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작은 길을 내주자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편집부에 처음 출근한 날은 결코 유쾌하거나 재미있지 않았다. 문예면을 담당하는 거의 모든 편집자들과 여비서들은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내게 배정된 방은 너저분했다. 가구 상태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나를 맞아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해놓았을까 ?그러나 나는 그 모든 환경에 특별히 놀라지 않았다. 전혀 낙담하지도 않았고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런 노골적인 저항은 도리어 자극제가 되었다. 내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기분은 더 좋아졌다.
나는 당장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편지를 구술하고, 원고를 정리하고, 특히 앞으로 채용하려는 직원 몇 명과 전화 통화를 했다. 제일 먼저 통화한 사람은 귄터 블뢰커였다. 그다음에는 기고자로 초빙하고 싶은 작가들, 비평가들과 통화했다. 전임자가 남겨둔 많지 않은 원고들을 읽어보면서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원고가 장황하고 지루한 문체로 작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모로 보나 독자의 이해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평론가들의 글이 대부분이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새로운 기고자들을 구해야 했다. 그런데 어디에서 데려와야 할까 ?일단 유명 작가들부터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평론가로서 신문 문학면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독자에게 이름이 알려져 친숙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개성적인 문체가 문학면을 다채롭고 활기차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1년에 겨우 한두 번 서평을 쓰는 그들,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풋내기 평론가에 불과한 그들은 전문 평론가보다 훨씬 호의적인 서평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작가들의 명성은 대중매체에 어쩌다 쓰는 부수적인 글이 아닌 소설이나 시집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단에서는 서로 글을 써주고 받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는 모토에 이런 것이 있다. “네가 나를 실러라고 불러주면 나는 너를 괴테라고 불러주마.” 전문 평론가가 풋내기 평론가보다 더 성실하고 성품이 더 훌륭한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평론이 본업이기 때문에 자신의 명성을 손상시켜가며 호의적인 비평을 쓸 정도로 경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따금 비평을 쓸 수 있고 그럴 마음도 있는 몇몇 유명 작가들을 섭외하여 망설임 없이 글을 부탁했다. 그런 내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볼프강 쾨펜, 하인리히 뵐, 골로 만, 지그프리트 렌츠, 헤르만 부르거, 한스 J. 프뢸리히, 카를 크롤로브, 페터 륌코르프, 귄터 쿠네르트가 필진에 합류했다. 딱히 막을 방도가 없어서 호의적인 평론을 몇 편 싣기는 했지만, 나는 그들을 필진으로 모신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그 작가들이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문학부를 금방 빛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학 교수들은 어땠을까? 당시 많은 독문학 교수들은 사이비 학문의 냄새가 나는데도 그들 스스로는 학문적이라고 생각하는 은어를 사용했다. 보통 필요하지도 않은 외래어와 전문용어로 가득한 교수들의 글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들의 원고에서는 가끔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났다. 바로 세미나실의 분필 냄새였다. 따라서 신중하고 끈기 있게 그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까지 신문에 전혀 글을 쓰지 않았거나 예외적인 경우에만 썼던 열다섯 명 정도의 독문학 교수들은 시간이 가면서 차츰 훌륭한 평론가, 나아가 뛰어난 평론가가 되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이 있다. 혹시 나는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던 과거의 한을 이런 식으로 보상받은 것은 아닐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신문이나 해당 독문학 교수들에게 해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독일 대학 내의 독문학과 문학평론 간에, 특히 언론매체에 실리는 문학평론 간에 존재하던 안타까운 격차를 극복했다 는 것이 내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에서 15년간 일하며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영어권에는 이런 격차가 없다. 그쪽 지역에서 수년간 살면서 강의하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출신 독문학자들의 원고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신문에 싣는 문학평론은 독자에게 높은 수준을 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해하기 쉽고 가능하면 쉽게 읽혀야 한다는 점을 그들에게 굳이 납득시킬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 독문학자들 중에서 특히 하인 츠 폴리처, 페터 데메츠, 게르하르트 슐츠, 볼프강 레프만, 그리고 나중에 필진에 합류한 루트 클뤼거의 평론을 아주 좋아했다.
