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판 서문
이 책의 원서는 2012년 1월 25일, 일본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제가 강의하고 있는 대학의 학생들과 대화하며 써내려간 책으로, 일본에서는 ‘중학생의 질문 상자’라는 시리즈의 첫 번째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중학생까지 포함하는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재일조선인은 누구인가’를 가능한 한 알기 쉽게 이야기하고자 쓴 책입니다.
원래 일본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썼던 이 책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제가 무척 바라던 일입니다.
저는 도쿄에 있는 작은 대학에서 ‘인권과 마이너리티’라는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이자, 일본에서 첫 책을 출판한 지 어언 20년 이상 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책이 일반인들에게 이렇게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반응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알기 쉽다”, “아이덴티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타자(피해자)의 입장에서 일본 역사나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같은 고마운 반응입니다.
또 하나는 “무슨 일이든 차별이나 식민지 지배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유의, 견디기 힘든 갖은 악담이나 “거짓으로 학생들을 속이려 한다.”는 유의 지리멸렬한 중상모략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재일조선인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에 연행된 것이 아니라 해방 후에 제주도에서 건너왔다.”는 둥, 터무니없는 주장을 집요하게 반복합니다. 저는 인터넷에 익숙지 않아 최근에서야 키워드 검색이란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과 이 책의 제목으로 검색했더니, 그런 주장을 담은 트위터나 블로그가 눈에 띄더군요. 또 ‘재일’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니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댓글들이 넘쳐났습니다.
저는 일본 사회가 병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감 상실과 타자에 대한 증오 때문에 자가중독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눈에 띄게 공격적으로 차별하는 이들만 병든 것이 아닙니다. 그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다수자도 병든 것과 다름없습니다. 예순이 넘게 살아온 사람으로서, 젊은 세대에게 이런 사회를 물려주는 것에 대해 자책을 금할 수 없습니다. 또 앞으로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몰이해와 차별에 포위당한 재일조선인은 물론이거니와 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척하는 것으로 정신적 위안을 삼는 다수자들도 걱정됩니다. 이 병이 더욱 깊어지면, 결국은 타자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폭력으로 돌진하기 전에는 멈추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은 몇몇 사람들이 출판사나 제가 근무하는 대학에 “왜 이런 책을 출판했나?”, “왜 이런 사람을 교수로 두는가?” 하며 항의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독자(정말 읽었는지 의심스럽다 하더라도)로부터 이토록 강력한 반응이 돌아온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 하나하나는 거론할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엄청난 무지와 적대감에 계속 노출되다 보니, 피로감과 소모감이 쌓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이런 책은 쓰지 말고, 이성적이고 양식 있는 사람들만 상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덮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쓴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후회는커녕 점점 병들어가는 일본 사회에서 이런 책을 쓸 기회를 얻은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후에는 이런 책을 일본에서 출판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이 책으로 작은 저항을 할 수 있었다면, 젊은 세대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나마 완수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책을 한국 사람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은 이유는, 일본 사회는 이렇게 병들었다든지, 일본인의 다수는 이렇게 차별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지금 이 책을 손에 든 당신을 포함해 한국 독자들은 ‘재일조선인’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같은 민족’이라는 막연한 의식 때문에 잘 모르면서 왠지 그냥 아는 것 같은 느낌만 갖고 있지는 않나요?
한국에도 ‘재일조선인’을 가리키는 다양한 호칭이 있습니다. 재일 한국인, 재일 한인, 재일 교포, 재일 동포, 재일 코리안, 자이니치……. 또 재일조선인이란 대체로 ‘조총련계’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 살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이라는 의미에서 ‘재일조선인’이라고 총칭하고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단어를 총칭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이 책에 밝혀두었습니다.
1951년에 교토 시 교외의 관광지 아라시야마에서 찍은 필자의 가족사진. 뒷줄 오른쪽이 필자의 어머니 오기순, 안겨 있는 사람이 필자, 왼쪽이 아버지 서승춘, 앞줄 왼쪽부터 장남 선웅, 삼남 준식, 차남 승.
