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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언제나 타인이다
당신이 누군가의 부모이거나 조부모, 이모, 삼촌, 사촌, 혹은 어느 한 가족의 친구라면, 어린아이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다가 단어 하나, 또는 그림 한 장을 건너뛰었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호되게 질책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이란 늘 똑같은 책을 의미한다. 세 살짜리 독자는 친숙한 문장을 자주 들으면 만족을 느낀다. 단어 하나만 달라져도 즐거움은 바로 사라진다.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그 책이 아닌 것이다.
아이들이 똑같은 것에 열정을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안전함safety’을 필요로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롭고 흥분되지만 예측 불가능한 경험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아이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책마저 예측할 수 없이 돌변한다면 아이는 의지할 바를 잃게 된다. 친구의 성격이 변해버리는 것이다.
아이들이 책을 똑같이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떼를 쓰면, 어른들은 어른의 미소를 짓는다. 그들 역시 ‘다시 읽기’라는 더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그 어린애 같은 필요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읽은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지는 충동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안전함에 대한 요망도 그 중 하나다. 작가인 래리 맥머트리는 칠십대 초반에 이렇게 썼다. “예전에는 모험을 위해 책을 읽었지만, 지금은 안심하기 위해 읽는다. 언제나 그대로인 것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는 출판사들이 신간을 보내 논평을 부탁해도, 이미 알고 있는 작품들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 책들을 돌려보낸다고 한다. 맥머트리는 이렇게 썼다. “저녁 식탁에 책을 들고 앉을 때는 그 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쯤은 알았으면 한다.”
우리는 매번 좌절을 느낀다. 어린 시절, 믿고 의지하던 어른들이 같은 책을 매번 있는 그대로 똑같이 읽어주지 않을 때. 나이가 들어서는 우리가 꼼꼼히 읽은 것들을 다시 읽거나, 다시 만나거나, 다시 깨닫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하지만 문학 작품과의 재회를 통해 매우 특별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복합적인 즐거움을 발견할 수도 있다. 다시 읽기란 즐거움이자 일종의 도피이며, 잠을 부르거나 머리를 식히는 도구이고, (단순히 책 내용뿐 아니라 자신의 삶과 과거의 자아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방책이자 반쯤 잊어버린 진실을 되살리는 것이며, 새로운 통찰의 실마리이다. 다시 읽기는 우리를 자극하면서도 달래고, 도발하면서도 안심시킨다. 또한 맥머트리의 말처럼, 우리에게 안전함을 제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안전함이란 정확히 어떤 종류를 말하는 것일까? 맥머트리의 말에 따르면, 다시 읽기는 항상 그대로인 것을 제공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은 그와 반대로 다시 읽기를 통해 예상치 못한 변화를 거듭 경험한다. 헨젤과 그레텔이 빵 부스러기를 흘려 돌아갈 길에 표식을 남겼던 장면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림 형제의 이야기를 다시 읽다가 마녀가 아이들을 구워먹을 생각에 입맛을 다시는 장면과 마주치고 놀라기도 한다. 이는 아주 작은 디테일이지만, 이야기의 풍미에 복합성을 더하고 새로운 방식을 통해 이야기를 기억하게 만든다. 아이들을 불에 굽겠다는 암시를 접한 독자는 마녀가 아이들을 진짜로 잡아먹을 심산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마녀는 다음 식사 거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릴 적 읽었던 낡은 『그림 형제 동화집』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다가 이런 예상치 못한 순간과 맞닥뜨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구체적인 그 묘사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변화를 느끼는 것은 놓쳤던 디테일을 새롭게 알아챘기 때문만은 아니다. 해석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죄와 벌』을 읽었을 때, 주인공 라스콜니코프Raskolnikov는 온몸으로 관습에 대항하는 대담무쌍한 젊은이로 보였다. 성인 독자가 된 후에는 바보 아니면 괴물 같은 인간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그 소설을 다시 읽었다. 그는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동정적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새로운 이유로 인해 그 작품에 매혹되었다.
어떤 책은 다시 읽으면 더 나빠지기도 한다. 문학평론가 비비언 거닉의 경우가 그랬다. “이십대에 콜레트를 읽고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바로 이거야.’ 지금은 그녀의 책을 읽고 생각한다. ‘옛날과 비교하면 얼마나 작아 보이는지 몰라. 차갑고 영리하고 편협하고.’ 그리고 작가에게 ‘왜 좀 더 말이 되게 쓰지 못한 거지?’ 하고 조용히 묻게 된다.” 20년 전 처음 조우했을 때의 스릴을 다시 느끼기 위해 책을 읽지만, 그때의 감동은 수수께끼처럼 사라지고 없다. 기억하고 있던 멋진 이야기는 진부한 상투어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우리가 성숙해졌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뭔가를 상실한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도발일지도 모른다. 논픽션 작가 벌린 클링켄버그는 <뉴욕 타임스>에 이렇게 썼다. “다시 읽기의 진짜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다시 읽기란 불가능하다. 등장인물들은 그대로이고, 단어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는 변한다. 핍*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독자는 묘지에서 그를 놀라게 하는 탈옥수와도 같다. 언제나 낯선 타인인 것이다.”(「다시 읽기의 즐거움에 대한 몇 가지 단상」, 2009년 5월 30일자) 클링켄버그는 자신이 반복해서 다시 읽는 책들이 정전canon이라기보다는 도피처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 책들이 중요한 이유는 특정한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정서적 만족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독자의 역할.언제나 낯선 타인인.에 대한 관심을 분명히 드러낸 것은, 그가 느낀 만족이 단순한 도피 이상임을 알려준다.