얼마 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 각 분야의 교수들이 청하지도 않은 원고를 거의 매일 보내왔다. 그 원고들은 대부분 신문에 싣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딱히 글의 수준이 떨어져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유익한 글도 가끔씩 보였다. 그러나 그 원고들은 강연이나 강의용으로, 혹은 책의 서문으로 작성된 것들이라 일간지에 싣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어느 책의 후기로 쓰였던 원고 하나를 읽은 나는 한 비범한 독문학자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1982년 3월, 괴테 사망 150주기를 맞아 독일어권의 출판사들은 괴테가 쓴 책과 괴테에 관한 책들을 봇물처럼 시장에 쏟아냈다. 그 모든 책의 서평을 쓰기란 불가능했지만 그렇다고 전부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권장 사항, 조언, 경고 등을 하나로 버무린 기사를 쓰기로 결심하고 최대 열 권의 책을 선별하여 다루기로 했다.
그 많은 신간 중에 『괴테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인상적인 책이 있었다. ‘이야기, 단편, 묘사, 모험, 고백’이라는 부제도 참신했다. 나는 후기를 읽기 시작했다. 첫 단락부터 “두려움 없는 독자를 위한 책 ”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전이라는 통념에 구애받지 않고 여기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몸을 실어보려는 호기심 많은 독자, 감수성 강한 사람을 위한” 책이라고 했다.
첫 페이지를 읽은 직후, 아니 어쩌면 첫 단락을 읽은 직후 나는 여비서에게 당장 취리히에 있는 아르테미스 출판사에 연락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 책을 출간한 사람의 직업과 연락처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더 마음에 들었다. 그 후기를 채 끝까지 읽기도 전에 벌써 연락처가 들어왔다. 괴테 책을 출간한 사람은 취리히 대학 현대독문학과 정교수인 페터 폰 마트였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교수들은 “두려움 없는 독자”를 위해, 더욱이 “고전이라는 통념”은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기 않기 때문이다. 나는 곧 뛰어난 새 필자를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걱정을 안겨준 것은 시평이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나 그 밖의 대형 신문사 지면에 실리는 시집 평론은 대개 철저하고 학구적이고 공정했다. 그러나 그 평론들에는 치명적인 흠이 있었다(매번은 아니더라도 자주 그런 흠을 드러냈다). 실례되는 말인지 모르지만, 조금 따분했다. 지금도 가끔씩 따분한 시평들이 나온다. 그 책임은 평론가에게만 있지 않다. 평론의 바탕이 되는 시 탓일 때도 있다. 물론 새로 발표된 시에 대해서는 진지하면서도 재미있게 평을 쓸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주 어렵다. 원문을(그것도 많이) 인용하지 않는 시평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시구 인용이 평론의 가독성을 해치는 경우가 흔하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는 브레히트의 시 제목이다. 이 시는 1930년대에 나왔지만 그때 이후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시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야 했다. 그래서 든 생각이 매주 한 차례 시평란을 마련하여 지금까지의 시평 방식을 보완하자는 것이었다. 시집만이 아니라 개별 시까지, 그것도 모든 시대의 독일 시를 소개하면서 작가와 문학이론가와 시인과 평론가 들을 해석자로 투입할 생각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곁들여 써달라고 매번 부탁했지만 매번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프랑크푸르트 명시선’이라는 시평란이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측에서는 당초 내 계획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발행인의 한 명이자 노련하고 회의적이었던 편집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그토록 시평란을 만들고 싶어한다면 하게 내버려두죠. 지면을 많이 차지하지는 않을 거예요. 서너 편 이상은 하지 못할 겁니다.” 1974년 6월 15일 자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에 괴테의 시 「한밤중 」을 다룬 첫번째 글이 실렸다. 시평란을 소개하는 서문에 나는 ‘시에 작은 길을 내주자 ’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동안 ‘명시선’에는 약 1300편에 달하는 글이 실렸다. 350여 명의 시인들이 쓴 시에 280여 명의 해석자들이 평을 붙였다. 그 해석자들 가운데 루돌프 아우크슈타인부터 디터 침머에 이르는 많은 이들이 『디 차이트』 『슈피겔』 『쥐트도이체 차이퉁』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등의 다른 신문에서도 활동했다. 나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덕분에 가능해진 ‘프랑크푸르트 명시선 ’시평란이 독일어권의 제도적 장치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독일 시에 대해 무언가 발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상의 경쟁을 생략하고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선별된 시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편지나 전보로 항의를 해왔다. 이해하기 힘든 현대 시인들의 시는 그만 싣고 횔덜린, 아이헨도르프, 뫼리케의 시를 더 많이 소개하라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명시선 ’에서 매번 횔덜린이나 아이헨도르프나 뫼리케의 시를 읽기가 지겨우니 현대 시인의 작품을 실어달라는 불평도 들어왔다. 