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감성의 체온을 높여주는,
소설 ‘함께’ 읽기
인생은 축제와 같다. 어떤 이는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오고, 어떤 이는 장사를 하러 오지만, 최상의 사람들은 관객으로 온다. — 피타고라스
잘 잊어버려야만 비로소 잘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진 않다. 망각은 우선 뼈아픈 상실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가끔 형편없는 내 기억력에 절망할 때도 있다. 오래전에 사서 밑줄까지 좍좍 그어가며 읽은 책을 또 한 번 ‘처음인 양’ 설레는 맘으로 구입했을 때다. 그리하여 내 책장에는 두 권씩, 심지어 세 권씩 꽂혀 있는 똑같은 책들이 적지 않다. 책을 읽었다는 것은 기억나는데 책을 샀다는 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서글픈 기억의 풍화 작용이 반드시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특히 내가 두 번 세 번 처음인 양 구입한 책들이 명불허전의 고전일 경우, 은근히 그 망각의 효과(?)를 즐길 때도 있다. 허겁지겁 각종 필요를 핑계로 새 책을 구입하지만, 결국 내 기억의 창고에서 ‘마음속 헌책방’을 발견하게 되고, 빛바랜 헌 책에 끼적인 옛 메모를 바라보며 행복한 ‘기억의 시차’를 경험하는 것이다. 아, 그 옛날엔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때로는 기특하고 때로는 한심해지는 이 경험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뜻하지 않게 분리되는 순간이다.
문학 속 캐릭터들은 ‘독서의 시차’를 통해 매번 다른 기억의 풍경을 토해낸다. 사춘기에 만난 베르테르와 30대에 다시 만난 베르테르가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어린 시절 그토록 ‘나쁜 놈’으로 보였던 후크 선장이나 메피스토펠레스가 지금은 한없이 매력적인 캐릭터로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망각과 회상을 반복하던 문학 속 캐릭터들은 기억의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치면서 훨씬 풍요롭고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이러한 독서의 시차야말로 고전 읽기의 묘미다. 그토록 열심히 읽었던 것을 그토록 깡그리 잊어버리다니.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다시 되돌아온 고전’은 더욱 아련한 매혹을 뿜어낸다. 워낙 감쪽같이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현듯 찾아온 회상의 기쁨은 더욱 커지는 셈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잃어버린 기억 속 캐릭터’와 ‘다시 찾은 고전 속 캐릭터’는 흥미로운 수다의 향연을 펼치기 시작한다. 고전 속 인물들은 내 안에서 서로 아무 때나 교신하여 자기들끼리 흥겨운 의미의 네트워크를 빚어내곤 한다. 내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딜레마에 빠져 있을 때, 그 옛날 기억의 냉동 창고 저 아래쪽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주인공들의 얼어붙은 삶이 내 안에서 천천히 해동 모드에 진입한다. 그들은 천천히 얼어붙은 의미의 육체를 녹여내며 자기들끼리 분주하게 내 인생의 종합 검진을 시작한다. 그들은 그렇게 내 삶을 숙주로 삼아 아름다운 의미의 세포 분열을 시작한다. 때로는 문학 속 캐릭터가 살았던 ‘대단한 삶’에 비해 내 삶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아픔은 금세 지나간다. 아픔 뒤에 남는 것은 그들 삶의 ‘관객’이 될 수 있는, 행복한 관조자의 조용한 기쁨이다. 그들의 삶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만이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기쁨이 있다. 그들의 삶은 우리, 관객들의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만, ‘고정된 해석’의 암반을 깨고 새로운 의미의 토양 위로 부활할 수 있다.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라 관객이기에, 그 모든 야단법석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있기에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이 수많은 관객들 중에서도 조금 수다스러운(?) 편에 속하는 나는, 내 마음속에서 틈날 때마다 비밀 미팅을 진행 중인 고전 속 캐릭터들의 커플매니저가 되어보기로 했다.
