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혁명으로서의 역성혁명
전제개혁으로 구체제의 물적 기반에 타격을 가한 역성혁명 세력은 이어서 구체제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불교비판운동에 돌입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비판운동이 아니라 역성혁명의 이념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척불운동의 선두에는 역시 정도전이 있었다.
도덕정치와 참여정치의 깃발 아래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인데, 그 이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쳐 국가 이데올로기이자 민간 신앙으로 민족 통합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려 말의 불교는 세속 권력과 유착하고 이권에 개입하며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일삼는 등 극심한 부패 타락상을 보였다. 당시 불교의 타락상은 역사상 가장 체계적인 불교 비판서로 평가받는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1398)에 잘 묘사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저들이 화려한 전당과 큰 집에 사치스러운 옷과 좋은 음식으로 편안히 앉아서 향락하기를 왕자 받듦같이 하고, 넓은 전원과 많은 노복을 두어 문서가 구름처럼 많아 공문서를 능가하고, 분주하게 공급하기는 공무보다도 엄하게 하니, 그의 도에 이른바 번뇌를 끊고 세간에서 떠나 청정하고 욕심 없이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처럼 본연의 사명으로부터 벗어나 백성을 우롱하고 착취했던 점에서 불교는 서양 중세의 암흑시대를 낳았던 중세 가톨릭과 같은 수구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정도전을 비롯한 역성혁명의 주체들이 강력하게 불교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은 불교에 대해서 대개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이색 등 온건파들이 불교의 폐해를 지적하면서도 유·불을 겸통하는 고려 지식인의 전통을 유지한 것에 비해, 정도전 등 역성혁명파 유교 지식인들은 척불론의 입장에 서 있었고 그중에서도 정도전이 가장 철저했다.
조선의 창업이 수많은 유교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이처럼 사상과 종교 혁명적 요소를 바탕에 깔고 봉건 사회의 유신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불교가 더 이상 사회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고 지식인들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게 된 시점에서,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를 주장하는 유가의 도덕주의와 사회 참여론은 지식인들을 매혹할 만큼 참신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1391년 봄, 공양왕이 회암사에 행차하여 자기 생일을 기념하는 예불을 올리자 정도전은 “임금이 스스로 자기 복을 비는 것을 듣지 못했다”고 정면으로 공박하고, 그 후 기회 있을 때마다 왕실 불교 행사를 못하도록 비판했다. 이 당시 척불운동은 정도전을 필두로 조준·조인옥·윤소종·성석린 등 역성혁명파 핵심들과 성균대사성 김자수金子粹·성균박사 김초金貂·성균생원 박초朴礎·이조판서 정총 등이 합세해 진행했다. 이들은 사원 소유 논밭과 노비를 몰수해 국가에 귀속하고, 일반 백성이 승려가 되는 것을 엄금하며, 오교양종五敎兩宗(고려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던 화엄·자은·총남·종신·시흥의 5종을 5교, 조계·천태의 2종을 양종이라 함)의 승려들을 해산하여 군대에 편입시킬 것 등 철저한 척불 정책을 주장했다. 동시에 유교 진흥책으로서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학습하는 경연제도를 실질화하고, 개경의 5부와 동서북면의 주·부에 유학교수관을 설치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시행하여 집집마다 가묘 세우기 운동을 전개했다.
대의명분과 의리도덕에 민감한 봉건 사회에서 이러한 사상운동은 보수파를 직접 타격하는 정치투쟁은 아니었으나, 보수파의 이념적 기반을 허물고 역성혁명의 명분을 확고히 한다는 점에서 보수파 청산 못지않게 강력한 개혁운동이 되었다. 역성혁명에서 대의명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정도전은 정치투쟁만이 아니라 이념투쟁을 통해서도 보수파를 제압해야만 천하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수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역성혁명이 초읽기에 들어간 1392년 6월에도 전 전의부정 김전金琠, 전 호조판서 정사척鄭士倜 등 퇴역 구신들은 정도전 등의 척불운동을 건국의 근본을 알지 못하는 광유狂儒의 소행이라고 비난하며 불교의 장려와 진흥을 역설하는 항의서를 제출했다. 이러한 호불운동에 개혁 과정에서 소외된 수많은 보수파가 참여함으로써 신·구 정치 세력 간의 대립이 매우 격심하게 일어났다.