그런 편지를 쓴 독자들은 결국 내가 올바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옛날 시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는 현대 시인의 작품을 소개하여 친숙하게 만들어주고, 현대시 애호가에게는 과거의 독일시를 상기시켜주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항의도 들어왔다. 전보로 “왜 괴테를 그렇게 자주 소개하죠?”라고 묻는 독자에게 나는 똑같이 전보로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시인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다. ‘프랑크푸르트 명시선’은 책으로도 발간되면서(어느덧 22권이나 나왔다) 차츰 소규모 총서로 자리잡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에서는 비교적 단시간 안에 대규모 문학 토론장이 탄생했다. 이 공개 토론장은 주로 비평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주말판 부록과 날마다 문예면에 연재되는 시, 장단편 연재소설, 문단 소식과 논평을 위한 광장이기도 했다. 나는 이따금 내 노력이 “문학을 공적인 자산으로 만들려는 장대하고 이상향적인 시도 ”이며, 내가 독일 문학 비평을 다시 제도의 위치에 올려놓았다는 찬사를 받는다. 솔직히 말하면 지나친 과장이다. 이런 찬사에 나는 미혹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 말은, 특히 이 같은 의례적인 찬사는 비록 형식적이고 표피적이라 해도 내가 정말로 원한 게 무엇인지 최소한 암시라도 하기 때문에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이렇게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지면에서 문학의 비중이 커진 상황은 문학계에서(신문사 내의 많은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갈채만 받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자꾸만 “대비평가”, 심지어 “문단의 거물”이라고 불렀으나, 이런 호칭이 존경과 호의에서 나온 말인지 아니면 악의를 가지고 조롱하는 욕인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었다. 내게 붙여진 그 상표나 간판 같은 표현 속에 빈정대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말투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나를 치켜세우는 모든 말이 내게는 비난이자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성공에 성공을 거듭할수록 나는 더 자주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느꼈고, 가끔씩 노골적인 증오도 감지했다. 그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적의 증오는 내가 썩 괜찮게 일을 한다는 보증이라는 하이네의 멋진 말로 위안을 삼았다. 얼마 후에는 내가 유난히 많은 권력을 거머쥐었다는 말까지 정면으로 들렸다. 어느 텔레비전에서는 나를 다룬 꽤 긴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내가 책임지고 있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문학부서가 독일문학 역사상 최대의 권력 중심부라는 대담한 주장까지 펼쳤다.
‘권력’은 분명히 어감이 좋은 말은 아니다. 이 말을 들으면 곧장 권력 남용과 횡포가 생각난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대개 동정을 받는 쪽은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고통을 짊어진 사람 또는 희생자이다. 그래, 맞는 말이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의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편집 업무에서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문단에 관여하고 있던 내 활동 범위는 당시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를 벗어나 다른 영역에까지 뻗어 있었다. 나는 많은 곳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77년에는 클라겐푸르트의 잉게보르크 바흐만 문학상 경연대회의 공동 발기인이었고 1986년까지 이 대회 심사위원 대변인 역할을 했다.
외람되지만 이렇게 질문해보겠다. 내 활동이 문학에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해가 되었을까? 무엇을 위해 나는 15년 동안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의 그 큰 부서를 책임졌을까? 그건 바로 문학을 위해서였다고 나는 감히 생각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했다. 편집부에서도 일했고 집에서도 일했다. 주말에도 쉬어본 적이 거의 없다. 내게 할당된 휴가도 전혀 쓰지 않거나 쓰더라도 신이 나서 놀지는 않았다. 나는 부지런히, 정말 부지런히 일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랬을까? 내가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업무는 언제나 반드시 직접 해야 하는 일들은 아니었다. 많은 업무는 남에게 맡겨도 괜찮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끊임없이 힘들게 노력하는 수고를 했을까? 문학을 위해서? 그렇다. 분명하다. 독일 문학비평 역사에 스민 유대인의 전통을, 나 자신도 오래전에 닿아 있는 그 전통을 중요한 자리에 앉아 공개적으로, 심지어 보란 듯이 이어가려 했던 건 야심이었을까? 물론이다. 내가 쏟은 열정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관련이 있었을까?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고향, 그러나 독일문학에서 찾았다고 믿은 그 고향 말이다. 그렇다. 아마도 내가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크게 관련이 있었을지 모른다.
