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충성하라!”
잡지 『에스콰이어』 에 실린 「누구나 마스터해야 하는 75가지 기술」이라는 기사에서 열거한, 오늘날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조언 중 하나다. 이 기사에서 다루는 내용은 나비넥타이를 매는 법, 캠프파 이어를 할 장작에 불을 붙이는 법, 강한 회전력을 실어 축구공을 차 는 법처럼 대부분 가볍고 하찮은 것들이다. 그런 잡지에서, 도덕적인 태도를 선택하라는 조언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 잡지는 이 조언에 대해 “아무런 기대 없이 주었을 때 가장 눈부신 보상으로 돌아 오는 것이 바로 이타성의 원리”라고 설명한다.
충성하라는 교훈이 나비넥타이를 매는 것처럼 고리타분하게 여 겨진다 해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삶에 그런 고색창연한 미덕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여기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충성이 밥 먹여주나’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 19세기 말 아일랜드의 소설가이자 국회의원이었던 저스틴 매카시Justin McCarthy 는 이렇게 썼다. “헌신적인 개인적 충성이라는 정신은 이제 낡아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우리 추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충성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시적인 회한을 노래하는 것에 불과하다. (……) 충성은 절대 되살아나거나 복원되지 않을 것이다.” 몇백 년 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이러한 충성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마지막 숨이 멎는 순간까지 진심과 충성으로 주인을 따랐던 믿음직한 하인에게 주인이 건네는 말에서, 그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묘사한다.
고대 세계의 불변하는 충성이
자네 모습 속에서 다시 살아났구려.
시중드는 일이 달콤하기는커녕 고되고 힘들 때조차!
그대는 보상을 약속하지 않으면 누구도 땀 흘리지 않는
이 시대의 유행을 좇지 않는구려.
그러한 불평은 13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시인 뤼트뵈프Rutebeuf는 「콘스탄티노플의 애도La Complainte de Constantinople」에서 당대 의 남자들이 고대 롤랑 시대의 신념이 굳은 영웅을 닮기 위해 노력 하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면서 “충성은 죽었다. 사라졌다”라고 말한 다. 또한 기원전 2세기 로마의 극작가 테렌티우스는 충성스러운 성품을 지닌 사람에 대해 “고대의 덕목을 가지고 있다”라고 묘사한다. 충성은 또한 “어떤 시대에나 이전 시대에만 존재했던 것”이라는 냉소적인 로마의 격언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근본 없는 우리 시대는 충성에 관해서는 더욱 황폐한 환경처럼 보인다. 우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이듯, 우리 우정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우정이 아무런 비용도 지불할 필요 없이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거래가 되어버린 페이스북 세대에게 충성이란 어떤 의미일까? 서로 자신의 친구목록에 넣어주겠다는 친구요청에 불과한 것일까? 이제 친구란 하이퍼링크로 맺어진 관계일 뿐, 영원한 이타적 믿음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충성은 신뢰에 관한 것이다. 믿지 못하는 시대에 친구는 담보 대출로 맺어진 관계만큼이나 불확실하다. 버나드 메이도프Bernard Madoff는 다단계 금융사기수법으로 얼마나 많은 ‘친구’들을 등쳐먹었는가? 오늘날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진정한 혼란 속에서 절망적인 의심은 얼마나 불안하게 느껴지는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충성이 진부한 것으로 인식된다면, 우리는 왜 충성을 계속 찬미할까? 충성은 우리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근본 중에서도 근본이기 때문이다. 충성이 없으면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 충성이 없으면 가족도 존재할 수 없다. 충성이 없으면 친 구도 존재할 수 없다. 충성이 없으면 공동체나 국가에 헌신할 수도 없다. 충성이 없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로버트 하인라인Robert Heinlein은 이렇게 말한다. “충성이 불명예로 취급받는 곳에서는 최대 한 빨리 빠져나오라! 자기 목숨 하나는 살릴 수 있겠지만, 그런 집단은 살릴 수 없다. 너무 늦었다. 집단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충성에는 힘과 회복성이 있다. 보니 프린스 찰리Bonnie Prince Charlie는 재커바이트 반란이 실패한 뒤 스코틀랜드를 탈출하여 망명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영국사』를 잇는 책에서 토비아스 스몰렛Tobias Smollet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50여 명의 충성 덕분에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비천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또한 찰리의 목에 현상금 3만 파운드가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배신하고 고발하기만 하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부를 얻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증오했다. 도리어 자신들이 파멸할 위험이 있었는데도 극도의 열정과 충정으로 찰리를 보필했다.” 그렇게 왕자는 결국 탈출에 성공했다.
