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
어떻게 여행서를 쓸 것인가
여행 가이드북들이 진주 꿰듯 고정관념들을 줄줄이 꿰기만 한다는 비판을 종종 듣는다. 런던 하면 안개, 뉴욕 하면 문화의 ‘멜팅 팟melting-pot’, 모리셔스 섬 하면 꿈의 해변, 북구와 ‘그곳의 도시에 부족한 파란색을 눈동자에 담고 있는 사람들’……. 여행 가이드북은 클리셰를 만들어내는가? 혹은 이미 기존에 있던 편견들이 여행 가이드북을 만나서 확고해진다는 점에서 클리셰의 도매상인들이라고 해야 하려나? 하지만 모리셔스 섬이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다든가 슈티* 사람들은 도량이 넓다는 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 Ch'tis, 프랑스 최북단 지역의 사람들과 그들이 쓰는 사투리를 가리킨다.
어쨌거나 이 문제는 해결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그동안 여행 가이드북 편집자들은 똑같은 이미지를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었다. 과거에 그들은 ‘명암이 엇갈리는 땅 인도’, ‘미소의 나라 태국’, ‘콜마르, 동구의 작은 베네치아’ 따위의 진부한 문구들을 서로 퍼뜨리고 다녔다. 오늘날 그들은 클리셰 추방운동에 나섰다.
작가들도 좀 더 신경 써서 언어를 구사해 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림 같은’, ‘특유의’, ‘진정성 있는’ 따위의 닳고 닳은 표현들은 추방대상이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림 같은 것, 특유의 것, 진정성 있는 걸 추구하는데도 여행 가이드북 작가는 더 이상 그런 말을 쓰면 안 된다.
출판사가 여행 가이드북 작가들에게 내세우는 헌장에는 그 밖에도 몇 가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이 나타나 있다. 작가는 반드시 독자에게 친근한 느낌을 주되 지나친 속어의 남발은 삼가야 하며, 시대감각을 갖되 너무 유행을 타서는 안 되고, 정중하되 갑갑해선 안 되며, 정보 전달에 무게를 두되 개성이 드러나야 하고, 독자를 편안하게 품어주되 작가가 독자를 내려다본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되고, 통통 튀면서도 도발적이지 않아야 한다. 간결하되 무뚝뚝하면 안 되고, 명쾌하되 문장이 너무 짧아서는 안 되며, 비판적이되 엄격한 느낌은 주지 않아야 한다. 출판사는 작가에게 자기 생각은 속에 담아두고 개인적 신념들을 드러내지 말라고 명한다. 지나친 서정성이나 투쟁적인 태도도 금한다. (너무 진부하기 때문에) 석양의 한 장면을 묘사하지도 말고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권위적인 정치체제를 비난하지도 말라고 한다. 잔잔한 유머를 가미하되 지나친 익살, 너무 쉬운 문장, 어디서 본 듯한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논쟁에 빠지거나 ‘아는 사람만 아는 사적인 농담’을 해서도 안 된다.
요컨대, 출판사가 이렇게 제약을 많이 걸어놓기 때문에 여행 가이드북 작가는 “팔레르모는 시칠리아의 주도州都다”라고 첫 줄을 쓰자마자 오만 가지 회의에 사로잡힐 지경이다. 너무 많은 얘기를 한 게 아닐까? 문장이 너무 짧지 않나? 너무 정보 지향적인가? 좀 더 비유적으로 써볼까?
운이 좋아 오랫동안 통하는 클리셰도 있지만 상당수의 클리셰들은 완전히 현실과 어긋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행 가이드북 작가는 항상 클리셰에서 벗어난 걸 보면 관심 있게 다루어보고 싶어진다. 뭔가 특종을 터뜨리는 기분이랄까. 예를 들어 모리셔스 섬의 해변이 천국처럼 아름다운 곳이 전혀 아니라면?
물론 터키블루와 군청색 사이에서 흔들리는 바닷물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해변 그 자체는 실망스러웠다. 야자나무는 호텔 전용 해변에만 있었고 잎사귀가 빈약한 쇠뜨기나무들만 즐비했다. 모래도 곱지 않았고 콘크리트용 거친 모래에 여기저기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페트병과 코코넛 껍데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무엇보다 몇 킬로미터에 달하는 해변은 길이가 몇 킬로미터에 달한다지만 폭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좁았다. 비치타월을 두 장만 펼쳐도 모래사장은 꽉 차고 나머지는 다 산호초였다.