*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 유년시절 마주친 탈옥수와 놀라운 인연을 맺는다.
다시 읽기가 어떤 안도감을 제공하는가라는 질문은 곧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어떻게 안도감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일까? ‘언제나 낯선 타인’일 뿐인 독자가 어떻게 해서 안도감을 얻을 수 있는 걸까? 만일 책이 독자를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면 안정성stability이 없다는 이야기일 테고, 따라서 안전함 역시 제공할 수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5년 만에 동창회에서 옛 친구를 만나는 게 충격적인 일일 수 있듯이, 한때 아끼던 책을 다시 읽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다시 읽기가 안도감을 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책에서는 많은 것이 달라지지만 또 많은 것이 예전 그대로이다. 줄거리는 더 이상 스릴 넘치지 않지만, 한때 우리를 짜릿하게 했던 그 형태 그대로 남아 있다. 등장인물들은 예전에 비해 다소 흉허물이 눈에 띄지만, 옛 고교 동창처럼 우리가 알아볼 만한 특징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다시 읽기는 또한 과거의 자아를 기억해내게 하는, 다른 종류의 안전함을 제공해준다. 19세기 문필가 윌리엄 해즐릿은 이렇게 썼다.
과거에 좋아했던 책(내가 읽었던 첫 번째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상상과 비평적 음미의 즐거움뿐 아니라 기억의 즐거움도 얻는다. 내가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과 연상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일반적인 과정들은 의식을 지닌 존재인 우리 자신을 연결하는 고리와도 같다. 그것은 우리의 흩어진 정체성의 조각들을 한데 묶어준다.
달리 말하면, 다시 읽은 책들이 주는 안정성을 통해 우리는 견고한 자아상을 구축할 수 있다. 이는 경험으로서 다시 읽기가 지닌 심오한 측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적이다. 즉, 다시 읽기는 자아의 성장과 연속성을 기록하는 급수degree인 것이다. 해즐릿의 말처럼 다시 읽기라는 행위가 정체성을 통합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것은 개인의 성장을 측정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안정과 변화 사이의 역동적인 긴장이야말로 다시 읽기의 핵심이다. 독자와 책이 새롭게 교유할 때는 언제나 안정과 변화라는 두 가지 요소가 개입하는데, 이 두 가지 다 독자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 인간의 정신적 요구는 다양하며, 다시 읽는 책들은 각기 다른 시점에 다른 요구에 응답한다. 위로가 필요할 때면 아끼던 어린이책으로 돌아갈 수 있다. 즐겨 읽는 가벼운 소설 한 권은 순수한 오락을 찾으려는 갈망에 답한다. 마음을 사로잡는 플롯을 만나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이미 알고 있어도 흥분을 느낀다. 청소년기에 처음 만난 책을 다시 읽을 때는 과거를 되새겨보게 된다.
영국의 한 독자 설문 결과는 다시 읽기의 즐거움이 어디서 오는가를 상상하게 한다. 영국의 커피 회사이자 권위 있는 영국 도서상의 후원사인 코스타는 2천여 명의 독자를 상대로 그들이 책을 다시 읽는지, 다시 읽는다면 어떤 책인지를 설문했다. 가장 빈번하게 다시 읽는 20편의 작품을 집계한 결과는 자못 흥미롭다. 성경은 20편 중 16위에 올랐다. 셰익스피어는 아예 순위에 들지 못했다. 1위부터 3위는 해리 포터 시리즈, 『반지의 제왕』, 『오만과 편견』 순이었다.
나는 이 설문이 얼마나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친구가 이메일로 보내준 이 목록에는 응답자들이 그냥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적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도 있었다. 응답자를 어떻게 골랐는지,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목록을 어떤 증거로 제시하는 게 아니다. 그저 상상력을 자극하는 계기로 삼고자 할 뿐이다.
책 목록을 보면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20편 중 4편은 통상 어린이책이라고 할 만한 읽을거리들로, 해리 포터 시리즈와 『호빗』 『사자와 마녀와 옷장』 『블랙 뷰티Black Beauty』 등이다. 전체의 20퍼센트이면 제법 비중이 높은 편이며, 『블랙 뷰티』가 목록에 들었다는 게 다소 의외이긴 하다. 다음으로는 19세기 고전 소설인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위대한 유산』 네 편이 있다. 20세기 고전으로는 『1984』가 들었다. 『캐치 22』『앵무새 죽이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은 미국 색이 강한 작품들이라 영국 독자들의 선택으로는 뜻밖이다. V. C. 앤드루스의 『다락방의 꽃들』과 닐 게이먼과 테리 프래쳇 공저의 『멋진 징조들』 과 같은 작품은 들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그럴듯한 설명을 찾기 위해 마음이 바빠진다. 어린이책이 상대적으로 많이 포함됐다는 사실은 분명 향수를 말하는 것이리라. 해리 포터 시리즈가 1등인 건 뉴스에서 빈번하게 다뤄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자녀에게 읽어주느라 어른들이 그 시리즈를 다시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설문조사가 이뤄진 2007년 시점에 영화가 개봉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작 소설을 찾았을 수도 있다. 미국 소설들은 화려하고 세련돼 보이며 대화의 소재로 적당하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고전들은? 글쎄, 아마도 영국 사람들은 그 작품들이 얼마나 훌륭한 읽을거리인지에 대해 미국인들보다 더 잘 아는 모양이다. 하지만 『다 빈치 코드』가 왜 포함됐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이유도 떠오르지 않는다. 워낙 엉망으로 써놔서 처음 읽을 때 두 번째 문단을 넘기기가 어려운 책이었다.
