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며
과학의 최전선에서 보낸
따뜻한 질문 그리고 대답
《인간과 우주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 모르는 것들》은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학자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과학적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어떤 질문은 너무 뻔해서 아직도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을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질문은 다루고 있는 범위가 너무 커서 수많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기도 한다. 이 책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런 대담한 질문들에 야심 차게 도전하고 있는 무모한 책이다.
2005년 《사이언스》는 창간 125주년을 맞아 우주와 자연, 생명과 의식에 관한 가장 중요한 125개의 질문을 선정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화제가 됐던 이 질문들의 매력은 누구나 흥미로워할 만큼 보편적인 물음이라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잠자고 꿈꾸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덕성은 뇌에 각인되어 있을까?’ ‘자연이 이토록 복잡하고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이유는 무엇일까?’ ‘줄기세포로 모든 암을 치료할 수 있을까’ 같은 질문들은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호기심을 느낄 법한 질문들인데, 125개의 질문들 대부분 이렇게 보편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그만큼 과학자들이 이런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이 질문들을 보면서 묘한 호기심이 다시 발동했다. 과연 대한민국 최고의 석학들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에게 이런 질문들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이런 엉뚱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이 책은 세상에 나오게 됐다.
이 책을 세상에 선보이는 데까지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2006년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 날, 처음 이 책의 기획 이야기를 하며 출판사 편집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 차가 수면에 미끄러져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를 박는 사고가 일어났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차는 폐차하기에 이르렀고, 이 책은 그런 우리에게 ‘영광의 상처’ 같은 훈장이 되리라 믿고 출간을 준비하게 됐다.
석학들을 초청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다들 질문이 너무 도전적이어서 답하기 곤란하다며 정중히 거절하셨다. “저는 이런 큰 질문에 답을 하는 학자가 아니에요. 저는 실험실에서 아주 작은 질문에 겨우 답을 하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아주 구질구질한 연구를 하는 사람이랍니다.” 같은 솔직한 답장을 해 주신 과학자도 있었다. 우리 과학자들은 모두 실상 그렇지 않은가! ‘의식의 생물학적 토대는 무엇인가’같은 거대한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이런 책을 쓸 때만 하는 일이지 않은가?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 주신 석학들의 ‘생각의 산물’들이다.
덧붙여, 이 책에는 독특하게도 인문학자들이 자연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이 답해 놓은 질문에 논평을 하는 좌담도 수록돼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별미가 될 텐데, 많은 인문학자들이 이 대담을 조심스럽게 고사한 것도 또 하나의 우여곡절이었다. 원래 다른 분야에 대해 논평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를 깨는 도전이니까. 하지만 대화는 유쾌했고, 과학에 대한 따뜻한 조언과 비판이 가득했으며, ‘과학자 아닌 척, 과학자 흉보기’도 달콤했다.
이 책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야심 차게 출간됐다. 이런 책을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출간해 준 낮은산 출판사, 그리고 이 책에 기꺼이 옥고를 보내 주신 대한민국 최고의 과학자들, 그리고 과학에 대해 논평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던 ‘진정한 과학애정인’ 김용석 선생님과 강신주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분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과학 분야의 도전적인 질문과 이에 대한 대한민국 과학자들의 탁월한 답변이 세상에 던져지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과학은 질문과 대답을 통해 우리가 인간과 우주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 책이 만약 충분한 대답이 못 되었다면, 바로 그 자리에 과학의 최전선이 존재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최전선에서 과학자들이 인류에게 보내는 따뜻한 편지다.
2012년 7월
지은이와 좌담자를 대신하여 정재승 씀.
생체시계는 어찌 이렇게 정확할까
What synchronizes an organism's circadian clocks?