저는 재일조선인 2세(거의 3세에 가까운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일본의 일반 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 시절 며칠 동안 ‘재일 교포 모국 하계 학교’에 참가한 것을 제외하고는 민족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저의 청년 시절은 한국의 군부 독재 시대와 일치합니다. 그 시절, 저는 ‘조국(조상의 출신지)’인 한국을 방문할 수 없었고 일본 사회에서 고립되어 지냈습니다. 그 때문에 나이가 꽤 들 때까지 조국의 사회나 문화에 대해 깊은 지식을 쌓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990년대부터 겨우 조금씩 한국에 왕래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2006년 4월부터 2년간 성공회대학교에 연구교수로 오게 되어서 실제로 한국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은 이미 여기저기에 썼습니다만, 당시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는, 제가 조국의 사람들에 대해 잘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국의 사람들도 ‘재일조선인’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대했던 만큼 이해받지는 못 한다는 것을 알고 솔직히 다소 낙담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조국의 사람들도 ‘재일조선인’에 대해 정확히 알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지내면서 무척 당혹스러웠던 일은 어디를 가든 “외국 사람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던 것입니다. 간혹 일본인이냐고 묻는 이도 있었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일본인’은 아닙니다. ‘재일조선인’으로, 한국 국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한 사람은 ‘한국인이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확고한 기준이 있어서 그에 맞지 않는 저를 ‘외국인’으로 간주하는 것이겠지요.
독자 여러분은 이 책에 있는 ‘일본’이란 단어를 ‘한국’으로 치환하며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재일조선인’이란 단어를 ‘이주 노동자’, ‘국제결혼 이주자’, ‘연변 조선족’ 등으로 바꾸어보세요. 그럼으로써 제가 이 책에서 ‘일본인’에게 묻고 있는 질문들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알고 있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한국에 머물던 당시, 저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휴대전화를 개통하려고 했는데 ‘외국인은 안 된다’며 통신사 가입을 한마디로 거절당했습니다. 국내 은행이 발행한 신용카드가 있으면 가능하다기에 은행에 갔는데, 신용카드를 만드는 것도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렵사리 신용카드를 만든 뒤 다시 휴대전화 대리점에 가서 신청 서류를 모두 작성했습니다. 마지막 지불 단계에 이르자, 대리점 직원은 저에게 “주민등록번호는 어떻게 되시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번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가입 절 차가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번호가 없습니다. 대리점 직원은 외국인 등록증도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외국인이 아닙니다. 국적도 한국입니다.” 하고 말하자, “그러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재외국민 등록을 하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길로 다시 터벅터벅 출입국관리사무소로 가보니, 좁은 대기실에 사람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피부색이나 눈 색깔이 다른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겉모습이 다르지 않은 조선족 동포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재일조선인’은 일본 정부의 억압적인 출입국 관리 정책으로 고통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조국에서 같은 경험을 하다니, 얼마나 고약한 일인가요. 지금 한국에 있는 많은 ‘외국인’들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맛본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국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와 공유하는 특성이 있지만 엄연히 별개의 개념입니다. 국민주의란 자신이 ‘국민’임을 당연시하며, 아무런 의심 없이 사람들을 ‘국민’과 ‘비국민(국민이 아닌 자)’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부당한 차별에는 무관심한 사고방식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정부는 국민을 무시하지 마라!”, “국민을 바보 취급하지 마라!”는 구호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호는 은연중에 ‘국민’이 아닌 사람의 권리에는 무신경함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요? 국민이 아니면, 즉 외국인이나 소수자라면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을 무시하지 마라’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제가 평생에 걸쳐 저항해온 대상이 바로 일본인 다수자의 ‘국민주의’인데, 한국 사람들에게도 그와 닮은꼴의 ‘국민주의’가 침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 재일조선인에 대해 강연한 뒤, 저보다 조금 젊은 교수에게 “마치 과거의 망령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다.”는 감상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시대의 어두운 기억을 연상시키는,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편한 과거의 표상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령 일제 강점기에 강요된 ‘황민화 정책’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면 어떨지 상상해보십시오. 예컨대 조선어를 사용할 수 없고, 일본식 창씨를 사용해야 하며, 학교에서 민족의 역사나 문화를 배울 수 없을 뿐 아니라, 히노마루나 기미가요에 대한 의례를 강요당한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런 상황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바꾸어보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 재일조선인이 처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식민지 지배의 흔적이 한국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특히 해방 후에도 일본에 남은 재일조선인에게는 지금도 이런 상황이 하루하루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은 국내 사람들에게 ‘과거’일까요, 아니면 ‘현재’일까요?
