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어이가 없군. 이곳에서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다니.”
―클로드 랭,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르노 경위의 대사
노인네는 창백하고 수척해 보였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으로, 각료로, 미국 금융계를 좌지우지하며 보낸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의 말이라면 역대 대통령들도 꼼짝 못하고 예우를 갖추어 경청했다. 하지만 그날 아침, 그러니까 2008년 10월 23일 아침에 의회에 출두한 앨런 그린스펀의 모습에서 그런 권위는 찾기 힘들었다. 그린스펀은 이미 2006년 1월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직을 사임한 터였다. 2007년 여름에 서브프라임모기지 증권 시장이 무너지면서 많은 금융 기관들은 헐값에도 팔 수 없는 수백억 달러의 파산 자산을 떠안았다. 하원 정부감독개혁위원회 위원장인 민주당의 헨리 왝스먼이 주재하는 국회 청문회는 TV로 연일 생중계되었고, 월 스트리트의 CEO들, 모기지 업체의 중역, 신용평가 회사 대표, 규제위원들이 줄줄이 소환되었다. 이번에는 그린스펀이 증인석에 설 차례였다.
왝스먼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은 책임 지울 사람을 찾고 있었다. 모기지 증권의 주요 보유자였던 월 스트리트의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갑작스레 파산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금융시장은 예기치 않았던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미국 최대 보험 회사인 아메리칸인터내셔널그룹AIG이 파산 직전에 몰리자, 그린스펀의 뒤를 이어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 오른 온화한 성품의 벤 버냉키는 850억 달러의 긴급 대출 자금을 이 회사에 수혈하도록 승인했다. 연방규제위원들은 미국의 대형 모기지 은행인 워싱턴뮤추얼을 폐쇄하고 대부분의 지분을 JP모건체이스에 매각했다. 미국 4위 은행인 와코비아는 6위인 웰스파고에 흡수되었다. 다른 금융 기관의 건전성에 대해서도 루머가 돌았다. 그중에는 시티그룹과 모건스탠리, 심지어 골드만삭스까지 끼어 있었다.
이런 사태를 지켜본 미국인들은 지갑을 꽁꽁 닫았다. 자동차, 가구, 옷, 심지어 책까지 팔리지 않았고 경제는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금융 시스템을 다시 안정시기키 위해 벤 버냉키와 재무장관 행크 폴슨은 국민이 낸 세금에서 7000억 달러를 빼내 은행 구제 자금으로 쓸 수 있는 권한을 의회로부터 얻어냈다. 당초 계획은 부실화된 모기지 증권을 은행으로부터 사들이는 것이었지만 10월 중순께 금융공황 사태가 고조되자, 그들은 방침을 바꾸어 2500만 달러를 직접 은행의 자기자본에 투자하는 쪽을 택했다. 이 같은 결정으로 시장은 다소 잠잠해졌지만 사건의 전개 속도가 너무 급박해서 그 의미를 차분히 따져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8년 동안 자유 시장, 감세, 작은 정부의 미덕을 외쳐 왔던 부시 정부는 미국 재무부를 미국 내 모든 대형 은행의 공동 소유자이자 효과적인 보증자로 변모시켜 놓았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부시 행정부는 1930년대 이후 최대 규모로 국가 개입의 폭을 늘렸다.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나라 정부들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그린스펀 박사.” 왝스먼이 말문을 열었다. “귀하는 역사상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최장수 의장이었고, 그 기간 내내 아마 우리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 완화를 가장 앞장서서 지지했던 분일 겁니다. …… 귀하는 금융시장의 규제를 자율에 맡기도록 적극 권장했습니다. 귀하께서 했던 발언을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왝스먼은 메모지를 읽었다. “‘연방 규제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시장 규제보다 더 우월한 것은 없다.’ ‘장외 파생상품 거래에 대한 정부 규제는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공공정책 사례가 이 정부의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늘 그렇듯이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를 맨 그린스펀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주름살은 깊었고 턱은 쳐졌다. 누가 봐도 여든둘 노인 그대로였다. 그린스펀의 발언을 다 읽고 난 왝스먼은 그를 보며 말했다. “간단히 묻겠습니다. 귀하가 틀렸습니까?”
“그런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린스펀은 대답했다. “조직의 이기심, 특히 은행 등의 이기심이 자기자본과 주주를 보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점은 내 오판이었습니다. …… 문제는 매우 견고한 건축물처럼 보였던 어떤 것, 실제로 시장 경쟁과 자유 시장의 중요한 기둥이 하나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했듯이 그것이 나에게 충격을 준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미 벌어진 사태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내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왝스먼(그는 미국의 최고 부자 동네인 비버리힐스, 벨에어, 말리부 등이 그의 지역구라는 사실과 어울리지 않게 매우 친서민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떤 개인적인 책임을 통감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린스펀은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왝스먼은 다시 메모지를 읽기 시작했다. “‘내겐 확실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경제를 꾸려 가는 데 있어서 자유롭고 경쟁적인 시장이 단연 독보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규제도 해봤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는 보지 못했다.’” 왝스먼은 다시 그린스펀을 보았다. “이 말은 귀하가 한 말입니다. 귀하께선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를 초래한 무책임한 융자 관행을 막을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경제는 어디라 할 것 없이 총체적으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귀하의 이데올로기가 귀하가 원하지 않았던 결정을 하도록 밀어붙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린스펀은 도수 높은 안경을 통해 왝스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눈초리는 회한에 차 있었지만 자수성가한 뉴요커의 노회한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린스펀은 대공황 시기에 어퍼맨해튼의 노동자 동네인 워싱턴하이츠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엔 타임스퀘어의 한 스윙 밴드에서 색소폰을 불었고, 얼마 후 생각을 바꾸어 경제학을 공부했다. 당시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그린스펀도 처음에는 실질적으로 정부가 경제를 관리해야 한다는 케인즈의 생각을 받아들였으나, 나중에는 입장을 바꾸어 그의 사상에 반기를 들었다. 1950년대에 그린스펀은 에인 랜드의 친구이자 추종자가 되었다.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인 랜드20세기에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 『아틀라스』의 저자는 그린스펀을 가리켜 ‘장의사’라고 불렀다. 늘 검은 옷을 입었고 말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 컨설턴트로 성공하여 알코아, JP모건, US스틸 등 많은 대기업에 자문을 해 주었다. 1968년에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자문 역할을 했고, 제럴드 포드 정부에서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1987년에 워싱턴으로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수장이 되어 오랜 세월 동안 자유 시장 경제의 화신으로 맹활약했다.
