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의 상징 메커니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단일한 정치적 의지의 통합체인 국민을 형성하는 것과 관련해 근대국가는 또 다른 문화적 장치를 발명했다. 축제와 박물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근대국가들이 국민적 정체성을 위해 활용하고 있는 수단이 바로 축제와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근대국가는 국민들이 기억해야 할 역사적인 날들을 선정해 국경일로 명명하고 정기적인 의례를 거행한다. 해마다 열리는 국민적 축제의 공간을 채우거나 장식하고 있는 정치적 언설들과 국가적 상징물들은 국민을 하나로 묶어줄 매우 긴요한 매개물이다.
1790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명한 ‘연맹제’는 오늘날의 국가들이 거행하는 국경일의 원형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살펴볼만하다. 1790년 7월 14일 파리에서 개최된 연맹제의 목적은 “지방적 차이나 특권을 종식시키고 모든 프랑스인을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전체가 하나 되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다’라는 일체감과 환희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국민의회가 승인하고 법률로 제정되어 파리에서 열린 연맹제는 그야말로 국민을 만들기 위한 거대한 이벤트였다. 행사장소로 샹드마르스Champs de mars 광장이 선정된 데는 정치적인 동기가 숨어 있었다. 국민적 통합과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제의 흔적을 볼 수 없으며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구분되지 않을 열린 공간이 필요했다. ‘조국의 제단’에서 개최된 시민선서와 지방의 국민방위대를 위한 ‘조국 대순례’와 같은 프로그램은 참여한 군인과 시민들이 하나의 국민적 정체성으로 통합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광장 한 가운데 세워진 조국의 제단은 혁명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는 시민선서를 통해 모두가 동일한 국민임을 감동 속에서 느끼게 했으며, 지방의 국민방위대원들은 연맹제에 참여하기 위해 올라오면서, 그리고 축제가 마무리된 뒤에 혁명을 표상하는 깃발을 들고 귀향해 자신들이 참여한 시민선서를 전하면서 혁명의 대의와 연맹제의 이념이 지방민들에게도 공유될 수 있도록 했으며, 그 바탕 위에서 국민의 정체성이 파리를 넘어 지방으로 확대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국민을 통합하고 단일의 정치의식을 주조할 문화적 형식으로서 축제, 혹은 현대적 의미에서 국경일에는 이 연맹제의 원리가 투영되어 있다. 국민적 축제의 공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의식들, 가령 합창과 선서와 연설 등은 그 공간에 참여한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고 국가에 대한 공통의 정치적 기억을 상기하고 공유하도록 하는 장치다. 모든 나라는 고유한 국경일 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국민적 통합을 위한 정례적인 의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적 혼란과 분열의 국면에서는 새로운 국가의례를 발명하거나, 전례와는 다른 장대한 정치미학의 형식을 동원해 혼란과 분열을 질서와 통합으로 이끌고자 한다. 예컨대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종결된 지 10년이 되는 시점에 기획된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들 수 있다.
국민적 축제의 날을 얘기할 때,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또 하나의 상징물이 있는데, 바로 달력이다. 근대국가의 달력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달력에는 모든 국가적 의례의 날들이 기록되어 있고 국민은 그 달력을 통해 국민적 축제의 날들을 일상에서 인지한다. 그런 면에서 달력은 국민이 동일한 정치적 시간의 리듬과 동일한 정치적 기억의 서사를 따라가고 있다는 동질의식을 갖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프랑스 혁명세력이 구체제의 달력을 없애고 공화력으로 대체한 것은 그러한 상징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박물관 또한 구성원들을 하나의 국민적 범주로 통합하는 중요한 정치적 공간이다.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하나는 특정한 역사적 의미들을 간직한 문화재들을 관람하면서 동일한 집단기억을 갖게 되고 그것을 통해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원리적으로 볼 때, 보관하는 문화재들의 소유 주체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국민 모두라는 집단적 소유 개념이 구현되는 공간이 박물관이라는 점이다. 박물관은 국민주권이라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근대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인지하는 공간이라는 면에서 대단히 정치적이다.