해수욕을 즐기기에도 좋은 곳은 아니었다. 파도를 즐길 꿈은 꾸지도 마라. 그 해변에는 파도가 치지 않는다. 섬을 빙 둘러싼 산호초 때문이다. 대양의 파도는 산호초에 부딪혀 부서진다. 덕분에 섬을 둘러싼 초호는 넘실대는 바닷물을 일종의 욕조처럼 담고 있다. 모리셔스 섬 어디에서 바다에 뛰어들든 간에 미지근한 물이 허리까지 찰 뿐, 결코 그 이상으로 높아지진 않는다. 여기서 바다수영을 즐긴다는 얘기는 시립수영장의 어린이용 풀에서 장거리 수영연습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진짜 바다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은 그 넓은 초호를, 날카로운 산호들의 벽을 넘어가야 한다. 이 위험한 시도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가끔 무모하게 바다까지 나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결국 산호대와 충돌해서 어디가 부러지든가 사냥감이 오가는 길목에 어슬렁대는 상어, 창꼬치, 그 밖의 포악한 육식성 고기들의 밥이 되고 만다.
하지만 내가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아직 하지 않은 얘기가 있다. 모리셔스 섬에서는 플라스틱 샌들을 신고 수영을 해야 한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깨진 산호조각들이 얼마나 날카롭고 위험한지 모른다. 수없이 널린 개불(또는 해삼)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않겠다. 이 시커멓고 커다란 의충동물들은 바다 밑바닥에 개똥처럼 널려 있다. 따라서 수중 마스크를 쓰고 잘 보지 않으면 개불을 밟을 확률은 매우 높다. 파리에서 개똥 밟기 싫어 모리셔스 섬까지 왔는데 개불을 밟는다면 기분이 참 좋기도 하겠다.
요약하겠다. 모리셔스 섬은 해수욕 관광지로 인기가 높지만 해변은 좁아터졌고 산호초는 위험하며 바닷물은 어린이풀 깊이밖에 안 되고 징그러운 생물들이 들끓는다. 하지만 여행안내소, 여행사, 지역 관광청에서는 끊임없이 모리셔스 섬으로 가보라고, 그곳에 비치타월을 펼치라고 꼬드긴다. 여행 가이드북 작가에게 이건 양심의 문제다. 진실을 모두 밝혀야만 하나?(플라스틱 샌들, 허리까지밖에 안 차는 물, 징그러운 개불 등) 아니면 그림엽서처럼 판에 박힌 이미지들로 미화를 해야만 하나?(아, 터키블루 빛깔의 초호여! 아, 감미로운 무역풍이여!) 답은 당연히 2번이다. 독자를 약간 조심시키는 것은 좋다. 하지만 독자를 겁먹게 해선 안 된다. 독자가 ‘여행’ 서가에서 서성대고 있다. 그는 여행 가이드북을 들춰보며 심사숙고한다. 그는 여행 가이드북이 의욕을 불러일으켜주기를, 감미로운 말들을 속삭여주기를 기대한다. 그는 잠시 꿈을 꾸고 싶어 한다. 그런데 책을 읽어도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약간 과장하는 맛, 살살 달래주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그는 책을 다시 서가에 꽂는다. 이렇게 해서 독자 한 명이 달아나버렸다!
나 개인적으로도 론리플래닛 여행서의 조언을 읽을 때면 묘한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만 론리플래닛의 어떤 대목들은 여행지에서 걸릴 수 있는 온갖 질병들을 냉정하게 나열한다. ‘볼리비아’ 편에서 짧은 예를 들어보겠다. 혈전증, 황열병, 뇌수막염, 말라리아, 톡소플라스마병……. 이거야말로 플로베르식의 나열, 그것도 편집증적인 버전이다.