해방 직후, 온갖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민족 분단이 고착화 되어 조선 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성립했습니다. 조선 반도에 사는 사람들, 특히 분단 이후에 태어나 자란 세대는 자신이 태어난 국가의 국민인 것을 무의식중에 대전제로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때 민족이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어떨지 상상해보십시오.
해방 후에도 일본에 남은 60만 조선인에게는 ‘국적’이 없었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강제된 ‘일본 국적’은 1952년에 일방적으로 박탈당했는데, 당시 조국은 분단되었을 뿐 아니라, 남북 모두 일본과 국교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처참한 무권리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1945년부터 1948년에 걸쳐 조국의 사람들을 분단시킨 정치 폭력이, 당시는 아직 재일조선인에게까지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국이 ‘둘’로 분단된 후에도 재일조선인은 ‘하나’였습니다. 제가 전에 “재일조선인에게는 지리적인 군사경계선이 없다. 재일조선인은 ‘분단되지 않은 사람들’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965년의 한일조약을 계기로 한일 간에 국교가 체결되고, 재일조선인의 한국 ‘국민’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70년대와 80년대에 적지 않은 재일조선인이 군사 정권의 탄압을 받았는데, 그것도 크게 보면 ‘분단되지 않은 사람들’을 억지로 분단시켜 국민화하려는 정치 폭력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조국은 분단되어 있어 한순간도 군사적 긴장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해방은커녕 한국 국내에는 과거 군사 정권 시대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조차 보입니다. 그렇다면 ‘분단되지 않은 사람들’인 재일조선인은 국내인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잊어야 할 ‘과거’일까요, 아니면 ‘현재’일까요?
바꿔 말하면 재일조선인은 국내의 많은 사람들이 잊고자 하는 어두운 과거나, 분단 체제가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새삼 떠오르게 하는 존재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국내의 여러분이 재일조선인을 ‘차별받는 가여운 타자’로 규정짓거나 ‘일본인’이라는 ‘악’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하지 말고, 오히려 재일조선인 속에서, 혹은 재일조선인을 차별하는 일본인 속에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이는 계속되는 식민지주의와 분단 체제를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이 책을 통해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재일조선인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만은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없어지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상상력도 없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일본 독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름을 인정하면서 더불어 사는 사회가 실현된다면, 일본은 재일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 호소는 한국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유효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책의 번역은 저의 오랜 벗인 한남대학교의 형진의 교수가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편집은 반비 출판사의 김희진 씨와 김선아 씨가 해주셨습니다.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한국 독자들에게 말을 건넬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2년 7월 1일
신슈(信州)의 산장에서
서경식
조선은 나쁜 게 아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재일조선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가능한 쉽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야기하는 저는 서경식이라는 재일조선인입니다. 60년쯤 전에 교토(京都) 시에서 태어나, 그 후 계속 일본에서 살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먼저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한 뒤, 2부에서는 재일조선인에 관한 질문들에 상세히 답하기로 하겠습니다.
