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역사 앞에서
역사철학
인류와 사회는 그 삶의 조건인 제도나 전제들을 절대적이고 자명하고 본디부터 주어진 것으로 여기곤 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증거에 의해서 그 믿음을 굳히기도 한다.
사실 인류의 관념과 사회 유형은 고정된 것도 아니고 미리 주어진 것도 아니다. 우리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런 통념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고 이것이 분명해진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집합적이거나 개인적인 우리의 역경을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은 반드시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배경막으로 삼게 된다. 우리가 선택한 일들이 자명한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라면, 우리 선택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다른 이들은 어떤 걸 선택했는지 또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선택권의 범위를 결정하는 원칙 또는 요인들을 알아야 한다. 이 원칙과 요인들을 알아내는 작업이 우리 능력을 벗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특정한 예측은 늘 어긋나곤 한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인류 역사의 패턴을 가정한다. 그 패턴을 사용하느냐 마느냐에 관해서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철학자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의 관점을 되도록 유용한 사실들과 일치하고 명백하며 일관된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관점을 거의 무의식적이고 일관성 없이 사용하느냐일 뿐이다.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일종의 ‘상식’처럼 은연중에 제공되는 관념들을 아무런 검증이나 비판 없이 사용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에 관해서 케인스가 한 말처럼, 상식은 죽은 이론일 뿐이다.
…… 경제학자들과 정치철학자들의 관념은 ……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다.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그것들이다. 스스로 어떠한 지적인 영향력에도 좌우되지 않는다고 믿는 실무자들은 대개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이다. 허공에서 목소리를 듣는 미친 권력자들의 광기는 몇 년 전의 엉터리 학자에게서 증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경제사상 분야를 멀리 벗어나서도 사실이다. 역사철학을 무시하는 이들은 사실 죽은 사상가와 검증되지 않은 이론의 노예일 따름이다.
우리 시대는 전에 없던 속도와 깊이로 사회적?지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하지만 사유는 대체로 비역사적이거나 반역사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이 우리 시대의 큰 역설이다. ‘역사주의’Historism라는 말은 스스로 예언자입네 하는 이들을 겨냥한 욕이 되었다. 다시 말해, 역사의 비책과 미래로 나아가는 열쇠를 갖고 있다면서 자기 자신의 가치와 미래에 대한 전망을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그것이 상서롭고도 엄연한 역사적 필연일 거라고 내세우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 된 것이다.
오늘날까지 가장 웅변적인 표현이기는 해도, 역사주의라는 말이 역사관을 향한 유일한 비난이었던 건 아니다. ‘발생론적 오류’라는 비난 또한 역사관을 겨냥한다. 그 단순한 요점은 특정 관념의 ‘기원’과 ‘타당성’이 서로 무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미래 선택권의 장단점을 판단할 때, 우리 기원과 과거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그릇된 주장이 가능하다. 우리 관념들의 뿌리를 발견한다고 해서 그 관념들이 건전한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왜 구태여 뿌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그 뿌리를 살펴보려는 의도는 우리 선택권을 이해하기 위해서이지 우리 선택권을 예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역사관을 배경막으로 삼아야 할 불가피한 필요가 있으면서도, 세계사의 패턴에 대한 정교한 시각은 존중하지 않는다. 이보다 역설적인 상황은 없다. 헤겔, 마르크스, 콩트 또는 스펜서 같은 19세기 역사철학자들의 사상이 별로 존중받지 못하면서도 어디에서나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단순하다. 가장 뚜렷하고 어쩌면 과장된 윤곽선으로 인류 역사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 관점은 최신의 모양새를 띠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하나의 체계를 이룬 것은 아니다. 그것을 표면에 내세우려는 건 내가 이 역사관이 진리임을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결정적이고도 최종적인 진리라는 판단은 이론 일반에 주어지지 않는다. 특히 어떤 학자 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 무한히 다양하게 펼쳐지는 매우 복잡한 사실들을 다루는 이론에 그런 표현을 쓰기는 어렵다. 역사관을 공식화하는 건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진술이 비판적인 검증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작업에서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연역적이다. 명확히 진술되는 ‘전제들’로부터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그리고 유용한 사실들에 비추어 다양한 결론들이 검토된다. 사실들과 함의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전제를 다시 검토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 배경막을 채색하는 일은 단순히 묘사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은 무척이나 풍부하고 다채로워서 그림을 완성하는 건 둘째 치고 어떤 임의적인 묘사로 시작될 수가 없다. 판단력을 발휘해서 인류 역사에 작용하는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들을 선택하고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기존의 기록에 부합하고 관련된 문제를 조명해 낸다면 잘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제들을 더 다듬어야 한다. 그 방법은 원리상 매우 단순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기란 간단하지 않다.