그뿐인가, 론리플래닛은 남아프리카에서 선탠을 즐길 확률보다 차가운 시체가 될 확률이 더 높다는 식으로 말한다. 론리플래닛 ‘남아프리카 공화국’ 편에서 ‘범죄와 치안’ 장을 보면 이 나라에서(특히 요하네스버그에서) 무사히 살아남으려면 여행자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수칙이 최소한 열두 개는 나온다. 심지어 ‘현금지급기를 이용하면서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이라는 소제목 하에 현금지급기에서 목숨에 지장 없이 돈을 꺼내기 위한 행동수칙만 아홉 가지가 나온다.
나는 구판 론리플래닛 ‘오스트레일리아’ 편에서 다음 대목을 인용하고픈 충동을 참을 수 없다.
해파리. 바다에서 만날 수 있는 상자해파리box jellyfish는 ‘바다의 말벌’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이 해파리의 촉수에는 독이 있는데 몸 뒤로 몇 미터 거리까지 뻗어나갈 수 있으며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해파리에 쏘인 사람은 즉시 비명을 지르며 물에서 뛰쳐나와 해변에서 데굴데굴 구를 것이다. 이런 사람의 몸에서는 채찍 자국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해파리에 쏘인 사람이 사망하는 확률은 꽤 높다.
1999년도 판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그래도 개정판을 찍으면서 독자에 대한 경고는 점차 완화되었다. 이제 오스트레일리아는 더 이상 공포영화의 배경처럼 묘사되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작가에게 “해파리 얘기는 짧게 넘어가요!”라고 주문했을 거다. 그 결과 가장 최근 판에서는 딱히 더 안심이 되진 않지만 간략한 문장이 쓰였다. “상자해파리에 쏘이면 매우 아프며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뱀에 물린다고 즉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왠지 모르지만 나는 위에서 인용한 무시무시한 묘사보다 임상적 관찰을 방불케 하는 이 짤막한 언급들이 더 무섭다.
하여간 서점에서 책을 들춰보다가 이런 대목을 읽었다는 이유로 오스트레일리아에 가고 싶은 마음이 달아났다는 말은 하지 마라. 나는 그런 말 안 믿는다.
정보는 전달하되 겁주지는 말 것, 이게 여행 가이드북 작가의 묘다. 이건 아주 섬세한 기술이다. 클리셰 하나가 무너질 때마다 여행객은 겁을 먹게 되어 있으니까. 퀸즈랜드 해변에서 피칠갑 시체로 생을 마감할까 봐 겁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가장 큰 두려움은 휴가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가장 큰 즐거움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가장 아름다운 섬, 가장 근사한 성을 빗겨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림엽서 같은 배경 속에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요즘 사람들은 여행안내책자, 여행사 카탈로그, 지하철 포스터에 실린 사진과 똑같은 풍광을 보고 와야만 여행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종려나무, 백사장, 터키블루 빛깔의 물. 사막, 단봉낙타, 박하차. 피요르드, 터틀넥, 등산용 지팡이. 뭐, 좋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세이셸 제도, 모로코, 노르웨이, 전부 참 좋다.(사진에는 머리채를 땋은 스칸디나비아 미녀도 불타는 석양을 배경으로 등장하지만 그런 부분까지 트집 잡진 않겠다.) 여러분이 무엇을 원하든 클리셰는 여러분을 안심시켜 준다. 미국에서 제일 높은 빌딩에 가보고, 미국에서 제일 많이 팔린다는 햄버거를 먹지 않으면 미국 여행을 한 것 같지가 않다. 여행 가이드북 독자들을 끊임없이 안심시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베네치아까지 가서 곤돌라를 타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네, 독자님, 말이 되고말고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곤돌라를 탈 수 있는 곳도 기꺼이 가르쳐드릴게요.
여행 가이드북 작가는 때때로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야만 한다. 그러한 진실들이 불편해서 못 밝히는 게 아니라 그 진실들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자기 혼자뿐이라서 그렇다.