역사를 안다, 자기 자신을 안다
현재 일본에는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재일조선인이 약 60만 명가량 살고 있습니다. 귀화 등에 의해 일본 국적을 갖게 된 사람들을 포함하면, 그 수는 10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입니다. 그래도 일본의 전체 인구와 비교해보면, 100명 중 1명 정도로 소수자입니다.
일본 국적이 없는 재일조선인은 외국인 등록을 할 때 ‘한국·조선’으로 분류됩니다. 여기에는 40만 명에 조금 못 미치는 ‘특별영주권자’도 포함됩니다. ‘한국·조선’이나 ‘특별영주’라는 말의 의미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재일조선인을 정의할 때 가장 먼저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minorit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이너리티란 ‘소수자’라는 의미의 영어로, 그 반대인 ‘다수자’는 머조리티majority입니다. 한 사회에서 무시당하거나 경시되거나 여러 가지 불평등을 강요당하는데, 그 존재가 머조리티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사회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들이 마이너리티입니다.
여기서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은 마이너리티에 대해 아는 것은 머조리티에 대해 아는 것이고, 재일조선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일본이라는 사회와 다수자인 일본인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일본인에게 ‘타인’의 역사가 아닙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직접 관여해서 만든 역사이며, 말하자면 일본 자신의 역사입니다.
‘재일在日’이란 ‘일본에 살고 있다’는 의미이므로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은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고 하면 곧장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겁니다. ‘왜 (조선인인데) 일본에 살고 있는가?’
일제강점기에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던 연락선. 시모노세키의 뒷글자와 부산의 앞 글자를 따서 관부연락선이라고 한다. 강제 징용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끌려갔다.(재일한인역사자료관소장) |
제가 일본에 살고 있는 이유는 지금부터 80년쯤 전에 할아버지가 조선 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왔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일본의 교토에서 일자리를 구한 뒤, 자식들과 다른 가족들을 조선에서 불러들였습니다. 당시 아직 어렸던 저의 아버지도 그때 일본에 와서, 일본에서 어른이 되었고, 비슷한 경우로 조선에서 건너온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저는 그 두 사람 사이에서, 1951년(일본 패전 6년 후)에 교토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럼 저는 일본에 이주해온 ‘외국인’의 자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에게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외국인’이라는 말은 ‘다른 민족’이라는 의미로도, ‘다른 국적의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족’과 ‘국적’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은 원래 ‘외국’이었지만 무력에 의해 1910년에 일본으로 ‘병합’되었습니다. 과거 제국주의 열강으로 불리던 세계의 몇몇 나라들은 앞다투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했습니다. 영국의 인도 지배,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지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본도 메이지유신 이후, 열강을 흉내 내어 류큐(현재의 오키나와—옮긴이), 아이누모시리(홋카이도), 대만 등을 지배했는데 이웃 나라인 조선도 ‘병합’이라는 형태로 식민지 지배를 했습니다.
그 때문에 1910년 이후 조선은 ‘외국’이 아닌, 대일본제국의 해외 영토가 되었고 그 땅에 있던 사람들(조선인)은 ‘다른 민족’이면서도 같은 제국의 ‘신민(일본 국적)’이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1910년부터 일본이 패전한 1945년까지 조선은 일본의 일부였고, 조선인은 일본 국민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할아버지가 일본에 왔을 때, 할아버지는 ‘국적이 다른 외국인’으로서 온 것이 아니고(자신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고 해도), 같은 국민으로서, 같은 영역 안을 이동한 것이 됩니다. 이 설명이 여러분에게 복잡하게 생각된다면, 그것은 ‘민족’과 ‘국민’을 구별해서 생각하는 것에 익숙지 않기 때문입니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국민’이란 무엇인가? 계속 새로운 의문이 솟아오르지요. 이것은 2부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식민지 지배란 다른 민족의 토지나 자원을 빼앗거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때문에, 토지를 잃고 일본인의 절반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던 조선인 몇 십만 명이 살 길을 찾아 고향인 조선 반도 밖으로 나갔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도 식민지 지배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조선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재일조선인 중 많은 사람이 이러한 사정으로 일본에 살게 된 사람과 그 자손들입니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있는 외국인의 일부지만, 다른 재일 외국인과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1) 과거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당한 사람들이라는 점, (2) 과거에 ‘일본 국민’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확히 정의하면 ‘재일조선인이란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 거주하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릴 ‘특별영주자’가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그 이외의 재일조선인도 이 특별영주자만큼 일본과 깊은 관계에 있습니다.