그린스펀은 궁지에 몰렸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다루는 개념적 틀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둘러댔다. “생존하려면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 말은, 그래요, 결함을 봤습니다. 그 결함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오래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난감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왝스먼이 말을 자르고 나섰다. “결함을 봤다고요?” 그는 다그쳤다. 그린스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정의하는 중요한 기능적 구조라고 생각했던 모델에서 어떤 결함을 찾았다는 말입니다.”
왝스먼은 다음 날 신문의 머리기사가 될 제목을 끌어낸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판단 착오였다.’ 그린스펀 시인”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왝스먼은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귀하의 세계관, 귀하의 이데올로기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군요. 그런 것이 먹혀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 그러니까 바로 그 때문에 충격이 큰 겁니다.” 그린스펀은 대답했다. “그게 신통할 정도로 잘 먹혀 들어갔다는 아주 많은 증거를 가지고 40년 넘게 버텨 왔으니까요.”
이 책에서 나는 자유 시장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흥망을 추적할 것이다. 그린스펀의 말대로 그것은 하나의 의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정교하고 총체적인 방식이다. 나는 사상사와 금융위기의 설화와 해결책을 하나로 묶어 보려 했다. 최근의 사태는 그것이 전개된 지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런 맥락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1장과 21장에서 2007년부터 2009년까지의 신용경색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비슷한 책들과 달리, 여기서는 관련된 기업과 인물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나의 의도는 이런 위기와 관련된 경제의 기본 이론을 파헤쳐 자유 시장 경제학의 근간이 되는 이기심의 합리적 추구가 어떻게 해서 이런 위기를 초래했고 지금도 그 위기를 지속시키고 있는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시장의 붕괴와 그에 따른 세계 경제의 침체를 하나의 황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린스펀뿐이 아니었다. 2007년 여름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버냉키 의장을 비롯한 많은 분석가들은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미국 여러 지역에서 주택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모기지를 갚지 못하는 가구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지만 경제학자들 사이에선 여전히 미국 자본주의의 생명력과 그것이 대변하는 사상을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수십 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번영을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부의 간섭을 억제하고 경제를 민간 부문에 맡기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1970년대 후반에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케인즈와는 반대 입장을 대변하는 보수적인 반동 정부를 출범시켰을 때, 사람들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아서 래퍼, 키스 조지프 등 이런 논리를 처음 밀어붙였던 지식인들을 우파의 별종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1990년대에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를 비롯한 많은 진보 정치가들까지 이런 우파의 논법을 채택하자 사람들은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긴 클린턴과 블레어에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대서양 양쪽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보수파가 득세하면서 시장에 대한 긍정적 태도는 정치적 체면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의 각국 정부는 복지 프로그램을 폐지했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했으며 정부의 감독 아래 있던 산업의 규제를 풀었다.
미국에서 규제 완화는 카터 행정부가 항공기 노선 제약을 폐지하면서 조심스러운 첫발을 내딛었다. 이 정책은 통신, 미디어, 금융 서비스를 비롯하여 경제 각 분야로 확대되었다. 1999년에 클린턴은 ‘그램리치블라일리법Gramm-Leach-Bliley Act’금융제도개혁법안에 서명했다. 이 법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통합하여 거대한 금융 슈퍼마켓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버드를 대표하던 경영학자 로렌스 서머스는 재무장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이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데 선봉장 역할을 했다. (지금 서머스는 버락 오바마의 최고 경영 자문이다.)
대형 금융사의 로비스트나 기업에서 설립한 워싱턴 연구 기관의 분석가들, 그리고 금융 분야를 대표하는 의원 등, 금융 규제 완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즉 그린스펀이나 서머스 같은 사람들도 월 스트리트가 상당 부분 자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금융시장은 연봉도 많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로 채워져 누가 먼저 돈을 쓸어 담느냐 하는 투기장으로 변해 갔다. 다른 분야와 달리 금융 산업에서는 어떤 일개 회사가 시장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시장가격을 결정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경제학 정설에 의하면 그런 환경에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게 바꾸어 놓는다.
이런 주장이 어떤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지 않았다면, 보수 반동은 그들이 거두었던 성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시장은 땀 흘린 노동과 개혁과 품질 좋고 값도 알맞은 제품을 공급하는 데 따르는 보답을 해 준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매기거나 질 나쁜 상품을 만드는 기업이나 노동자에게는 응당한 제제를 가한다. 이런 당근과 채찍의 메커니즘은 자원이 생산적인 용도로 할당되어 공산주의나 봉건주의 같은 효율적인 인센티브 구조가 없는 다른 체제보다 시장경제를 더 효율적이고 역동적으로 작동하도록 보장한다. 이 책 어디를 뒤져도 토지 문제로 되돌아가자거나 소련의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를 재건하자는 주장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 시장이 늘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하게 되면 이제부터 실체를 밝히려는 세 가지 환상 중의 하나인 ‘조화harmony’라는 환상에 희생되는 불행을 피할 수 없다.