나는 아일랜드 취재여행을 하는 동안 매일 저녁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펍을 드나들었다. 여러분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고 참 괜찮다느니, 성격이 화끈하고 프랑스 사람들에게 특히 잘한다느니 하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거다. 그런데 삼 주간 그렇게 술집을 드나들었는데도 카운터 바에 나란히 앉은 사람과 두 마디 이상 나눠본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나마 제일 얘기를 많이 한 상대가 술을 권하는 종업원이었다. 티에리 앙리의 ‘신의 손’ 사건이 있기 전이었는데도 그랬다.*
*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프랑스와 아일랜드의 경기 중에 프랑스 선수 티에리 앙리가 공에 손을 대는 반칙을 범하고도 심판의 제재를 받지 않은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에 대한 아일랜드의 감정이 악화되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일부러 프랑스 사람 티가 나는 영어로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 소용없었다. 모두들 나를 냉담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는 이내 등을 돌렸다. 참으로 모욕적인 경험이었다. 결국 나는 에둘러 말할 것도 없이 직구를 날렸다. “안녕하세요, 전 프랑스 사람인데요. 아, 아일랜드는 참 좋은 나라 같아요! 경치도 정말 아름답고요! 게다가 럭비도 아주 잘하죠!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감격해서…… 나한테도 아일랜드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가 봐요. 1798년 아일랜드 봉기 당시에 프랑스는 아일랜드 편을 들었다는 거 아세요? 아, 빌어먹을 잉글랜드, 그쪽 놈들은 진짜 밥맛이라니까요……. 기네스 한 잔 더 드시겠어요?” 하지만 이 방법도―재수 없게 잉글랜드 사람이 대화상대로 걸려든 때를 제외하고서도―통하지 않았다.
음악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사람 많은 술집이라면 더욱더 곤란하다. 바이올린과 백파이프 소리에 질세라 언성을 높였지만 허사였다.(구석에서 악단이 ‘라이브’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비행기 제트엔진 뺨치는 소음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종업원들조차 나를 무시했다. 종업원이 다른 손님들은 다 상대하면서 나만 무시하는 것만큼 신경질 나는 일도 없다.
프랑스에 돌아온 내게 아일랜드 사람들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어김없이 이렇게 물었다. “그래, 어땠어? 아일랜드 사람들 참 좋지? 내가 골웨이에서 갔을 때 사귀었던 친구들 생각이 나네. 사람 사귀는 게 금방이더라고. 난 하룻밤도 호텔에서 지내지 않았어.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넌 어땠어? 얘기 좀 해봐…….” 나는 혼자서 기네스를 들이켠 사연 외에는 말할 게 없었고, 그러한 사연이 유쾌하다면 크리스마스이브를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는 것도 유쾌하다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책에다 그런 얘기를 쓸 순 없었다. 내가 운이 없어서 그랬는지, 사교성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독자가 알 바 아니다. 독자가 원하는 건 오가는 술잔 속에 평생의 우정을 찾을 수 있는 술집들의 주소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아일랜드와 프랑스는 이제 글러먹었다. 차라리 영국으로 가라.
두말 할 필요도 없겠지만 여행 가이드북 작가는 진짜 작가가 아니다. 그 점은 작가가 어떤 식으로 자기를 드러내는가만 봐도 알 수 있다. 여행 가이드북 작가는 마르셀 프루스트보다는 크로마뇽인에 더 가까운 글쓰기를 구사한다. 그는 ‘먹을 곳’, ‘잘 곳’, ‘마실 곳’, ‘볼 만한 곳’ 얘기밖에 하지 않는다. 뉘앙스나 미학적 효과는 그에게 중요치 않다. 새벽녘에 어느 한 도시에 도착한 진짜 작가는 새벽 미명과 이제 막 깨어나는 거리에 대해서 말할 거다. 여행 가이드북 작가의 글은 훨씬 간결하리라. “버스를 타고 도착하다.” 그곳을 떠나는 순간, 소설가는 마법에서 깨어나듯(혹은 그 비슷한 객설을 늘어놓으며) 서서히 아득해져가는 도시의 실루엣을 묘사할 거다. 여행 가이드북 작가는 “버스를 타고 떠나다”라고만 쓰고 그 아래 버스운행 시간표를 수록할 거다.