재일조선인을 간단히 ‘재일’이나 ‘자이니치(재일의 일본식 발음—옮긴이)’로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호칭은 ‘일본인이 아닌데 왠지 일본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왜 조선인이 일본에 살고 있는지, 그에 관한 역사를 바로 볼 수 없게 합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재일조선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호칭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이야기를 진행해 가겠습니다.
‘재일조선인’에 대해 많은 일본인은 잘 모릅니다. 시험 삼아 여러분의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물어보십시오. 재일조선인은 몇 명 정도 있고, 왜 일본에 사는가, 어째서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가…….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는 분은 적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 때, 제가 느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지진이 있던 날, 저는 직장인 도쿄東京 교외의 대학에 있었습니다. 전철 운행이 멈춰서 집에 갈 수 없게 된 동료와 함께 걸어서 저의 집으로 왔습니다. 그 동료는 저의 집에서 하룻밤 묵었습니다. 시내에 나갔었던 아내 역시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새벽 2시 무렵에야 겨우 돌아왔습니다. 도쿄조차 지진에 이토록 큰 영향을 받았는데, TV 보도를 통해 피해 지역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역사적인 대재해가 틀림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맨 먼저 떠오른 것은 ‘재일조선인, 재일 외국인들은 괜찮은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진이나 쓰나미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재해에 동반되는 데마고기demagogy, 거짓 소문에 의해 폭력에 노출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 또한 걱정되었습니다.
교통망이나 통신망도 큰 피해를 입어서 지진이 있고 나서 2주 정도는 피해 지역의 상황이 거의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3월 26일자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에 ‘외국인 절도단’, ‘폭동, 이미 일어났다’, ‘난무하는 유언비어, 현혹되지 않도록’ 등의 머리기사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이하 요지)
동일본대지진 피해 지역에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근거 없는 소문은 입소문에 더해 휴대폰 문자로도 확산되고 있다. 미야기 현宮城縣의 경찰은 25일 대피소에 전단지를 배포하며 냉정한 대응을 호소했다. 경찰에 따르면 110번(한국의 112—옮긴이) 신고는 하루에 500~1000건 정도 있는데 이중에는 목격자의 착각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피해 지역에서는 ‘성폭행이 다발하고 있다’, ‘외국인 절도단이 있다’ 등 다양한 소문이 무성하다. 인터넷으로도 소문이 확산되고 있다.
이 기사에서는 ‘외국인’이 성폭행이나 절도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라고 했지만,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 의하면 인터넷에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명확하게 쓴 글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 사람들은 무엇을 걱정할까요? ‘외국인’ 절도단이나 성폭행범에 대해 불안이나 공포를 느낄까요? 저는 이런 ‘소문’ 때문에 죄 없는 마이너리티가 폭력에 피해를 입을까 걱정됩니다. 저와 똑같은 불안을 느낀 재일조선인이 적지 않을 겁니다. 하물며 그 사람이 피해 지역이나 대피소에 혼자 고립되어 있다면 얼마나 불안할까요.