1부에서 나는 애덤 스미스부터 앨런 그린스펀까지 훑어 가면서 소위 유토피아 경제학의 실체를 추적할 것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시카고학파’의 주장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일반균형이론general equilibrium theory이라는 자유 시장의 정설까지 아울러 설명할 것이다. ‘유토피아 경제학’이라는 프리드먼의 브랜드는 그 자체로 유명한 경제학 이론이지만, 그것은 레옹 발라, 빌프레도 파레토, 케네스 애로 같은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수학적 설명이기도 하다. 이들의 이론을 들여다보면 왜 많은 전문 경제학자들이 자유 시장을 존경의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즘도 많은 경제학 관련 서적들을 보면 일반균형이론이 안정적이고 자정 능력을 가진 메커니즘으로서의 경제학이란 개념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일반균형이론은 전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유 시장 경제가 튼튼하고 건실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상은 ‘안정성stability’이라는 환상일 뿐이다.
보수파의 상대적 우위는 대략 1997년에서 2007년까지 지속된 소위 ‘그린스펀 버블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 10년 동안 세 가지 투기 거품이 따로 형성되어 있었다. 기술주, 부동산, 그리고 석유 같은 물리적 상품이었다. 각각의 경우에 투자가들은 단기 차익을 내기 위해 조바심을 냈고 물가는 수직적으로 치솟았다가 금융 붕괴를 맞았다. 10년 전부터 이미 거품은 하나의 이상 조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거품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견해는 쑥 들어갔다. 그린스펀조차도 발뺌하기에 급급하다 한참 후에야 주택 거품의 존재를 인정했다.
버블이 시작되면 자유 시장은 더 이상 자원을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할당하는 믿을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자유 시장은 벼락치기 불로소득을 꿈꾸는 사람들이 수익을 낼 수 있는 전망을 내놓으면서, 개인과 기업이 개별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행동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이런 왜곡된 인센티브의 문제점은 금융시장에서 가장 심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제 전반의 문제이다. 시장은 유수 기업들이 환경을 파괴하고 지구온난화를 야기하고, 건강보험 회사가 아픈 사람들을 보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컴퓨터 제조 회사가 고객들에게 필요없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강매하고, CEO들이 주주들을 희생시켜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채우도록 부추긴다.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시장 실패’의 사례이다. 시장 실패는 이 책 전반에 걸쳐 반복되어 결국 제목이 된 개념이다. 시장 실패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건강보험, 첨단기술, 금융 등 경제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편집자에겐 이런 이야기가 흥미 있는 뉴스거리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신문 기사는 논란거리가 될 만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지난 삼사십 년 동안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은 자유 시장 모델이 갖고 있는 비현실적인 가정이 잘 들어맞지 않을 때 시장이 어떻게 기능을 하는지 검토하느라 분주했다. 몇 가지 이유로 시장 실패 경제학은 시장 성공 경제학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실패’라는 단어가 너무 부정적인 함의를 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시장 실패 경제학market failure economics’은 하나의 캐치프레이즈로 자리를 잡는 데 실패했다. 경제학 교과서에는 ‘정보 경제학economics of information’도 있고 ‘미비된 시장의 경제학economics of incomplete markets’도 있지만 ‘시장 실패 경제학’은 없다. 최근에는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나는 ‘현실 기반 경제학reality-based economics’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이 용어를 이 책 2부의 제목으로 삼았다. 현실에 기반한 경제학은 유토피아 경제학에 비해 통일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 경제는 미로처럼 복잡하기 때문에 현실 기반적인 경제학은 다양한 이론을 한꺼번에 다루게 되고, 그 이론들은 제각기 특정한 시장 실패에 적용된다. 이런 이론은 보이지 않는 손만큼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효용성은 더 높다. 미인 콘테스트, 재난에 대한 근시안적 태도, 레몬 시장 같은 내가 개관하려는 개념의 관점에서 세상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런 것 없이 어떻게 지냈는지 신기해질 정도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경제학의 출현은 그 원천을 두 갈래로 추적할 수 있다. 1960년대 말에 시작된 정통 경제학에서 새로운 세대의 전문가들은 정보 문제, 독점적 권력, 맹목적 집단행동 같은, 자유 시장 모델에 잘 들어맞지 않는 여러 주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실험 정신이 남다른 두 명의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카너먼은 합리적인 경제적 인간인 호모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인간이 영리적인 타산에 의거하여 행동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냈다 하더라도, 인간은 슈퍼컴퓨터가 아니다. 우리는 무수한 경제 이론의 중심에 있는 수리적 최적화 문제는커녕 경제의 실마리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해 쩔쩔매고 있다. 복잡한 선택을 해야 할 때면 종종 주먹구구식 방법이나 본능에 의존하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트버스키와 카너먼 등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이론을 경제학에 응용하게 되면, 두 갈래의 사상은 ‘행동경제학’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수렴된다. 행동경제학은 경제학의 엄격함과 심리학의 사실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이다.