파멸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가장 극단적인 충성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충성은 언제나 자발적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래서 충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늘 극단을 달렸다. 진실을 배신하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구약 성서의 욥기는 충성을 지키고자 하는 한 남자에게 얼마나 많은 불행이 닥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욥은 그 모든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꿋꿋이 버티며 파괴되고 절망할 때조차 신을 찬양한다. 욥기의 핵심은, 파멸과 절망 앞에서도 충절을 지키는지 시험하는 것이 유일 한 진짜 충성 테스트라는 점이다. 체스터턴G. K. Chesterton은 이렇게 말한다. “충성이란 곧 불행한 상황에서 배신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 다.” 또 철학자 조사이어 로이스Josiah Royce는 이렇게 말한다. “충성은 그런 슬픔 없이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라갈 수 없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명백한 진실이다.”
우리는 친구에게 의지하고 싶어하지만, 모든 일이 제대로 풀릴 때는 어느 친구가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인지 알 수 없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처럼, 돈으로 많은 친구를 살 수는 있지만 돈이 떨어지면 그런 친구들은 모두 떨어져나간다. 이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가장 잔인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우리 는 그런 진실을 친구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순간에 깨닫는다는 것이다.
운이 따라준다면 아직 우리 곁에는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 가족, 연인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경계를 풀고 모든 것을 터놓을 수 있는 믿음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다. 물론 경솔한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우정의 정의는 아니겠지만, 우정이 제대로 그 가치를 지니려면 그런 공유는 본질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자신을 열어 보여줄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진실한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런 종류의 믿음은 함께 사는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훨씬 중요 하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자연상태의 삶이 “고독하고 초라하고 더럽고 야만적이며 부족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발전한 사회에 서도 우리는 밤에 문을 잠가야 하고, 사무실의 금고는 눈을 뜨고 있을 때에도 잠가둬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삶을 조금이나마 덜 지저분하고 덜 야만적으로 만드는 관계는 우리의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관계이다. 도둑이라고 의심이 가는 사람 옆에서는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다. 믿음이 핵심 이다. 충성이란 믿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미덕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충성을 경험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충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아마도 그런 희소성이 충성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반대로 배신은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다. 작은 배신(둘만의 비밀을 자꾸 누설하는 친구)과 큰 배신(국가에 대한 반역)이 존재하며, 이 둘 사이에 다양한 배신(부부의 공동계좌에 서 돈을 모두 빼돌려 정부情婦와 함께 달아나는 남편, 구두口頭로 사업계약을 한 뒤 나중에 강제력을 지닌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을 바꾸는 친구 등)이 존재한다. 배신이 그처럼 만연하는 듯 보이는 것은, 부분적으로 충성보다 배신이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누군가 보니 프린스 찰리를 밀고했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충성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충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이 아니라, 49명의 충성은 한 명의 배신자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배신이 흔하기는 하지만, 배신을 아무리 자주 경험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쓰라림에 절대 면역되지 않는다.
단테는 배신을 가장 비열한 악덕이라고 생각했다. 『신곡』의 「지옥」 편에서는 지옥의 여러 단계를 보여준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고문은 더 심해지고 이전 단계보다 훨씬 무시무시하다. 진흙, 수렁, 불바람, 활활 타오르는 지옥불, 피의 강을 거쳐 내려가면, 맨 아래 아홉번째 지옥에 도달한다. 이곳은 가장 악랄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곳으로, 최악의 고문이 자행된다. 이곳에 떨어지는 가장 악랄한 죄는 바로 ‘불충’이다. (가벼운 죄에서 무거운 죄의 순서로) 가족을 배신한 사람, 국가를 배신한 사람, 손님과 친구를 배신한 사람이 이곳에 온다. 바닥이 차가운 얼음으로 되어 있어, 영원히 추위 속에서 신음해야 한다.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을 배신한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고통받고 있다. 이 지옥 한가운데에는 사탄이 있는데, 세 개의 머리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이빨로 배신자의 상징이라 할 브루투스, 카시우스, 유다를 끊임없이 물어 뜯는다.
우리가 배신을 싫어하는 만큼, 충실성이 친구나 연인과 맺는 관계의 토대가 되는 만큼, 이 미덕에는 비극적 오점이 있다. 충성은 언제나 절망적으로 얽히고 타락한다. 우리가 진실하게 헌신하려 한다 해도, 다양한 사람과 맺는 헌신은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상반되는 충성이 빚어내는 갈등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가족에 대한 충실은 친구에 대한 충성(의리)과 충돌할 수 있고, 사적인 충성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충돌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친구에 대한 우정과 진리 사이에서 깊은 고뇌를 해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친구에게 충실할 수 있다. 가족에게 충실할 수 있다. 국가 에 충성할 수 있다. 원칙이나 이상에 충실할 수 있다. 신에게 충성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동시에 충성할 수 있는가? 한번 해 보라.