응답자 2천여 명 모두 같은 책을 다시 읽는다 해도 그 이유는 제각각 다를 수 있다. C. S. 루이스의 어린이책을 읽는 건 영화 때문일 수도 있지만, 책장에서 갑자기 그 책을 발견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조카딸이 요즘 그 책을 재밌게 읽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스칼렛 오하라를 연상시키는 초록색 커튼을 보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읽을 수도 있다. 책을 다시 읽는 직접적인 이유나 구실은 무한하며, 그것으로부터 얻는 잠재적 보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보상의 이유는 대체로 변화나 안정일 가능성이 높다. 초록색 커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읽을 때마다 늘 거기에 존재한다. 스칼렛이 초록색 커튼을 잘라 만든 드레스 역시 결코 변하지 않는다. 초록색 커튼과 드레스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는지는 매번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초록색 커튼은 다시 읽기가 지닌 동일함과 차이라는 이중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억의 변덕은 다시 읽기라는 드라마에서 커다란 역할을 떠맡고 있다. 헨젤과 그레텔을 잡아먹으려는 마녀에 관한 디테일을 읽을 때, 나는 내가 전에는 그것에 주목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것에 주목한 기억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몇 년 전에도 오늘 그랬던 것처럼 그 대목을 재미있게 여겼으나, 기억의 결함으로 인해 그 즐거움이 지워져버리는 바람에 모든 것을 처음처럼 새로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5년 뒤에 헨젤과 그레텔을 다시 읽는다고 해보자. 그때는, 의외의 디테일이 안겨준 지금의 재미와 그 책이 아주 오래전에 주었던 만족감(현재는 이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가정해보자) 둘 다를 기억해낼 수도 있다. 사람이 뭔가를 어느 순간에는 기억하고 어느 순간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데는 분명 원인이 있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시 읽기라는 행위가 예측 불가능한 이유는 대체로 기억의 이런 수수께끼 같은 작동방식 때문이다.
안정성과 같은 개념은 그래서 더욱 복잡해진다. 밤마다(때로는 하룻밤에 여러 번) 같은 이야기를 듣는 아이는 아주 작은 정보도 잊지 않겠지만, 긴 세월 동안 다수의 책을 읽는 성인은 기억이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서 몇 년 후 그 책을 다시 읽을 때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책 속의 언어는 그대로이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낯선 사람처럼 느껴진다. 낯설지만, 경이롭게도 친구이기도 하다. 성인이 어린아이처럼 같은 텍스트를 반복해서 다시 읽으면 그들의 기억력은 좀 더 신뢰할 만해진다. 나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을 매년 다시 읽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그런 식으로 해서 자기만의 안전함을 창조해내곤 한다.
그렇다면 맥머트리가 찾는 안전함은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겠으나, 적어도 일부 독자들의 경우엔 그런 안전함을 찾기 위해 같은 작품을 여러번 반복해 읽어야 한다. “나는 전에 읽었던 작품(더 자주 읽을수록 더 나은데)을 집어들면 무엇을 기대할지 안다.” 해즐릿은 이렇게 말한다. 괄호 안의 부분은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담고 있다. 더 자주 반복해서 읽을수록,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지 더 잘 알게 된다. 물론 놀랄 일은 언제든 생길 수 있지만 말이다. 다시 읽을 때도 놀랄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시 읽기에 연구할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이유 중 하나다. 다시 읽기를 연구함으로써 애당초 우리가 왜 책을 읽으며 어떻게 읽는지의 문제를 조명할 수 있다는 점도 또 다른 이유이다.
먼저, 앞서 거론한 안정과 변화 사이의 역학관계를 이야기하자면, 독자와 텍스트 간 상호작용이라는, 독서 행위를 규정짓는 복잡한 과정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비언 거닉이나 내가 다시 읽은 작품에서 명백한 변화를 발견했다고 말할 때,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에 대해 말할 때, 보이는 것이 달라졌다고 말할 때, 그건 필연적으로 읽는 사람 쪽의 변화를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책 속의 언어는 예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책을 다시 읽을 때 독자는 예전에 주목하지 않았던 언어를 알아차릴 수도 있고, 동일한 단어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런 가능성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독자가 그 글을 마지막으로 읽은 시점으로부터 그의 사고와 마음, 경험,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상황, 혹은 이 모든 것들이 (어쩌면 그저 기분상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한 권의 책을 처음 읽거나 다시 읽으면서, 독자는 단순히 텍스트와의 관계뿐 아니라 상상된 작가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또한 다시 읽기를 통해 과거의 자아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런 관계들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살피면서 독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더불어 독서라는 신비로운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연관관계에 대해 배우게 된다.
