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를 대신하여
최초의 아름다움,
최초의 윤리에 대하여
제가 어렸을 땐 어린이용 세계 명작을 전집으로 사는 것이 꽤 유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파는 영업사원이 있었고 그분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마치 지금 보험 상품을 팔듯이 책을 팔았던 것 같습니다. 거실에 앉아서 책 파는 영업사원이랑 엄마가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영업사원은 좀 뚱뚱했고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고, 더운지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었습니다. 계몽사란 출판사가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금성출판사도 있었던 것 같고요. 저희 집에도 그런 전집이 적어도 두 세트는 있었습니다. 책장은 거실에 있었는데 저희 부모님은 어느 정도는 책을 인테리어 용품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책은 책장에서 수년간 모은 술병이나 수석이나 돌하르방 같은, 당시만 해도 이색적인 기념품들과 모조 도자기들 옆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저희 부모님이 책을 인테리어 용품으로만 생각한 것은 아니고 아주 귀하게도 생각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빠도 책을 전집으로 사기 시작했는데 그 책들은 번호가 뒤섞이는 법 한 번 없이 늘 소중하게 관리되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어린이 책에서 어른 책으로 손길을 뻗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오랫동안 책보다는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던 「말괄량이 삐삐」나 「아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삐삐가 좋았습니다. 삐삐 같은 여자애가 있다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해적의 딸인 것도 맘에 들고, 부모와 같이 살지 않는 것도 맘에 들고, 친구가 있는 것도 좋아 보이고, 달걀 프라이를 엄청나게 부쳐 먹는 것도 좋고, 집 안 가득 황금을 보관하고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다만 신발과 헤어스타일, 주근깨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톰은 로봇이긴 한데 슬픔을 아는 로봇 같아 보였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아톰이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아톰이 “로봇인 내가 눈물을 흘리는구나!” 같은 대사를 했던 것 같은데 저도 괜히 같이 슬퍼졌던 기억이 납니다.
책 읽기에 흥미를 느낀 최초의 계기는 별다른 게 없습니다. 그 일은 어느 겨울밤에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그만 이 닦고 불 끄고 자야지!”란 말을 들은 뒤에 부모님 방에 불이 꺼졌는데 너무 심심한 겁니다. 당시에 낮에는 주로 종이 인형 놀이를 했는데,(학교 앞 문방구에서 종이 인형을 팔았는데 그걸 오려서 캐릭터 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대개 인기 ‘짱’인 여학생이 아주 예쁜 옷을 입고 파티에 가서 또 인기를 끄는 내용이나, 평범한 여학생이 밤에는 공주로 변신한다는 내용 같은 것을 지어내서 놀았습니다.) 겨울이니까 엄마가 명주솜 이불을 해줬습니다. 아주 무거운 이불이었는데 그 안에서 몸을 웅크리면 둥글게 동굴 모양이 만들어집니다. 나만의 ‘알라딘의 동굴’이죠. 처음엔 그 안에서 손전등을 켜고 인형 놀이를 했는데 그것도 슬슬 지겨워지자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무서운 책이나 액션 스릴러를 읽을 때 겨울밤의 어둠은 더욱 더 효과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이야말로 이불 동굴에서 제가 처음 만난 공포 소설이었습니다. 무덤을 파내 시체의 피부나 눈을 꺼내서 그것을 누더기처럼 덕지덕지 기운 사람의 몸이라니요. 정말로 무서웠습니다. 『셜록 홈즈』도 좋아했습니다. 가난한 소년들이 “호외요!” 하고 신문을 뿌릴 때 그 소년들은 얼마나 중요해 보이던가요? 『셜록 홈즈』를 읽으면서 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도 상상해보고 너도밤나무도 상상해보고 눈에 찍힌 발자국도 상상해보면서 그렇게 밤은 깊어갔던 것 같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셜록 홈즈 대신 공룡을 등장시킨 소설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책은 반은 어른이고 반은 아이인 사람들을 위해 썼다고 아서 코넌 도일이 밝히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반은 인간, 반은 물고기인 인어 공주를 믿느냐 마느냐가 심각한 문제였던 것처럼, 반은 어른이고 반은 아이인 것도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상체는 어른, 하체는 아이 이런 식으로요.