이 책은 소설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은밀한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한 소중한 미팅 장소가 되어주었다. 이 글을 웹진 <나비>에 연재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로미오와 트리스탄이 만나 밤새 술잔을 기울였고, 지킬 박사와 도리언 그레이가 만나 서로의 치부를 은밀하게 훔쳐보았으며, 오페라의 유령 에릭과 폭풍의 언덕 주인 히스클리프가 만나 서로의 닮은 미소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고, ‘위대한 개츠비’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던 블랑시가 만나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수줍게 고백하기도 했다. 누군가 ‘당신은 왜 그렇게 옛이야기라면 껌뻑 죽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신이 나서 그 사람과 밤새도록 수다를 떨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꼭 한 가지 이유만 대라고 한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옛이야기를 읽으면 내 힘으로는 살아낼 수 없는 그 모든 ‘타인의 삶’이 내 마음의 체온을 매번 1℃씩 높여준다고. 타인의 이야기를 늘 품에 안고 타인의 삶을 늘 공기처럼 호흡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면, ‘세상의 체온’ 또한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높아지지 않을까. 소설은 혼자 읽어도 좋다. 하지만 누군가의 따스한 ‘낭독의 목소리’를 상상하면서, 그리고 누군가가 서로 많이 닮은 캐릭터들을 오지랖 넓게 ‘중매’까지 해준다면, 이 세상의 체온은 더 빨리, 더 신명나게 높아지지 않을까. 이 수많은 소설들을 여러분과 ‘함께’ 읽는 동안, 나는 정말 신기하게도 덜 외롭고, 덜 아프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었다.
따스한 봄 햇살이 쏟아지는 내 오랜 창가에서, 정여울
1장. 『데미안』
vs.
『호밀밭의 파수꾼』
멘토,
지상에 없는 구원을 찾아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 『호밀밭의 파수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 『데미안』
이 막연한 그리움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기는 한데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털어놓고 싶은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미칠 듯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시작하기만 하면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온다. 내 곁의 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내 말을 들어줄 단 한 사람의 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속속들이 읽어줄 독심술의 귀재는 없을까. 내 마음을 읽더라도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을, 그저 내 마음의 무늬와 빛깔을 가만히 바라봐주는 사람은 없을까.
게다가 난 아직 어른이 되려면 시간이 한참 필요하다. 마법에 걸려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렸으면 하는 날도 있고, 영원히 어른 따위는 되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게다가 따분하고 골치 아픈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면, 차라리 어른이 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영원히 아이 상태에 머무른다면, 그것 또한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저기서 아무 생각 없이 뛰놀고 있는 저 조무래기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평생 살 수 없는 일 아닌가.
생각하면 문제는 어른인가, 아이인가 따위가 아니다.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는가 없는가 따위도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 그 자체가 문제다. 저기 부모님이 평생에 걸쳐 갈고 닦아온 삶의 기반이 있다. 저들처럼만 따라 하면 문제없을 것이다.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한 채 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모범 시민의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부모님의 유전자를 그대로 빼다 박은 자식이 아닌 것 같다. 내 형제들은 모두 저렇게 말쑥하고 얌전하기만 한데, 나 혼자만 저들과 다른 돌연변이가 아닐까. 도대체 금방이라도 온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이 숨막힘, 이 답답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춘기를 돌이켜보면, 나는 저렇듯 불안하기 그지없는 감정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하루하루를 거뜬히 보냈던 것 같다.
완전한 아이도 완전한 어른도 아니었을 때 나 또한 저런 고민들을 하며, 금방이라도 낭떠러지에서 추락할 것만 같은 기분을 신기하게도 ‘정상’처럼 여기며, 어른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그 시기를 거쳐왔다. 나도 모르게 어른이 되었는데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내 손으로 번 첫 번째 화폐를 만져보았을 때도, 아직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저런 고민들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나지 않는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던 것 같다.