박물관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곳은 영국이었지만 박물관의 근대 정치적 원리와 의미와 위상을 확립한 곳은 프랑스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초기 국면인 1789년 11월 2일 국민의회는 “성직자의 소유물을 국민의 관리하에 둔다”는 결정을 통해 문화의 소유 주체가 특정 집단이 아니라 국민으로 불리는 전체임을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이러한 선언은 이후 혁명의회 의원들의 여러 발언들로 재확인되었다. 1793년 6월 4일 ‘공공교육위원회’에서 한 의원이 주장했다. “공공교육위원회는 의회의 관련법령을 국가의 모든 문화적 유산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국가의 모든 문화적 유산은 모든 시민들에게 속합니다. 그것은 그들 중 특정한 몇몇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발언에서 보듯이 문화재는 권력자의 능력과 존귀함을 표상하는 도구가 아니라 국가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소유물이자 국민적 원리와 가치의 표상물이다. 국민이 문화 소유의 집단적 주체인 이상 그 문화의 향유 주체 역시 국민 전체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 행정구역 개편에 관한 법률인 1790년 1월 24일과 25일의 법률들은 국민에 의한 문화 향유를 명시하고 있다. 이 법률들은 혁명정부가 수집하거나 몰수한 구시대의 문화적 유산들을 전국에 균등하게 분배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국민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체계적 보존과 관리 및 감상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혁명의회가 창설한 ‘문화재위원회Commission des Monuments’는 1790년 12월 2일의 보고서를 통해 그러한 법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했다. 모든 사람들이 문화재를 향유할 수 있도록 83개 데파르트망departements ―혁명기에 수립된 프랑스의 최고 행정 단위―마다 각각의 문화재 보관소를 마련하고, 각 데파르트망의 문화재 보관소는 공공 교육기관이 존재하는 대도시에 설립하며, 폐쇄된 교회를 박물관으로 사용할 수 있다.
문화재를 보관하고 전시하며 감상할 공간으로 박물관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절대주의 군주들 역시 문화재를 보관하고 감상하는 공간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적인 갤러리였지 박물관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국민국가의 박물관은 국민의 공유물이자 향유물인 문화재를 보관하고 감상함으로써 국가 주권이 누구에게 존재하는가를 명확히 제시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국민적 통합과 동질성 형성을 위한 상징물들이 존재하는 장소로 일종의 혁명의 정치문화학교였다. 당시 자코뱅파의 화가로 박물관 논쟁을 주도한 다비드Jacques Louis David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박물관이란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호사스러운 물건 또는 자질구레한 물건이 아무 의미 없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다. 박물관은 중요한 학교가 되어야 한다. 교사는 어린 학생들을, 부모는 자녀들을 그곳에 데려가야 한다.
국민의 형성이라는 근대적 임무에서 박물관이 차지하는 역할의 또 다른 최근의 예를 싱가포르에서 확인한다.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 싱가포르의 가장 중대한 과제는 국가 구성의 종족적 다양성과 이질성을 하나의 국민적 형식으로 통합하는 일이었다. 중국계, 이슬람계, 말레이시아계 등 혈연적·문화적·역사적 차원에서 다른 종족들을 단일한 싱가포르 국민으로 전환해내는 일은 앞서 논의한, 근대국가의 본질적 프로제트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을 위해 국가는 머라이언Merlion이라는 거대한 사자상을 통해 국가를 표상하고 박물관을 만들어 국민 통합의 문화적 토대를 구축하려 했다. 싱가포르 박물관 정책의 본질적 원리는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국가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단일의 국민적 주체로 전환해내는 것이었다. “국가 구성원들의 기원과 출신이 다르지만 어떻게 성공적으로 하나의 나라를 만들고 그 주인이 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1997년 4월에 개관한 아시아문명박물관은 그러한 정치적 의지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문화적 발명들로 근대국가와 국민은 시각적 형태를 부여받고 통합체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제 그렇게 표상된 국가와 국민을 향한 충성, 즉 애국적 덕성의 문제가 떠오른다. 국가는 구성원들의 자기헌신과 희생 위에서 유지되고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앞서 논의한 것처럼 정치공동체를 향한 구성원들의 충성과 희생은 비단 근대국가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공동체의 존속 메커니즘에서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논리다. 그렇지만 근대 국민국가가 요청하는 애국은 전통국가의 정치적 의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위계적인 질서가 만들어내는 군주를 향한 일방적이고 사적인 희생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 즉 국민의 자격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자발적이고 공적인 의지이자 열망이다.
명예혁명으로 정치적 근대의 제도적 형식을 완성한 영국의 18세기는 국민의 담론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국민 만들기의 미시적 과정의 진행으로 담론은 정치적 주체로서 국민이 지녀야할 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당시 국민의 담론을 이끈 자유주의 사상가 샤프츠버리Shaftesbury 백작은 국민의 덕목이 애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태어나 살아가는 땅을 사랑하고 그 땅을 위해 헌신하는 덕목을 지니고 있는데, 백작은 그러한 사랑과 헌신의 대상인 땅을 ‘고향country’으로 이해하고, 논리를 바꿔 애국이란 고향이 아니라 ‘파트리아patria’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 파트리아는 무엇인가? 그곳은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공동체로, 고향과 같이 지역성이나 종족성에 기반을 두는 원초적 공동체가 아니라 자유, 공동선, 공적 가치와 같은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상호동의라는 근대적 원리에 의해 조직된 공동체다.