2부에서 나는 카너먼과 트버스키에게 한 장을 할애했지만 이 책이 또 하나의 행동경제학 교과서로 오해받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현실 기반적 경제학은 다루는 대상이 훨씬 더 넓지만, 그 대부분은 합리성이란 공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며 또한 그 역사도 상당히 길다. 현실 기반적 경제학의 발전은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동료이자 라이벌인 영국의 아서 피구Arthur C. Pigou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는 많은 경제 현상에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주고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는 상호 의존성이란 개념이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시장이 종종 놓치는 대목이다. 나는 이런 ‘과잉 효과spillover’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지구온난화를 통해 설명한 다음, 다른 만연한 시장 실패의 유형을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여기엔 독점력, 전략적 상호작용(게임이론), 숨겨진 정보, 불확실성, 투기적 버블 등이 포함된다.
이 분야에 공통되는 주제는 시장이 가격 체계를 통해 사람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정신적인 한계 안에서, 또 환경에 따른 제약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한다. 3부 ‘대경색Great Crunch’에서 나는 이 논지를 더욱 밀고 나가, 1부와 2부에서 전개한 개념적 도구를 사용하여 그런 주장을 금융위기에 적용할 것이다. 돈에 쪼들리는 근로 계층 가계를 위험도가 높은 서브프라임모기지로 끌어들인 모기지 브로커들은 돈이라는 인센티브에 반응했다. 이런 대출을 승인해 준 대출 담당자들이나, 그 대출 상품을 기발한 수법을 써서 모기지증권으로 바꾸어 놓은 투자은행이나, 이 증권을 안전한 투자로 규정한 신용평가 기관의 분석가들이나, 그 증권을 사들인 뮤추얼펀드 매니저들도 모두 돈이라는 인센티브를 갖고 움직였다.
서브프라임 붐은 아는 사람만 아는 내용, 불확실성, 숨겨진 정보, 맹목적인 추세 추종, 풍부한 신용 등이 맞물리면서 자본주의의 실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 모든 것들은 현대 경제의 특징이기 때문에, 서브프라임은 늘 보아 왔던 사업상의 실패였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애써 부인하기 위해 모든 책임을 연방준비제도이사회나 재무부나 패니메이연방주택저당조합나 프레디맥연방주택대부저당공사에 돌리려 했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은 사실상 준정부기관인 대형 모기지 회사이다.(미국 재무부는 그들의 빚을 암묵적으로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저명한 보수주의자이자 ‘법경제학’의 개척자인 리처드 포스너는 핵심을 간파했다. 그는 2008년의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위기는 일차적으로, 아니 거의 전적으로, 최소한의 규제라는 환경에서 민영 회사들이 취한 결정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규제가 대폭 완화된 금융 부문이 경제 각 분야를 무력화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잘못된 경제정책이 주범이었다. 그린스펀과 버냉키는 너무 오랜 기간 금리를 지나칠 정도로 낮게 유지하면서 시장이 보내는 물가 신호를 왜곡했고, 예기치 못한 주택 버블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조장했다. 탐욕도 자주 언급되는 요소이다. 우매함은 세 번째이다. (아무리 월 스트리트의 얼간이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악명 높은 ‘닌자’ 모기지론처럼 수입도 직업도 재산도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이 얼토당토한 발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버니 매도프와 그의 수백억 달러의 폰지사기가 폭로되기도 했지만, 범죄 행위 역시 따져 봐야 할 또 하나의 요소이다.
일부 독자들은 발끈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인물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탐욕은 언제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탐욕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자본주의 모델의 ‘원형’이다. 우매함 역시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나는 우매함도 여기서는 대수로운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몇 가지 분명한 예외가 있지만 노골적인 착복 행위도 대단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재정적 실책을 저지르고도 수백만 달러의 퇴직 수당을 챙겨 지난 2년 동안 툭하면 신문 1면을 장식하곤 했던 척 프린스나 스탠 오닐이나 존 테인 같은 월 스트리트의 고위 임원들을 무조건 공공의 적으로 몰아세울 수만은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들은 대부분 영리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열심히 일해 승진한, 유별난 상상력을 가진 것도 아닌 미국인이며, 교양 있는 바른 생활의 사나이들이었고, 동료들에 비해 성과가 조금 더 좋았고, 대대적인 신용 붐이 일었던 기간 내내 주요 직책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몇몇, 어쩌면 대다수가 당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미심쩍은 생각을 가졌겠지만, 그들이 몸담았던 경쟁적인 분위기는 그들에게 자제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환경은 그들을 더욱 부추겼다. 붐이 절정에 이르렀던 2004년에서 2007년 사이에 은행과 그 밖의 금융회사들은 경이적인 수익을 올렸다. 그들의 주가는 계속 기록을 경신했고 리더들은 언론에서 영웅 대우를 받았다.
예를 들어 2003년에서 2007년까지 시티그룹의 CEO를 맡았던 척 프린스가 2005년에 상황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서브프라임 시장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하자.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프린스의 경쟁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의 결단이 현명하다고 인정하고 그 뒤를 따랐을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온 직원을 동원해 시티그룹이 내던진 사업에 벌 떼처럼 달려들었을 것이다. 시티그룹의 단기 수익은 경쟁사와 비교해 열세를 면치 못했을 테고 주가도 하락했을 것이다. 마침 시티그룹의 다른 사업에서 생긴 문제로 이미 궁지에 몰려 있던 프린스는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구닥다리 노인네라는 낙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2007년 7월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프린스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이렇게 인정했다. “유동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음악이 멈추면 사태는 복잡해질 겁니다.” 프린스는 그렇게 운을 뗐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은 일어나서 춤을 춰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춤을 추고 있습니다.” 넉 달 뒤 시티그룹은 악성 기업 부채와 부실 주택 모기지로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프린스는 사퇴했고 그의 평판도 땅에 떨어졌다.