이제 와서 보면 다행히 ‘외국인’에 의한 것이라고 특정할 만한 범죄나, 근거 없는 소문 때문에 벌어진 ‘외국인’에 대한 폭력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런 걱정을 한 것은 90년쯤 전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23년 9월 1일, 리히터 규모 7.9의 거대한 지진이 관동 지방을 덮쳤습니다. 낮 12시 2분 전이었기 때문에 화재도 많이 발생해서 10만 명 이상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바로 관동대지진입니다.
이때 6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조선인과 200명 이상의 중국인, 수십 명의 일본인이 학살당했습니다. 지진이 있던 날 저녁부터 ‘조선인이 방화하고 있다’,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의 소문이 급속히 퍼져 일본인이 조선인을 습격한 것입니다. 당시 군과 경찰에 의해 청년단, 소방단 등의 자경단自警團이 각지에서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조선인을 찾아내서는 일본도나 쇠갈고리, 죽창 등으로 폭행해 죽였습니다. 소문은 곧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학살은 며칠간 계속되었습니다.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보통 ‘집단 학살’로 번역됩니다. 1948년에 유엔에서 채택된 ‘제노사이드 금지 조약(집단 학살 방지와 처벌에 관한 조약)’은 제노사이드를 ‘국민적,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인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로 행해지는 살해 등의 행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어떤 집단을 통째로 적대시하거나 위험시하여 몰아내거나 죽이는 행위가 제노사이드입니다.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 외에도 세계 각지에서 제노사이드가 행해져 왔습니다.
「관동대지진을 그리다ㅡ두루마리 그림·만화·어린이그림」(『關東大震災過眼錄』1924) 지진이 관동 지방을 덮쳐 큰 피해가 났을 때, '조선인이 방화하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퍼져, 6천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
제노사이드 연구자인 도쿄 대학의 이시다 유지石田勇治 교수는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일본이 관여한 세 개의 제노사이드 사례’ 중 하나로 들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개는 일본군에 의한 1937년의 ‘난징 학살’과 1942년의 ‘싱가포르 화교 학살’)
이시다 교수에 따르면 조선인 학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치안 당국이 근거 없는 데마고기를 사실로 인정하여 관계 관청에 엄중한 단속을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또 학살의 주된 실행자가 된 자경단 조직에 지역 유지, 재향군인회뿐 아니라 경찰도 관여했습니다. 군대가 일반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조선인을 붙잡아 살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자경단의 폭력이 심해지자 국가가 다양한 은폐 공작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건 후 열린 재판에서 자경단에만 책임을 묻는 한편, 마치 데마고기가 사실인 양 미디어 조작도 했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정부 당국이 독립을 요구하는 조선인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던 사실이 있습니다. 이시다 교수는 “학살이 국가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군이든 경찰이든 국가 기관이 관여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재일조선인은 무방비인 채, 민중·자경단·경찰·군의 손에 붙잡혀 살해당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주일 미국대사가 “이런 끔찍한 대학살이 백주대낮에 공공연히 행해지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결단코 문명국이라 인정할 수 없다. 특히 그것을 태연히 바라보면서 제지하지 않은 일본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야만적인 정부다.”라고 말한 일이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후, 조선인 학살에 가담한 일부 일본인에 대해 시늉뿐인 재판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도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음이 재차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피고가 가벼운 형에 처해졌을 뿐, 진실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후(1945년 8월 15일 이후—옮긴이)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진상 조사, 사죄, 보상 등의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습니다.
학살 사건이라고 하면 먼 나라의 옛날 일처럼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이 나고 자란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아니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이번 동일본대지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무척 걱정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90년 전의 일이며 지금은 다르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90년이 지난 지금까지 걱정을 하는지, 그것이 바로 이 책을 통해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범죄 DNA?
관동대지진은 90년 전의 일이지만, 불과 약 10년 전인 2000년 4월 9일, 지금도 도쿄 도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郞 지사가 도쿄도 내의 어느 자위대 주둔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해 9월에 도쿄에 대재해가 있다고 상정하고, 자위대의 재해 출동 연습이 실시되었는데 그에 앞서 자위대원에게 한 말입니다.