우리는 어떻게 해가 뜨면 잠에서 깨고 해가 지면 잠에 들까? 태양이 없어도 우리 몸은 제때 잠들고 깰까?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우리의 일주기 리듬을 관장하는 생체시계가 우리 몸의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 애써 왔다. 그리고 이제 뇌에 그 생체시계가 있다는 것까지는 밝혀냈다. 그럼에도 과연 서로 다른 주기를 가진 신경세포들은 어떻게 24시간에 맞춰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일주기 리듬을 살려 더욱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지,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자명종, 인류 최악의 발명품
2000년 새해,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면서 영국의 한 매체는 ‘지난 1000년 동안 인류가 내놓은 최악의 발명품’ 리스트를 유명 학자들로부터 받았다. 그 최악의 발명품 리스트에는 세상에서 마땅히 사라져야 할 다양한 제품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비닐봉지라든가 총, 마약, 스팸메일 등이 포함돼 있었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착상돼 세상에 등장했고 널리 사용되었으나,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제품들! 이 리스트 속에는 ‘인류의 어리석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만약 시간생물학Chronobiology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에게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명종’이라고 답할 것이다. 현대인의 수면을 방해하고, 낮의 일상을 피곤하게 만든 발명품, 인간의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 무자비한 발명품이야말로 침실에서 몰아내야 할 제품이라고 시간생물학 연구자들은 믿는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자고 깨는 리듬, 일주기 리듬을 관장하는 생체시계는 뇌에 있다고 하며 빛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자명종은, 빛에 영향을 받고 수면과 각성을 조절하는 생체시계는 제대로 깨우지 않은 채, 소리로 대뇌 피질Cerebral cortex만 깨우기 때문에 사람의 일주기 리듬을 망가뜨리고 하루 종일 피곤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자명종은 자명등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 리듬이 망가지면 판단도 흐려지고 업무의 실수도 잦아진다. 응급실에서 벌어지는 판단 실수의 많은 경우가 의사와 간호사의 일주기 리듬이 망가졌기 때문이며, 인도의 보팔 화학 공장 사고, 옛 소련의 체르노빌과 미국 스리마일 섬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모두 밤 12시부터 새벽 4시, 일주기 리듬을 거슬렀던 직원들의 판단 착오로 벌어진 대형 사고였다. 이렇듯 ‘깨어 있는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생체시계의 특징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의 과학저널 《사이언스》가 ‘인류가 아직 풀지 못했으나 꼭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난제 125개’ 가운데 하나로 생체시계를 꼽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정이었다. 충분한 수면 후에 내린 ‘한낮의 결정’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질문 안에 들어 있는 동기화synchronization, 즉 주기적 운동을 하는 진자들의 위상이 서로 일치하는 현상이다. 생체시계에서 동기화가 왜 중요한 과학적 문제일까? 무엇이 서로 동기화돼 있다는 얘기일까? 우선 이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좋은 답을 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생체시계는 어디에 있는가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때가 되면 잠이 쏟아지고 잠에서 깨는 경험을 누구나 하듯이, 우리 몸에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 같은 기관’ 즉 생체시계가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경험적으로 알려져 왔다. 이런 현상은 행동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각 신체기관의 생리적 운동 수준에서도 관찰된다. 하루의 시간 변화에 따라 호르몬 분비량도 달라지고 체온도 정해진 변화를 겪는다. 그런데 우리 몸의 신체 기관들이 들여다보는 이 생체시계는 과연 우리 몸의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위치를 찾기 위해 과학자들은 지난 100여 년간 많은 노력을 해왔다.
모든 신체 기관이 주기적인 운동을 하니 그 자체로 시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생체시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생체의 일주기 운동을 관장하는 생체시계를 중앙 통제 시계master clock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모든 신체 기관은 이 주인 시계에 맞춰 생리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부수적인 시계slave clock인 셈이다. 이 주인 시계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체 기관의 각 영역을 하나씩 망가뜨려 보면서, 그래도 일주기 운동이 살아남아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일 테다.
그래서 결국 찾은 곳이 바로 뇌에 있는 시교차상 핵suprachiasmatic nucleus이다. 빛이 눈으로 들어온 뒤 가게 되는 뇌의 좌우 신경이 교차하는 곳, 즉 시교차 위에 있어 시교차상 핵이라 불리는 곳인데, 생체시계가 빛의 영향을 받다 보니 오랫동안 가장 그럴 듯한 생체시계 후보로 간주됐다.