프린스가 맞닥뜨린 딜레마는 게임이론으로 치자면 ‘죄수의 딜레마’에 해당한다. 죄수의 딜레마는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행동할 때 집단적 결과가 어떻게 나쁘게 나타나는지 설명해 주는 이론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따라 내 행동을 정해야 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이론은 가능성 있는 결과에 관해 별다른 지침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게임이론이 만들어질 때까지, 경제학자들은 이런 경우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목적은 분명하지만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 어떻게 형성되고 존속할 수 있는지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런 행동을 나는 ‘합리적 비합리성rational irrationality’이라 부르겠다.
3부 ‘대경색’에서는 합리적 비합리성이 어떻게 주택 버블,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성장, 그리고 이어지는 금융 체제의 붕괴를 야기했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 우리가 목격한 현실은 궤도를 벗어난 이상 현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신용 주도적인 호황과 불황의 변동 주기는 수백 년 동안 자본주의 경제를 괴롭혀 온 문제였다. 지난 40년 동안 세계적으로 124건의 체제상의 은행 위기가 있었다. 198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그런 위기를 겪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는 일본, 노르웨이, 스웨덴, 미국 등 많은 선진국들의 차례였다. 저축-대부 사업이 붕괴하면서 미 의회는 정리신탁공사Resolution Trust Corporation를 설립하여 수백 개의 실패한 금융기관을 떠맡았다. 아시아에서도 1990년대 후반에 타이, 인도네시아, 한국 등 급속히 성장하는 여러 나라들이 금융 폭탄을 맞고 휘청거렸다. 2007년에서 2008년 사이에 금융 폭발은 다시 미국의 차례가 되었고, 그 한복판에는 대형 은행들이 있었다.
여러 해 동안 그린스펀을 비롯한 여러 경제학자들은 비우량주택담보증권MBS, 부채담보부증권CDO, 신용부도스왑CDS 같은 복합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금융상품들이 시스템을 보다 안전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품의 기본 개념은 시장가격을 리스크에 놓고 그것을 떠안을 의지와 능력이 있는 투자가에게 배분함으로써 체제적 위기의 확률을 대폭 줄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위험 분산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착오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상품이 거래되는 가격은 금융시장의 움직임이 규칙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으며 또한 시장의 일일 변동폭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반적인 분배 정도는 예견할 수 있다는 전제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런 분배를 예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내가 ‘예측 가능성의 착오illusion of predictability’라고 부르는, 유토피아 경제학의 핵심을 이루는 제3의 착오에 의한 오류이다. 실제로 위기가 시작되었을 때 시장은 참가자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반응했다.
이런 이야기를 나열하고 또 그 이야기를 2009년까지 끌고 오면서, 나는 최근의 사건을 시장 체계의 업적에 관한 오랜 지적 토론과 연관시키려 했다. 지난 10년은 몇 가지 의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 고안된 독특한 자연적 실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경제 규제를 완화하고 경제에 엄청난 액수의 저리 자금을 공급할 때, 금융 주도적인 21세기의 경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보이지 않는 손은 모든 것이 최선의 상태로 작동하도록 보장해 주는가? 이 책은 경제 교과서는 아니지만 독자들을 매일 신문의 헤드라인의 이면에 감추어진 사실로 이끌면서 현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법과 경제정책을 만드는 이론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정책을 정치와 특정 관심에 관한 전부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책도 분명 일정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의회와 케이블 TV와 신문의 기명 투고란에서 벌어지는 토론에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복잡하고 추상적인 관념이 버젓이 존재한다.
“자신은 어떤 지적 영향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실용적 인간도, 이미 고인이 된 경제학자들의 노예인 경우가 많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는 권좌에 앉은 미친 사람들이 저지르는 미친 짓도 알고 보면 몇 년 전에 학자들이 끄적거린 내용을 추린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케인즈는 화려한 수사에는 소질이 부족했지만 경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충분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소개할 내용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전에 모호하게 여겼던 부분을 좀 더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내가 들인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이 또한 유토피아 경제학을 역사책에 넘겨 줄 수 있다면, 그 역시 보람이 있을 것이다.
1부 유토피아 경제학
“내겐 확실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경제를 꾸려 가는 데 있어서 자유롭고 경쟁적인 시장만이
단연 독보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규제도 해봤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앨런 그린스펀
1 경고에 귀를 닫는
‘사회적 통념’
벤 버냉키는 주택 가격이 오르는 것은 “경제적 기반이 그만큼 탄탄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아흐레 뒤에 부시 대통령은 그를 그린스펀의 후계자로 발탁했다.
너무 황당한 사건을 겪으면 예측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반응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 뉴올리언스를 할퀴고 간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끔찍한 경로, 이 모든 경우에 대해 당국은 전혀 낌새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고 발뺌했다. 엄밀히 말해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좀 더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분명 어떤 조치라도 취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확고한 지식이 없다고 해서 전혀 모른다고 둘러댈 수는 없다. 1941년에 미국의 일본 전문가들은 대부분 미국의 태평양 함대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경고했었다. 9?11 사태만 해도 알카에다는 전부터 미국을 재차 공격하겠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고, CIA와 FBI는 혐의자들을 감시 대상에 올려놓고 있었다. 미육군 공병대의 전문가들은 1986년부터 이미 뉴올리언스를 보호하고 있는 제방의 설계에 심각한 결함이 발견되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었다.
