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중요하지만 대개 분명히 생각하기를 꺼려하는 주제.
- 애슐리 몬태규, 『인류의 가장 위험한 신화: 인종주의라는 궤변』(1954)
인종주의(racism)는 무엇이고 어떻게 변화해왔으며, 왜 그토록 오랫동안 살아남는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쉽고 간단하고 명료한 답을 원하는 독자들에겐 이 책이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종주의는 범위가 넓고 복잡하고 논쟁적인 이슈다. 인종주의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명료한 답이 어려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는 점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짧고 협소하게 정의를 했다가는 잘못 나가기 쉽다. 맥락에 따라 짧고 간명한 정의가 불가결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광범위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 이런 짧은 책에서조차 인종주의를 다루려면 상대적으로 복잡한 접근이 필요하다. 간결하고 대중적인 책이라 해서 지나치게 단순화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인종주의는 여러 가지 차원을 지닌 현상이지만, 정치적 스펙트럼에서는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사고에 매여 왔다. 정치 활동가들은 자기네 지지기반을 움직이기 위해 인종주의를 너무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는 정치학자들이나 역사가들도 그런 단순화의 유혹에 굴복하기 쉽다.
나는 연구를 하고 책을 쓰면서 인종주의 논쟁이 경솔하게 정의되거나 치밀하지 못하게 일반화되거나, 분석이 부실해지지 않게 하는 데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보기에 인종주의에 대한 그동안의 학문적인 논쟁이나 대중적인 토론은 단순히 인종주의와 인종주의 아닌 것, 인종주의자(racist)와 인종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가르는 데에만 치중해왔다. 과장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인종주의에 대해 사람들 깊이 이해할 수 없도록 방해해온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이것이다. 인종주의를 간명하게 정의한 뒤 누가 ‘진짜’ 인종주의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빨리’, ‘확실히’ 가려내는 데에만 모두 몰두해왔다는 점 말이다.
이 책 후반부에서 나는 인종주의의 다양한 정의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그중에는 재앙이다 싶을 만큼 혼란스러운 것도 있고, 수많은 반(反)인종주의자들에게 인기 있는 공식 즉 ‘편견+권력=인종주의’라는 명제에 맞지 않는 정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또한 관습적인 인종주의 발상이, 그 유용성이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 있는 이유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이 책은 아주 간단한 소개서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깊이 있는 이해를 맛볼 수 있게 해주려 애썼다. 이 책이 인종주의에 대한 기존 소개서들과 다른 점은 또 있다. 대부분의 개괄서는 주로 반유대주의나 반아일랜드 정서를 인종주의의 중요한 측면으로 다룬다. 이 책은 인종주의가 백인 문화나 백인 개개인들의 전유물이라는 전제를 탈피해, 계급과 젠더를 비롯한 수많은 분류와 연결돼 있음을 인식시켜줄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나는 우리가 직면해야 할 고통스럽고 야만적인 현실을 모두 다루지는 않았다. 인종주의자들의 행위 때문에 희생된 것이 분명한 사람만 해도 수백만 명에 이른다. 인종주의라는 이름으로 불의를 저지르고 상처를 입히는 짓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종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인종’이라는 개념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생물학의 영역에서조차 광범위한 비판에 부딪히고 있다. 나치즘이 패망한 뒤 수많은 민족국가들은 법률적, 정치적, 교육적 수단을 동원해 인종주의와 싸웠다. 어떤 나라들은 ‘포지티브 액션’, ‘어퍼머티브 액션’1 등의 프로그램을 도입해 과거의 인종차별로 말미암은 피해를 중화시키기도 했다. 이런 조치가 역풍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에 반대하는 이들도 인종주의적인 목적을 드러내놓고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포지티브 액션 혹은 어퍼머티브 액션이 역(逆)인종주의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지만.
참 혼란스러운 일이다. 인종주의자라는 비판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행위나 의도가 애국심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혹은 인종이 아닌 민족문화나 민족(부족)과 관련된 문제일 뿐이라고 우긴다.2 “그런 기준으로 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종주의자”라는 주장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편견’과 이른바 인종주의라는 것의 차이를 마음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인류는 언제나 무리를 지어 살아왔고, 이런 집합성은 보편적인 특성에 해당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대개 언어나 영토, 혹은 다른 표지들을 이용해 소속 집단의 경계를 표시하는 습성이 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외부인, 이방인을 가려낸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앙드레 타기에프(Pierre-André Taguieff)는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현상을 ‘헤테로포비아(heterophobia)’3라 불렀다. 그러나 사람들이 외부인이나 낯선 이들을 꺼려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역사적·인류학적 증거들을 살펴보면 이방인이 늘 적대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속성 중에는 적대감이나 편견만 있는 게 아니다. 감정이입, 호기심, 관용, 대화, 협력 같은 것들도 그 못지않게 자주 발현되는 인간의 속성이다. 외부 사람이라 해서 자동적으로 두려움과 미움을 받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낯선 이들을 우러러보거나 성적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가 종종 겪는 일이지만, 이중적인 감정으로 외부인들을 바라보거나 부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인종은 현대적인 개념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에서는 그 비슷한 것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인종이라는 주제는 정말 지뢰밭 같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인종과 인종주의에 관한 문제들을 둘러싼 이런 혼란들과 비생산적으로 양극화된 견해를 넘어 독자들이 보다 명료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1. affirmative action.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진학·취업 등에서 혜택을 주는 조치.
2. race는 통상 ‘인종’을 가리킨다. ethnic은 ‘부족’, ‘민족’ 등 여러 의미로 쓰이는데, 인류학·민족지학(民族誌學)적 관점에서 부족·소수민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될 때가 많다. nation은 근대 국민국가·민족국가의 국민·민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책의 저자는 태생적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인종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미국 내 흑인과 같이 통칭 ‘소수인종’으로 불리는 집단을 지칭할 때 ‘racial group’ 대신 ‘ethnic group’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래서 책 속의 ‘ethnic’이라는 용어는 문맥에 따라 ‘부족’, ‘민족’, ‘소수집단’ 등으로 각기 다르게 옮겼다.
3. heterophobia는 보통 자신과 다른 성별의 사람에게 두려움과 혐오감을 느끼는 ‘이성(異性) 혐오증’을 뜻하나, 여기서는 이방인·외부인 혐오증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머리말 전문)
----------------------
저자 소개
알리 라탄시 Ali Rattansi
맨체스터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런던 시티대학교 사회학과 방문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종주의, 근대성, 정체성 Racism, Modernity and Identity』(공저), 『‘인종’, 문화, 차이 'Race', Culture and Difference』(공저), 『인종주의와 반인종주의: 불평등, 기회, 정책 Inequalities, Opportunities and Policies』(공저), 『마르크스와 노동의 분리 Marx and the Division of Labour』, 『포스트모더니즘과 사회 Postmodernism and Society』(공저) 등의 책을 펴냈다.
--------
역자 소개
구정은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고, 문화일보를 거쳐 경향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천 가지 얼굴의 이슬람, 나의 이슬람』『세계의 신화』 등의 책을 번역했다.
--------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