이것이 이 책의 방법이라면, 그것은 다른 분야의 이론이나 모델들과 어떻게 다른가? 이 대목에 역사적인 무언가가 있다. 새롭고 중요한 요소들이 모델에 보태지는 차례나 순서는 기록되거나 추정되는 사실의 문제이지 그저 논리적 편리함의 문제가 아니다. 식량 생산, 정치의 중앙집권화, 분업, 글을 읽고 쓰는 능력, 과학, 지적인 해방은 특정한 역사적 순서로 나타난다. 인류 역사에서 나중에 발전한 어떤 것들은 적어도 그보다 앞선 발전을 전제로 하며 그것들보다 앞서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인류 역사라는 연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등장인물이 더 많아지는 경향이 있고, 등장인물들이 나타나는 ‘순서’에 제약이 가해지는 것 같다. 인간 사회 이론가는 그 등장인물들을 어떤 기존의 순서에 내키는 대로 집어넣을 수 없다. 적어도 몇 가지 변화는 순서를 바꾸기 힘들다. 물론 농업, 중앙집권화, 읽고 쓰기, 과학은 그것들이 발생한 지역에서 사라질 수 있고 가끔은 후퇴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차례대로 누적되는 것 같다.
특정한 변화들은 그보다 앞선 변화들을 전제로 해야만 일어날 수 있고, 앞선 변화들이 그 전제 조건이라는 주장은 진화생물학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역사적 변화는 문화에 의해 전파되고, 유전적 전달과는 달리 획득형질을 ‘영속화하는’ 전파 형태를 띤다. 사실 문화는 여러 획득형질의 집합들로 이루어진다. 문화란 한 사회를 특징짓는 특유한 방식의 활동으로, 구성원들의 유전적 구조에 지배되지 않는다. 인류가 속한 사회들은 저마다 놀랄 만큼 다양한 행동 양식을 드러낸다. 하지만 모든 사회가 분명히 인류 공동의 유전적 유산과 양립하는데, 어떤 사회도 유전적 구조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류는 특징적이다. 인류처럼 어느 정도 다양함을 드러내는 동물 종도 있을 수 있지만, 그 다양성의 범위는 인류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인종 간의 서로 다른 유전적 구성이 중요한 사회적 결과를 낳았다고 믿는다. 사실 모든 아이가 어떠한 언어를 습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모든 문화는 특정 ‘인종’ 집단의 어린아이가 받아들이고 내면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화는 유전적 특성을 상징이나 표식으로 이용할 수 있고 이용하기도 하지만, 유전적으로 전파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를 좀 더 느슨하게 정의한다면, 사고와 행동을 이끌어 가는 개념 또는 관념 체계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논지에서 상당 부분은 아마도 다양한 사회 환경에 존재할 수 있거나 존재할 법한 개념들의 견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문화는 사회적으로 전파되지만, 문화가 사회를 영속화한다는 반대의 주장 또한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실 논쟁거리이고 중요한 문제이다. 물론 특정 문화를 구성하는 개념들은 그 문화의 생명력에 상당히 중요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개념들이 한 사회를 영속화하는 데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 도움이 되느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 영속화가 물리적 억압이나 굶주림의 위협 같은 더욱 현실적인 요소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느냐는 대답하기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역사적 관념론자와 유물론자가 갈라진다. 이 질문의 대답이 왜 언제 어디서나 똑같다고 생각하는가? 개념들은 사회적 제약으로 기능하지만 모든 사회적 제약이 개념적인 건 아니다.