당국이 이런 재앙을 피하지 못한 것은 시의적절한 경고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책임자들이 유달리 부패한 것도 아니었고 근시안적인 안목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무지조차도 있을 수 있는 수준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일본이 감히 하와이를 폭격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뿐이다. 지하드를 외치는 자들이 민간 여객기를 맨해튼의 고층빌딩에 처박는다는, 멕시코 만의 가공할 파도가 쉰 개가 넘는 제방을 동시에 깨뜨릴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극단적 사건에 대한 수학적인 정의로 나타낼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 내에 있는 일은 아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는 또 하나의 독자적이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지만 이 역시 경고 없이 닥친 사건은 아니었다. 2002년에 이미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일부 평론가들은 미국 곳곳에서 부동산 가격이 소득에 비해 너무 높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그해 가을, 나는 롱아일랜드의 레비타운의 전형적인 한 중산층 마을을 찾아갔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개발 업체인 레빗앤선스Levitt and Sons가 800제곱미터의 랜치하우스를 팔려고 내놓았을 때 냉장고와 가스레인지, 세탁기, 기름 보일러, 베네치안 블라인드를 완비한 그 주택의 가격은 7990달러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 집은 어느 정도 손질을 하긴 했지만 대략 30만 달러를 호가하고 있었다. 이미 2년 전 시세에 비해 50퍼센트나 오른 시세였다. 1951년부터 집안 대대로 부동산을 팔아 왔다는 중개업자 리처드 댈로우는 마을 곳곳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는 2000년의 나스닥 폭락, 2001년의 경기 침체, 9?11의 여파에도 집값은 끄떡없었다며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어느 시점에선 영향을 받을 겁니다. 2000년 여름을 그런 시점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얼마 안 가 원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대체로 레비타운에서 집을 장만하는 사람들은 늘 정해져 있었다. 경찰관, 소방대원, 경비원, 건설 노동자 등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집을 살 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집값 인플레이션 때문에 이들은 레비타운에 집을 장만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댈로우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운페이가 낮은 동네였습니다. 가격이 33만이면, 5퍼센트만 다운페이를 하고 나머지 31만 3500은 모기지로 하면 됩니다. 그러니 점보 모기지를 얻어야 합니다. 레비타운에선 그렇습니다.” 타임스퀘어의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뉴요커》에 실을 글의 제목을 뽑았다. “다음 붕괴The Next Crash.” 그리고 댈로우와 부동산 시장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몇몇 금융 분석가들의 말을 인용했다. “가격이 너무 올랐지만 아직도 끝은 아니다.” HSBC 은행의 미국 담당 수석경제학자 이언 모리스는 그렇게 말했다. “두 부부만 사는 조그만 집조차 소득에 비해 값이 너무 비싸다.” CLSA 이머징마켓의 투자 전략가인 크리스토퍼 우드의 말은 훨씬 더 과격했다. “미국의 주택 시장은 마지막 빅 버블이다. 터지는 순간에는 끔찍할 것이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주택 가격 상승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2005년 6월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경고했다. “주택 가격의 세계적인 상승은 역사상 유례없는 버블이다. 버블이 꺼질 때 당할 경제적 고통에 대비해야 한다.” 이 시사 주간지는 미국에서 집세에 대한 주택 가격의 비율이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높다고 지적하면서 어떤 지역에서는 매년 20퍼센트 이상 오르고 있다고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2000년에 베스트셀러 『터무니없는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을 내놓은 예일 대학교의 저명한 경제학자 로버트 쉴러는 《배런스Barron’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주택 가격 버블을 보면 1999년의 주식시장 광풍을 보는 것 같다.”
이런 경고들을 흘려들을 수밖에 없었던 한 가지 이유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 때문이었다. 자산 가치가 매년 20 내지 30퍼센트 올라갈 때는, 그런 자산을 소유하거나 팔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들이 새로 찾아낸 재산이 환상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격 곡선이 역전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부동산 중개업자와 아파트 전매업자들만이 아니었다. 부동산을 전문으로 하는 경제학자들도 대부분 그들과 같은 의견이었다. 웰즐리 대학의 한 경제학자는 내게 미국의 평균 주택 가격이 1945년 이후 해마다 상승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프레디맥의 수석경제학자인 프랭크 노태프트는 낮은 모기지 금리, 대규모 이주, 적당한 물량의 신축 주택 등 ‘경제적 펀더멘털’을 열거하며 이런 요인이 주택 가격이 높게 형성되고 계속 상승하는 현상을 정당화해 준다고 주장했다. “단독주택 가격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잘라 말했다.
주택 붐이 이어지자 미국 정부까지 전국 주택 가격의 방향이 오직 위로만 치달릴 것이라는 프랭크 노태프트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2003년 4월, 캘리포니아 주 시미밸리에 있는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에서 앨런 그린스펀은 미국에서 부동산 버블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4년 10월, 그린스펀은 부동산은 투기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집을 팔면 곧바로 어디엔가 이사를 가서 살아야 할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2005년 6월에 의회에 출두해 증언하는 자리에서 그는 몇몇 지역에 ‘버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주택 시장은 어디까지나 지역적인 문제라며 전국적 규모의 버블 가능성은 배제했다. 특정 지역에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것까지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린스펀은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해도 거시경제적으로는 큰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린스펀이 이런 코멘트를 했을 때는 벤 버냉키가 2002년부터 맡고 있던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이사직을 그만두고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으로 간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2005년 8월에 버냉키는 부시 대통령에게 브리핑하기 위해 텍사스 주 크로포드로 갔다. 거기서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주택 버블 이야기가 있었습니까?” 버냉키는 주택 문제도 논의 대상이었다고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주택 가격이 상당 부분 매우 단단한 기반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일자리와 고용 수요도 많고, 소득은 높고 모기지 금리는 낮고,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토지와 주택 부족으로 시달리는 지역이 많습니다.” 2005년 10월 15일에 전미실물경제협회NABE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버냉키는 주택 가격이 오르는 것은 “경제적 기반이 그만큼 탄탄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아흐레 뒤에 부시 대통령은 그를 그린스펀의 후계자로 발탁했다.