시교차상 핵은 2만여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돼 있다. 살아 있는 쥐의 시교차상 핵에 전극을 꽂아 신경세포들의 전기 신호local field potential를 측정해 보면, 24시간을 주기로 사인sine파에 아주 가까운 파형을 그린다. 그리고 바로 이곳을 망가뜨리면 체내 대부분의 기관이 보이던 24시간 주기적 양상이 사라진다. 시교차상 핵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중앙 통제 시계인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시교차상 핵의 신경세포를 모두 꺼내 적절한 체액과 영양분을 공급해 접시 위에서 키우면서 이들의 일주기 리듬을 측정해 봤을 때, 시교차상 핵의 2만여 개 신경세포들에서 서로 다른 주기가 측정된다는 사실이다. 그 범위는 20시간에서 28시간 사이.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서로 다른 주기의 신경세포가 체내에서 활동할 때에는 정확히 24시간에 맞춰 리듬을 만들어 낸다.
시교차상 핵이라는 생체시계 내의 신경세포들은 서로 다른 주기의 리듬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체내에서 24시간이라는 동기화된 리듬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사이언스》가 꼽은 ‘인류가 아직 풀지 못했으나 꼭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난제’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동기화는 왜 중요한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앙 호이겐스는 서로 다른 주기적 운동을 하는 두 개의 진자는 둘 사이를 매개해 주는 매개 물질mediator이 존재한다면 주기와 위상이 같아지는 동기화 현상이 벌어질 수 있음을 처음 관찰했다. 벽에 걸린 진자형 추시계들이 처음에는 다른 위상으로 움직이다가 결국 같은 위상을 갖게 되는 현상, 인도네시아 맹그로브 숲의 반딧불이 떼가 순식간에 같은 박자로 깜빡이는 현상, 가을밤에 귀뚜라미들이 같은 박자로 합창하는 현상, 같은 기숙사 방을 사용하는 여학생들의 생리 주기가 일치하는 현상 등이 그 예이다. 그러한 일이 시교차상 핵 신경세포들 사이에서도 일어나는데 그 메커니즘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사이언스》의 물음인 것이다.
이처럼 시교차상 핵 신경세포들 사이의 동기화 현상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시간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최대 이슈이다. 아마도 시교차상 핵에서 매개 물질은 신경 전달 물질인 가바 GABA, gamma-aminobutyric acid일 텐데, 흥미로운 것은 가바가 억제성inhibitory신경 전달 물질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억제성 매개 물질이 어떻게 동기화 현상을 만드는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아 과학자들도 난감한 형국이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가바가 시간에 따라 흥분성excitatory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보고도 나와 이 문제를 더욱 미궁에 빠뜨리고 있다. 한 신경 전달 물질이 같은 영역에서 시간에 따라 흥분성과 억제성을 모두 갖는 현상은 뇌 속 어느 곳에서도 관찰된 바가 없어 신경과학자들의 이목이 더욱 집중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과학자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생체시계의 작동 원리와 특히 신경세포 간의 동기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일이 왜 중요한 것일까?