그래도 문학적 자아는 어쩔 수 없나니, 저마다 풍경, 도시, 식당을 묘사하면서 개성을 반영하려 애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 가이드북에는 지켜야 하는 양식이 있기 때문에 개성을 어떤 한계 이상으로 발산할 수 없다. 갠지스 강가의 마법을 멋들어지게 그려낸 글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 거다……. 정말 슬픈 일 아닌가?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험가들이 쓴 글이 변변찮을 때가 어디 한두 번인가. 이국 취향이 부족한 재능을 감추기 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을 때가 한두 번인가. 하지만 도대체 뭘 바라는 걸까? 여행기를 쓰는 작가는 일요일에만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비슷하다. 그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이상은 모른다. 여행일러스트 작가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도 않겠다. 이 사람들은 맥 빠지는 그림과 초점도 안 맞는 사진에 그로테스크한 문장 몇 줄 휘갈겨 쓰는 걸로 작가 행세를 하니 점입가경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기가 다녀온 곳의 버스표나 사탕봉지까지 붙여놓고 ‘방랑자’ 티를 낸다.
여행 가이드북 작가들은 이런 짓을 하려야 할 수가 없으니 천만다행이다. 우리는 여행 가이드북은 여행기와 다르다는 말을 수시로 듣는다. 그래도 실용적인 여행 가이드북을 만들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영감과 어휘력이 필요하다. 키클라데스 제도의 어느 한 마을을 묘사하기란 어렵지 않다. 새파란 배경에 하얀 정육면체 돌들이 널려 있다고 하면 땡이다. 문제는 키클라데스 제도에는 제법 큰 섬만 해도 20여 개가 있는데 그중 15개를 동일한 묘사로 때울 수는 없다는 점이다. 동의어를 아무리 동원해도 소용없다. 그런 식으로 말만 바꿔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여러분에게 과제를 한 번 내볼까? 똑같은 방식으로 지어진 목조 가옥들밖에 없는 퀘벡에서 3주를 지내고 나서 어떤 건물을 ‘나무’, ‘널판’, ‘들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5줄 이상 묘사해보라.
여행지가 어디든 마찬가지다. 과들루프 여행 가이드북에서 ‘바다’, ‘해변’, ‘야자나무’라는 단어들을 전부 지워보라. 그러고도 그 책에 멀쩡한 문장들이 5, 6쪽 이상 남는다면 차라리 기적이라 하겠다. 어떤 호텔에 대한 설명은 아마 이런 식이 될 거다. “...에 면해 있는 이 호텔은 꿈의 ...를 조망할 수 있으며 ...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내부는 .... 목재를 써서 ... 전망의 아름다운 객실을 꾸며놓았다. 호텔에서 ...로 바로 통한다.” 나 역시 원래 의미에서 벗어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가급적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는 편이다. ‘요리’는 다음 문장에서 ‘식사’로 바꿔 쓴다. ‘식당’을 ‘맛집’으로 바꿔 쓰고, ‘맛집’은 다시 ‘소문난 집’으로 받아주고, ‘소문난 집’은 먹을 만한 곳’으로 바꿔 쓴다. 이 수법이 좀 더 나아갈 수도 있다. ‘해변’이라고 했다가 ‘바닷가’라고 쓰고, ‘만’은 ‘내포內浦’로 받아주고, ‘바다’는 ‘대양’이 된다. 그냥 ‘호텔’이라고 하면 될 것을 ‘초초화 호텔’, ‘숙박업소’, ‘숙소’ 등으로 계속 말을 바꿔 쓴다.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미끄러짐 없는, 어휘의 파도타기랄까.
형용사의 구사도 만만찮은 과제다. ‘예쁜’, ‘귀여운’, ‘근사한’, ‘장엄한’, ‘찬란한’, ‘호화로운’을 쓰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동의어 사전을 미친 듯이 뒤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환상적인’, ‘눈부신’, ‘경이로운’, ‘파격적인’ 등을 발견하고 과장의 함정에 빠지는 거다. 그 결과는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가 없다. ‘매력적인 작은 호텔’이 여행 가이드북 작가의 펜 끝에서―이미 그는 ‘매력적인’이라는 형용사를 35번, ‘호텔’을 72번이나 썼기 때문에― ‘웅장한 호화 호텔’이 될 수도 있고 ‘감탄 나오는 숙소’, ‘두 번 보기 어려운 숙박업소’가 되기도 한다. 이리하여 진실은 다소 왜곡할지언정 최소한 읽기에는 덜 지루한 문장이 나온다.