내가 너무 쉽게, 저 고민을 미처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내게 문득 떠오른 두 작품은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성장소설의 대표 선수들이지만, 성장소설이라는 규범적인 레테르가 너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이 두 작품들은 언제 읽어도 새롭고 묵직한 화두를 던져준다.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은 어른도 아이도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일 수 있는, 그 미칠 듯한 시간을 각자 다른 힘으로 버텨낸 소년들의 이야기다. 나무들의 사춘기인 6월에는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과 함께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오솔길을 산책하고 싶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들을, ‘친구’로 만들어주고 싶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 『데미안』
아무도 나를
모른다
갑자기 나는 이 방에서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제부터 끔찍한 잔소리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아직 열한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사람들도 더러 있을 줄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 일을 이야기하지 않겠다. 인간을 보다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 『데미안』
‘아무도 내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항변은 곧 누군가 내 마음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강렬한 욕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은 아무에게도 내보일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읽어줄 타인을 찾는다. 이제 막 영혼의 사춘기에 접어든 싱클레어와 홀든은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을 꿈꾸기 시작한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에게 느끼는 조건 없는 어여쁨이 아닌, 첫사랑에게 느끼는 이성적 호기심도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 나 스스로가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제대로 읽힐 수 있는, 난해하고 신비로운 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비행 청소년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어른들 말이라면 곧 죽어도 듣지 않을 것만 같은 괴짜 소년 홀든 콜필드. 홀든은 어른들의 ‘관심’이라는 포장지로 위장된 ‘지배’의 욕망을 견딜 수 없다. 걸핏하면 낙제를 거듭하던 홀든이 퇴학을 앞두고 기숙사 밖으로 뛰쳐나와 아무렇지도 않게 어른 행세를 할 때, 어른들은 예외 없이 그에게 나이를 묻는다. 너 몇 살이니? 이런 질문 안에는 나이로 인간을 판단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는 건 아닐까.
택시에서도 호텔에서도 술집에서도, 홀든은 번번이 숨길 수 없는 앳된 얼굴 때문에 자신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어른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한다. 그에게 섣불리 충고를 하려는 어른들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홀든은 ‘나이’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짜증을 버럭 낸다. 내가 몇 살이든,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애송이가 아니야.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든, 그 판단은 틀렸다고. 자신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도 아니면서 어린 소년이라면 일단 통제부터 하려는 어른들의 습관이 홀든을 골치 아프게 만든다.
어른들의 온몸에 달린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에 살고 싶은 욕망.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하고 살아야 한다는 시선의 네트워크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 부모님이 일생을 바쳐 가꾸어온 행복의 정원을 사랑하지만, 그 평화의 울타리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일탈의 본능. 내가 괴로울 때 달려가면 언제든지 안아줄 어머니의 따스한 품에 굴복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미묘한 반항심. 이제 갓 열 살에서 열한 살로 넘어가는 소년 싱클레어의 마음에는 벌써부터 그런 불온하지만 정상적인 성숙의 조짐이 시작되고 있다.
교양의 향취가 물씬 느껴지고 예술의 향기가 곳곳에 가득한 집안에서 자라난 싱클레어는 이제 막 ‘부모님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어둡고 은밀하고 잔혹한 세계가 뿜어내는 위험한 매혹에 눈을 뜬다. 부모님이 걸어왔고, 자신이 걸어가야만 할 올바르고 단정한 길 바깥에 서 있는 존재들. 악당과 탕아와 요부, 폭력과 죽음과 유혹이 가득한 바깥 세상은 이제 막 부모님이 물려주신 영혼의 태반에서 떨어져 나온 싱클레어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한다. 조무래기들의 소꿉장난과 골목대장 놀이에는 흥미가 딱 끊긴,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싱클레어의 마음속에서는 ‘악’과 싸우기보다 ‘악’에 흠뻑 탐닉하고 싶은 유혹과 부모님에 대한 죄의식이 팽팽한 내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협소해서 사실 그 안에는 내 부모님밖에 없었다. (……) 그 세계의 이름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 그곳에서는 아침에 찬송가가 불려졌다. 그곳에는 성탄절 잔치가 있었다. (……)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 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 그리고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출입문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펴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데,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 밝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그 후 곧바로 부엌에서 혹은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줏간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아낙네들과 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딴 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 속했다. 비밀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랬다. 나 자신이 가장 심하게 그랬다. — 『데미안』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카인이 고귀한 인간이고, 아벨이 비겁자라구! 카인의 표적이 표창이라구! 그건 어처구니없는 얘기였다. 신성 모독이고 극악 무도였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디 가버리신 거야? — 『데미안』
성서에서 내가 예수님 다음으로 좋아한 사람은 무덤 속에 살면서 돌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살아가는 미친 사람이다. 그 가련한 사람이 열두 제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 (……) 난 예수님이 유다를 지옥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 천 달러라도 걸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내가 천 달러를 가지고 있을 때 얘기지만 말이다. 다른 제자들이었다면 누구라도 유다를 지옥으로 보냈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하지만 예수님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 『호밀밭의 파수꾼』
싱클레어와 홀든은 모두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특히 원조 모범생이었던 싱클레어는 교양과 예절과 학문과 예술의 향취가 물씬 나는 집안에서 아무런 정신적 결핍 없이 살아왔고, 홀든 또한 눈에 띄는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문제아였던 것은 아니었으며 유난히 작문을 잘하는 감수성 여린 소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에게 삶 전체를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 싱클레어에게는 사악한 불량배 크로머가 나타나 돈을 요구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홀든이 더없이 사랑했던 남동생 앨리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평화롭고 그지없었던 어린 시절의 마지막 페이지가 그렇게 처참하게 끝나버렸다.