우리는 또한 독자가 텍스트에 쏟는 주의력의 종류와 집중도가 각양각색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익숙한 글 속에서 새삼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때면, 어떻게 읽느냐가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한 사람의 독자가 한 편의 작품을 읽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작품의 여러 측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주어진 순간의 감정과 지성의 상태와 상황에 따라 책을 해석하면서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다시 읽기의 경험은 해석의 한계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독자의 천성이나 상황적 요인을 제외하면, 텍스트 자체가 해석의 가능성을 좌우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어떤 방식일까? 독자는 자신이 읽는 책을 어느 정도까지 창조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은 어떤 독자에게도 중요하겠지만, 특히 다시 읽기를 하는 독자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기억이 다시 읽기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라는 사실은 앞에서 한 차례 이상 언급했으며 앞으로도 자주 이야기할 예정이다. 다시 읽기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독서라는 행위 전체에서 기억이 갖는 중요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책에서 내가 몰두하고 있는 소설 작품의 경우는 기억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소설 독자는 사소한 세부사항까지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인생 경험에 비춰 평가하기 때문이다. 성장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될수록 우리는 그렇게 배운 것을 책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적용하며, 또한 책에서 읽은 것으로 실제 삶에서 만난 사람들을 평가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것을 판단하는 데 기준이 되는 인생 경험에는 다른 책들을 통해 배운 경험도 포함되는데, 과거의 독서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직접 지식과 마찬가지로 새로 접한 텍스트를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책을 다시 읽을 때 기억의 필요는 배가된다. 우리는 다양한 독서와 인생 경험을 통해 획득한 지혜를 활용할 뿐 아니라, 기억의 힘을 통해 지금 앞에 놓인 책을 예전에 읽었을 때의 경험이 미치는 영향을 느낀다. 비록 몇 년이 흐르는 동안 특정 항목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남아 있는 지식은 그 텍스트를 새롭게 다시 접할 때 우리의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반응에서 과거 자아의 기억은 특정한 언어의 망을 다시 접한 독자로서의 기억에서 비롯되었으나, 그와 동시에 이를 넘어선다. 우리는 무언가를 처음 읽을 때도 역시 과거의 자아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 상상 속 타인의 삶을 대리 체험할 때 책과 책 바깥의 삶이 우리에게 제공한 지나간 경험을 되살려보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읽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읽은 책들이 그렇듯 우리가 얼마나 변했고 또 그대로인지를 좀 더 선명하게 대면한다. 책은 우리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며, 또한 다시 읽기를 통해 시간의 경과에 따른 정체성의 변화를 측정하게 해준다.
그러나 종이 위의 언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을 쓴 작가도 현재 존재하거나 혹은 이전에 존재했으며, 다른 독자들 역시 같은 글을 예전에 읽었고 앞으로도 읽을 것이다. 독자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소설 속 이야기를 실제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지식에 견줘 평가하고, 현실의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등장인물들을 평가한다. 현실은 실재하는 것이고, 독서의 영역은 현실과 동떨어져 지속될 수 없다. 우리는 소설 속에서 인생 경험에 대한 깨달음, 정신과 감정의 작용에 대한 통찰, 삶이 제공하는 교훈의 표현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반대로 책에서 읽는 것을 텍스트 바깥의 세상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비춰 시험하기도 한다.
이제부터는 이야기를 독서에서 ‘어떻게’의 측면, 그러니까 독자와 텍스트의 교유, 기억의 기능, 외부 세계의 역할 같은 것으로부터, ‘왜’라는, 앞으로 이 책에서 중요성을 띨 질문으로 옮기고자 한다. 사실 ‘왜’라는 물음은 꼬리를 물고 증식하는 거나 다름없다. 우리가 소설 읽기를 통해 각성과 통찰을 추구한다고 말하면, 즉각 다음 질문이 떠오른다. “왜 그런 가치들을 사실을 다룬다고 자처하는 글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가?” 상상의 문학이 사람들을 오도할 수도 있다는 의심은 아주 오래전, 적어도 플라톤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그의 이상국가에서 시인들을 추방시킨 것으로 악명 높다. 상상에 대한 옹호 역시 그만큼 오래됐다. 옹호론자들은(나 역시 마찬가지 입장인데) 상상적 작품은 보여줄 수 있는 사실에 엄격하게만 집착하는 글보다 더 심오한 진실을 말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상에 대한 이론적 옹호는 21세기 독자에게는 그저 수사적으로만 들릴 수도 있다. 말은 멋지지만, 실체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보다는 독특함particularities 쪽이 훨씬 설득력을 지닐 것 같다. 이전에 보았던 것을 또 다시 보는 다시 읽기를 통해, 독자는 무엇이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다시 읽기는 경험을 통해 독특한 것의 가치를 제고하게 한다. 그것은 독자에게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과거에 알려준 진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도 하다. 이를 통해 소설을 위한 공식화된 변명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소설의 힘을 깨닫게 할 수는 있다. 다시 읽기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을 탐색함으로써 나는 그 힘을 증명해 보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이유’에는 진실의 힘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그것은 또한 즐거움의 힘을 포함한다. 읽는 즐거움은 학문적 담화에서는 전반적으로 무시되고, 일반 독자에게는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된다. “난 그냥 즐거움 때문에 읽어”라는 말은 가볍게 들릴 뿐 아니라 ‘쓰레기 같은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고전 시대로부터 적어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류 평론가들은 즐거움과 교훈이 독서의 주요한 양대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덕적 중재자이자 문학평론가였던 새뮤얼 존슨이 그의 주요작 『시인들의 삶』에서 작품 하나하나를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느냐라는 기준에서 평가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독서가 제공하는 많은 장점들 중에서 즐거움은 진지한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여겨질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책에서 그 이야기를 기쁜 마음으로 논의하려고 한다.
