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교육에 대한 기본 견해
여기 이 자리에는 우리 글쓰기회가 지향하고 있는 교육을 이론면에서나 실천면에서 앞장서고 있는 분들이 여럿 계시기도 하지만, 회원이 아닌 분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의 기본 입장을 밝혀 보이는 일이 무엇보다도 긴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부터 들어 보는 글쓰기에 대한 몇 가지 기본 견해는, 어떤 집단 토론이란 형식을 거친 것은 아니고 저 혼자의 생각입니다만, 이것이 우리 글쓰기 교육을 나날이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한편 이 교육을 널리 펴 나가는 일을 온몸을 던져서 하고 있는 모든 우리 동지들의 공통된 견해라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 교육 동지들의 공통 견해라고 생각되는 것을 몇 가지 정리해 보는 심정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 얘기가 끝나면 우리 회원이든 아니든 누구든지 자유스럽게 제가 발언한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해주시거나 토론해 주시기 바랍니다.
1. 글쓰기 교육은 삶을 가꾸는 데 그 목표가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아주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은 글쓰기 교육의 목표입니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글을 쓰는 특별한 기술이나 재주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글쓰기 지도의 목표는 상을 타고 이름을 낼만한 작품을 생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삶을 키워 가는 데 목표가 있습니다. 글을 어떻게 쓰나 하는 문제는 삶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가꾸나 하는 문제에 직결됩니다. 삶을 떠난 글쓰기의 기술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아이들을 속이고,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이런 타락된 속임수 교육이 지금도 우리 교육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교육 풍조는 머지않아 반드시 바로잡힐 것이라 우리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며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 수단이며 과정입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글의 형식보다 내용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형식에 무게를 주어 지도할 때도 그것이 내용과 깊이 관련되었기에 중시하는 것입니다. 즉 삶을 키워 가는 데 긴요하거나, 적어도 삶을 왜곡하는 몸가짐이 되지 않는다고 인정되었을 경우에만 형식면의 지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글쓰기 지도의 단계에서 글 고치기 지도보다 글감 찾기 지도를 중시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백일장, 글짓기 대회 같은 행사에 아이들을 참가시키지 않으려고 하고 신문 잡지에 아이들 글을 발표하는 일을 삼가하고, 그 대신 학급문집을 만들어 보이는 데 힘을 기울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들 교육에서 글쓰기를 위한 글쓰기가 있을 수 없는 것은, 마치 문학을 위한 문학이 속임수가 되거나 아무런 뜻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사람을 위한 문학만이 참 문학이 되듯이, 삶을 가꾸는 노력에서만 참 글이 쓰입니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에게 시인이나 문학 작가가 되도록 하는 특수 교육을 하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가령 문인을 기르는 교육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삶을 가꾸는 일을 통하지 않고는 참된 문인이 될 수 있는 기본 바탕을 닦고 수련을 쌓는 길이 없다고 봅니다.
2. 참된 삶이란 어떤 삶인가
그러면 참된 삶이란 어떤 삶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 참된 삶이란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겨레의 한 사람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말합니다. 글쓰기로서 가꾸어야 할 우리 겨레의 아들딸의 바람직스런 참 모습을 저는 다음과 같이 들어 됩니다. 이렇게 드는 여러 가지 어린이 모습들은 더러 비슷한 진술이 있고, 또 이 모두가 서로 어떤 한 맥으로 이어져 있다고 하겠는데, 다만 그 강조하는 각도나 측면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 교육자의 자질과 개성에 따라서 그 어느 항목을 더 중시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만 이 모든 진술 목표를 포괄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맨 첫 번째에 들어 놓은 민주적 삶을 몸에 붙이는 일이라 봅니다.
① 참된 민주적 삶을 실천하는 어린이.
② 어린이다운(사람다운) 감능, 사고, 행동을 가진 어린이.
③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파악하고, 참 이치를 생각하는 어린이.
④ 겸손하고, 양보할 줄 알며, 남을 도와주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어린이.
⑤ 약한 자, 불행한 자의 편에 서는 어린이.
⑥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감을 갖는 어린이.
⑦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높이 보고, 일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어린이.
⑧ 물욕에 사로잡히지 않는 어린이.
⑨ 어려운 일을 참고 이겨내는 어린이.
⑩ 창조적 태도를 가진 어린이.
⑪ 자기의 느낌과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하는 어린이.
⑫ 사치하지 않고 검소한 어린이.
⑬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어린이.
⑭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린이.
이 열네 가지 항목에 공통되는 목표를 추상해서 짧게 말하면 '자유를 지키고, 평화를 사랑하고, 평등을 염원하는 어린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글쓰기 교육의 이념입니다. 교육을 실천하시는 여러분은 위의 여러 가지 항목 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 각자가 맡으신 학급의 교육 목표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진술 용어를 더 적절하게 수정할 수 있겠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3. 글쓰기 교육은 어린이의 세계를 지키고 가꾸어 가는 교육이다
자유를 지키고, 평화를 사랑하고, 평등을 염원하는 민주적 어린이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은, 오늘날의 비인간적 교육 상황에 어절 수 없이 맞서게 되며, 입신출세식 교육 풍조를 비판하여 이를 극복하는 인간 교육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점수 따기 경쟁 교육은 다음에 드는 여러 가지 병적 증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① 인간과 인간의 분열을 조장하고 이기주의적 삶, 서로 미워하고 해치는 동물 이하의 삶으로 인간을 타락시킨다.
