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로쟈와 나1
금정연(활자유랑자)
그 누군가가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인간이란 두 가지 욕망을 지닌 배와 한 가지 욕망을 지닌 머리로 되어 있다고 말하고, 그 누군가가 그것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본래적인 유일한 동기로서 언제나 기아, 성욕, 허영심만을 보면서, 그것을 찾아내보려고 할 때, 즉 간단하게 말해 사람들이 인간에 대해 ‘나쁘게’ 말할 때 —결코 사악하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 인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말에 세심하게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누군가 ‘나쁘게’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 건 아니다(나는 그렇게 할 만큼 인식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옆에 앉은 누군가에게 나쁘게 말해보기로 했을 뿐이다. 다름 아닌 로쟈에게. “인식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세심하게 귀를 기울일 게 분명한 사람이다. 나는 나쁜 말로 그를 자극함으로써 그 안에 숨겨져 있을 “인간 행위의 본래적인 유일한 동기”를 찾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글을 쓰겠다고 덜컥 나선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을 어떤 동기를.
그러니 로쟈를 둘러싼 그 모든 상찬을 반복할 생각이 처음부터 내겐 없었다. 이를테면 “그는 하나의 경이驚異다”(천정환, 『로쟈의 인문학 서재』, 「발문」에서) 또는 “저이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닌가?”(신형철, 『책을 읽을 자유』, 「발문」에서) 같은 말을. 나는 애당초 낯간지러운 찬사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다. 특히 그것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인간 행위의 본래적인 유일한 동기”의 신봉자로서, 나는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당신은 경이도, 기계도, 그렇다고 무슨 ‘지식의 보고’ 같은 것도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잖아요. 그러니 이제 슬슬 속내를 보일 때가 되지 않았나요?”
나쁘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중략)
2
우리는 S시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정확히 말하면 K군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로쟈가 강연을 할 예정이었다. 버스는 시끄러웠고,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나는 그에게 몸을 바싹 붙여야만 했다. 인터뷰 준비를 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참이었다. 그의 지난 책들을 ‘다시’ 읽어보았고, 새 책의 교정지를 들춰보았으며, 그의 서재를 들락거렸고, 그가 사랑하는 김훈의 이름이 새겨진 잔에 한 잔 술을 따라 마셨으며,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어느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책과 교정지, 서재와 김훈, 그리고 시. 로쟈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데 이보다 더 나은 목록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것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아니요, 시는 거의 읽지 못해요.” 그가 말한다. 의외로 간단한 대답이다. “시는 저에게 복합적인 감정이 들게 하죠.” 버스의 엔진이 굉음을 뱉고, 그는 입을 다문다. 성급한 질문자는 그의 대답을 채 기다리지도 않고 다음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소설은?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일종의 분업이죠. 문학 쪽엔 평론가들이 많이 있으니. 이쪽(인문학)은 쓸 사람이 많지 않아요. 하지만 수요는 있죠.”
그는 분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역할분담이에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지리학자처럼, 탐험가들이 보고를 하면 커다란 지리책에 그걸 기록하는 거죠.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지리학자라면 나도 알고 있다. 여섯 번째 행성에 사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을 쓰고 있다던 늙은 학자가 아닌가. 그는 언젠가 한 인터뷰를 통해 “그가 하는 것은 편력이 아니라 기록이다. 나는 책들의 성좌, 문학과 사상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 취미가 있다”(『로쟈의 인문학 서재』, 414쪽)고 밝히기도 했다. 나는 궁금하다. 그렇다면 직접 탐험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후임이 생긴다면.” 그가 웃는다. “로테이션이 되면 좋겠어요. 내근하는 기간이 있고, 외근하는 기간이 있고. 요즘엔 내근하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전담하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불만이 없을 리 없다. 나는 다시 묻고, 그는 역할분담이라는 단어를 다시 꺼낸다. “깊게 읽는 사람은 많아요. 소위 말하는 전문가. 하지만 넓고 얕게 읽는 사람은 부족합니다. 이건 우열의 문제가 아니에요. 대학은 지식을 전문화하는 공간이고, 전문화된 지식은 필연적으로 대중들과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 사이를 메워주고 좁혀주는 역할, 이를테면 중간인문학이라고 할까요, 그런 역할이 사회적으로 중요해진 시대인 거죠.”