이후 영국에서는 토리파 지도자 볼링브룩Bolingbroke의 보수적 애국주의 담론에서부터 18세기 후반 윌크스Wilkes 운동으로 부상한 급진적 애국주의 담론에 이르기까지 애국에 관한 공적 논의의 스펙트럼이 확장되었고,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을 계기로 영국의 애국주의 담론은 그 깊이와 강도를 더해갔다. 예컨대 비국교도 목사이자 급진 개혁주의자였던 프라이스Richard Price는 국가를 지리적 개념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고, 같은 헌정체제 안에서 같은 법의 보호를 받으며 연대하고 살아가고 있는 동료들의 집합체로 이해하고자 했다. 입헌주의, 법치, 평등, 우애와 같이 근대의 정치적 이념과 가치들을 구현하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이 곧 애국이라는 면에서 애국은 근대의 정치적 의지와 열정을 그 본질로 한다.
영국의 애국주의 담론이 혁명이 마무리되고 정치적 안정기로 접어드는 국면에서 생성되고 전개된 것과는 달리, 프랑스의 애국주의 담론은 혁명이 시작되기 전부터 공화주의 사상 속에서 솟아나고 혁명 속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 대혁명기의 애국 담론은 그 사상적 토대에서나 실천적 국면에서나 한층 더 급진적인 성격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몽테스키외는 일찍이 애국심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공화국이 요구하는 덕성의 본질이 국가에 대한 사랑임을 강조했다. “공화국에서 덕이란 매우 명료하다. 그것은 공화국에 대한 사랑이다.” 중요한 사실은 그 애국심이란 자기 자신 또는 가족과 같은 원초적 유대관계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애국심은 자기애나 가족애와는 반대되는 덕성이다. 왜냐하면 국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돌보거나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익에 대한 끊임없는 선호를 요구하면서 모든 개인적인 덕들을 산출한다. 덕이란 바로 그런 선호다.
몽테스키외와 같은 초기 계몽주의 사상가가 주창하기 시작한 공화주의적 애국 담론은 루소에 와서 비판적 계승과 사상적 체계화를 거치면서 종국에는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와 같은 급진주의 혁명가에 의해 정치적 실천의 장으로 진입했다.
루소는 몽테스키외처럼 공화국을 이상으로 삼고 공화국에 대한 사랑인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지적 열정을 바쳤지만, 그와는 달리 자기애와 공화국에 대한 사랑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루소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의지와 감정의 연장으로 애국심을 이해하고자 한다. 인간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동료시민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덕이 있고 애국심이 충만한 시민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루소는 몽테스키외와 마찬가지로 자기애와 조국애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과 충돌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가 제시한 사회계약, 즉 일반의지의 형성을 통한 공화국의 수립은 그 둘 사이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였다. 루소는 개인의 이익과 의지가 전체의 이익 및 의지와 어떻게 양립하고 조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데, 개별적 구성원 각자의 의지가 전체의 의지로 전환되고 그 둘 사이에 어떠한 분리와 차이도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생성되는 것이 일반의지다. 따라서 일반의지의 구현체로서 공화국을 따르고 사랑하는 일은 곧 자기 자신의 의지를 따르고 사랑하는 일이다.
루소, 몽테스키외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소리 높여 외친 애국적 공화주의 정신은 단순한 관념과 사색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국민들의 마음속에 심어야 할 정치적 덕성으로서 조국애는 실천적 목표에 연결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공화국 프랑스는 인근 군주국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혁명 프랑스가 이웃 적대국들과 처음으로 치른 전투는 1792년 9월 프로이센과의 발미Valmy 전투였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듬해 영국과의 전쟁을 필두로, 혁명의 불길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주변 나라들의 침공 때문에 군사력의 강화를 꾀해야 했다. 하지만 지원군의 충원이 예상을 밑돌게 되자 혁명정부는 급기야 1793년 8월 23일 국민총동원령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게 된다. 부족한 군사력을 충원하고, 혁명 프랑스에 대한 군사들의 충성과 자기희생을 위해서는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애국심의 조장을 통해 혁명군대의 강인함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그 반대도 성립했다는 사실이다. 즉, 병사들은 국민의 이름으로 적국들과의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공화국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폴란드 정부의 군사체제에 관한 루소의 제안을 읽을 수 있다.