② 물욕을 충족시키는 것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게 한다. 그리하여 사치, 낭비, 허영을 즐기게 한다.
③ ‘힘’을 숭배하게 하고, ‘힘’ 앞에 아부 아첨하고, 수단과 요령으로 살아가게 한다.
④ 속임수, 거짓 꾸밈, 세련됨 등이 삶의 방편이 되고, 출세의 수단이 된다.
⑤ 자기보다 더 약한 자를 짓밟음으로써 열등감을 해소하고, 남의 것, 외국 것을 부러워하고 숭배하게 한다.
⑥ 유행을 따르고 획일화를 좋아하며, 동물적 삶 속에 안주하는 노예근성을 기른다.
⑦ 일하는 사람을 멸시하며, 게으름에 빠지고 타락한 삶을 즐기게 한다.
이것이 모두 교육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병든 어른이 됩니다. 이러한 반인간의 교육, 어린이를 어른으로 개조하는 교육, 어린이를 잡는 교육에 우리는 감연히 맞서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지키는 교육, 인간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어린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어린이를 지키는 교육을 하려면 어린이의 참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① 어린이는 정직합니다.
② 어린이는 단순 소박합니다. 이 단순 소박이야말로 진리를 가진 징표입니다.
③ 어린이는 겸허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결코 사치하지 않고 겉을 꾸미지 않습니다.
④ 어린이는 늘 움직입니다. 행동적입니다. 이것은 놀이를 겸한 근로(노동)가 어린이를 즐겁게 하고 어린이를 키워 주는 이유가 됩니다.
⑤ 어린이는 자연을 좋아하며, 자연 속에서 가장 행복하게 자라납니다.
⑥ 어린이는 능숙하고 세련된 것보다 서툴고 촌스러운 것을 오히려 더 친근하게 대합니다. 어린이는 야성적입니다. 야성적인 것이야말로 부패와 타락을 막는 인간의 생명입니다.
이러한 어린이의 마음, 어린이의 세계를 믿고 이것을 지키고 가꾸어 가는 것이 글쓰기 교육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앞에서 열거한,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어른의 세계는 도시적인 삶의 세계라 할 수 있고, 뒤에 들어 놓은 어린이의 세계는 농촌적인 삶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른들의 그릇된 교육에서 아이들을 지키는 참 교육은, 도시적인 삶에 맞서는 농촌적 삶을 가르치는 교육, 농촌적 삶을 회복하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글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까닭은 거기에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글을 읽고 감동을 받는 것은 거기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없는 곳에는 어떤 아름다움도 감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진실이 없는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감동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병들었거나 진실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진실의 겉모습이요, 감동은 진실의 울림입니다.
아이들의 글을 읽었을 때 우리는 흔히 감동합니다.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고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글의 아름다움은 어린이의 삶의 아름다움입니다. 어린이 글의 진실은 어린이의 삶의 진실입니다.
그러면 삶의 아름다움, 또는 진실이란 무엇일까요?
만약에 여기 어떤 아이가 어린이답지 않게 호화판 생일잔치를 벌여 제 친구들을 초대해서는 잘 먹고 잘 놀았다는 얘기를 글로 썼다고 합시다. 그런 얘기는 사실이지만 진실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세상에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았다는 얘기에 감동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집이 가난해서 생일잔치도 못하는 아이가 남의 생일잔치에 초대도 못 받고, 길가에서 나물을 파는 어머니를 위해 산에 나물을 뜯으러 갔던 얘기를 쓴 글이 있다면 그 글은 감동을 줍니다. 거기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삶에는 진실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가난한 삶이라 해도 좋고, 평범한 백성들의 삶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소박함, 단순함, 정직함, 자연스러움이 있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거기에는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이 있고, 고난과 역경을 참고 이겨 내는 마음이 있고, 남을 동정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정신이 있고, 눈물(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요!)이 있고,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있습니다. 가난한 삶이야말로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그리고 어린이의 마음, 어린이의 삶은 본질적으로 가난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물질이 넉넉한 사람의 삶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사치와 낭비, 오만과 멸시, 안일과 나태, 거짓과 허세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타락이요, 죄악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한 것입니다. 이 물질적 부유의 세계가 바로 어른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어른도 가난한 마음을 가지면 어린이의 세계를 잃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린이도 물욕을 가졌다면 이미 어린이의 마음을 잃고 서글픈 어른이 된 것입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무조건 아름답게 느껴져서 그 모습을 그리기에만 정신을 쏟았다고 말한 어느 화가의 말은 참으로 공감이 갑니다. 그 화가와 비슷한 말을 저도 하고 싶습니다.
‘강요받지 않고 다만 쓰고 싶어서 어쩔 수 얼이 써 놓은 어린이의 글은 무조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담긴 글을 쓰게 하여 그들을 키워 가려고 합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