그는 그것을 지식의 공유주의라고 표현한다. 이를테면 과학 분야에서 교양과학서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서평 또한 일종의 공유주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진정한) 앎과 아는 척을 구분하는데, 아는 척도 중요해요. 어떤 책에 대해, 서평이라도 읽었다면 일단 대화가 가능하잖아요? 독서 경험에 대한 공유가 가능해지는 거죠. 세상엔 책이 너무 많고, 그건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에요. 저만 해도 가지고 있는 책이 만 권이 넘는데, 한 개인이 읽을 수는 없는 거죠. 어쩔 수 없이 한 분야의 전문가는 다른 분야의 문외한이 될 수밖에 없어요. 서평이 그 불균형을 좁혀줄 수 있는 중간 지대 역할을 하는 거죠.”
이건 너무 모범적인 대답이 아닌가. 조금 심통이 난 나는, 그의 전공인 러시아 문학을 비꼬아 묻기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겐 얼마나 많은 책이 필요한가? 물론 톨스토이다. “그건 언젠가 쓰기도 했는데…….” 그도 내 짜증을 눈치 챘는지 슬쩍 질문자의 ‘야코’를 죽인다. “톨스토이가 말하는 건 욕심과 만용의 문제예요. 아무리 욕심을 부려봤자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건 결국 한 평 무덤뿐이라는 것. 하지만 체호프는 반박해요. ‘그건 죽은 사람의 경우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지구 전체로도 모자라다는 거죠. 제 입장을 말하자면 세상에 있는 모든 책, 그에 더해 아직 나오지 않은, 나올 책들까지도 필요해요. 물론 이건 중독자의 입장이고, 일반적으로는 적정량이 필요하죠. 사회적인 독서가 가능한 적정량이.”
하지만 나는 사회적인 독서라는 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던 부분이다. 독서보다 개인적인 경험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요즘처럼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책의 종말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평범한 사람들이 책 을 일상적으로 접하게 된 지 1세기도 채 되지 않아요. 일제 강점기에는 문맹률이 70퍼센트였고, 1960년대 들어서야 개선된 거죠. 반세기도 안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종말이라니? 너무 성급하지 않아요? 이건 어떤 음모, 차라리 강박처럼 들린다는 거죠. 우리나라 성인이 한 달에 한 권꼴로 책을 읽는다는데, 단순히 개인의 독서량이 아닌 이 평균적 독서량이, 다시 말해 시민적 독서가 한 달에 네댓 권으로 많아진다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될까? 호기심이 생기는 거예요. 인류사에 없었던 일이니까.” 그는 덧붙인다. “별로 안 바뀐다고 해도 상관은 없어요.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고 죽으면 되니까. 하지만 시간은 필요해요. 정치적 진보하고는 다른 문제죠. 사실 딜레마가 있어요. 본래 책이라는 건, 소수 계급의 전유물이고 대중화된 지 얼마 안 된 거죠. 흔히 말하는 ‘인문人文’에서 ‘인人’은 지배계급을 뜻하는데, ‘민문民文’이라는 건 없잖아요. 그것에 대한 상상, 기대를 해보는 거예요. 가능할까? 오늘 학생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할 예정입니다. 협박을 섞어서. 여러분이 지배계급이 되고 싶다면, 적어도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고 싶지 않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이런 게 의외로 잘 먹히더라고요.”
말을 마친 그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음모를 꾸미는 악동 같은 웃음. 버스는 한적한 고속도로를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3
조금씩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패착은 분명했다. 그가 어떤 애틋함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한 ‘시’라는 주제를 통해, 점잖은 ‘지리학자’의 인간적인 동기와 고충을 끌어내보겠다는 계획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잠시 들른 휴게소에 내려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물론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전략을 수정하기로 했다. 오랜 이웃으로서 내가 그에게 느껴왔던 불만을, ‘곱지 않은’ 시선을 그대로 직접적으로 물어볼 것.
이를테면 이런 질문. 그렇다면 지금까지 강조한 것처럼 로쟈의 서평에 는 단순히 사회적인 의미만 있는 것인가? 그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서평을 계속 쓰는 것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어요. 과잉성, 생명을 초과하는 과잉성이라는 게 있죠. 주체의 욕망을 넘어서서 계속 춤을 추는 어떤 자동인형 같은 느낌이랄까. 내 안에서 넘쳐나는, 충동으로서의 독서. 그건 의지를 넘어서는 일이에요.” 『책을 읽을 자유』의 「발문」에서 신형철이 언급한 그대로다.