2005년 8월 버냉키가 텍사스로 간 뒤 몇 주 지나, 연방준비제도의 열두 개 지역 은행 가운데 하나인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이 주최한 연례 경제정책 심포지움은 그린스펀 시대가 가르쳐 주는 교훈에 충실했다. 늘 하던 대로 회의는 와이오밍 주 잭슨홀의 고급 휴양지인 잭슨레이크로지에서 열렸다. 개막 연설은 그때까지 18년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직을 맡고 있던 그린스펀의 몫이었다. 전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 유럽 중앙은행의 장 클로드 트리셰 총재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연사들은 연준 의장에게 최고의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린스펀이 연방준비제도에서 눈부신 성공을 일구어 낸 의장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경제학자이자 전 연준 이사였던 앨런 블라인더는 그렇게 말했다. 시카고 대학 부스 경영대학원의 경제학자이자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수석경제학자였던 라구람 라잔은 조금 비판적인 입장이어서 20년 동안의 금융 규제 완화의 결과를 문제 삼았다.
라구람 라잔Raghuram G. Rajan은 1963년에 인도 중부의 보팔에서 태어나, 1991년에 MI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시카고 경영대학원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2003년에 그는 재정 분야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40대 기수로 지목받았다. 그해에 라잔은 IMF의 수석경제학자에 지명되어 2006년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라잔을 급진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가 공동으로 저술한 어떤 책은 제목이 『자본가로부터 자본주의 구하기: 속박된 금융시장의 힘을 풀어 부를 창조하고 기회를 넓히자Saving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였다. (한국어 판 제목은 『시장경제의 미래』이다.)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 정부에서 일했던 보수파 행동주의자 브루스 바틀릿은 이를 “지금까지 쓰인 책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자유 시장을 방어하는 책”이라 평했다.
라잔은 역사를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규제 완화와 기술적 진보로 은행들은 가계로부터 예금을 받아 다른 개인이나 기업에 빌려주는 핵심 사업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은행들은 주택저당증권MBS, 부채담보부증권CDO 같은 새로운 금융상품을 개발하고 유가증권 거래 등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은행은 이런 유가증권의 대부분을 투자가들에게 팔았지만, 일부는 투자를 목적으로 직접 보유하기도 했다. 따라서 관련 시장이 크게 위축될 때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라잔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시스템은 위험을 분산시켜 경제의 위험자산 규모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보다 더 큰 위험을 떠안게 되는 부담 또한 피할 수 없다. 더욱이 시장과 시장, 시장과 기관의 연계는 보다 뚜렷해졌다. 이런 현상은 시스템이 작은 충격을 다변화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자산 가치의 큰 변동이나 총 유동성의 변화 등, 시스템을 더 큰 체계적인 충격에 노출시킨다.”
라잔은 그 밖에 금융 시스템을 취약하게 만드는 요소에 눈을 돌려 인센티브를 기반으로 하는 보상을 문제 삼았다. 고위 재무 담당자들은 거의 모두가 사업에서 발생하는 투자 수익과 연동된 보너스를 받는다. 이런 수익은 리스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매니저나 기업이 보다 높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왜곡된 인센티브perverse incentives’가 있다고 라잔은 지적했다. 특히 확률은 매우 적지만 발생할 경우 끔찍한 결과를 낳는 소위 꼬리 리스크tail risks의 경우는 그 영향력이 더욱 막대하다. 그 밖에도 투자가나 거래자가 서로의 전략을 따라하는 소위 쏠림 현상도 안정을 해치는 요소가 된다고 라잔은 말한다. 자산이 지나치게 높이 평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남들이 사면 따라서 사게 되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를 기반으로 하는 보상과 쏠림 현상이 합쳐지면 “매우 불안정한 휘발성 상태가 된다. 군중의 행동으로 자산 가치가 펀더멘털에서 멀어지게 되면, 대규모의 조정 가능성, 정확히 말해 꼬리 손실을 야기하는 그런 종류의 가능성은 증가한다.”
마지막으로 라잔은 “칵테일을 특히 휘발성 상태로 만드는” 요소가 한 가지 더 있다고 덧붙이면서 “그것은 금융 자유화나 극단적인 시장 친화적 통화정책으로 인해 고금리 기간이 지난 후에 등장하는 저금리”라고 지적했다. 저리자금으로 은행, 투자은행, 헤지펀드들은 더 많은 돈을 빌려 더 큰 투자처를 찾게 된다고 라잔은 강조한다. 신용이 원활하게 움직일 때는 도취감이 고조되지만 ‘서든 스톱’에 부딪히면 경제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는 미국 경제가 그런 결과를 용케 피해 왔다고 라잔은 양보하면서도, 1987년의 주식시장 폭락과 2000-2001년의 기술주 붕괴로부터의 반동은 “사태를 지나치게 낙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증권시장에 대한 충격이 아무리 크다 해도 신용 시장에 대한 충격만큼 막대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라고 분석했다.
