을 ‘내적으로 복종화’하고자 했다. 이에 반해 신자유주의적 권력은 개개인의 내면에 대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개인이 놓여 있는 ‘환경’ 또는 그 게임의 규칙에 작동을 가함으로써 환경을 균형화·최적화하고자 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개개인에게 직접 개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환경에 개입해 그 게임의 규칙을 설계함으로써 환경의 최적화를 꾀하고자 하는 권력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유형의 권력을 규율 권력에 반해 ‘환경 개입 권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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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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