다시 읽기에서 내면과 외부의 상호작용은 과거와 기억에 의해 복잡해진다. 과거의 느낌들이 현재의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 느낌이 독서의 목적을 지배하게 되어버릴 수도 있다. 새로 얻은 느낌은 예전의 느낌을 뒷받침할 수도 있지만, 그것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다. 새로 판단을 내리고자 하면 과거의 느낌을 부인하는 셈이 된다. 두 번, 다섯 번, 혹은 열 번 읽은 책의 주관적 현실은 보통 이상의 힘을 갖는다. 시간을 두고 누적된 개인적 경험은 인쇄된 글과 만나 복합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같은 책을 과거에 여러 차례 읽으며 쌓인 층위들이 다시 읽는 순간, 독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혹은 그와 반대로, 두 번째 또는 다섯 번째 읽을 때 독자는 비로소 책이 자신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욱 온전히 인식하게 될 수도 있다. 처음 읽을 때보다 플롯과 인물들의 활력에 덜 압도됨으로써 독자는 이제 느끼기만 하기보다 평가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정신적 여유를 누릴 수 있다. 독자는 저자의 의도와 자신의 반응 사이에 놓일 수 있는 갈림길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 책의 과거와 현재의 정치사회적 상황 사이의 관련성, 인간 심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과의 관계에 대해 더욱 폭넓게 생각할 수 있다. 다시 읽기가 회를 거듭할수록 책을 둘러싼 자유의 공간은 확대되며 독자가 반응할 수 있는 가능성도 넓어진다.
다시 읽기는 가치의 문제를 강조하고 주목하게 한다. 최근 전문적 문학 비평가들은 작품을 평가하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노력을 피하려는 추세이다. 『노튼 세계 ‘명작’ 선집』은 제목이 바뀌었는데(지금은 여러 권의 『노튼 세계문학선집』으로 발간된다), 추측컨대 편집자들이 “명작”이라는 표현이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아마추어 비평가들 역시 어떤 책이 “좋다”고 말하는 대신 “흥미 있다”고 표현하면 비슷한 불편함을 드러낸다.
물론 다시 읽는 사람들 역시 가치 평가에 대한 그런 회피에 기댈 수 있으며, 그렇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번은 읽어야 함에도 아직 그러지 못한 책들에 대한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이미 읽은 책, 어쩌면 한 번 이상 읽은 책으로 의도적으로 돌아가는 행위는 ‘왜 그러는가’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 대체 그 책들이 어떤 종류의 가치를 가졌기에 우리는 돌아오게 되는 것일까? 그 가치는 개인의 성벽과도 같이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일까, 아니면 텍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것일까? 문학적 판단의 적절한 기준이란 무엇일까? 가치라는 문제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은 이 책에 기록한 실험들로 인해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문학 작품의 가치를 분별하려는 노력은 유용한 비평 훈련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기 이해를 위한 끝없는 탐색이라고 믿는다.
한편에는 나처럼 열정적인 옹호의 말을 쏟아내는 다시 읽기 애호가들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시 읽기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일부는 도덕적 반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읽어야 할 책이 그렇게 많은데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다. 한 대학원생은 그녀가 다시 읽기라는 주제에 대해 “강하게 찬성한다”며 다음과 같은 사연을 들려주었다. 어릴 때부터 열정적으로 책을 읽은 그녀는 같은 책을 다시 읽을 때마다 어머니로부터 심하게 질책을 당했다고 했다. 어머니의 논리는, 새롭고 더 어려운 읽을거리로 계속해서 나아가지 못하면 마음이 정체되거나 약해진다는 것이었다. 학생은 일기에 독서에 관해 썼는데, 그녀는 책을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해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주목했다. 달라지는 해석은 성장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그녀는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에게 계속 저항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다시 읽기에 적극 찬성하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겉만 번지르르한 생각일 뿐이라며 딸의 생각에 대해 여전히 강한 반대 의견을 보였다.
에세이스트인 로저 에인절Roger Angell은 <뉴요커> 지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다시 읽기에 대한 세간의 비판에 대해 이렇게 간결하게 답했다. “다시 읽기는 작은 죄책감을 수반한다. 맞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용파산스왑과 다윈, 스테로이드, 그밖에도 많은 걸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좀 내버려둬, 제발.” 어떤 독자도 읽어야 할 책의 수가 자신의 능력을 크게 넘어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시 읽으려는 열정에 일단 불이 붙으면, 방종에 딸려오는 희미한 죄책감은 되레 다시 읽기의 즐거움을 강화할 뿐이다.