나는 국가가 군대 없이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국가의 진정한 군대는 그 구성원들이다. 각 시민들이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의무로서 군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로마의 군사체제였으며, 오늘날 스위스의 것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모든 나라, 특히 폴란드의 군사체제는 바로 그래야 한다.
루소는 전쟁과 조국애의 밀접한 상관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만일 외국과 전쟁이 일어난다면? 시민들은 두말없이 싸우러 나갈 것이다.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무를 다할 것이다. […] 그들 앞에 저 영광과 열렬한 조국애가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씩씩한 인민들을 세워보라.
루소는 조국애를 키우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게 교육은 “영혼들에게 국민적 형태를 부여하고, 그들이 성향과 열정과 필연성을 따라 애국적으로 되게 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의견과 취향을 인도하는 것이”며, 그 교육으로 조국만을 생각하는 국민을 육성한다. 루소는 “모든 참된 공화주의자들은 모유와 함께 조국애, 즉 법과 자유에 대한 사랑을 먹는다. 그 사랑이 바로 그의 모든 존재성”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본능적 열정이자 정치적 의지인 애국심을 만들어낼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루소 사상의 세례를 받은 혁명가들은 공식적 학교제도의 중요성을 인식했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애국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감성의 정치를 기획하고 실천했다.
미술은 공화주의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데 핵심적인 교육적 소재였으며 그 교육의 중심에 급진 혁명가 다비드가 있었다. 양식과 주제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전범으로 삼는 신고전주의 회화의 중심인물이었던 다비드는 이미 프랑스 대혁명 이전부터 공화주의 애국심을 화폭에 담는 정치적 열정을 보여 왔다. 대표적으로 가족애를 버리고 조국을 위해 자발적 희생을 감수하는 용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7)와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아들들의 목숨을 빼앗은 아버지의 정치적 강인함을 그리고 있는 ‘브루투스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1789)을 들 수 있다. 대혁명이 발발하자 다비드는 자코뱅 클럽의 지도자로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혁명의 전개과정을 증언하는, 그리고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영웅들의 모습을 담은 회화들을 그려 국민적 애국심을 고양하고자 했다.
그런데 조국애의 상징적 인물들은 비단 다비드의 캔버스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들은 혁명의 숨소리가 들리는 현실의 정치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대혁명 발발 이듬해인 1791년에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한 인물들을 모시는 국민의 전당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빵떼옹으로 불리는 혁명의 묘지였다. 그런데 왜 묘지를 만들어야 하는가? 묘지에는 그야말로 애국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영웅들이 국민의 이름으로 안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국민들은 그곳에서 애국이란 무엇이며, 왜 조국을 사랑해야 하며, 애국이 얼마나 값지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죽음보다 더 값진 것이 애국이라는 사실을 묘지가 보여주는 것이다.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는 이제 묘지를 매개로 국민에게 애국심과 조국을 위한 충성과 희생의 당위를 웅변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래 근대적 정치제제는 결코 평화적으로 수립되지 않았다. 그 대부분은 대내외적 적들과의 전쟁국면을 통과해야 했다. 정치적 근대의 형성과정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근대국가가 본질적으로 이념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정한 영토라든가 자원을 빼앗는 일이 아니라 주권을 뜻하는 특정한 영토적 경계를 기초로 정치공동체가 지향하는 이념과 가치들을 수호하는 것이 근대국가가 마주할 문제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이념적 순결성을 지켜야 한다는, 근대국가가 조우하고 풀어내야 할 핵심적 과제를 최초로 인식시킨 계기였다. 그런데 어려움은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곧 국민들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가로서는 그들의 죽음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국민적 충격이 너무 커서 감당하기 어려운 죽음일 경우 상황은 더 예민해진다. 죽음의 방치는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헌법적 조항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료 국민들의 죽음이 아무렇게나 처리되는 것을 보면서 어느 누가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조국애를 키울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국가는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국민들을 고귀하고 영웅적인 존재들로 만들어내야 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건립된 묘지에서 이루어지는 ‘사자의 위로’는 그러한 정치적 필요성을 만족시킨다.
그 정치심리학은 살아있는 국민들로부터 이끌어내야 할 애국심의 이상적 모델을 주조해내는 일이다. 근대국가가 국민으로 불리는 정치적 주체들의 죽음을 국립묘지의 형식 속에서 아름답고 숭고하게 재현해내는 정치미학을 우리는 그 두 맥락에서 이해한다. 근대국가가 운영하고 있는 국립묘지는 그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그와 같은 정치적 고민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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