대체로 중앙은행 뱅커들은 무대 위로 몰려가 삿대질을 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랬다면 라잔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얼마 후에 연방준비제도 부의장에 임명되는 연준 이사 돈 코온은 라잔의 주장을 증권화 론securitized loan과 신용부도스왑credit default swap 같은 새로운 금융상품의 개발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린스펀 독트린’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기관들이 리스크를 다변화하고, 리스크 프로파일을 보다 정확하게 선택하고, 그들이 떠안는 리스크의 관리를 개선하도록 해 줌으로써, 우리는 기관의 건전성을 높여 왔다.” 돈 코온은 그렇게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상품의 개발은 시장 전반에서, 그리고 전국적인 범위에서 저축의 흐름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분배하여 성장을 촉진시켰다.”
그린스펀 독트린이 금융시장을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돈 코온은 한 발 물러서면서도 “그린스펀 의장이 말하는 사적 규제, 즉 민간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자율적 행동은 대체로 아주 효과적이다.”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정부는 “인센티브를 억제하여 사적 규제와 금융 안정을 훼손시키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월 스트리트의 보상 구조에 어떤 종류의 정부 조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라잔의 제안에 대해, 코온은 은행이나 여타 금융기관들이 “단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장기 리스크를 담보로 잡거나, 고객들을 위해 그들이 부담하는 리스크의 정도를 애써 축소하거나,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평판에 금이 가게 만드는 것” 등은 기관의 고위 간부들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결과적으로 나는 보상 문제에 정부의 간섭이 필요하다는 논의를 시장에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라고 고집했다.
하버드 대학교 총장 로렌스 서머스는 발언권을 얻어 일어나 말했다. “이 보고서의 기본 전제는 다소 고루하고 대체로 핵심을 잘못 짚었다.” 잠깐 말을 멈춘 서머스는 그린스펀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 후, 금융 산업의 발전을 민간 항공의 역사에 비유했다. 간혹 비행기 추락 사고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예전보다 더 쉽고 안전하게 갈 수 있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지금까지 추세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금융시장의 자기 강화적인 나선 구조의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이 적법하다고 생각한 탓인지 서머스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라구람 라잔 교수의 지적은 대체로 규제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많아 보인다. 그의 주장은 여러 나라의 갖가지 잘못된 정책을 지지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라잔의 발표에 대한 반응은 이론적인 차원에서조차 규제 완화와 자유 시장이라는 도그마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입증해 주었다. 코온은 그린스펀의 오랜 동료이자 조언자로서의 ‘자부심’을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서머스의 경우는 달랐다. 1980년대 하버드대의 소장파 교수로서 서머스는 주식 구매 같은 증권 거래에 대한 세금을 옹호하면서, 월 스트리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판은 전체적으로 볼 때 어떤 부가가치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야바위 노름이라고 주장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대통령 후보들의 자문까지 맡고 클린턴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할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사회적 통념conventional wisdom’을 수호하는 선봉장이 된 것이다. 사회적 통념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만들어 낸 용어로, 정책 논의와 술집에서 흔히 벌어지는 토론의 뼈대가 되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가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갤브레이스가 1958년의 베스트셀러인 『풍요로운 사회The Affluent Society』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회적 통념은 어떤 정당이나 신조의 독점물이 아니다. 공화당원이든 민주당원이든, 보수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독실한 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모두가 그런 통념의 핵심적 교의에는 동의한다. “사회적 통념은 건전한 학문과 다소 동일시되기 때문에, 그 지위는 실제로 견고하다. 회의주의자는 오래된 것을 버리고 새것을 찾는 바로 그런 경솔한 경향 때문에 실격된다. 건전한 학자라면…… 사회적 통념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그렇게 썼다.
그러나 사회적 통념은 어떤 경로를 통해 자리를 잡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18세기 글래스고에서 시작하여 런던과 로잔과 빈과 시카고와 뉴욕과 워싱턴 DC를 관통하는 지적 오디세이를 감행해야 한다. 유토피아 경제학은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유 시장 독트린의 결함에 눈을 돌리기 전에, 우선 그 독트린이 발달한 과정과 그 끈질긴 매력을 살펴보자.
(서문,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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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존 캐서디 (John Cassidy)
1963년 출생, 옥스퍼드 대학교와 뉴스쿨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선데이 타임스>, <뉴욕 포스트>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현재 <뉴요커> 경제 담당 기자이며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닷콘: 인터넷 시대에 미국이 어떻게 정신과 돈을 잃고 있는가?(Dot.con:How America Lost Its Mind and Money in the Internet Era)』가 있다.
1987년 주가가 빠른 속도로 대폭락한 블랙먼데이에 존 캐서디는 월 스트리트의 비명을 기사화하려고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 밖으로 월 스트리트의 바에 모인 화이트칼라 족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날 팔자 일색의 주식 거래량은 사상 최대였고, 수수료를 챙겨 먹고 사는 트레이더들은 가장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날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실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 늘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잊지 못할 교훈을 얻는다. 2007년 서브프라임 위기가 막 시작되었을 때는 십여 년 전에 죽은 하이먼 민스키의 책이 이베이에서 수백 달러에 거래되었다. 수십 년 전 민스키라는 무명의 경제학자가 경고한 금융 위기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유토피아 경제학은 환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세계 경제의 추진력인 자유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어디서 해답을 찾아야 할까? 경제학자이자 경제 전문 기자로서 존 캐서디는 주류 경제학이 놓친 경제 이론들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제 교과서가 무시했던 애덤 스미스의 또 다른 목소리, 아서 피구, 만델브로 등의 주장을 살피면서, 독자에게 현실 경제를 다른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참신한 틀을 제공해 준다. 『시장의 배반(How Markets Fail)』은 미국에서 출간 이후 큰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화제가 되었다. IMF 이후 금융 시장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 독자에게도 큰 통찰력을 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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