이번 9월 3일에 육해공 3군을 동원하여 도쿄 방위와 재해 방지, 재해 구급을 하는 대연습을 실시합니다. 오늘날의 도쿄를 보면, 불법 입국한 많은 삼국인三國人, 외국인이 매우 흉악한 범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미 도쿄의 범죄 형태는 과거와 다릅니다. 굉장히 큰 재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아주 커다란 소요 사태도 상정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경찰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여러분이 출동해서, 재해 구급뿐 아니라, 치안 유지 역시 여러분의 커다란 목적으로 생각하고 수행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이 발언은 ‘삼국인’이라는 용어가 차별적이라는 이유로, 언론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삼국인’이란 일본 패전 직후에 사용된, 조선인과 대만인을 가리키는 매우 차별적인 말입니다. 도쿄 도지사라는, 매우 높은 지위에 있는 공무원이 그런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비판받았는데 지사는 사죄하거나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삼국인’이라는 말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사하라 지사의 발언은 더욱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확인할 것은, 과거의 재해 때 외국인이 대규모로 일본의 일반 주민에게 피해를 준 사실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앞서 말한 것처럼 재일조선인이 일본인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대재해가 일어나면 신상이 위험하다고 불안을 느껴야 하는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외국인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시하라 지사의 말은 반대입니다.
또한 이시하라 지사는 자위대에게 재해 구조뿐 아니라 치안 유지도 해주기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치안 유지는 자위대 본래의 존재 이유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자위대의 임무는 방위와 재해 구조이고, 치안 유지는 경찰의 업무입니다. 2차대전 패전 전, 일본에는 군대가 본래의 임무를 넘어 국민 생활 전반을 간섭하고 통제한 군국주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반성에서 전후 여러 나라가 패전국인 일본에, 자위대는 본래의 임무를 일탈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습니다. 지사는 그 합의를 뒤집는 발언을 한 것입니다.
이시하라 지사는 ‘불법 입국한 삼국인, 외국인이 매우 흉악한 범죄를 반복하고 있다’고도 말합니다. 외국인 범죄가 일반적으로도 증가하고 있는 듯 말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대부분은 흉악한 형사 범죄가 아니라, 출입국관리법 위반 같은, 체류 지위 등에 관련된 행정상의 위반 행위입니다.
매년 일본에서 상당수의 범죄자가 검거되어 처벌받고 있고 그들 중에는 외국인도 있습니다. 거주, 상업, 관광, 유학 등 다양한 목적으로 일본 사회에 있는 외국인 중, 일정 비율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는 것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외국인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유대인』이라는 책에서 유럽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유대인 차별 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소중한 모피를 세탁하려고 맡겼는데 그만 타서 눌린 자국이 생겨버렸습니다. 그 여자는 화를 내며 “저 가게 주인은 역시 유대인이라서.”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사르트르는 ‘왜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유대인 전체를 미워하는가’ 하고 질문한 뒤, 그것은 많은 유럽인이 옛날부터 마음속에 가져왔던 차별 감정을 이 여자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나치 독일에 의한 대규모 유대인 학살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일반 사람들의 이와 같은 차별 의식이 있었습니다.
비슷한 일을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느 날 택시를 타고 운전기사와 잡담을 나누던 때의 일입니다. 무슨 이야기 끝에 화제가 중국으로 갔는데, 그 운전기사가 기묘할 만큼 단호하게 “나는 중국인을 싫어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쉽게 그에게 동의하리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말했는지 모릅니다.
“왜죠?”라고 제가 되묻자 운전기사는 “이전 회사에 중국인 동료 가 있었는데 지각을 많이 하고, 동료들에게 퍽 민폐를 끼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계속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게 중국인이기 때문입니까?” 운전기사가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에 제가 말을 보탰습니다. “중국인은 십수 억 명이나 있습니다. 당신이 우연히 알게 된 것은 그중 한 명이겠지요. 그 한 명을 보고 중국인은 이렇다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습니까?” 운전기사는 “어쨌든 나는 싫습니다.”라고 했고 대화는 중단되었습니다.