사춘기 시절에는 누구나 ‘부모님의 세계’와 ‘나의 세계’, 그리고 ‘평화로운 가정’과 ‘험난한 세상’ 사이의 경계가 홍해처럼 선명하게 갈라지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결코 나의 힘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소외감을 느끼고, 평화로운 집 밖으로만 나가면 언제든 쉽게 폭력과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불량배에게 매일 협박을 당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극심한 대인기피 증세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전혀 알지 못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양가감정을 느낀다. 그래, 나도 부모님이 전혀 모르는 나만의 세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정말 모르겠냐고, 내가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지를. 홀든은 앨리의 죽음 이후 점점 약에 의존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미처 동생의 죽음을 마음 놓고 슬퍼할 기회조차도 갖지 못한다. 그들은 그렇게 아프게 ‘부모님의 세계’와 ‘나만의 세계’ 사이의 분리를, ‘가정’과 ‘바깥 세상’ 사이의 칼날 같은 경계를 경험한다.
사실 이럴 때 가장 절실한 것은 친구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수직적인 충고보다는, ‘나도 너처럼 힘들고 아파’라는 뉘앙스로 다가오는 친구의 수평적인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크로머의 교활한 협박과 끈질긴 감시에 지칠 대로 지친 싱클레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혼자 끌어안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싱클레어에게 다가온 친구는 바로 데미안이었다. 지나치게 어른스러워서 도저히 동년배로 보이지 않는 데미안. 학생이라기보다는 수도원의 구도자 같은 느낌을 주는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미처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던 자신의 수치스러운 내면을 응시하게 도와준다. 넌 지금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그 두려움은 누군가에게 너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었기 때문이라고. 너의 약점을 상대방은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 약점을 이용하는 상대방은 결코 너를 지배할 자격이 없는 악당이라고. 그 두려움을 네가 먼저 떨쳐버려야만 한다고. 그게 안 된다면 그 녀석을 아예 때려죽여버리라고. 만약 네가 그 녀석을 죽일 거라면 나도 널 도울 거라고.