하지만 기분에 따라서는 이런 죄책감이 힘겨울 때도 있다. 다시 읽기에 대해 책을 쓰겠다는 충동은 나 자신의 방종을 정당화하려는 필요에서 비롯되었다. 자기 방종은 때로 죄스럽게 느껴진다.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을 때는 이것이 어려운 새 책과 씨름하는 힘든 일을 피하려는 게으름의 한 형태일 뿐인 게 아닐까 궁금해지곤 한다. 그게 아니라면, 특정한 책의 내용을 떠나 생각해볼 때, 다시 읽기는 과정 자체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걸까? 앞서 말했듯, 나는 다시 읽기를 독서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다시 읽기라는 행위의 가치에 대한 질문은 그것의 의미와 결과를 찾고자 하는 이 연구의 핵심에 놓여 있다. 다시 읽기는 회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관여engagement의 한 형태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에 관여한다는 것인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다시 읽는 행위는 일종의 재관여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처음부터 주의 깊게 읽었다면 왜 재관여가 필요할까? 나는 의식적인 다시 읽기 실험을 통해 다시 읽기가, 첫 독서가 줄 수 없는 무엇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나는 이를 통해 다시 읽기에 반대했던 그 학생의 어머니나 다시 읽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 다시 읽기가 무익하고 잘못된 행위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물론 적어도 무신경한 거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야 있겠지만. 하지만 그러는 대신, 읽어야 할 온갖 책들에 대한 죄책감을 가진 채, 혹은 그런 죄책감 없이 이미 다시 읽기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되짚어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충족시키길 바란다.
독자들의 생각은 아마도 나와 다를 테고, 또 달라야만 한다. 나는 그들이 독자로서, 혹은 다시 읽기의 독자로서 겪은 경험에 대해 생각하고, 그 경험이 얼마나 극도로 개인적인 것인지를 깨닫길 바란다. 내가 하는 말에 대해 “그건 전혀 그렇지 않아!” 하는 식으로 격분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동의만큼이나 바람직한 반응이다. 예전에는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은 활동에 대해 독자가 숙고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다시 읽기에 관한 대화는 이렇게 길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장들은 실험 사례들을 통해 다시 읽기의 본질을 정의하는 동시에 다시 읽기가 제공하는 다양한 즐거움과 깨달음에 대해 다룬다. 또한 다시 읽기의 과정이 독서라는 행위에 내재하는 충족감을 어떻게 강화하는지도 보여준다. 독서를 하면서 우리는 감정적이고 지적인 자극을, 또 지혜를 찾는다. 독자는 작가와 신뢰 관계를 맺고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대화를 나눈다. 더불어 우리는 즐거움도 찾는다. 독자가 읽었던 소설을 다시 읽는 이유는 대부분 과거 그 책과 만났을 때 자극과 지혜, 즐거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볼 때, 친숙한 텍스트와 새롭게 교류하면서 이 모든 일들은 더욱 강력하게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 실험들의 대상은 나 자신이다. 이 때문에 다시 읽기의 과정에 무의식적으로 슬그머니 접근하려는 실험이 성공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읽기의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책을 다시 읽을 때, 나는 그 과정에 명백히 의식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것이 무작위로 읽는 오락적 다시 읽기와 같을 수는 없다. 더구나 나는 전문적인 비평가다. 오랜 세월 동안 책에 대해 가르치고 글을 써왔으며, 그러기 위해 많은 책들을 여러 차례 다시 읽었다. 그것은 독자와 학생들이 특정한 책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도록 설득하는 논리를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런 개인사 때문에 나의 독서 방식은 필연적으로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오락적인 다시 읽기를 즐겨왔으며, 그것에 관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경험들을 직접 겪었다. 이를테면 어릴 적 좋아하던 책이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는 걸 깨닫거나, 그 속에서 새로운 풍부함을 발견하거나,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이해한다거나, 혹은 나의 경험과 책 속의 경험 사이에 유사점을 밝혀내는 것과 같은 경험들이다. 또한 나는 단지 즐거움을 얻기 위해 내가 가르치거나 글감의 재료로 삼았던 책들을 자주 다시 읽었다. 『오만과 편견』의 경우, 40번 이상 읽었지만 그 책 없이는 1년도 버틸 수 없다.