이불 동굴에서 발견한 책의 즐거움
그런데 문제는 한밤중에 책을 다 읽어버렸을 때면, 꼭 한 권 더 읽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는 겁니다. 한겨울 밤이고 거실까지 이어지는 복도는 차갑고 어둡고 책은 거실에 있고 책을 가지러 갈 용기가 나질 않는데 읽고는 싶고. 그럼 저는 옆방의 벽을 주먹으로 두드립니다. “오빠, 오빠, 대답하라.” 그럼 조금도 친절하지 않은 오빠는 짜증을 냅니다. 저는 대개 미끼를 던집니다. “오빠, 구슬 줄게.”, “오빠, 남겨놓은 빵 줄게.” 우리 오빠는 친절하지는 않았어도 귀는 얇았기 때문에 제 방에 와서 손전등을 들고 저를 거실에 데려다줬습니다. 불친절한 오빠는 다행히 의리는 있었습니다. 제가 책을 고를 때 옆에 서서 책의 제목들에 손전등을 비춰줬습니다. 책의 제목에 내리 꽂히던 손전등의, 레몬 껍질 같은 강렬한 노란 불빛은 지금까지도 제게 하나의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책의 제목만 환하고 거실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범행을 저지르는 것처럼 침을 삼키는 것도 조심합니다. 그럴 때 불빛 아래서 도드라져 보이는 제목들은 너무나 유혹적이어서 저는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읽었던 책의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오면 막연하게 슬퍼지기도 했습니다. 책 내용들이 기억날 때였죠. 『플랜더스의 개』나 『안데르센 동화집』 같은 책이 그런 느낌을 줬습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추운 밤에 성냥불을 켜죠. 그 불빛 아래 크리스마스트리가 나오고 칠면조구이가 나오죠. 저는 칠면조구이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데도 군침을 삼킵니다. 제가 일평생 먹고 싶었던 게 바로 칠면조구이였던 것만 같습니다. 저는 성냥팔이 소녀와 환상을 나누어 갖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의 동화에 빚진 게 많습니다. 최초의 아름다움, 최초의 윤리 같은 거죠. 엄지 공주가 누워 자던 호두 껍질 침대, 장미 이불, 제비꽃 담요, 그리고 또 벌거벗은 임금님이 입었던 거미줄로 짠 옷감. 이런 것은 제 누추한 머리로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었죠. 『인어 공주』를 읽지 않았다면 목숨을 거는 사랑에 대해 몰랐을 테고 『미운 오리 새끼』를 읽지 않았다면 고생이 끝난 후에 찾아오는 기쁨에 대해서 한참 뒤에 알았겠지요. 저는 나중에 커서 한동안 별명이 겔다였습니다. 친구들이 ‘겔다병’을 앓는다고들 놀렸습니다. 겔다는 안데르센의 동화 『겨울 여왕』에서 친구를 구하러 세상 끝까지 여행을 떠난 용감한 소녀입니다. 제가 만약 『겨울 여왕』을 읽지 않았다면 친구를 구하러 세상 끝까지 떠나는 여행에 대해 상상이나 해볼 수 있었겠습니까?
톰 소여를 닮았던 서울내기 소년
옆으로 이야기가 새버렸네요. 하여간 그렇게 손전등으로 비춰서 읽은 책 중에 『톰 소여의 모험』이 있었어요. 톰과 허클베리, 참 좋은 한 쌍이죠. 『톰 소여의 모험』에서는 한 장면을 특별히 좋아했습니다. 톰에겐 짝사랑하던 예쁜이 베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베키가 쉬는 시간에 선생님의 물건을 만졌다가 깨트리고 맙니다. 톰은 항상 베키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소녀의 범행을 압니다. 교실에 돌아온 선생님은 누가 그랬냐고 노발대발하죠. 베키의 얼굴은 빨개졌거나 아니면 하얗게 질렸겠지요. 그런데 그때 톰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베키의 죄를 뒤집어씁니다. 톰은 선생님에게 실컷 얻어맞습니다. 물론 베키가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둘이 연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베키의 무정함이 괘씸했고 반대로 톰에게는 한없이 관대해졌습니다. 톰을 알고부터 내 옆에 있는 남자애들이 더없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고자질로 날밤 새우는 녀석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책 덕분에 우리 반 남자들과는 다른 남자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엔 없지만 세상 어딘가에 나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날 남자가 있으리란 것, 그것 하나만은 희망으로 남겨뒀습니다.
저는 황순원의 『소나기』에서처럼 얼굴이 하얀 서울내기가 전학 오기를 고대했습니다. 물론 여학생 말고 남학생으로요. 그런데 놀랍게도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의 섭리는 위대하십니다. 얼굴이 하얗고, 손톱 밑에 때가 끼지 않은 남학생이 전학을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애는 전학 온 날 자기소개를 할 때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걸 알자 저는 좀 더 책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솜이불을 고집해서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저희는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나름대로는 은밀하게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저에게 『삼총사』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책을 빌려줬습니다. 물론 그 책들은 우리 집에도 있었지만 저는 기왕이면 내 남자로 내심 점찍어둔 남자의 손길이 묻은 책으로 읽고 싶었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 집엔 책이 없는 척했습니다.