인간에 대한 사랑
척불운동의 선두에 섰던 정도전은 당대의 유교 지식인 중 누구 못지않게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유배 시절까지만 해도 승려들과의 교유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배 시절 정도전이 여러 승려들과 막역한 교유를 맺었던 것은 그가 남긴 시나 글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불교로는 그가 바라는 사회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다음은 《불씨잡변》의 한 대목이다.
불씨佛氏(부처)는 자연에 대해서는 표독한 승냥이, 호랑이 같은 것에나 미세한 모기 같은 것에도 자기 몸을 뜯어 먹혀가면서 아깝게 여기려 하지 않는가 하면, 사람에 대해서는 월나라 사람이냐 진나라 사람이냐를 가리지 않고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먹이려 들고,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옷을 밀어주어 입히려 드니, 이른바 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와 같은 지친에 대해서나 군신과 같은 지극히 공경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반드시 끊어버리려 드니 이는 무슨 뜻인가. 그뿐인가. 사람이 스스로 신중을 기하는 것은 부모처자가 있어서 그것에 배려하기 때문이거늘, 불씨는 인륜을 가합假合이라 하여, 아들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신하는 그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아서, 은혜와 의리가 강쇠되고 각박한지라 자기 지친 보기를 길 가는 사람같이 보고, 공경해야 할 어른 대하기를 어린아이 대하듯이 하여 그 근본과 원류를 먼저 잃어버렸다.
정도전이 생각한 이상사회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사회다. 그런데 사랑이 흘러넘치는 데도 순서가 있다. 무조건 모든 인간을 다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뜻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공상적 박애주의에 불과하다. 인간은 가까운 사람을 더욱 가깝게 대하고, 친한 사람을 더욱 친하게 대하는 데서부터 사랑을 배운다. 부자간의 사랑, 모녀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은 사람이 사랑을 학습하는 가장 원초적인 관계다.
유교 이상사회의 사랑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주변에서 시작한 사랑은 순차적으로 흘러넘쳐 그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든 이에게 닿을 수 있어야 한다. “무릇 사람들을 사랑하라凡愛衆”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정치가 모든 문인의 의무이다. 무릇 문인이요 군자라면 집안 단속이나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여 “천하를 평화롭게 해야 한다平天下”는 것이다.
범애중하고 평천하하는 것은 유가 사회에서 모든 문인의 의무요 삶의 이유이며 최고의 영예다.
불교 역시 중생에 대한 사랑을 최고의 도로 생각하는 점에서는 유교와 유사점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정도전이 보기에 불교의 사랑학에는 사랑의 순차가 뒤바뀐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천지 만물에 대한 자비는 사랑에 있어서 순서와 차등이 없으므로, 실제로는 의리가 없고 인륜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씨의 말에 그 폐해가 많으나 인륜을 끊어버리고도 조금도 기탄함이 없는 것이 이 병의 근원이다.
정도전은 불가의 승려들이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탁발로 생계를 잇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유가의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생산에 대한 불가의 고답적 입장은 사회 발전에 역효과를 낼 뿐이며, 민생 안정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라는 사람은 서역 왕의 아들로, 아버지의 왕위를 옳지 않다고 하여 받지 않았으니, 백성을 다스릴 자는 아니며, 남자가 밭 가는 것이나 여자가 베 짜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여 버렸으니, 힘써 일한 것이 뭐가 있는가. 부자도 없고 군신도 부부도 없으며 또한 선왕의 도를 지키는 자도 아니다. 이런 사람은 하루에 쌀 한 톨을 먹을지라도 모두 구차하게 먹는 것이니, 진실로 그 도와 같이하려면 지렁이처럼 아예 먹지 않은 뒤에라야 가능할 것이니, 어찌 빌어서 먹는단 말인가. 더구나 자기 힘으로 벌어서 먹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니 그렇다면 빌어먹는 것은 옳단 말인가.
