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_ 지금, 인문학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인문학 교육이 곧 인류의 미래다
인문학humanities은 표류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어디로 떠내려갈지 예견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의 목적은 인문학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인문학의 이런 슬픈 상황은 우리가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한다. 확실히, 인문학을 가르치거나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비전문가들은 흥미가 없다. 그리고 인문학을 가르치고 거기서 출판되는 대부분의 내용은 거의 배울 필요도 읽을 필요도 없는 것들이다. 많은 학생들이 대학을 시간 낭비라고 판단하고 많은 부모들이 대학을 돈 낭비라고 여기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고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인문학을 평가할 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인류humanity를 위해서 중요하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인문학 교사들과 학생들이 깨닫지 못하지만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인문학은 깊은 어려움에 빠져있다. 고등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무엇이 잘못되고 있으며 그 대안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논의된 바가 없다. 이 책의 목적은 인문학 교육에 대해 진단을 내리고 왜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관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논의를 진행하다보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다름 아닌 인류의 미래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인문학’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인문학이 경종을 울릴만한 상황이라는 것은 정말로 사실인가? 우선 이런 질문들에 대략적으로 답을 해야 할 것이다.
인문학의 분야와 관련해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종교, 철학, 예술, 음악, 문학, 역사에 관한 연구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앞의 네 가지 분야는 대학에서 개별 학과가 담당하는 반면, 문학은 영어나 독일어 같이 각각의 언어군에 따라 다양한 학과들에서 연구한다. 인문학에 속하는 이 여섯 가지 분야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한때는 인문학이 가장 명망 있다고 여겨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자연과학이 가장 높은 명성과 경제적인 후원을 누리고 있다. 사회과학은 비교할 만한 특별한 성과는 지적할 수 없지만 ‘과학’이라는 반사적 영예를 얻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자신을 인문학자보다는 사회학자로 보기를 바라며 이것은 다른 ‘인문학’ 분과의 교수들 역시 마찬가지다. 인문학이 처해있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1970년경부터 일어난 것으로 훨씬 심각하다. 그 당시에 갑자기 인문학 박사학위가 있는 젊은 사람들이 교직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여기에는 주요한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1940년대에 가파르게 상승했던 (소위 베이비 붐Baby Boom이라 불리던) 출산율 증가가 지속되지 않았고, 1960년대부터 급증하던 대학의 성장이 갑작스럽게 멈춰 버렸다. 1960년대 이전에는 늘어나는 대학의 숫자와 더불어 교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훌륭한 대학원생이라면 학위를 마치지 않아도 높은 봉급의 교수직을 제의받았지만 1970년대부터는 그런 시절이 지나가면서 새로운 기회도 멈춰 버렸다. 둘째, 교수직과 종신 재임직을 포함한 많은 자리들이 지난 25년 동안 젊은 사람들로 채워지면서 퇴임으로 인한 공석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 이 두 가지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음에도 대학기관은 충격에 휩싸였고 대학원들은 변화된 상황에 극도로 느리게 대처했다.
대표적인 예로 1961년에는 ‘교육발전을 위한 카네기재단Carnegie 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Teaching’의 퇴임 회장이 『대학원 교육』이라는 책에서, 대학이 당면한 주된 문제가 앞으로 다가 올 1970년대의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한 수요의 박사학위자들을 배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최근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대학 40여 곳을 방문”했다고 말하면서, 「증가하는 박사 부족 현상」이라는 장에서 과학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인 수많은 통계자료들을 쑤셔 넣어 놓았다. 그럼에도 1975년에는 철학 분야에서만 2,000여 명의 박사학위자들이 교직을 구할 수 없었으며 이런 문제는 전 세계로 확산됐다.