심약한 모범생이었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강력한 메시지에 전율을 느끼고,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게 된다. 내가 크로머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나는 영원히 그의 노예가 될 수도 있겠구나. 어머니 앞에서 고해를 한다면 언제든 나를 구해주시겠지만, 결코 어머니의 치마폭에 숨어버리기는 싫은데. 그런데 이 사람, 데미안은 누굴까. 내가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내 마음의 비밀을 속속들이 읽어버리다니.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구나. 말하지 않아도 내 표정을 읽어내는 이 친구가 있다면, 나는 더 이상 크로머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드디어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로머의 감시체제에서 벗어난 싱클레어. 그는 이제야 데미안의 사고방식이 보통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데미안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을 의심한다. 그는 단지 의심할 뿐 아니라 공인된 진리의 허점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 진리가 발딛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주춧돌을 기어코 부숴버리고 만다. 싱클레어에게 가장 충격적인 메시지는 바로 카인과 아벨에 대한 데미안의 독특한 해석이었다. 데미안에 따르면 카인은 결코 사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카인이 받은 형벌은 그가 ‘우월한 인간’이기 때문에 견뎌야 했던 뭇사람들의 질투와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아벨의 세계’가 약속하는 따스하고 선량하고 수동적인 세계를 믿어왔던 싱클레어는 ‘카인의 세계’가 유혹하는 추악하고 잔혹하며 폭력적인 세계의 매력에 깊이 빨려든다. 데미안은 악마의 유혹과 천사의 미소를 모두 가진 야누스적 존재였던 것이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 하나를 쳐 죽였어. 그것이 정말 형제였는 지 그거야 의심할 여지가 있지. 정말 형제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결국 모든 인간이 형제잖니. 그러니까 어떤 강한 사람이 어떤 약한 사람 하나를 때려죽인 거야. 어쩌면 그건 영웅적 행위였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 어쨌든 다른 약한 사람들이 이제 잔뜩 겁이 난 거야. 그들은 몹시 탄식을 했지. 그런데 “왜 너희들도 그 사람을 그냥 쳐 죽이지 않는 거지”라고 누가 물으면 그들은 “우리가 겁쟁이이기 때문이죠”라고 말하지 않고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표적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느님이 그에게 그려준 겁니다!”라고 말했지. 대략 그런 식으로 그 사기는 이루어졌을 게 틀림없어. — 『데미안』
내 안의 상처를
투시하는 용기
정말로 자신의 운명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 그에게는 그때부터는 자기 비슷한 사람이 없어. 완전히 홀로 서 있지. 주위에는 오직 차가운 우주뿐이지. — 『호밀밭의 파수꾼』
어쨌든 난 제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수첩을 뒤지면서 그날 밤을 같이 보내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수첩에는 단 세 명밖에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 『호밀밭의 파수꾼』
부끄럽지만, 어린 시절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보다도 선생님의 ‘사랑’에만 목말라 하던 아이였다. 조금 못 가르치는(?) 선생님이어도 좋으니, 나는 선생님이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나를 콕 집어내어 한 번이라도 더 바라봐주기를 기대했다. 지식은 자습으로도 얻을 수 있었지만, 사랑은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무엇을 배우든 그 내용보다는 선생님의 칭찬이 중요했고, 칭찬받지 못한 선생님의 과목은 성적이 늘 불안했다.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 나만을 좀 더 오래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심각한 공주병은 대학교에 가서 비로소 치유(?)되었다.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곧 세계 그 자체였던 학창 시절을 지나자 나의 극심한 칭찬 중독증은 저절로 해소되었다. 매일매일 새롭고 신기한 세상을 향한 맹렬한 짝사랑에 빠져, 선생님의 사랑과 칭찬을 향한 목마름 자체를 깡그리 잊어버렸던 것이다.
정말 내가 멘토를 원하게 된 것은, 여전히 불완전한 사회인이 되고 나서였다. 그토록 많은 선생님들께 셀 수 없이 많은 지식을 전수받았지만, 그 모든 스승님들로부터 다른 곳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소중한 지식을 흡수했지만, 여전히 목말랐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스승에 대한 갈증은 더욱 절실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문학 작품을 접할 때 주인공들이 직접적인 사제 관계를 맺지 않아도, 그들의 관계를 지속하는 동력을 ‘스승과 제자’ 사이의 친밀감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교과서나 자기 계발서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그 무엇을, 반드시 살아 있는 인간에게서 배우고 싶어 한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서 느끼는 감동은 100권의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과도 맞바꿀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느낀 감동과 충격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이 사람의 가르침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 살아 있는 데미안의 존재가 곧 우주의 진리를 압축한 거대한 책처럼 다가오는 순간들. 데미안은 존재 자체가 놀라운, 그의 모든 행동이 하나하나 위대한 가르침으로 다가오는 ‘구루 Guru’*였다. 그에게서 배우는 것은 세상 어떤 책에도 나오지 않는 지혜였을 것이다. ‘아벨’의 무력한 순수를 닮은 연약한 모범생 싱클레어를, 하루아침에 자신의 이마에서 ‘카인’의 표적을 느끼는 비범한 청년으로 만들어버린 이가 데미안이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두렵다. 그는 데미안을 사랑하는 만큼, 데미안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의 이마 위에 찍힌 카인의 표적을 느끼는 순간부터 싱클레어는 이미 데미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의 샴쌍둥이가 된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도대체 누구와 자신의 고민을 나눠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고 있었다면,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자신의 유일한 멘토가 누군지 분명히 알면서도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좀처럼 그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데미안에게 너무 큰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정신적 지배권 안에 속해 있을 것 같은 예감. 데미안이 걸어가는 길은 불길하고 위험한 징조로 가득해 보이고, 데미안과 함께하는 순간 ‘부모님이 약속하는 평화로운 세계’, 즉 시민적 안전과 질서의 세계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다.