그는 내게 정말 톰이 되어주었습니다. 운동장에서 저를 기다리고 집까지 같이 걸어가고 신발주머니를 들어주고 집에서 사과를 가져다주고 대문 앞에서 휘파람을 불며 왔다 갔다 하고.(톰처럼 물구나무를 서지는 않았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가까워지던 어느 날, 학부모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아이의 엄마와 우리 엄마는 처음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둘은 사실 처음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이지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두 사람은 고등학교 친구였습니다……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의 원수였던 것입니다. 한 사람은 공부를 아주 못하는 부잣집 딸이었고 한 사람은 공부를 아주 잘하는 가난한 집 딸로서 둘은 끝없이 각자의 약점을 폭로하며 지루한 학창 시절을 견뎌나갔습니다. 두 사람에겐 상대방을 비난하는 일이 낙이자 프라이드 유지 비법이었습니다. 여고를 졸업할 무렵 두 사람의 인생 목표는 “내가 적어도 너보다는 잘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십수 년이 흘러서 아이들의 교실에서 조우한 것입니다. 첫눈에 두 사람은 둘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것을, 그러니까 각자의 인생 목표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두 사람의 인생은 갑자기 바빠졌습니다. 다시 인생 목표를 가동했으니까요. 두 사람은 놀라운 활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제가 집에서 겪은 고초는 필설로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집 밖으로 나갈 때마다 “어딜 가냐?”, “누굴 만나냐?”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학교에선 반드시 일등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우리 엄마의 인생 목표를 위해서 꼭 일등을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제가 코피를 쏟으면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 시절에 우리 엄마는 나에게 온갖 과외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전 과목 과외에, 미술 학원에, 피아노 학원에……. 저는 그 와중에도 은밀히 그를 만났습니다. 은밀히 만나는 것의 짜릿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신랑은 도둑처럼 온다.’는 구절이 혹시 있던가요? 그는 늘 도둑처럼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저의 톰이 휘파람도 불지 않고 저를 뒷산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날따라 소나무들마저 기상을 잃고 추레해 보였습니다. 그 직전 시험에서 저는 그를 앞질렀습니다. 앞지르고도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가 집에 가서 당할 고초를 생각하니 슬펐습니다. 저는 밤새 더더욱 하얘진 그의 얼굴을 보고 직감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별이 다가왔구나’. 그는 슬퍼 보였고 별 말 없이 꽃무늬 포장지에 싼 선물을 건넸습니다. 이별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바스락대는 촉감이 좋았습니다. 그는 제가 선물을 받아들자마자 손등으로 눈물을 쓱 훔치며 후다닥 산 아래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저는 영화에서처럼 “안 돼.” 하며 쫓아가지 않았습니다. 울지도 않았습니다. 일단 그 자리에 서서 선물 포장지부터 뜯어보았습니다. 선물은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그게 뭐였을까요? 선물은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란 분이 지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책이 싫어졌습니다. ‘쳇, 책 선물이라니!’ 그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책도 싫어졌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서 몇 날 며칠 책을 팽개쳐두고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이불 동굴에서 그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아, 가문의 반대로 헤어져야만 했던 남녀의 이야기. 그건 이탈리아 베로나의 일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날도, 그다음 날도 못 다 이룬 사랑을 위해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덕에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친구에게 진정으로 감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수세기 전 책 속의 일이 바로 이 땅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챈 걸까요? 책이 우리의 이야기란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는 어떻게 우리의 짧고 슬픈 사랑을 위대한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을 생각을 했을까요?
어린 시절의 독서는 영원히 살아남는다
어린 시절에는 책을 대개 요약본으로 읽기 때문에 그 내용의 완전함 때문에 그 책이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닐 겁니다. 완전한 이해나 깨달음 때문도 아닐 겁니다. 아마 최초의 그 무엇으로 어떤 원형을 이루겠지요. 저는 어린 시절의 독서는 ‘공감’이나 ‘상상력’, ‘호기심’과 관련된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독서가 그것들의 원형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공감 능력이란 뭘까요?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놓는 겁니다. 나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겁니다. 우리는 최신 상품 덕택에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를 접하게 되었지만 그 대신 귀중한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접속하는 능력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어떤 것은 이해하고 어떤 것은 지루해합니다. 그렇지만 문장의 표현이 어떻더라도, 주인공이 누구더라도 그 안에는 인간적인 호소가 담겨 있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어려서는 어른들보다 그런 일들을 더 잘해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 어른들도 책을 읽을 때는 다시 어린이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다시 귀를 쫑긋하면 좋겠습니다. ‘책 따위야 남이 지어낸 이야기인데.’ 하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선물해준 제 친구를 몇 년 전 제 책 『삶을 바꾸는 책 읽기』를 낼 무렵 오랜만에 떠올려봤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친구가 제 최초의 책 스승이었던 것 같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읽었지만 아직도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책을 남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한 순진하고 착한, (그래서 슬퍼진) 얼굴이 하얀 남학생이 얼마나 훌륭한 독자였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저도 모르는 새, 책을 읽는 기술을 배운 셈입니다.
마침 저는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동화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인어 공주도 아니고 그것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인어 공주』를 계속 읽겠습니다. 뭔가를 얻기 위해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니까요. 저는 빨간 망토를 입은 소녀는 아니지만 『빨간 망토』를 계속 읽을 것 같습니다. 세상엔 친절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내는 늑대가 우글거리니까요. 저는 아기 돼지는 아니지만 『아기 돼지 삼형제』를 읽겠습니다. 내 집을 부서뜨리거나 나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늑대가 우글거리니까요. 제가 드라큘라는 아니지만 『드라큘라』를 읽겠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혼이 없으면 남들의 피나 빨아먹고 살 수밖에 없단 걸 알려주니까요.
어린 시절의 독서는 우리에게 영원히 살아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최초의 나, 벌거벗은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알게 되었나, 어떻게 남의 마음을, 다른 세상을 상상하게 되었나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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