우선 물리학자들에게 이 문제는 ‘동기화 현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반딧불이나 귀뚜라미처럼 개체 수준이 아니라, 한 신체 기관 내에서 벌어지는 동기화 현상은 우리가 실험적으로 조작하기 용이해서 동기화 메커니즘을 제대로 밝히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동기화가 일어나는지, 그 필요충분조건을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서로 다른 주기와 위상의 진자 운동이 순식간에 동기화가 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자연이라는 복잡적응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시간생물학적으로도 이 문제는 매우 흥미롭다. 지금 다수의 시간생물학자는 24시간 일주기 리듬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지만, 설령 그들이 시간 유전자들을 찾는다고 해도 서로 주기가 다른 리듬이 어떻게 동기화되는가는 유전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시교차상 핵의 핵심 기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동기화 현상을 잘 이해해야만 한다. 실제로 시교차상 핵의 체내 일주기를 정교하게 측정하면, 그 값이 약 24.3시간 정도이다. 그런데 24시간 주기로 뜨고 지는 태양빛이 있으면 이 생체시계는 정확하게 태양의 주기에 맞춰 24시간 주기를 보인다. 이 현상을 외부 동기화 현상external synchronization or entrainment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외부 자극인 태양빛 변화에 의해 생체시계의 주기가 일치하는지 역시 아직 과학자들이 풀지 못한 난제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의 세포를 수십 분 동안 관찰해 보면 그들이 만들어 내는 활동 전위 양상spike trains of action potential은 매우 복잡하다. 그런데 어떻게 완전히 다른 시간 스케일인 일day 단위로 보면 24시간이라는 주기를 정교하게 가질 수 있을까? 시간 유전자들은 어떻게 작동해 하나의 일주기 리듬을 세포 내에서 발생하게 하며, 이것은 신경세포들 사이에서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칠까? 수면과 각성을 관장하는 송과선은 멜라토닌을 통해 어떻게 시교차상 핵에 영향을 미칠까? 이 역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 모든 현상을 관장하는 중앙 통제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알아서 이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과학자들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시간과 행복하게 사는 법
수면을 연구하는 의사들은 생체시계의 동기화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한다. 생체시계의 손상이나 비정상적인 작동은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수십만 명이 고통받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연성 수면위상 불면증delayed sleep phase insomnia 환자들은 오전 4시에서 낮 12시까지 잠을 잔다. 이 환자들은 오전에 깨어 있어야 하는 직업은 가질 수 없다. 1999년에 발견된 희귀 질환인 선행 수면위상 가족 증후군familial advanced sleep phase syndrome 환자들처럼 오후 7시 30분쯤 잠이 들어서 오전 4시 30분이면 저절로 깨는 이 극단적 아침형 인간들의 질병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일 또한 생체시계의 메커니즘과 관련이 깊다.
최근 연구 결과, 선행 수면위상 가족 증후군 환자들은 정상인보다 한 시간 정도 빠른 주기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이는 시계 기능을 담당하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는 것을 시사한다. 유타 대학교 루이스 프라섹 팀은 이 돌연변이를 추적해 hPer2라는 단일 유전자가 이 시간 유전자 가운데 하나임을 밝혀냈으며, 이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선행 수면위상 가족 증후군의 원인일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 유전자가 만드는 단백질이 분자 수준의 되먹임 고리feedback loop(이것이 개별 신경세포의 일주기 운동을 일으킨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이런 식의 유전자적 연구가 어떻게 생리적인 변화를 일으켜 질병을 만들어 내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체시계의 메커니즘을 빨리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진화적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을 포함해 동물들은 왜 일주기 리듬을 갖게 됐을까? 그것이 생존에 더 도움이 됐기 때문일까?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으로 나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그것을 결정할까? 그것은 타고난 것일까, 습관과 노력으로 변형 가능한 것일까? 좀 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시계라는 개념은 인간이 편의상 만든 개념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발명품일까? 시간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량일까, 그저 운동만이 이 우주에 존재할 뿐이며 시간이란 물체의 운동을 관통하는 가상의 개념일 뿐일까? 신경세포 간의 동기화 현상은 시교차상 핵이라는 생체시계를 둘러싼 이 모든 질문에 근사한 해답을 얻는 데 우리에게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인간은 자연이 선물해 준 자명등을 하나씩 뇌 속에 가지고 있다. 뇌 속의 이 자명등이 우리로 하여금 태양으로 관장되는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고 때에 맞는 행동 양식을 갖게 하고, 우주와 자연이 만들어 내는 빛의 조화와 운동의 흐름 속에 인간의 삶을 녹아들게 하는 것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기 참 어려운 시간을 복잡한 도시의 현대인들은 관통하고 있다. 생체시계의 동기화 현상을 파악하는 수준을 넘어, 불야성의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이 시계와 행복하게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난제일 것이다.
BRAIN 02
인간의 뇌는 복제될 수 없는가
강봉균
어떻게 기억을 저장하고 불러내는가?
How are memories stored and retrieved?