싱클레어는 깨닫는다. 데미안이야말로 크로머보다 더 강력한 적임을. 데미안이야말로 아벨을 때려죽이고 흉물스러운 표적을 이마에 찍히고도 굴하지 않을 무서운 ‘카인’이었음을. 싱클레어는 아직 아벨이기도 하고 카인이기도 한 자신을 발견한다. 싱클레어는 대책 없는 순수와 수동성을 무기로 삼는 나약한 아벨이기도 하면서, 아버지가 창조한 세계를 증오하는, 언제 자신의 비범함을 발각당할지 몰라 자신의 표적을 숨기기에 바쁜, 숨은 카인이기도 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자신이 다다라야 하는, 그러나 다다를 수 없는 미묘한 이상이자 섬뜩한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토록 데미안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지만 자신이 진정 찾는 것은 데미안일 수밖에 없었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라는 매개자를 통해 데미안으로 가는 길을 우회적으로 깨닫게 된다. 싱클레어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해 기꺼이 ‘학교 밖의 스승’이 되어준 피스토리우스는 문사철文史哲은 물론 예술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걸출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개척하는 능력, 사랑과 신앙의 새로운 상징을 창조하는 능력, 단지 지식의 습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운명과 우주 자체를 투시하는 직관이 결여되어 있었다. 데미안에게는 있지만 피스토리우스에게는 없는 것을 깨닫기 위해, 싱클레어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스승은 데미안이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불현듯 나타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피스토리우스가 ‘도서관’ 속의 지식을 가르쳐주었다면, 데미안은 오직 살아 있는 인간으로부터만 배울 수 있는 ‘길 위의 지식’을 가르쳐준다. 운명을 긍정하고 운명의 장단에 맞추어 인생이라는 춤을 출 수 있는 힘. 더불어 때로는 운명과 대결할 수 있는 힘까지도.
피스토리우스는 너무도 편안하게 이미 존재하는 것 속에 머물렀다. (……) 그의 사랑은 이미 지구가 보았던 형상들에 매여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것은 새롭고도 달라야 한다는 것, 새 땅에서 솟아야지 수집되거나 도서관에서 길러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의 직분은 어쩌면, 나에게 해주었듯이, 인간이 그 자신에게로 이르도록 돕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들어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것, 새로운 신들을 제시하는 것, 그것은 그의 직분이 아니었다. (……) 새로운 신들을 원한다는 것은 틀렸다. 세계에다 그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 『데미안』
매일 이별해야
만날 수 있는 것들
가면서 계속 울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울었다. 지독하게 외롭고, 우울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 『호밀밭의 파수꾼』
인류가 멸종하고,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지만 상당한 재능을 지닌 어린아이 하나만 남는다면, 이 아이는 사물들의 전체 과정을 다시 찾아낼 거야. 그 애가 신이 되어 수호신, 낙원, 계율과 금기, 신약과 구약, 모든 것이 다시 만들어질 수 있을 거야. — 『데미안』
어른이 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조금만 늦어져도 캥거루족 소리를 듣기 쉽고, 자식에 대한 애프터서비스가 조금만 길어져도 헬리콥터 맘 소리를 듣기 쉬워졌다. 부모로부터의 경제적·정신적 독립은 예나 지금이나 성인의 징표인 것 같다. ‘엄마 품에만 있으면 이렇게 편한데 굳이 힘들게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어리광과 ‘엄마 곁에서만 탈출한다면 만사 오케이, 곧바로 어른이 될 것 같다’라는 극단적인 환상. 이 모두가 사춘기의 전형적인 고민들이다. 싱클레어와 홀든은 부모로부터 되도록 빨리 독립하려는 유형의 소년들이다. 싱클레어는 교양과 신앙으로 무장한 모범적인 부모님으로부터, 홀든은 동생의 죽음 이후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모님으로부터 하루바삐 독립하고 싶어 한다. 싱클레어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평생 자신이 가꿔온 신념의 울타리를 지키는 보수주의자이고, 홀든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유능한 가장이긴 하지만 왠지 정서적 공감대를 찾기는 어려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아버지이다.