1976년 2월 4일자 <뉴욕 타임스>(38면)는 “고용과 취업 전망에 대한 미연방 노동 통계청의 예측에 따르면, 1972년에서 1985년까지 (…) 예술과 인문학 분야의 박사학위자들의 전망은 (…) 음울하며, 7만 9,600명으로 예상되는 졸업생들에 비해 일자리는 1만 5,700개 정도만 가능할 것”이라고 전했다. 80퍼센트 이상의 학생들이 자신이 교육받은 분야에서 직업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은 예술과 인문학 분야에서 특히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런 분야의 박사학위는 전통적으로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 역할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박사학위가 있는 과학자들은 대체로 보다 더 유리한 다른 선택지들이 있다. 남아도는 박사들을 중고등학교의 교육 수준을 높이는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출산율의 저하는 중고등학교에도 공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런 개혁안은 박사학위가 없는 젊은이들의 취업 기회까지 막아버리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현재의 교육 과정대로 인문학을 가르치는 한, 과연 박사학위자들이 중고등교육의 수준을 정말 높일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대부분의 박사들은 비전문가인 십대를 가르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당연히 대부분의 인문학 대학원 프로그램들은 과감하게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월등하지 않은 많은 대학원들은 한꺼번에 폐기될 위험에 처할 것이고, 많은 교수들은 이전과 다르게 학부생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 교육도 다시 재고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도 인문학에 대한 이런 면밀한 검토를 통해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교육의 문제는 초등교육 또는 그보다 앞선 가정교육과 문화적인 환경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만일 학생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준비를 해서 대학에 들어간다면, 고등교육의 전망 또한 훨씬 밝아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중등학교와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을 다루는 교재들이 엄청나게 늘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쓸모없는 피상적인 교육이 양산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내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분야들 역시 엄청나게 방대하다. 나는 특히 음악에 관심이 있음에도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지금도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절감하고 있다. 사회과학에서 무엇이 불필요하고 무엇이 유익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가급적이면 사회과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것을 가르쳐야 하는가의 문제 역시 간략하게만 집고 넘어가기에는 정말 중요한 사안이다. 간결함의 미덕도 있기 때문에 나는 언어교육과 창조적인 예술교육은 논의에서 제외시켰다. 이 두 가지는 앞서 언급한 여섯 가지의 주요한 분야와는 다른 문제점이 있다. 반면 여섯 가지 분야는 유사한 문제점이 있으며 이것들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또한 대체로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 여섯 가지 분야를 묶어서 ‘인문학’이라고 통칭하고자 한다.
플라톤Plato, BC 428/427~BC 348/347은 이미 오래전에 교육과 관련한 최초의 중요 저작에서 구체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를 다룬 바 있다. 나 역시 큰 틀의 문제에 관심이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사항들과 연결시켜 보려고 노력했고, 플라톤이 했던 것처럼 세부적인 강의 계획안도 제시해보았다. 강의 계획안과 관련해서는 한 학기를 대략 10주로 잡았다. 많은 학교에서 한 학기는 10주보다 길게 구성되는데, 이는 좀 더 많은 것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논의가 추상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례를 제시하고 명칭을 부여했다. 1장에서 나는 마음가짐을 네 가지로 구분하면서 이런 시도를 했다. 물론 어떤 인물을 특정한 유형으로 구분하지 않고 써내려가는 게 좀 더 편리할 것이다. 어떤 개인을 언급하게 되면 곧바로 반박에 부딪히고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인물을 다뤄야만 유형의 분류가 생생함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물들에 친숙하지 않고, 그래서 낯선 이름들 때문에 종종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혹시 누군가가 이런 점 때문에 괴로움을 느낀다면 정말 유감스럽다. 이런 독자들은 자신이 경험한 사례들 가운데서 관련 사례를 찾아본다면 이해가 명료해지리라 생각한다.
1장에서는 논의를 진척시키기보다 좀 더 많은 주제를 소개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주제는 각주를 달아 설명하기보다 다음에 이어지는 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논의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로 여길 필요가 있다.
또한 간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고등교육과 관련한 수많은 문헌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피했다. 그 대신 반대의견과 대안을 숙고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내가 주장한 것을 실천해보려고 노력했다. 이전의 저서들에서는 다른 학자들과의 입장 차이를 변호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이 책에서는 비교적 사소한 논쟁 때문에 길을 잃지 않고 한번에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일관된 관점을 구체화하는 데 집중했다.
같은 이유에서 잘못된 사례들을 지나치게 많이 제시하는 것도 피했다. 이런 사례가 책을 좀 더 흥미롭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마 자신이 겪었던 실패나 실망을 떠올리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그런 긴 목록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서로 맞물려있으며, 인문학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인문학은 표류하고 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충분히 많지만 대부분의 교수들이나 학생들은 배의 방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이 인문학의 방향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할 것인가?
몇몇 교수들과 학생들은 게임을 즐기느라 바쁘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 게임을 분석하느라 바쁘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게임의 아주 작은 움직임을 분석하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일에 아주 능통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당신들의 활동과 논문, 저서, 강의와 연구의 요점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상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지식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든가, 지식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라는 상투적 주장은 우선순위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방기하게 만든다. 모든 지식이 동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학생들이나 교수들에게 미국의 낙선한 부통령의 비서의 아버지에 관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수년을 허비하라고 부추겨서도 안 된다.
한편, 아직도 몇몇 대학의 총장들은 ‘인문주의humanistic’와 ‘인도주의humanitarian’가 마치 동의어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 분야의 연구 중 대부분은 분명히 하찮은 것임에도 인문학이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느끼는 풍조 또한 만연해 있다. 만약 인문학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신의 관으로 들어가는 열쇠만을 쥐고 있는 것이다.