이처럼 여러 충성이 충돌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갈등 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거기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친구에 대해서만 충실하다고 해도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친구가 여럿 있다면 그 친구들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올 수 있고, 따라서 한두 친구를 배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한 친구에게만 헌신한다 해도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친구에 대한 의리와, 원칙과 진실에 대한 헌신이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 상대방에게 충실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던 자질이 더이상 그렇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면, 우정은 어떻게 될까? 그토록 존경스럽던 친구가 갑자기 존경하던 이상을 위반하는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가 배우자 몰래 부정을 저지르거나 세금을 탈루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에도 끝까지 그의 곁 에 설 것인가? 또, 내가 지키고자 하는 원칙과 확신이 변해 기존의 관계를 더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삶의 복잡한 현실은 언제나 도덕적 판단에 혼란을 선사한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충성의 문제에서 자주 발생한다.
가족은 평생 충성을 훈련하는 장소라고 오랫동안 여겨졌다. 우리가 집에서 배우고 익힌 헌신은 도덕적 근육이 되고 친구, 공동체, 국가, 진실에 헌신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가족에 대한 충성과 다른 의무가 갈등하는 경우, 가족의 유대를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1957년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무장독립투쟁을 하던 알제리 독립운동가를 추모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카뮈는 거절했다. 무장테러로 ‘나의 어머니, 나의 가족도 죽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다. 가족에 대한 그의 충직한 헌신은 가족을 보호 하지 않는 국가에 충성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강렬한 도덕성이라 판단하여, 당시 유행하던 무장폭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던 도덕적 추상성에 동참하지 않았다. 카뮈는 말한다. “나는 정의를 믿는다. 하지만 나는, 정의보다는 어머니를 먼저 지킬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무자비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가족은 장애물로 취급된다. 나치와 소비에트는 시민이 충성할 유일한 대상이 국가가 되도록 하기 위해 가족 간의 유대를 끊으려 노력했다. 이처럼 가족을 감시하고 고발하라고 요구하는 ‘정의’는 늘 경계해야 한다.
한편 가족에 대한 충성이 다른 헌신을 가로막는 것도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가족에 대한 의리만을 최고로 여기며 정의를 무시하는 사회는 시칠리아에 만연한 마피아 문화처럼 씨족사회의 역효과만 양산할 것이다.
또 가족에 대한 충성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중대한 의무마저도 배신하도록 이끌 수 있다.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로버트 리Robert E. Lee장군은 국가에 대한 헌신과 분리주의가 지배하는 버지니아에 사는 가족 사이에서 고뇌했다. 그는 결국 가족을 선택했다. 그는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국가에 대한 헌신과 미국 시민으로서 품은 충성심과 의무감만으로, 나는 가족, 아이들, 집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성에 서열을 매기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원칙에 대한 충성이 언제나 사람에 대한 충성보다 우선한다고, 또는 사람이 원칙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족이 항상 국가보다 우선한다거나 국가가 가족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친구에 대한 의무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러한 문제의 극단적인 해결책은,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드는 관계를 모두 끊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에게 무엇인가 기대하고 바라는 사람들이 없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러한 충돌이 일어날 확률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영화 <인디에어Up in the Air>에서 조지 클루니는 사람들을 자꾸 자신의 등 위에 올려놓지 말라고 주장하며, 홀가분하게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충성이 소중한 덕목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충성이 우리에게 안전망이나 구명보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리 있는 친구나 가족은 우리가 언젠가 위험에 처할 때 보호해주는 보험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우정과 사랑에 문을 여는 순간, 가장 심각한 위험도 함께 들어온다. 우정과 사랑은 우리 운명을 다른 사람과 묶어주는 것이기에, 이로써 불행한 운명과 접촉할 확률도 높아진다. 친구에 대한 헌신과 원칙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하나는 배신할 수밖에 없는, 도덕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할 확률도 높아진다.
충성은 이처럼 한편으로 우리를 위험에서 보호해주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새로운 위험을 무수히 안겨주는 기묘한 미덕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와 마하트마 간디 같은 순수주의자들은 절대로 친구를 사귀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러면 친구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설 필요도 없고, 가짜 우정에 배신당하고 실망할 일도 없다.
충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구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해법에 공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친구를 모두 버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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