싱클레어가 데미안 되기, 혹은 카인 되기를 통해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났다면, 홀든의 기숙사 탈출과 뉴욕 탐험의 종착역은 엉뚱하게도 ‘집’이었다. 홀든은 모든 연락망을 검색해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조금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찾지만, 사람들에게 전화를 할수록 더 짙은 외로움을 느낀다. 비상금도 다 떨어지고, 녹록지 않은 어른들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도 사라져갈 때쯤, 홀든이 학교도 집도 아닌 어딘가 머나먼 곳으로 떠나려는 결심을 굳히기 직전, 그에게 떠오른 것은 막내 여동생 피비였다.
부모님께는 너무 송구스러워 작별 인사조차 할 수 없지만, 사랑스러운 피비의 얼굴만은 꼭 보고 싶은 홀든. 그는 자신의 집에 몰래 잠입하는 기이한 모험 끝에 마침내 피비를 만난다. 부모님의 눈을 피해 어렵게 만난 피비는 오빠에 대한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선다. 이제 갓 열 살이 된 피비는 귀신같이 오빠의 퇴학 사실을 눈치채고는 걱정이 태산 같다. 또 퇴학을 당하다니. 이번에는 아빠가 오빠를 죽이고 말 거라며 노심초사한다. 도대체 오빠는 뭘 원하느냐고, 왜 걸핏하면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칠 궁리만 하냐고 다그치는 피비에게 홀든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해준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명장면, 피비에게 홀든이 자신의 꿈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넘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 『호밀밭의 파수꾼』
피비는 빈털터리가 되어 자신을 몰래 찾아온 오빠의 괴상한 고백을 열심히 들어주지만, 아빠가 오빠를 죽일 것만 같은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린 소녀가 소중히 간직했던 크리스마스 용돈을 오빠의 손에 쥐여주며 작별을 고하자 홀든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여동생의 품에 안겨 엉엉 운다. 홀든은 모든 것을 다 잃을 위기의 구렁텅이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나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그토록 필요로 했던 것을,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을, 자신은 이미 다 가지고 있었음을. 내 이야기를 언제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내가 정말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된다 할지라도 나를 비웃지 않고 조용히 응원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여동생 피비와 앤톨리니 선생님, 홀든의 첫사랑 제인, 홀든의 친형 D.B까지도.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들을 이미 다 가지고 있었는데, 다만 자신이 손을 내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홀든은 단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었지만, 현재 스코어 진정한 호밀밭의 파수꾼은 오히려 열 살배기 여동생 피비가 아닐까. 언제 절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는 홀든 자신이고, 든든한 호밀밭의 파수꾼은 막냇동생 피비였다. 내가 가장 지켜주고 싶었던 소중한 대상이, 거꾸로 나를 지키고 있는 수호천사였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우리가 진정 지켜줘야 할 존재가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할 때, 그리고 나를 지켜주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기 시작할 때, 비로소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걸까. 지금은 오히려 어린 동생이 자기보다 훨씬 커다란 오빠를, 온 힘을 다해 붙들고 있다. 홀든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작가의 말,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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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여울
독문과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겨레신문』에 ‘정여울의 청소년 인문학’ 코너를 연재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시네필 다이어리 1? 2』, 『소통』, 『미디어 아라크네』,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