우리는 일상에서 들은 소리, 이미지, 냄새 등을 어떻게 기억하게 되는 것일까? 뇌에는 기억을 담당하는 특정한 영역이 따로 있을까? 이제 21세기의 가장 각광받는 과학 분야인 뇌과학은 동물 실험과 인간 뇌에 대한 컴퓨터 이미징 기술의 발전 덕분에 기억과 관련된 뇌 영역의 위치와 여러 형태의 기억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시작일 뿐 그 세세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직 갈 길이 먼 것은 사실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느 날 갑자기 기억이 없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같이 살고있는 부모나 형제자매도 몰라볼 테고, 하루 일과가 끝나도 집을 못 찾을 테니 아마 일상생활 자체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실질적인 생활의 어려움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즉, 기억이 없어지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될 테니 말이다. 심각한 기억 장애를 일으키는 치매도 그 한 예이다.
치매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사람은 순간적인 기억 장애 또는 경미한 기억 손상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시험 볼 때 어떤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애를 태워 본 경험을 누구나 한두 번쯤은 갖고 있다. 분명 머릿속에 들어 있는데 왜 생각이 안 나는지 때로 화가 나기도 한다.
아내가 살해되던 날의 충격으로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이야기인 〈메멘토〉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 레너드는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 중요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심지어 찾아낸 정보를 자기 몸에 문신을 하면서까지 기록한다. 10분이 지나면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억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해 주는 중요한 이유이다. 어느 한 집단의 문화유산도 기억에 의해 이어졌으며, 어느 한 개인의 정체성도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해 주는, 기억하는 능력 때문에 유지된다.
기억의 시작은 뉴런이다
한 인간이 저장할 수 있는 기억의 용량은 거의 무한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양의 기억이 저장되는 장소는 놀랍게도 무게가 1.5킬로그램도 안 되는 뇌이다. 그런데 몸무게의 2~3퍼센트에 불과한 이 뇌가 쓰는 에너지는 인체가 사용하는 총 에너지의 50퍼센트 이상이다. 이런 놀라운 에너지 소모량은 생명체를 유지하는 데 뇌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뇌에는 뉴런neuron이라는 신경세포가 약 1000억 개 들어 있고, 뉴런은 대부분 뇌의 껍질 부위, 즉 피질에 몰려 있으면서 여러층을 형성한다. 그 가운데 뇌의 정보 처리 기능은 회백질의 신경세포 층에서 일어난다. 이 뉴런은 어떻게 정보를 저장하고, 다시 불러낼 수 있을까? 우선, 다른 세포와는 달리 조금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뉴런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크게 보면, 뉴런은 유전 정보가 담긴 핵이 있는 세포체와 여기서 복잡하게 뻗어 나온 돌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뇌는 우리가 눈과 귀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보고 들은 이미지, 소리 그 자체를 저장하고 불러내는 것일까? 아니다! 뇌가 저장하고 불러내는 정보는 바로 그러한 자극이 만들어 낸 활동 전위라는 전기 신호이다. 소리의 떨림을 전기 신호로 바꿔 저장하는 녹음기와 같은 원리이다. 세포체에서 뻗어 나온 돌기가 이 전기 신호를 전달하는 전선과 같은 역할을 한다.
당연히 하나의 뉴런과 다른 뉴런이 서로 연결돼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의 뉴런은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상 돌기와 그 신호를 다른 뉴런에게 전달하는 기다란 축삭 돌기를 갖고 있는데, 어떤 뉴런의 축삭 돌기가 신호를 전달해 주면 다른 뉴런의 수상 돌기가 신호를 받음으로써 정보는 전달된다. 이렇게 두 뉴런을 연결해 주는 구조를 시냅스라고 하는데, 하나의 뉴런은 수만 개의 다른 뉴런과 시냅스를 형성하고 있다. 뇌는 1000조 개에 이르는 시냅스로 이루어진 엄청나게 복잡한 회로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뇌에는 뉴런의 연결 방식에 따라 천문학적인 수의 신경 회로망이 있다. 생각하고, 느끼며, 기억하고, 몸을 움직이게 하고…… 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뇌에서 어떤 신경 회로망이 전기적으로 활동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사람마다 다른 기억
시냅스의 양이나 위치 등은 정상적인 사람끼리도 조금씩 다르다. 이 차이는 유전에 의한 선천적인 영향보다는 학습에 의한 후천적인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냅스의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그동안 많은 학자가 다양한 동물 연구를 시도했다. 이에 과학자들은 학습과 환경에 따라 시냅스의 형태가 늘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러한 성질을 ‘신경 가소성’이라고 했다.