비상구
도대체 여행 가이드북 작가란 무엇인가? 그는 피서객도 아니고 모험가도 아니다. 기자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다. 일벌레는 아니지만 게으름뱅이는 더욱더 아니다. 나는 여행 가이드북 작가를 사회 및 관광 차원에서(이 표현에 의미가 있다면) 관광객과 여행자 사이에 위치시키겠다. 그는 여행자와 비슷해지고 싶지만 자존심 상하게도 관광객을 위해 일한다. 요컨대, 그는 방랑자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는 가엾은 인간이다.
아, 방랑자라니! 방랑자가 우리를 얼마나 성가시게 하는데! 방랑자는 우리의 적이다! 그는 국경을 멸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대륙을 넘나든다. 지구를 하나의 마을로 여기고 어디든 제 집처럼 마음이 편하다. 어느 나라, 어떤 문화를 접하든 주눅 들지 않는다. 서아프리카의 마을이나 티베트 사원에도 거리낌 없이 발을 들인다. 그의 종교는 다른 모든 종교들을 포용하며 그의 철학은 모든 근본들과 맞닿아 있다. 동양의 지혜도 찔끔, 아프리카의 에너지도 찔끔, 끌어다 붙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는 미소가 보편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애버리진(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에게 흥미를 품고 캄차카에 직접 가보는 꿈, 손수 초밥을 만드는 꿈을 꾼다. 그는 끊임없이 다른 곳을 꿈꾸며 집에는 마지못해 돌아오고 금세 또 다른 먼 곳으로 떠날 생각에 빠진다……. 아, 얼마나 가증스러운 인간인가!
여행 가이드북 작가는 전혀 다르다. 그는 관광정보로 무장한 작은 병사, 수시로 세계를 누비고 다닐 임무를 띠고 파견된 탓에 어디어디를 다녀왔는지도 헷갈리는 무명씨無名氏다. 그는 여행을 한다. 하지만 그에게 오늘 머리 누일 곳도 알지 못하는 모험가의 도취 따위는 없다. 그의 얼굴은 갈색으로 그을렸지만 자연을 제 집 삼아 살아가는 유목민의 낯빛과 차원이 다르다. 그의 일화에는 다양한 삶을 경험한 방랑자의 일화처럼 통통 튀는 맛이나 이국적 향취가 묻어나지 않는다. 결국 여행 가이드북 작가는 실패한 여행자다.
그를 너무 부러워 마라. 그 딱한 인간이 파티에서 자랑할 거라고는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와 에어프랑스 마일리지밖에 없다. 물론 그도 본능을 따른다면 정해진 코스에서 벗어나 작은 샛길들에 발을 들일 거다. 오지 탐험에만 몇 주를 보내고 원주민들이 만든 목걸이를 걸고 집으로 돌아와 여행 가이드북이 아닌 여행기를 집필할 거다. 하지만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발적인 몇 가지 일들이 그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못하게 막아준다. 그는 여행 가이드북을 써야만 한다. 관광객들이 휴가를 보내는 데 도움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책일지라도. 그 보잘것없는 책이 그의 십자가요, 마지막 구원의 길이다. 현실 세계와의 유일한 끈이다.
언젠가는 나도 집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다 보니 영영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이 설지 누가 알겠는가? 다만 내게는 임무가 있다. 관광객들을 위하여 객실 요금표와 박물관 개관시간표를 수집해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임무가. 물론 나도 훨씬 더 고귀한 임무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임무도 길 잃은 양들에게 도움과 구원이 된다는 점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완수해야 할 것이었다. 오직 자신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위대한 여행자와 달리 여행 가이드북 작가는 남들을 위해서 움직인다. 얼마나 선량한 인간인가. 절대로 잊지 말라. 당신을 위해 수백 장의 식당 메뉴판을 읽느라 눈이 빠질 지경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양념이 지나치게 강한 음식을 꾸역꾸역 먹느라 위장병이 생긴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박물관에서 하품을 연발하다 턱이 나갈 지경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친애하는 독자여, 다음번에 여행 가이드북을 읽게 되거든 이 점을 생각해 주기 바란다. 시대에 뒤떨어진 정보와 역사적 오류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이 있음에 감사한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