역사가 단계로 이루어져 있고 앞선 단계가 나중 단계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앞선 단계 다음에 반드시 뒤의 단계가 온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발전이 예정되어 있거나 예측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모든 가능성이 실현된다거나 실제로 나타난 발전이 특히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개별 영역들의 바깥에서는 사회적 예측을 할 수가 없다. 특정한 상황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올바르게 파악했다고 해도, 그 요소들의 비율이 (예측할 수 없거나 더 나아가 탐지할 수 없을 만큼) 조금만 바뀌어도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더구나 그 누구도 그 밖에 새로운 요소들이 실재한다거나 실재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거나 어렵다고 해서 ‘이해’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사회질서란 그것을 낳는 기본 요소들로부터 생겨난 하나의 가능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바로 그 요소들의 집합이 다른 결과물을 낳을 수도 있었음을 인식해야 우리는 사회질서를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똑같은 카드들을 쥐고서도 다른 방식으로 패를 쓸 수 있다. 우리는 과거에 어떤 선택이 왜 이루어진 것인지를 알 수도 있고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좋든 나쁘든, 우리는 미래의 결과를 예언하기 힘들다. 따라서 예언은 확실한 믿음을 주거나 위협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유행처럼 예언을 반대하는 이들은 예언이라는 목욕물과 함께 이해라는 아기까지 쏟아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해를 하려면 쓸모없는 예측도 필요한 법이다. 어떤 일이 실현될 것인지 늘 미리 파악할 수는 없지만, 또는 아마도 늘 미리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선택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구조
인류는 크게 ① 수렵채취사회, ② 농경 사회, ③ 산업사회의 세 단계를 거쳐 왔다. 모든 사회가 이 세 단계를 다 거쳐야 한다고 정해 놓은 법은 없다. 의무적인 발전 패턴이라는 것도 없다. 사회는 어떤 특정 단계에 고정되어 있을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하지만 사실 ①에서 곧장 ③으로 이행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고, ③에서 ②로 또는 ②에서 ①로 후퇴하는 것은 상상할 수는 있을지언정 가능하지 않고 또 그렇게 되기도 힘들다. 19세기에 특징적인 철학이나 사회학과는 반대로, 사회가 ①에서 ②로 또는 ②에서 ③으로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나 내적인 필연성은 없다. 오히려 자연발생적이고 내생적인 이행이야말로 본디 불가능한 것이 당연하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거대한 이행에서 두 번째 경우가 특히 그랬다.
이 세 가지 사회는 뿌리부터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른 종을 이룬다. 하지만 각각의 범주 안에서도 매우 크고도 의미 있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이 또한 각각의 사회에 저마다 간명한 특성을 부여한다.
수렵채취인들은 부를 생산하고 축적하고 저장할 수단을 거의 또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로 정의된다. 그들은 자연에서 스스로 찾아내거나 잡은 것을 먹고 산다. 그들이 살던 사회는 낮은 수준에서 분업이 이루어지는 소규모 사회라는 특징이 있다.
농경 사회는 식량을 생산하고 저장하며, 다른 형태의 저장할 수 있는 부를 획득한다. 그런 부 가운데 저장된 식량 말고 가장 중요한 형태는 식량과 다른 재화를 꾸준히 생산하는 수단인 도구, 억압 수단인 무기, ‘상징적 가치’의 재화, 그리고 삶의 질을 뒷받침하거나 문화적으로 드높이는 온갖 물품들이다. 또 이들 사회는 더 큰 규모로 성장할 수도 있다. 노동력과 방위 인력이 필요하다 보니 출산이 중요해지고, 그 결과 인구가 위험한 수준까지 늘어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인구가 크게 늘어서 가용 자원의 한계에 부닥치고 자원이 바닥나면 굶주림을 겪기 쉽다.
농경 사회는 복잡하게 분화되고 분업이 정교해지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전문적인 지배계급과 전문 지식계급의 두 전문 집단이 가장 중요해진다. 전문 지식계급은 지식, 합법화legitimation(어떤 행위나 절차나 이데올로기가 해당 사회의 규범과 가치에 부합함으로써 합법적인 것이 되는 과정―옮긴이), 구원, 제의 전문가들을 가리킨다. 분화된 지식인과 지배계급은 농경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전형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공통적이다.
농경 사회Agraria를 이루는 사회에서도 혁신은 일어나지만 그것이 꾸준하게 축적되는 대표적인 과정은 아니다. 농경 사회는 안정을 중시하며, 일반적으로 세계와 사회질서를 기본적으로 안정된 것으로 인식한다. 농경 사회 가운데에는 파괴적일 수도 있는 혁신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조직된 것처럼 보이는 유형도 있다. 조상들이나 지난날의 제도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면서, 도덕적 기준이자 규범적 이상으로 제시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산업사회는 식량 생산이 밀려나고, 일반적으로 ‘나날이’ 발전하는 뛰어난 기술이 생산의 토대가 되는 사회이다. 기술 발전은 필요하다면 인구 증가를 완전히 뛰어넘을 수 있고 또 그런 현실이 실현되곤 한다. 여기서 산업사회Industria라는 개념은 19세기 영국의 공업도시 랭커셔와 음울하고 사악한 제분소dark satanic mills(윌리엄 블레이크가 쓴 시구로 산업혁명을 상징한다―옮긴이)를 넘어서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어떤 모습을 띠든 때로 ‘탈산업사회’라고 일컫는 것을 포함하기도 한다. 나는 ‘완전히 발전된 산업사회’라는 용어를 더 좋아한다. 마르크스와 디킨스가 얘기한 ‘산업사회’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곧 초기 산업사회를 가리킨다.
