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깊은 마음의 생태학
1. 제도와 마음
환경 의식의 성장은 근래의 놀라운 일 중의 하나이다. 동강, 녹지와 공원, 상수도원 보호, 공기 오염, 유기 농업에 대한 관심, 생명 운동,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나라 환경운동가들의 강력한 발언이나 일반 국민의 공감들을 보면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놀라운 것은 그간의 우리 사는 모습이 전혀 그만한 여유를 남겨놓았을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홉스가 말한, 사람에 대해서 이리가 되는, “짐승스럽고 잔인하고 단명한 삶”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방식처럼 보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나중에 어찌 되든 우선 독약도 사양하지 않는 험한 삶의 방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 왔었다. 가차없는 생존 투쟁의 세상에서 인간에 대한 고려도 없는 마당에 자연을 돌아볼 여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지금도 우리가 그러한 삶을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본래의 사람다움을 회복하려는 안간힘들이 사회 도처에 되살아나고 커져가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극적인 충격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면서도 환경 운동이나 일반적인 환경 의식의 성장은 우리의 마음이 자연스러운 평형을 되찾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생각된다. 이러한 재생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특히 놀라운 것은 정부가 환경에 대한 고려를 그 정책에 도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환경 의식이 아직은 제도와 현실 속에 깊이 들어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또는 여러 면에서 제도는 겉도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이 맞는 것인지 모른다. 최근에 우리는 신문에서 북한산국립공원에 호텔과 카지노를 포함한 놀이터 조성계획이 건설부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었다는 보도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직원들이 공원 관련의 토지나 시설에 투자하여 그것을 재산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보도를 읽었다. 더 놀라운 것은 개발공사와 관련된 환경영향평가보고서가 건성으로 또는 허위로 작성되는 것이 통상적이라는 보도였다. 환경의 수호자이며 환경정책에 대한 감시자의 입장에 있어야 할 그리고 학문적 엄정성에 의하여 뒷받침됨으로써만 의미가 있을 일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놀랄 일이 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홉스적 질서인데 환경 분야에서만 예외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의 심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환경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제도적으로 불충분한 것이 많지만, 설사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의 마련이 없이는 모든 일은 공허한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깊은 의미의 마련이 무엇일까.
위에서 든 예들로 미루어 이 깊은 마련의 핵심에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된다. 일을 꼼꼼하게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병폐라는 것은 이미 우리 스스로 많이 비판적으로 이야기해 온 것이다. 환경 문제에 있어서도 설사 제도가 있고 법이 있고 규칙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현실 속에 지킬 마음이 없다면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게 된다. 성심과 성의가 없는 곳에 제도와 법이 기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른 마음가짐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마음을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태를 지나치게 간단히 보는 것이 될 것이다. 마음은 전체적인 현실의 일부이다. 그것은 현실과 더불어 돌아가면서 현실을 만들어내고 또 거꾸로 현실에 의하여 결정된다. 마음의 문제를 생각하려면 이 전체를 해명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른 균형 속에 놓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마음은 사람의 모든 일에서 일에 수반하는 보이지 않는 매체이다. 아무리 작은 일상적인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없이는 바르게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깊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환경 문제를 접근하는 “깊이의 생태학”이라는 말이 있지만 깊이라는 말은 이러한 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환경이라고 한 것은 물론 자연환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환경의 중요한 부분이 인위적인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다. 도시 또는도시적인 것은 오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환경이다. 또 자연이든 도시이든 물리적 환경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회환경이다. 물론 이것은 환경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자연과 도시의 물리적 환경을 사람이 사는 곳이 되게 하는 것이 사회적 조건이라고 할 때 사회환경은 비유 이상의 것이다. 이 사회환경을 주관적 관점에서 본 것이 문화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물론 이 마음이란 어느 개인의 마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는 환경(적어도 적절한 환경에는 그것을 관류하는 어떤 로고스나 도가 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서 보다 큰 현실의 깊은 구조에 대응한다. 깊은 구조의 마음은 사람에 의하여 완전히 포괄될 수 없는 것이면서 사회 또는 사람 사는 세계에 보이지 않는 구조로 존재한다. 이것이 파괴된 곳에 자연과 도시와 사회가 바르게 성립되지 아니하고 또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나 그 운영이 바를 수가 없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삶을 통합하는 자연과 사회 그리고 마음가짐의 깊이의 생태학이다.