방향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과 같이 급변하는 시대에 위험한 일이다. 이 배가 새로운 여행을 생각하지 않고 오랫동안 정박해 온 것이라면, 방향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이고 관점이 항상 변해왔다면, 방향에 관한 숙고를 거절하는 것은 재앙을 맞이하는 일이다.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에는 최소한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인류의 위대한 작품들을 보존하고 양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상, 인문학은 인류의 역사와 업적을 다룬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과거의 업적에 몰두해야 하는가? 역사의 대부분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우울하고 부질없는 이야기들, 맹목성과 잔악성으로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이런 비참한 모든 것이 무가치하지는 않으며, 간혹 일어난 승리는 약간의 고통을 보상해준다. 이런 드문 승리의 값진 유산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후대에 전승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류의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을 가르치는 일은 숭배에서 우러나온 경건한 행위가 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과거 지향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 비극이나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또는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가 젊은이들을 인간답게 하는 데 영향을 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그저 듣기 좋은 헛소리일까? 어쨌든 결국, 나치를 탄생시킨 독일에서는 고전에 관한 연구가 1933년 이전부터 이미 한 세기도 넘게 꽃을 피워왔고, 렘브란트와 모차르트는 널리 존경을 받아왔으니 말이다. 비인간적인 유미주의자들은 비인간적인 인문학 교사만큼이나 흔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뿐만 아니라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가르칠 것인가이다. 만약 교사가 비극 시인들과 렘브란트, 모차르트 등에 생기를 불어넣고 학생들에게 이들의 인간성과 타인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접하게 해준다면, 인간답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기대도 그렇게 지나친 희망은 아닐 것이다. 이런 교육이 설교로, 이런 학문이 의식 고양으로 축소될 수 있을까? 독서의 기술과 번역을 논의하는 장에서 나는 현재 행해지는 대부분의 연구보다 내가 선호하는 이런 접근법이 훨씬 더 학구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나는 위대한 작가나 예술가를 해석자의 관점을 옹호하기 위한 단순한 대변인으로 축소시키는 접근법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대부분의 설교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불손한 습관 때문이다.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에 생기가 생기는 것은 그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다양성을 끌어안을 때다. 학생들은 대안적인 관점에도 노출되어야 한다.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둘째 이유는 인문학이 이 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 문학과 예술은 다소 어느 정도씩 삶의 목표, 실존의 이유와 인간의 궁극 목적을 다룬다. 이것들에 관한 올바른 해답이 이미 최종적으로 주어져있고 그것이 비판의 여지없이 분명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마 다른 대안을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실, 대안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은 이미 2,000년 전에 랍비들에 의해 발전했다. 이들은 성서에 계시된 해답을 믿었지만 대항적인 해석도 고려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중세 학자들은 이들의 발자취를 뒤따랐다. 두 경우에서 모두 대안적인 사고는 당시에 문제가 되지 않는 일반 여론에 속한 것들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이 문제로 삼을 만한 것들이다. 대안에 대한 탐구는 아직도 충분히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다른 대안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목적에 대해서도 숙고해야 한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일반 여론에 사로잡혀 다른 경쟁적인 대안과 비교하지도 못한 채 맹목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 연구는 정신이 자유롭고 자율적이도록, 다른 대안에도 눈을 열어 운명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으로 기획해야 한다.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인생 목적이 지닌 문제점과 대면하도록 하는 데 실패한다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목표와 목적에 대한 숙고를 폄하하고 더 전문화된 방식을 통해 안전성과 확실성만을 추구한다면, 정작 가장 중요한 관심사들은 학계에서 설 자리를 잃고 밀려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학생들은 다른 대안을 접해보지도 못한 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선택을 맹목적으로 결정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물론, 전문화의 이점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5장에서는 전문화 교육이 자율성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전문화가 얼마나 쉽게 우리를 근시안적이고 맹목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오늘날 인문학이 당면한 문제는 예수의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마태오 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군중설교. 윤리적 행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다―옮긴이)에 등장하는 고전적인 정식을 빌려 표현할 수 있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면 어디에 있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할 수 있겠느냐?If the salt have lost its savou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마태복음」 5장 13절이다―옮긴이) 대부분의 최근 판본들은 킹 제임스 판 성경King James Bible의 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신 영역 성경The New English Bible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떻게 그것의 짠맛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겠는가?How shall its saltness be restored?”만약 구어체의 느낌을 원했다면, 그리스어 원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이치에 맞을 것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그것을 짜게 할 수 있겠는가?When the salt becomes insipid, how can one slat it?”