그렇다면 괄호의 문제는 어떨까. 서재에 직접 쓰는 글이 줄어들고, 대신 지면을 위해 쓰는 글이 늘어나면서 사라진 괄호는, 그 속에 숨겨진 채로 드러났던 로쟈의 유머는, 풍자는, 때때로 이죽거림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갖게 마련인 자의식은? “그건 소수의 불만이에요. 블로그에 썼던 글들은 개인적인 글들이기 때문에 유희적인 성격이 강했죠. 하지만 지면에 쓰는 거라면 다른 곳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분량과 매체의 성격도 고려해야 하고요. 아무래도 작가의 개성보다는 사회적인 필요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거죠. 분량이 많아질수록 비평이 강해지는데, 보통 기고하는 글은 10매 내외이고, 일단 책을 안 읽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거잖아요. 로쟈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책 자체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인용할 때도 책의 성격이 드러나는 문장을 고르는 일에 많은 신경을 써요. 책의 분위기에 맞는 글쓰기 스타일을 추구하는 거죠. 읽을까 말까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가 바라는 서평이에요. 서평 필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글은 제가 지금 쓰는 글의 스타일과는 달라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짙은 회색빛 정장의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원래 ‘나대는’ 타입이 아니에요. 블로그는 사적인 공간이고, 공적인 자리는 또 다르죠. 지금도 정장을 입고 가잖아요?”
물론 괄호 쓰기와 유머, 혹은 이죽거림은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라는 사실은 나도 안다.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다는 것도. 하지만 때때로 쏟아내던 신랄한 비판이 사라진 것은? 그것이야말로 그가 말한 “읽을까 말까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서평가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닌가? “비판을 하게 되면 전체보다는 부분에 집중하게 되는데, 과연 독자에게도 그게 좋은 건지 의문이 들어요. 비평은 이미 읽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서평은 안 읽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접근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좀 더 온건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공유하고 싶은 거죠.”
그렇다면 다른 걸 물어보도록 하자. 술은 안 드세요? 안 드신단다. 대신 남들 술값으로 책을 산다고 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술값으로 매달 그 금액을 쓴다면 당장 집에서 쫓겨나고도 남을 만한 금액이다. 영화는 안 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더욱 충격적이다. “결혼 이후 영화냐 결혼이냐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어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렇다면 뭔가를 희생하긴 해야 하니까(그는 심지어 ‘그렇다고 책을 희생할 수는 없고……’ 같은 말은 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요즘엔 다시 보려고 하고 있어요. 지젝 때문에라도.” 심지어 영화를 다시 보려고 하는 이유 또한 지젝 때문이라니.
“인간 행위의 본래적인 유일한 동기”의 신봉자인 나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대답이다. 그건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삶이 아니었고, 솔직히 소름이 돋았다. 지젝이 말하는 ‘실재와의 조우’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멍청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도대체 삶의 낙이 무엇인지(“책”), 책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어디에 푸는지(“다른 책”),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흔히 말하는 ‘자기 착취’가 아닌지 따지듯 묻는 나에게 그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물고기가 물에 있는데, 물속에만 있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나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차를 멈춰 세운 후, 히치하이킹이라도 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사회적 분업이에요. 그 안에서 내 몫을 하는 것뿐이죠. 어떻게 술도 안 마시고, 여행도 안 가고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마다 각자 재미를 느끼는, 혹은 스트레스를 푸는, ‘아, 이게 사는 거지!’ 하게 만드는 각각의 분야가 있는 법이거든요. 누군가는 등산이고 누군가는 술이고 누군가는 노래방, 이런 식으로. 저한텐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갖고 싶었던 책을 갖는 게 ‘아, 사는 거다!’ 느낌을 주는 거예요.”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놀란다. 두꺼운 양장본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다. “러시아에서는 보드카를 마시고 한 번 소매의 땀 냄새를 맡는 걸로 안주를 대신하기도 했어요. 안주가 없으니까요. 그런 거예요. 욕망은 길들이게 마련인 거죠. 필리핀의 이멜다 전 영부인은 구두가 이천 켤레가 넘었다고 해요. 그 사람은 자기 욕망을 그쪽으로 길들인
거죠. 결국 상대적인 거예요.”
이어 그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한 장면을 묘사한다. 숲 속에 집을 짓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삼백 년 후에는 이 숲이 아주 울창하게 될 거야”라고 말하며, 동시에 묘한 충만감을 느끼며,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장면을. 그는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소련 탄광 노동자들이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보드카 한 잔을 들이켠 후 들이마시는 소매의 땀 냄새, 같은 것들을. 나는 어쩐지 패배한 느낌이다. 적어도 내가 가장했던 “인간 행위의 본래적인 유일한 동기의 신봉자” 역할에 있어서만큼은 완벽한 낙제다.
나는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그러나 과녁을 빗나갔던 그 질문을 다시 던지기로 한다. 다만 이번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나는 묻는다.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일단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국 시가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죠. 젊은 시절에 마음에 드는 시를 몇 편 썼고, 그걸로 만족합니다. 사람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고, 그게 자기 에티켓이라고 생각해요.”