이 대답은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핵심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 정말 솔직해지고 싶으면 간단하지만 실망스러울지도 모르는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내가 보여준 문제의 그 일 중독증 뒤에는 바로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에서의 업무가 선사한 즐거움이 숨어 있었다. 날마다 선사했다고 말하더라도 과장이 아니다. 내 경우야말로 취미와 일, 열정과 직업이 완전히 일치한 사례였다.
그 무렵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에 실린 많은 연재물들은 내가 이런 저런 개인적인 이유에서 기획하여 만든 것이다. 두 가지 예만 들어보겠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독일에서 독일인의 이름으로 벌어진 사건들은 그 시대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었을까? 나는 그 당시 미성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궁금했을까? 아니다. 내가 이 문제에서 관심을 거두지 못한 이유는 나 역시 그때 10대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 ‘제3제국에서 보낸 나의 학창 시절. 독일 작가들을 추억한다’라는 연재물이다. 이 연재 기사를 바탕으로 출간된 책은 지금도 많은 학교에서 교재로 쓰고 있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내가 청소년 시절에 읽은 20세기 전반기의 독일 소설들은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그 모든 소설에서 내가 받은 인상과 기억을 직접 검토해볼 수 없었기에 나는 여러 작가와 언론인, 평론가와 학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의뢰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오늘 읽는 어제의 소설’이라는 연재 기획물이다. 하인리히 만의 『놀고먹는 세상에서』(1900)부터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1945)에 이르는 125편의 독일 소설들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비판적 시선에 맡겨본 것이다. 이를 토대로 나중에 세 권짜리 소설 안내서가 나왔다. 흔히 보기 힘든 책이었다.
젊은 인재 후원이나 발굴 사업은 어땠을까? 그건 아주 고된 일이어서 대부분 무위로 돌아가거나 성과 없이 끝났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최소한 한 가지 사건은 잊히지 않는다. 1979년 8월 초에 나는 빈에서 텔레비전 토론에 나갔다. 주제는 여성문학이었는데 주최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여성이 쓴 문학작품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여성을 위한 문학? 그것도 아니면 여성에 관한 문학일까? 스튜디오에 들어가니 벌써 네 명의 호전적인 여성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여성 해방의 적, 나아가 여성 자체의 적으로 꼽히던 나를 카메라가 돌아가는 데서 갈기갈기 물어뜯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도 공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곧 시작될 논쟁에 대한 내 흥미는 토론자 한 명이 범상치 않은 여성임을 아는 순간 단번에 사라졌다. 그녀는 우아하고, 매력적이고, 유혹적이고,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한마디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는 그 여성에게 푹 빠져서 다른 여자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토론을 하다보니 그녀가 더 마음에 들었다. 말도 무척 똑똑하게 했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마다 맞장구를 쳐주는 최상의 호의를 보여주었다. 논쟁이라고 했던 그 토론회는 은밀한 성애적인 대화로 바뀌었다. 내가 하는 말은 그녀만을 위한 것이었고, 그녀가 하는 말도 나를 겨냥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방송이 끝난 후 그녀는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곧 연락할게요.” 그녀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로 작별 인사를 했다. 정말로 며칠이 지난 뒤 나는 초대장이 든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두번째 편지를 받았다. 나는 내 책 한 권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러나 두 통의 편지에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녀의 초대를 사양한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생략하겠다. 여하튼 나는 그후로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만큼은 여기에서 밝혀야겠다. 릴리 팔머였다.