이에 비해 유가에서는 “위로 천자와 공경대부는 백성을 다스림으로써 먹고, 아래로 농부, 장인, 상인들은 힘써 일함으로써 먹고, 그 중간인 선비는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경하여 선왕의 도를 지켜 후학을 가르침으로써 먹었으니 이는 옛 성인들이 하루도 구차스럽게 먹고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라며 유가의 건강성을 주장했다. 즉, 백성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졌다고 판단되는 불교에서 치국의 도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정도전의 생각이었다.
이념투쟁의 선두에 서다
정도전은 불교의 연옥설에 대해서도 “어찌 거짓된 가르침으로 사람을 교화할 수 있겠는가”라며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어떤 승려가 “만일 지옥이 없다면 사람이 무엇이 두려워 악한 짓을 안 하겠는가”라며 연옥설이 중생 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유효하다고 주장하자, 정도전은 “지극한 정성이 천지를 관통해도 사람을 감화시키기 힘든데 어찌 거짓된 가르침에 사람이 감화되겠는가”라고 한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면서, “군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아 모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번이라도 악명이 있게 되면 그 마음에 부끄러워하기를 마치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은 듯이 여기나니, 어찌 지옥설 때문에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라고 답했다.
즉, 군자는 무엇이 두려워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갈 뿐이라는 것이다. 정도전의 이러한 비판은 현실주의적인 유교가 내세 지향적인 불교에 가할 수 있는 가장 고고한 비판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정도전은 불교의 윤회설과 인과응보설에 대해서도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을 가했다. 유가의 합리적 관점에서 볼 때 불가의 윤회설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또한 상대적으로 합리주의를 추구하던 유교 지식인들이 불교에 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이상 공격하기 쉬운 약점도 없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쇠를 녹이는 노와 같아, 비록 생물이라 할지라도 모두 다 녹아 없어진다. 어찌 이미 흩어진 것이 다시 합하여지며, 이미 간 것이 다시 올 수 있으랴. …… 사람이 죽은 후에 혼기魂氣와 체백體魄이 또다시 합하여 생물이 될 수 없다는 이치는 명백하다.(《불씨잡변》)
정도전은 인과응보설에 대해서도 당시의 선진 과학인 의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비판했다. 즉, 인체의 병을 치료할 때 불가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설로는 치료할 수 없으며, 인체에 발생하는 음양오행의 감응에 따라 정확히 약을 조제함으로써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 것이다.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학문적이거나 이론적인 혹은 순수 종교적인 관심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역성혁명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정치적 의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객관적이지 못한 지나친 비판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방대한 종교 사상에 대해 그처럼 총체적이고 핵심을 찌르는 비판과 분석을 가한 예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동양권에서 불교 사상에 대한 비판서로는 정도전의 저술이 가장 체계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성균생원이었던 박초는 척불운동에서의 정도전의 공적을 칭찬하며 “천과 인과 성과 명의 연원을 밝혀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학의 도를 높이 외쳐 부도백대의 광유를 막아 삼한의 오랜 미혹을 끝냈다. 이단을 배척하고 사악한 이론을 종식시켜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했으니 우리 동방의 진유는 오직 그 한 사람뿐”이라고 했다.
정도전은 조선을 유교 사회로 만든 장본인이다. 장장 천년간 민족정신을 지배해왔던 불교는 정도전의 집요한 공격 앞에 끝내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위치를 잃고 말았다. 정도전의 관심은 오직 하나, 무엇이 사랑이 넘치고 의리도덕이 살아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 그리고 무엇이 이 역사적 과업에 방해가 되느냐, 이 기준에 따라 그는 호好와 오惡를 칼날 세우듯 분명히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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