정말이지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중략)
5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조금 더 짙은 어둠을 향해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화가 날 때는 어떻게 해요?” 내가 물었고, “화가 나면 그냥 무시해버려요.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알면, 그냥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죠.” 그가 대답했다. 과연 그다운 대답이다. 나는 잠시 조금 전 강당에 모여 있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다음 질문을 한다. “책을 읽을 자유가 있다면, 책을 읽지 않을 자유는 없나요? 책에서도 언급하셨듯이, 진정한 유토피아란 그것을 거부할 자유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가 웃으며 답한다. “그런 자유조차 책을 읽을 때 의미가 있어요. 그 자유를 주창하고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책을 읽어야 합니다. 책 읽을 자유가 있어야 그걸 가질 수 있는 거죠. 일단 독서력을 가지고, 그다음에 선택할 문제예요. 그전까지는 필수. 그건 안 읽는 게 아니라 못 읽는 거니까요.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앞선 후에야 가능한 말입니다.”
나는 여전히 내게 남아 있던 일말의 의구심을 털어버리기로 한다. “최근 의 고전 읽기 열풍이나 인문학 열풍을 볼 때, 이제 인문학 또한 자기계발의 한 분야로 그저 소비될 뿐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하는데요. 이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행간에 숨겨진 나의 의심을,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로쟈의 서평 역시 그것에 일조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긴 대답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물론 비판 가능한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어떻게 유도하는지는 별 상관없다는 입장입니다. 사기도 좋아요. 일단 그렇게 해서라도 읽게 되면 분명 변화가 생기니까요. 능력이 생기는 거죠. 바깥에서 보자면 물론 그렇게 비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할 순 없는 것 아닐까요? 역량을 키운 후에 목소리를 낼 수도 있고, 그게 더 효과적인 부분도 있지요. 마르쿠제는 자기 소외가 극도로 진행된 후에야 새로운 어떤 것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그 극대화가 전환을 위한 잠재력이 되는 거죠. 세상은 그렇게 일면적이지 않아요. 자기 소외가 극대화된다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이 최소화된다는 이야기잖아요. 문명이 발달할수록 필수적인 노동이 최소 화되고 초과노동이 점점 늘어나는데, 이건 역으로 착취를 바꿔버릴 한 걸음이 될 수도 있어요. 2시간 필수노동에 6시간 착취노동이라고 단순하게 말한다면, 6시간은 엄청나게 큰 착취지만, 그만큼 노동해방의 가능성도 더 커지는 거죠. 더 많이 착취당하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국가기구에 필수적인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그 체제에 가장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거죠. 따라서 적극적인 자기계발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소룡의 몸과 흔히 말하는 ‘몸짱’의 S라인에는 차이가 있어요. 못 가진 자들이 자기 극복을 위해 하는 노력, 즉 자기규율과 자기계발은 다르죠. 지젝이 자주 쓰는 표현을 따르자면 시차가 있는 거예요.”
시차라, 나는 생각한다. 결국 내가 그에게 품었던 불만과 의구심 또한 일종의 시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의 위치와 나의 위치 사이의 낙차가 만들어내는 시차, 혹은 그가 길들인 욕망과 내가 길들인 욕망의 거리가 만들어내는 그런 시차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 나는 800페이지가 넘는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고, 그 전에 로쟈의 페이퍼를 다시 한 번 읽어야 할 것이다. 뭐, 언젠가 는 알게 될 날이 오겠지.
그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Slow but steady”라는 표현을 좋아한다고 했다. 뭔가를 시작하면 오래 한다는 그는, 구두를 사도 떨어질 때까지 신고, 시계나 안경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 그것이 자신의 적성이라고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는 일주일에 평균 20시간의 강의를 하고, 3편의 서평을 쓴다. 그리고 종종 의심 많은 인터뷰어를 데리고 멀리 지방 강연을 가기도 한다. 잠깐만, 이게 ‘천천히’라고? 나는 다시금 새롭게 솟아나는 의구심으로 무장한 채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는 어느새 사위를 덮은 어둠 속에서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도 피곤할 것이다. 어쩐지 조금 안심한 나는, 내 옆에 잠든 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본다. 경이도 기계도 그렇다고 무슨 ‘지식의 보고’ 같은 것도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을, 그의 잠든 ‘자세’를.
그리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나쁜 말에 “세심하게 열심히 귀를 기울”이느라 참 고생이 많았겠구나, 하고.
1 미국의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로저와 나」에서 빌린 제목이다. ‘ㄹㅈㅇㄴ’라
는 초성이 같을 뿐, 다큐멘터리의 내용과 이 글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