시냅스를 많이 사용할수록 시냅스의 기능이 좋아지는 현상인 장기 강화LTP, Long-Term Potentiation 현상도 발견하였다. 결국 새로운 정보가 우리 뇌로 입력되면 신경 회로망이 활동하고 이에 따라 시냅스의 능력이 변하므로, 우리의 뇌는 수시로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또 어떤 시냅스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신경 회로망의 활동은 결정되므로, 결국 시냅스의 구조와 기능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뇌과학의 연구 결과는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예를 들어, 뇌과학자에게 “인간을 복제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아마 대부분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은 인격에 있고 이는 뇌의 활동에서 나오는데, 이러한 뇌의 활동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인마다 독특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다양한 정보를 뇌에 저장하고, 뇌의 신경 회로망은 개인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뇌 구조의 작은 차이는 개인의 독특한 개성으로 표현된다. 이렇듯 유전자를 복제한다고 해서 뇌의 회로를 복제할 수는 없으므로, 인간 복제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술 기억이 저장되는 곳
한 사람의 기억이라도 그 정보가 어떤 성질이냐에 따라 뇌에 저장되는 방식은 달라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내용은 크게 서술 정보와 비서술 정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술 정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정보이다. 즉, 학교 공부, 영화 줄거리, 장소나 위치, 사람 얼굴처럼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정보로, 외현 정보라고도 한다. 반면, 비서술 정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보이다. 몸으로 체득하는 운동 기술, 습관, 버릇, 반사적 행동 등처럼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힘든 정보로, 감춰져 있다는 의미에서 암묵 정보라고도 한다.
서술 정보는 비교적 쉽게 얻어지지만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만 기억과 회상이 가능하며 회상할 때는 가끔 기억 내용이 변형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비서술 정보는 대부분 고되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얻어지지만 기억 내용이 정확하게 표현되며 기억할 때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농구에서 경기의 규칙이나 전술은 서술 정보이고, 몸에 밴선수의 운동 기술은 비서술 정보라고 하면 쉽게 구분이 된다.
다음 사례는 두 가지 기억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어린 시절 사고로 뇌가 손상된 뒤 심한 간질을 앓다 뇌의 양쪽 측면인 내측두엽을 절개하는 수술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수술 뒤 그의 지능 지수는 수술 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금방 보거나 들은 내용을 몇 분 이상은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새로 이사 간 집을 찾지 못하고 수술 전 옛집만을 기억했다. 한편, 수술 뒤 배우게 된 탁구 실력은 제법 향상됐다. 비록 언제 어떻게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 심지어 자기가 배운 적이 있는지조차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나 탁구를 잘 쳤다.
이를 다르게 이야기해 보면, 운동 기술 같은 비서술 기억은 유지되었으나 이사 간 집 주소 같은 서술 기억은 오래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환자의 뇌에서 절개한 내측두엽은 해마와 그 주변 조직들이 포함돼 있는 곳이다. 어떤 이는 교통사고를 당해 해마 부위가 손상되었는데 그로 인해 서술 기억 능력이 심각히 손상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해마는 서술 기억을 처리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수술 뒤에도 잊어버리지 않은 옛집의 위치나 탁구 기술 같은 기억은 해마가 아닌 다른 곳에 저장되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해마 (Hippocampus) 운동 규칙처럼 비교적 쉽게 습득되며 변형이 되기도 하는 서술 기억은 해마와 그 주변 조직들이 포함돼 있는 내측두엽으로 들어와 몇 주 정도 일시적으로 머물게 되고, 그동안 쪼개져 신경 정보 신호로 바뀌고 어떻게 나뉘어 저장될지 결정된 뒤, 그 가운데 오랫동안 기억할 내용은 바로 대뇌 피질의 여러 부분으로 보내져 저장된다. |
장기 기억이 저장되는 곳
그렇다면 오랫동안 기억할 내용이 저장되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대뇌 피질이다. 내측두엽으로 들어온 서술 정보는 해마와 그 주변 조직들에 몇 주 정도 일시적으로 머물게 되고, 그동안 쪼개져 신경 정보신호로 바뀌고 어떻게 나뉘어 저장될지 결정된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도록 서술 정보를 조직화하는 과정을 부호화 단계라고 한다. 예를 들어, 좀 더 집중해서 의욕적으로 공부를 했을 때 잘 까먹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부호화 단계가 수월하게 되어, 학습한 내용을 오랫동안 기억하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 들어온 정보가 기존에 저장된 정보와 유사한 경우에도, 두 정보가 쉽게 연결되므로 부호화가 더 잘 일어난다.