그럼에도 책에 관한 경험을 쓸 때 나는 필연적으로 특정 유형의 독자일 수밖에 없다. 나는 ‘책을 샅샅이 분해하는’ 유형으로, 이는 이런 독서를 ‘그냥 즐기는’ 유형의 정반대로 여기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책을 분해하는 행위는, 그 책의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감정적이고 도덕적이며 지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지에 눈뜨게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강렬한 즐거움이라고 나는 믿는다. 더 많이 이해할수록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더 많은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나에게 다시 읽기란 아주 느긋한 상태일 때조차 고도로 집중된 상태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문학 비평의 핵심적인 활동이다. 다시 읽을 때, 나는 특정 순간이나 장면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관심이 기울여진다’는 수동태 표현이 적절하겠다. 새롭게 주목할 대목을 내가 고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가 새로운 지점에서 나의 주목을 요구하며, 그 결과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게 하여 다시 읽기는 나의 비평적 능력을 일깨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분석적이다. 나는 다시 읽기와 관련된 일련의 발견들을 기술하고, 다시 읽기를 학습과 이해의 방식이자 특별한 형태의 즐거움으로 이어지는 진입로로서 옹호하는 폭넓은 주장을 펼칠 예정이다. 실험이 누적되고 점차 틀을 갖춰가면서, 이 주장은 다시 읽기 그 자체가 그러하듯이, 이성뿐 아니라 감성에도 의존하게 된다. 그것은 성찰적 삶에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이미 읽은 것을 숙고하는 특정한 방식의 중요성과 그것이 지닌 특별한 힘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기 위한 주장이다.
그렇다고 내가 전문 비평가의 목소리만 내겠다는 건 아니다. 다시 읽은 책들에 대해 일관된 해석을 내리려는 체계적인 시도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최대한 느긋하게 읽으려고 애썼으며 그 결과로 내 마음에 무엇이 떠오르든 환영했다. 읽은 책의 다양한 면을 조명할 수 있는 일련의 단상들을 적어두긴 했지만, 그 과정이 체계적인 ‘해석’ 으로 끝난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이런 단상들은 종종 텍스트를 넘어서는, 다시 읽기의 정당성에 관한 곤혹스러운 질문들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문학적 가치에 대한 나의 판단과 개인적 취향 사이의 격차를 되풀이해서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예전에 즐겁게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을 때 전혀 즐겁지 않았지만, 책이 구사하는 기법과 통찰력, 활력에 찬탄하기도 했다. 그 역도 성립한다. 즐겁게 읽히지만 문학적 가치는 전혀 없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불일치가 늘 불가피하게 일어났던 건 아니었다. 때로 판단과 취향이 일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간간이 격차가 일어나면 나는 당혹스럽고 불안해졌다.
앞서 말했듯이 그런 느낌이나 그것들이 불러들이는 함의를 의식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노력해왔기 때문에, 나의 책 읽기는 오로지 오락이나 편안함 혹은 기억을 위한, 순수하게 오락적인 다시 읽기는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 오락적 다시 읽기는 내가 생계를 위해 해온 일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다른 색깔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 오락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했지만 크게 성공을 거둔 것 같지는 않다. 읽을 책을 선택한다는 건 읽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극도로 개인적이다. 앞으로 이어질 장에서 내가 겪은 다양한 종류의 다시 읽기와 경험을 논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들도 등장하게 될 테지만, 물론 이 책은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회고록도, 지적인 자서전도 아니다. 차라리 다시 읽은 소설들이 끄집어낸 생각과 느낌의 자서전이라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다시 읽기에 소설 외의 다른 장르를 포함할 수도 있다. 시 다시 읽기는 특별한 만족감을 제공하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회고록, 희곡, 수필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책을 다시 읽는다. 그들이 한때 즐겨 읽었고 다시 즐길 만한 것들, 한때는 이해할 수 없어 당혹스러웠지만 이제는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책들, 읽었다는 사실은 기억하는데 내용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들을 다시 읽는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관성을 위해 소설에만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 내가 다른 어떤 장르보다 소설을 더 자주 다시 읽는 편이며,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의 중요한 원천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전적이라는 이야기에 단서를 붙여야겠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다가 내가 처음 읽던 상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떤 책이 남긴 일반적인 인상은 기억나지만, 그런 인상이 남은 특별한 이유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내 마음에 생생하게 남은 것은(이 책에서 나는 대부분 오래전에 처음 읽은 뒤 다시 읽지 않았던 책들로 돌아갈 예정인데), 내가 그 무렵 읽고 있던 다른 책 혹은 다른 종류의 책들에 대한 느낌이다. 마치 책이 내 삶의 다른 측면들을 대체했고, 그리하여 내가 제공하는 자서전이 대부분 문학 작품들에 의해 가능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다시 읽기와 그것에 관한 질문들이 논의되기를 바란다. 어린이책을 다시 읽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다. 부분적으로는, 어린이책 다시 읽기와 연관된 특별한 죄책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열 살 먹은 아이를 위한 책을 열 번째 읽고 있다. 이 얼마나 게으른 일인가! 왜 그런 방종이 그처럼 즐거울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다시 읽기의 미스터리를 푸는 첫 작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이책은 시작일 뿐이다. 다음으로는 제인 오스틴 다시 읽기가 있다. 제인 오스틴은, 다시 읽기를 싫어한다는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분명하게 깨닫게 된 특별한 케이스이다. 그녀가 제인 오스틴을 다시 읽는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고 지적하자 친구는 놀란 듯 대답했다. “제인 오스틴은 누구나 다시 읽어.” 그 말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다시 읽기라는 측면에서 오스틴을 생각하면, 가치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뒤따른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오스틴의 소설을 읽고 또 읽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그 엄청난 인기는 작가가 지닌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한 매력을 보여준다. 이런 매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밝히는 것은 (종종 다시 읽기로 연결되는 독서의 즐거움의 원천을 발견한다는 것은) 우리가 특정한 책이나 작가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근거를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나는 취향과 판단이 갈리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두 가지 시도를 할 생각이다.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처음 읽을 때 좋아하지 않았던 책의 다시 읽기와, 좋아한다는 사실을 쑥스럽게 여겼던 책 다시 읽기다. 이를 통해 다시 읽기가 주는 즐거움의 특정한 원천을 조사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두 가지 특별한 사례를 탐색한다. 하나는 처음에 다른 사람과 함께 읽은 책들을 혼자서 다시 읽는 경험이다. 상대적으로 드문 편인 이런 상황은 화자와 독자 외의 관계들이 책에 대한 반응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타인과 반응을 공유하면서 읽었던 책을 혼자서 다시 읽음으로써, 삶의 다양한 상황들이 인쇄된 텍스트의 의미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직업적’ 다시 읽기 역시 하나의 주제로 탐구할 생각이다. 이 결과가 오락적 다시 읽기와 어떻게 다른지 사례를 통해 살펴볼 예정이다.