맛을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예전에는 좋은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현재를 대가로 과거를 칭송하거나 마치 내가 젊었을 때에는 목적에 대한 숙고가 훨씬 많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예전에 소금이 너무 짰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미각을 잃어버렸거나 늙은이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그리고 과거 세대들은 전혀 병들지 않고 건강했다고 믿는 사람들 또한 좀 더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셋째 이유는 비전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엄격한 의미에서, 비전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으며 모든 대학생들을 통찰가visionary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 문제는 비전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1장에서 나는 엄격한 의미에서 통찰가와 대안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대비해보았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다양한 독서 방식을 다뤘다. 독서의 기술은 인문학 연구의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들은 서평과 번역, 편집에 대해 논의하는 3장에서 더 심화될 것이다. 서평가, 번역가, 편집자는 다른 사람들이 책을 읽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독서가들이다. 책에 관심이 생길수록 서평가, 번역가, 편집자에게 더 많이 의존한다.
4장에서는 인문학의 한 분야인 종교에 관해 상세하게 다뤘다. 인문학 연구의 핵심이 인류의 위대한 작품들을 보존하고 대안적인 목적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사람들을 보다 덜 맹목적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라면, 비교 종교학은 인문학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나 『법구경Dhammapada』또는 『도덕경道德經,Tao-Teh-Ching』과 비교할 만한 문학 작품은 아주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대한 회화나 조각 작품, 건축물, 음악 중 많은 것들은 종교적인 맥락에서 탄생했으며, 종교를 떠나서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교 종교학을 가르쳐야 하는지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런 주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한 예로, 한때 상당히 유행했던 개론槪論 강의들survey course은 어떤 방식으로든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악평을 떠안고 말았다. 구체적인 실례를 다루는 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텍스트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으로 개론강의를 보완하려고 시도했다. 내가 이런 시도의 사례로 삼은 텍스트는 「창세기Genesis」이다.
그 다음 나는 비전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으며 전문화와 학제 간 연구가 이런 목적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논의해보았다. 마지막 장에서는 다양한 교수법과 강의안, 프로그램, 그리고 학제 간 연구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다뤘다.
모두 여섯 장으로 구분된 이 모든 것들은 단일한 하나의 ‘비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주요한 조각들이 어떻게 함께 맞물려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비전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세분화해보았다. 예를 들어, 1장의 유형 분류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서의 다양한 방식들을 논의하기 위한 도입이며, 이것은 종교적인 텍스트와 관련해서 더 확장된 논의로 발전할 것이다.
비전을 전달하기 위함이라는 모든 주장들은 다소 허풍처럼 들리기도 하며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의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책의 목적은 대안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런 것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표류하고 있으며 방향에 대한 논의가 절실한 시점에 서 있다. 여기서 나는 몇 가지 주장을 했지만, 이것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지 않으며, 교사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부정이 없는 긍정은 공허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내가 거부하는 것을 가능한 분명하게 설명하면서 나의 주장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 책은 모든 분별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하나로 일치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인용하는 방식의 글이 받는 비난보다 더 심한 분노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학자의 글들을 인용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글은 비판 정신을 길러내는 방식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비판 정신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을 가르쳐하는 넷째 이유이다.
(들어가는 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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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월터 카우프만 Walter A. Kaufmann, 1921-80
1921년 독일의 유대계 가문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에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니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33년간 철학을 가르쳤으며 종교철학, 역사철학, 미학 등을 넘나들며 다수의 철학서를 쓰고 번역했다. 또한 니체 전집을 편집하고 번역하면서 니체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고, 1951년에 『니체-철학자, 심리학자, 반드리스도 Nietzsche: Philosopher, psychologist, antichrist』를 출간하면서 미국 내에서 니체를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인문학과 인문학 교육 방식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던 그는 동시대 미국에서 함께 활동한 한나 아렌트를 ‘저널리스트 유형의 지식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철학자, 교수, 번역가, 서평가, 편집자, 시인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닌 카우프만은 50여 권의 철학사를 남겼다. 지은 책으로 『종교와 철학 비평 Critique of Religion and Philosophy』『셰익스피어에서 실존주의까지 From Shakespeare to Existentialism』『이단자의 신념 The Faith of a Heretic』『비극과 철학 Tragedy and Philosophy』『죄책감 없는 정의 Without Guilt and Justice』 등이 있다. 1977년에 첫 출간된 『인문학의 미래 The Future fo the Humanities』는 급격한 경제성장 이후, 인문학의 가치를 잃고 무너져가던 미국 대학의 인문학 풍토와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이다. 카우프만이 쓰고, 번역하고, 편집한 책들은 날카로운 비평정신과 인문학의 미래를 걱정하고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인문학자들과 독자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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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은정
직업이 보장된 전공을 선택해 대학을 마쳤으나, 인문학에 매료되어 다시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미학과 문학에 관심을 갖던 중 이방인을 주제로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에 관한 박사논문을 썼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의 중핵교과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며, ‘월요일 독서클럽’의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아버지란 무엇인가』, 『황금 노트북』(공역), 『레닌 재장전』(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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