이렇게 부호화 단계가 끝나면, 그 가운데 오랫동안 기억할 내용은 바로 대뇌 피질의 여러 부분으로 보내져 저장된다. 그 자세한 과정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내측두엽은 뇌에 넓게 퍼져 있는 대뇌 피질과 신경망을 통해 연결돼 있어서 정보가 전달된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래도 대뇌 피질에 장기 기억이 저장되는 방식과 관련해 몇 가지 밝혀진 사실은 있다. 먼저, 대뇌 피질에 전해진 정보는 같은 범주로 분류되는 내용끼리는 같은 영역에 저장된다. 예를 들어, 동물에 대한 정보와 무생물에 대한 정보가 저장되는 장소가 다르며, 언어 정보에서동사와 명사가 저장되는 장소가 다르다. 또한, 다음 단계에서는 기억과 관련된 유전자가 발현돼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이 단백질 덕분에 기억 내용이 공고해지고 오랫동안 저장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장기 기억은 거의 무제한으로 뇌에 저장된다.
기억과 관련하여 한 가지 재미있는 학설이 있다. 잠과 기억이 관계있다는 학설이다. 우리는 보통 피로에 지친 뇌를 휴식시켜 다음 날을 준비하기 위해서 반드시 잠을 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제로 이 학설에 따르면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 정보가 분산되어 저장되는 과정이 활발히 일어난다. 결국, 우리가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낮 동안 받아들인 방대한 정보를 정리하며 저장하기 위한 과정이 자는 동안 일어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히 잠을 잘 못 자면 기억이 제대로 저장되지 못한다.
작동 기억과 의식 밖의 기억
기억의 종류에 따라 그 양 또한 차이가 난다. 장기 기억은 무제한으로 뇌에 저장될 수 있는 데 반해, 대화를 나누거나 어떤 일을 생각할 때 순간적으로 잠시 저장되는 내용들은 그 용량에 제한이 있어 곧바로 지워진다. 이런 기억을 작동 기억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114에 문의해 알아낸 전화번호는 전화를 걸기 전까지는 잊지 않지만 전화를 걸고 난 뒤에는 대부분 잊고 만다. 이때 일시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전화번호 숫자는 7자리 정도이며, 이처럼 짧은 기억을 담당하는 곳은 뇌의 전두엽이다. 7자리 전화번호 숫자 같은 작동 기억 정보가 들어오면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 또는 글루탐산이 분비되고, 전두엽의 뉴런은 이 물질에 반응해 정보의 내용을 잠시 저장한다.
또한 기억은 의식과도 관계가 있다. 오래 기억되는 학습 내용이든, 잠깐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전화번호이든 의식이 깨어 있어야 회상이 된다. 하지만 의식이 필요하지 않은 기억도 있다. 앞에서 얘기했던 운동기술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나 계속적인 자극에 둔감해지는 습관화, 반대로 한번 자극을 받으면 그와 비슷한 자극에 계속 반응하는 민감화 같은 비서술 기억은 의식이 관여하지 않는다. 종소리만 들리면 침을 흘리도록 개를 훈련시켰던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의 실험 같은조건화 학습도 마찬가지다. 종소리라는 청각 정보와 음식이라는 자극이 학습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게 된 결과이다.