이 운전기사는 말투도 정중했고, 매우 좋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인종차별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가벼운 대화, 그러니까 불쾌한 경험을 했을 때 상대가 ‘어느 나라 사람이니까’라며 그 집단 전체를 싫어하는 감정을 느끼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대화 안에 무서운 위험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저 중국인 녀석들’, ‘저 유대인 녀석들’, ‘저 재일조선인 녀석들’……. 이렇게 타자 집단을 일괄해서 ‘저 녀석들은 우리와 다르다, 저 녀석들은 이렇다’라고 그 집단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인종주의의 특징입니다. 나치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유대인을 비롯한 마이너리티를 대량 학살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전쟁 때, ‘기치쿠베이에이鬼畜米英, 귀축미영’라는 상투어를 사용해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은 모두 ‘괴물’ 같은 무리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일들이 전 세계에서 행해져 온 것입니다.
전쟁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행위로, 특히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상대를 ‘적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쟁 수행을 위해 국민에게 이러한 적의나 차별 의식을 갖게 하는 일이 행해진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차별 의식은 전쟁으로 이어지는 위험한 것입니다.
유엔인종차별금지조약에는, 가맹국(일본도 가맹국입니다.) 정부는 고위 공무원이 민족 간, 인종 간 증오를 부추기는 언동을 하는 것을 금지할 의무가 있다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학살이나 전쟁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서의 이시하라 지사의 발언에 대해 유엔인권문제소위원회에서는 인종차별금지조약에 위반된다며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이시하라 지사는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았고 일본 외무성은 그런 이시하라 지사를 변호했습니다.
인종차별금지조약 가맹국들은 국제 조약에 따라 자국 법률을 정비하게 되어 있지만, 일본 내에는 차별 금지법이 없습니다. 다른 집단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언동, 즉 ‘증오 범죄Hate crime’를 처벌하는 법률이 있는 나라도 있지만 일본에는 그런 법률이 없습니다. 일본에서 인종차별적 언동은 사실상 손을 놓은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다른 장소에서, 이시하라 지사는 ‘중국인이 저지르는 범죄는 일본인이라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것으로, 이 범죄 DNA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습니다. ‘중국인에게 범죄 DNA가 있다’는 말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DNA란 유전자를 가리킵니다.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는지, 아닌지가 유전자로 정해집니까? 그 ‘범죄 DNA’를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집단의 전원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까? 일본에서 적발되는 범죄자 중에는 외국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본인입니다. 어느 일본인의 흉악 범죄가 DNA 때문이라고 한다면, 일본인인 이시하라 지사도 같은 범죄 DNA를 갖고 있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DNA 같은 태생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환경이나 교육 등 후천적인 요인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벌의 목적은 보복(응보형)이 아니라 ‘갱생’을 위한 교육(교육형)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형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사형이라는 형벌이 인간에게서 갱생의 기회를 최종적으로 빼앗는 것으로 교육형의 이념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집단에 대해 ‘갱생 불가능한 범죄 DNA를 갖고 있다’는 등의 폭력적인 논의가 통한다면, 그 집단 전원을 살해하는 일도 정당화될 수 있겠지요. 실제로 나치가 한 짓이 바로 이런 짓입니다.
도쿄 도지사라는 고위 공무원이 이와 같은 차별 발언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재일조선인에게 얼마나 무서운 일일지 상상해보십시오. 그런데도 이시하라 지사는 선거 때마다 압도적으로 많은 표를 얻어 당선되었습니다. 왜일까요? 어쩌면 그 택시 기사 같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들이 공개적으로는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본심을 이시하라 지사가 말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무서운 것은 이시하라 지사 개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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