그녀가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 바람에 나는 토론에 나왔던 다른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문학을 전공하고 브레멘 라디오 방송국에서 문학부서 편집자로 일하는 여성이었다. 그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다지 유익한 대화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에게 나는 발표하지 않은 소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반어적으로 말했다. “아뇨.”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시는 가끔 써요.” 나는 무엇에 홀렸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몇 편 좀 보내주세요.” 이 말이 나오는 순간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내 부탁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얼마 후 브레멘에서 네 편의 시가 도착했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수준이 떨어지는 형편없는 시일 것 같았다. 동봉된 아주 짧은 편지에는 우리가 빈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언급되어 있었다.
즉시 시를 읽어보았다. 황홀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지금까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에서 일하는 동안 그런 감동은 처음이었다. 아직 책을 낸 적이 없는 젊은 여성이 출간하고도 남을 만한 시를 보내오고, 더구나 독일 시가 지금 시대에도 얼마든지 아름다워도 괜찮고 또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시를 보낸 것이다. 그 무명 작가의 시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에 싣기로 결심한 나는 당시 문학 편집부에서 일하던 울리히 그라이너(훗날 몇 년 동안 『디 차이트』 문예란 책임자로 일한 사람이었다)를 불러 내가 내린 평가는 암시하지 않은 채 원고를 읽어보라고 했다. 그라이너는 급하게 다시 왔다. 거의 흥분 상태였다. 그의 평가는 “당장 모두 싣자”는 것이었다. 그에게 시를 쓴 여성의 이름을 알려주려고 했지만 원고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 편지는 어디 다른 데 두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휴지통에서 구겨진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간신히 해독한 그녀의 이름은 울라 한이었다.
나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에서 지루했던 적이 없다. 그러나 격주로 열리는 큰 회의 때는 예외적으로 자주 따분함을 느꼈다. 대체 왜 그런 회의가 필요했을까? 어느 발행인이 허물없이 알려주었다. 편집자들에게 가끔 한 번씩 “속 시원히” 말할 기회를 주려는 전략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그런 기회를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다 물고 앉아 있었다. 게다가 더 한심한 일은, 발행인 중 한 명이 편집자들의 비판적인 의견(여간해서는 듣기 힘들고 그것도 대개 조심스럽게 표현하던)을 하찮은 농담을 하며 무시하고 그것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다른 발행인들은 그의 행동을 침묵으로 묵과했다.
회의가 열릴 때마다 나는 정기적으로 참석하여 자주 발언했다. 당연히 비판적인 의견을 냈으며 때로는 반란에 가까운 발언도 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런 내 발언이 졸음을 유발하던 회의에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한다. 동료들은 내가 발언을 하면 좋아했지만 발행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낸 의견은 거의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마침내 그런 분위기가 지겨워진 나는 시험 삼아 회의를 멀리해보았다. 그러면 그들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나를 다시 회의에 부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철저히 오판하고 말았다. 동료들만 내가 돌아오기를 바랐을 뿐, 발행인들은 확실히 내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어진 걸 흡족해했다. 말썽꾼 한 명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내 분야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15년 동안 일하면서 신문에 내야겠다고 생각한 논평, 시, 기사 들 중에 어느 것 하나 실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현대 독일문학에 속하는 작가는 누구나 정치적 견해와 무관하게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에 글이 실릴 수 있도록 페스트와 합의했다. 누가 현대문학 작가에 속하는지는 내가 결정했다. 페스트는 약속을 지켰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에게 우리가 합의한 내용을 상기시켜야 했던 적도 없었다.
갈수록 나는 좌파 작가들, 그리고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작가들의 작품도 자주 실었다. 이것이 발행인들의 마음에 드는 행동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트집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1976년 5월 나는 금고 15년 형을 선고받은 테러범 페터 파울 찰이 감옥에서 쓴 시를 ‘프랑크푸르트 명시선’에 실었다. 시 해석은 에리히 프리트에게 맡겼다. 그러자 누군가가 말했다. “더이상의 좌파는 곤란해요.” 이 말을 비난한 사람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에는 없었다.
말하자면 나는 문학부 책임자로서 무한한 자유를 누렸다. 그런 자유가 있었기에 신문사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러 일들도 쉽게 견뎠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를 매일 읽었지만 문예면 이외의 기사는 예외적으로 사설 말고는 거의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시간을 절약하고 더불어 화가 날 만한 일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게 되겠지만, 나는 누구 덕분에 그렇게 마음껏 자유를 누렸는지 잘 알고 있었고 잊은 적도 없었다. 그 사람은 바로 요아힘 페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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