한편, 파블로프의 실험과는 조금 다른 보상을 매개로 한 학습 형태도 있다. 손다이크Edward Lee Thorndike라는 심리학자가 처음으로 시도한 실험으로, 실험 상자 속의 쥐가 페달을 밟을 때마다 음식이 나오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우연히 페달과 음식과의 관계를 알게 됐던 쥐는 결국 페달을 눌러 음식을 찾아 먹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기억들은 어디에 저장될까? 조건화 학습은 서로 다른몇 가지 뇌 신경망이 연합되어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페달을 누르는 기술에 대한 기억은 선조체나 소뇌에, 습관화나 민감화 기억은 감각이나 운동 체계를 맡고 있는 신경망에 저장된다고 알려져 있고, 비서술 기억 가운데 감정이나 보상 작용, 공포와 관련된 기억은 편도체에 저장된다고 한다.
기억을 바꿀 수 있을까?
사람들은 보통 기억하는 만큼 쉽게 잊는다. 이것은 매우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뇌졸중, 치매, 알코올 중독, 병원성 감염 및 물리적 충격 등으로 인한 뇌 조직 손상 같은 경우처럼 뇌의 이상으로 기억이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해마나 그 주변 조직이 손상되어 일어나는 기억상실증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옛날 기억보다 최근 기억이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기억 정보는 대뇌 피질에 오랫동안 보관되기 전 해마에 일시적으로 저장되는데, 뇌 손상은 주로 이렇게 일시적으로 저장된 기억에 대해 선택적으로 일어난다. 특히 일시적인 뇌경색이나 뇌가 어디에 부딪혀 뇌혈류가 일시적으로 멈췄을 때, 일시적인 기억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 설사를 멈추게 하는 지사제 같은 약물을 복용했을 때 일시적 기억 장애가 일어났다는 보고도 있다. 일주일 동안 파리를 여행하던 한 학생이 마지막 날에 지사제를 먹고 비행기를 탔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여행하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미생물체에서 분비하는 신경독 때문에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보고도 있다.
잊지 않았으면 하는 기억을 잃어버려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잊고 싶은 기억을 잊지 못해 고통 속에 사는 사람도 많다. 어떻게 하면 강제로라도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에게 반가운 연구 결과가 최근에 하나 나왔다. 앞에서 기억을 저장할 때 단백질 합성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저장된 기억을 회상했다가 다시 제자리에 저장할 때도 단백질 합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일 잊고 싶은 기억을 회상하는 순간 단백질 합성을 차단할 수 있다면 기억을 영영 지울 수 있다는 내용이다. 오래 저장된 기억도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우거나 보강하는 일이 먼 일이 아닐 듯싶다.
기억이 회상되는 과정을 완벽하게 알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많은 과학자는, 기억을 회상할 때는 뇌 여기저기에 흩어져 저장돼 있는 정보들을 끄집어내 다시 짜 맞춰서 원래의 내용으로 복원한다고 이야기한다.
한 사건에 대해서 여러 사람의 기억이 엇갈리거나 기억이 가물가물한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정보들을 짜 맞추는 과정 어딘가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기억 회상 과정을 완벽하게 밝혀낸다면, 오류의 지점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궁에 빠진 사건에서 목격자의 증언이 얼마나 정확한지도 쉽게 알아낼 수 있고, 괴로운 병적 기억을 강제로 삭제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인지장애 및 치매로 고통받는 수많은 이들을 치료할 때도 기억 회상 과정에 대한 이해는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서술 기억 저장에 중요한 일을 하는 해마에서 새로운 뉴런들이 만들어진다는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왜 하필 해마에서 뉴런들이 만들어질까? 혹시 새로 만들어진 뉴런들이 새로운 기억 저장에 관여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많지만, 해마와 뉴런 생성이 기억의 비밀을 풀 열쇠일지도 모른다.
(본문 중 일부)
『인간과 우주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 모르는 것들』
정재승 기획
강봉균, 이정모, 이현숙, 정재승, 최기운 지음
김용석, 강신주, 정재승 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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