농경 사회는 ‘하나’의 발견, 다시 말해 식량 생산 능력에 토대를 두었다. 그 밖의 발견이나 혁신들은 우발적이었고, 설사 혁신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이고 꾸준한 흐름을 타지 않았다. 말하자면, 혁신은 기껏해야 단독 첩보원이었을 뿐 큰 무리를 지은 적이 없었다. 이에 반해 산업사회는 어떤 하나의 발견보다는, 자연을 성공적이고도 체계적으로 탐구할 수 있고 생산량 증가를 위해 그 발견을 적용할 수 있으며, 자연에 대한 탐구와 발견의 적용은 일단 시작되기만 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2차 발견 또는 포괄적인 발견을 토대로 한다. 그 테크놀로지의 본성으로 인해 무척 규모가 큰 생산조직의 실재가 산업사회의 특징이 된다. 그렇다고 대규모 생산조직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혁신의 필요성은, 산업사회가 복합적인 분업뿐 아니라 늘 변화하는 직업 구조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어느 정도의 억압과 합법화는 본디 인간 사회에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구조가 인간의 유전적 잠재력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는 사실의 귀결이다. 유전적 구성이 똑같거나 비슷한 사람들이 표출하는 가능성의 범위가 몹시 넓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구조는 더 이상 자연에 의해 강제되는 게 아니라 다른 메커니즘의 영향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메커니즘의 요소 가운데 하나가 억압이고, 합법성과 유죄 판결은 또 다른 요소로 여겨진다.
합법화 과정은 완벽하게 평범한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는 인격에 부여된 마력이나 교리, 또는 그 둘 다를 이용해서 자신의 관점이나 규범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위대한 예지자나 예언자 또는 조직가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화표를 가진 사람을 지정된 좌석으로 안내하는 안내인의 평범한 일도 똑같이 합법화의 표본이다. 좌석 안내인이 없다면 관객들은 혼란에 빠지거나 불편을 겪을 것이다. 반발을 일으키지 않고 자리를 지정하는 능력이 바로 합법화의 전형이다. 억압자와 합법화 전문가legitimator는 보완적이다. 합법화 전문가를 보증하는 건 특정한 권력 상황이다. 하지만 그와 똑같이, 권력균형은 집단들의 본성과 규모와 지위에 따라 달라지고, 그것은 다시 각 사회에서 사람들을 지정 좌석으로 안내하는 좌석 안내인의 특별한 것 없는 일상적 활동을 기반으로 한다. 그 규모와 복합성 덕분에, 농경 사회는 필연적으로 억압과 합법화 제도를 유지한다. 그 체제는 농경 이전 사회의 선조들이 지닌 것보다 훨씬 정교하다. 그런가 하면 산업사회를 특징짓고 아마도 정의하는 것은 매우 특징적인 유형의 억압과 분업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농경 세계보다 더 단순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훨씬 복잡하다.
3단계론
인류 역사에 관한 3단계론들은 일반적이다. 어떤 것은 상당히 흥미롭고 장점이 있기에 이 책에서 살펴보고 넘어갈 만하다. 3단계론의 기원은 성부의 시대, 성자의 시대, 성령의 시대를 가정한 중세 사상가 피오레의 요아킴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은 3단계론이 기독교의 눈에 띄는 장점이고 인간의 운명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여겼다. 오귀스트 콩트는 인간 정신과 인간 사회의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단계를 구분했다. 제임스 프레이저 경은 적어도 공인된 그의 주요 이론으로 볼 때 콩트와 같은 주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주술의 시대, 종교의 시대, 과학의 시대로 구분했으나, 각각의 시대는 독자적인 현존에 의해 정의되는 게 아니라 사유 양식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가 우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단계는 세 단계가 넘지만 기본적으로 세 가지로 시대를 구분했다고 재해석할 수 있다. 인류가 잉여도 착취도 몰랐던 시대, 잉여와 착취가 뚜렷하게 존재하던 시대, 그리고 잉여는 있으나 착취가 사라진 시대가 그것이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사유 양식보다는 생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특징을 찾고 있던 칼 폴라니는 호혜주의 사회, 재분배 사회, 시장사회의 세 단계를 주장했다.
모든 분류가 그렇듯 역사를 시기로 구분하는 것은 참이냐 거짓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 상당히 유용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지식에 비추어 볼 때,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수렵채취, 농업 생산, 산업생산의 3단계 구성이 다른 3단계론보다 훨씬 유용하고 그런 의미에서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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