2. 깊이의 생태학
깊이의 생태학이란 말을 최초로 쓴 것은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이쓰Arne Naess이다. 이것은 생태계와 환경의 위기에 처하여 그 대책으로서 경제학이나 과학기술의 대책이 불충분함을 지적하거나 그것을 배격하면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할필요가 있음을 주장하는 입장을 이름한다. 기술적 대처방안이 아니라 근본적인 태도의 전환을 통하여 삶의 방식 전부를 자연 착취적인 것으로부터 자연 친화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깊이의 생태학의 주장은 오늘의 환경문제의 긴박성을 생각할 때 지나치게 낭만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사람의 근본적 태도를 바꾸는 일은 장구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그것이 생활의 방식을 전적으로 바꾸는 것을 요구하는 것일 때 그것은 오늘의 삶을 180도 뒤집어놓는 내적외적 혁명을 요구하는 것인데 그것은 어떤 천재지변이 있기 전에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오늘의 환경파괴의 속도로 보아 천재지변은 별로 먼 미래의 일이 아닐는지 모른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과거의 역사를 백지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환경문제의 해결도 오랫동안의 과학기술문명의 심리적 물리적 누적을 참고하는 것이 아니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실 개입의 수단으로서의 과학기술적 해결을 외면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일이 될 것이다. 역사의 불가역성을 떠나서도 과학기술이 인간 이성의 높은 표현이며 이성의 보다 높은 발현이 문제해결의 길일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떼어버릴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깊이의 생태학의 낭만주의는 바로 어떠한 기술적인 해결에 있어서도 핵심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 없이는 다른 해결책들은 바르게 움직이지 않을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우리 사회의 문제가 말하는 것은 바른 정신이 없는 곳에 제도와 규정 기술행정적 조치들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자연에 대한 깊은 외경심이 없는 곳에서 많은 환경대책은 곧 작동하지 않는 녹슨 기계가 될 것이다. 깊이의 생태학은 역설적으로 환경문제의 기술주의적 해결에도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깊이의 생태학은 반기술적이라기보다 반산업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깊이의 생태학의 기본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환경에 관한 다른 접근방법을 살펴보아야 한다. 미국의 환경론자 빌 디볼과 조지 세션스는 그들의 저서 《깊이의 생태학Deep Ecology》에서 그들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다른 몇 개의 접근방법과 구분한다. 그들이 이러한 다른 방법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근본적인 대책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필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바른 정신 결국 깊이의 생태학이 가장 적절하게 지적하는 정신의 동기를 부여하는 일일 것이다. 그들이 논하는 여러 환경사상의 유파는 주로 미국 환경운동의 테두리에서 하는 이야기이나 일반적으로 환경을 생각할 때에 참고할 만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디볼과 세션스가 열거하는 바에 따르면 개혁환경주의는 일반적으로 산업경제의 환경 황폐화를 방지하고 개선하려는 정치운동의 하나이다.
그것은 정부나 국회의원이나 일반 대중을 상대로 환경의 여러 문제 광물자원이나 석유 또는 천연 가스 개발, 환경영향 평가보고서, 자연 경관 보호, 유독 폐기물, 공기 및 수자원 오염 그리고 표토 유실의 문제에 있어서 의견을 제시하여 환경 개선을 도모하고자 한다. 또 하나의 환경 운동의 방향은 대중 동원 전문가들의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다. 여기에 들어 있는 것은 선거운동이나 정치운동의 모델이다. 이것은 출판이나 각종 대중매체를 통하여 국민여론을 환기하고 대중교육을 시도하며 환경을 정치 이슈화하여 환경 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고자 한다. 또 하나의 환경운동은 과학의 가능성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는 흐름이다. 지구의 자원은 보존되어야 하고 지구는 사람과 자연을 포함하여 일체적인 존재라는 것이 강조된다. 이 일체성을 요약하여 표현하는 것이 《우주선지구Spaceship Earth》라는 이미지이다. 그 러나 궁극적으로 자연은 이 관점에서 인간의 발전을 위한 자료로 간주되는 것이라고 디볼과 세션스는 말한다. 인간의 과학적 발전(에너지 개발 정보기술의 발전은 인간으로 하여금 화성이나 우주공간으로 진출하게 할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지구의 자원은 중요한 자산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에 있어서 인간은 완전히 인공적인 환경을 조성하여 그것을 생활의 환경으로 삼을 수 있다고도 생각된다. 그러니까 이 관점은 자연을 존중하되 인간이 자연질서 안에서 겸허하게 삶을 추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환경에 대한 접근법은 환경의 문제를 경제적 합리성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시장에 호소하여 해결하려는 신자유주의의 정신태도에서 가장 환영받는 것이 이러한 접근이다. (이것은 그에 못지않게 신자유주의가 환영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입신을 도모하는 신지식인의 기발한 아이디어의 하나로 보인다.) 미국의 자원경제학자 존 베이든John Baden은 보존이 필요한 토지를 환경운동가들의 단체로 하여금 소유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토지이용방향을 결정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토지가 환경애호가들의 소유가 되면 그들은 그것을 자연보호의 관점에서 보존하는 것에 힘쓸 것이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서는 환경보호운동의 비용을 염출하기 위하여 그 토지의 일부를 자원개발에 이용하는 것이 허용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베이든은 말한다. 또 일정한 면적의 땅을 자연보호구역으로 하면 자원개발의 필요에 따라 이 면적을 유지하면서도 보호구역을 교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즉 한 보호구역을 보호해제하여 개발하면서 다른 지역에 그에 상당한 보호구역을 조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을 보호하면서 토지이용도 가능하게 하는 유연한 정책과 제도를 만드는 것인데 말하자면 시장경제의 자원배분의 유연성과 합리성을 환경대책에 도입하자는 것이 베이든의 아이디어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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