몇 편의 다시 읽기는 순전히 즉흥적이고 오락적이었다. 나는 최근 우연히 『에마』와 『오만과 편견』을 다시 읽었고,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두었다. 하지만 나머지 작품들에 대한 나의 논평은 대부분 인위적인 맥락에서 쓰였다. 즉, 그것들은 나 자신에게 부여한 특별한 과제를 수행한 결과다. 나는 깊이 성찰해보고 싶은 문제들을 정한 뒤에(좋아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던 책들이 여전히 마음에 들까? 최근에 다시 읽은 어린이책들에 대해 꼼꼼하게 분석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 문제들을 탐색할 책들을 찾았다. 그 과정은 매우 즐거웠지만, 이런 과제의 수행이 순전히 오락적인 다시 읽기일 수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자신에게 던지는 수많은 질문과 일부 잠정적인 대답들, 몇 가지의 확고한 결론을 얻었다. 무엇보다, 다시 읽기의 즐거움은 근본적으로 안정과 변화의 역설적 결합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나머지에서는 다시 읽기가 주는 즐거움의 원천과 이점에 관해 지금까지 했던 주장들을 좀 더 충실히 탐색할 것이다. 매우 친숙한 책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읽기 쉬운 책에서 읽기 만만치 않은 것까지 다양한 책들과의 반복적인 만남을 고찰함으로써, 직업적 이유와 즐거움을 위해 평생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배우고 느꼈으며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여주려 한다.
읽을 책의 선정은 거의 전적으로 자의적이었다. 이는 의도적인 결과다. 단일한 종류의 책들로 쏠리는 것을 피하고, 수년간 읽은 소설들 중 최대한 다양하게 고르고자 했다. 우선 내 서재에서 살아남은 책들로 시작했다. 몇 번 이사할 때마다 내 서재는 점점 작아졌으며, 소개된 책들은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작품들이다. 그다음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선택했다. 언급된 특정 소설들이 널리 읽혀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내가 보이고자 한 것은, 내 취향이 다종다양하다는 점과 다시 읽기는 유형이나 대상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유용하다는 점이다. 이 책의 독자가 『미들마치』를 처음으로 읽고 싶어진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미들마치』에 대한 설명으로 인해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이나 트롤럽의 소설, 또는 필립 로스나 새러 패러츠키의 작품을 읽게 된다면 그것 역시 좋은 일이다.
널리 알려진 친숙한 작품들에 대해 논하려고 애썼지만, 종종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영역으로 빠질 때도 있다. 내 전공 분야(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화제)는 18세기 영국 문학이며, 내가 열정을 바치는 분야에 대해 쓰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읽은 책의 대부분은 19세기와 20세기 작품들이다. 나는 이 책들을 숙고하고 재숙고하면서 반복된 문학적 만남에서 얻은 참신한 통찰의 견본을 제공하려고 애썼다.
나의 관심은 그런 통찰 자체, 그리고 지식과 즐거움을 얻기 위한 활동으로서 다시 읽기에 대한 생각 둘 다를 포괄한다. 다시 읽기라는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 쓰는 것은 두 가지 보상, 즉 지식과 즐거움에 대해 간략히 요약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다시 읽기에 대해 쓴다는 것은 요약 이상이기도 하다.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통찰과 즐거움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시 읽기에 대한 글을 읽는 것 역시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까 싶다.
뭔가를 옹호하려는 목적이 나를 이 책의 기획으로 이끌었음을 실토해야겠다. 언급했듯이, 다시 읽기에 관한 이 책은 본질적으로는 독서에 관한 논의인 동시에 사실은 독서를 위한 변론이다. 나는 독서라는 행위가 우리의 머릿속에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내가 행한 실험은 가치의 문제를 숙고하고 있는데, 그 바탕에 깔린 가정은 고전시대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독서는 응당 교훈과 즐거움을 제공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정도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는 가정이다. ‘교훈’이니 ‘기쁨’이니 ‘해석’이니 하는 용어들은 관념 속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다. 독서는 셀 수 없이 많은 개별적 교류 속에 존재하며, 그 교훈과 기쁨은 무수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중 일부를 여기에 보임으로써 독자들 역시 자신의 경험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다양한 구체적 체험 속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찾기를 희망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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