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94년 가을, 나는 런던에서 학부 졸업반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음 학기에 있을 다소 지루한 강의를 들을 준비를 하던 중에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내 일생에 중대한 영향을 준 한마디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물리학을 공부하며 살아오는 내내 그 말의 의미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곱씹으며 계속해서 생각하는 동안 그 말의 의미가 점점 더 명확해졌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규칙과 법칙, 원리들을 배워야만 했다. 물리에서의 뉴턴의 법칙, 생물에서의 광합성의 순환, 불어의 문법 규칙, 경제학에서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 등등이었다. 그러한 법칙들은 관련된 주제 내에서는 아주 특수한 법칙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 법칙들이 더욱더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그 법칙들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법칙의 근원에 대한 의문 또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진정 우리의 현실이 아무런 연관도 없는 규칙들의 무작위적인 집합들로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저 어딘가에는 그러한 법칙들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마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문명의 기원에서부터 인류는 그러한 궁극적 실마리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떨어지고 있는 사과와 행성의 궤도를 연결함으로써 달까지의 여행도 가능해졌다. 우리가 가진 분자에 대한 이해를 공학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다양한 경우에 신체 복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인간의 삶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를 통신이론과 결합시킴으로써 우리는 세계적으로 상품을 교환하는 글로벌 시장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가 어느 나라 말을 하는지와 관계 없이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이해와 그들을 연결해내려는 시도들은 우리의 삶에 명백하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렇듯 현실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수록 새로운 진보가 계속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현실을 잘 해석하느냐와 우리가 배운 것들을 잘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에 미래의 발전이 달려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욱더 정교한 연결 고리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을 잘 아우르는 법칙을 발전시킬 수 있고, 그러한 법칙을 통해서 비로소 자연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먼저 우리는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것을 잘 정리하고 해석함으로써, 비로소 그 정보를 더 명확하고 잘 정돈된 그림을 그리는 데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러한 정보들을 얼마나 연결해낼 수 있는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기술해낼 수 있는 하나의 궁극적 법칙이 존재하는가 라는 위대한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러한 모든 철학적 질문들과 함께, 가장 흥미있고 궁극적인 질문은 ‘자연이라는 것은 왜 존재하며,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왜 모든 것들이 잘 연결되어 있는가를 말하기 전에 왜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정보’라는 것이 그러한 질문에 좋은 답이 될 것이라 주장하려 한다. 신기하게도 이러한 주장은 정보가 우주에서 물질이나 에너지보다도 더욱 중요한 궁극적인 양量이 될 것임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자연을 정보의 조각들로 인식할 수 있다면, 자연의 존재나 그러한 존재들의 내재적 연결성은 더욱더 명백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일반인이든 과학자든 이 사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보는 물리적이다Information is physical”라는 말은 나의 관점을 영원히 바뀌게 했다. 그것은 어쩌면 잊혀져버렸을지 모르는 난해한 어느 책 속에 매우 흥미로웠던 한 장의 제목이었다.
1장 무에서의 창조
인류의 모든 문명권에는 창조 신화가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의 근원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들의 근원을 이해하려는 뿌리 깊고 끊임 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모든 신화가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대부분의 신화는 인류의 출현 이래로 우주의 모든 것의 존재 및 작용과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인들은 여전히 우주의 궁극적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대표적인 종교인 기독교나 이슬람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주변의 모든 것이 하나의 창조주로부터 기인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전 세계 인구수의 1/6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종교인 가톨릭에서는 모든 우주는 창조주에 의해 무에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이 우세한 믿음이다. 무에서의 창조라는 이름으로 (좀 더 공정히 하자면, 모든 가톨릭 교도들이 이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교황을 따른다면 이를 믿어야 한다) 초자연적인 것을 가정하는 것은 자연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초자연적인 존재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할 뿐, 자연을 설명하는 데 진정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종교가 아닌 것만이 진정한 대답을 줄 수 있다.
만약 과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을 종교에서와는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백컨데,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아마도 무신론자들이겠지만 (흥미롭게도 영국에서는 95% 이상이 그렇다) 이러한 사실이 창조라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한 신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왜 자연이 존재하며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설명하는 관점에서는 종교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가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똑같이 어려운 질문으로 끝날 뿐이다.
세상에 관한 종교적 혹은 철학적 견해를 담은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거기에 있는 대부분의 아이디어들이 과학에 있는 아이디어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환원주의적 관점은―세상의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한 원인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견해―종교적이거나 과학적인 사고에서 매우 흔한 것이다. 종교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의 신성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과학에서도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통일이론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다. 사실상 모르는 것들에 대해 더 잘 알고자 하는 우리의 내적 갈망은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러한 갈망을 하는 것일까?
내게 이런 환원주의는 두 가지 이유 중의 하나 때문에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아주 제한된 상상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려고 사용하는 방법은―과학, 종교, 철학, 예술,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결국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한정된 생각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뛰어난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슬로Abraham Maslow가 지적했듯이, 당신의 도구가 망치라면 모든 문제는 다 못과 같이 생겼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모두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과, 그러므로 예술가, 과학자, 수도사와 모든 평범한 대중들은 모두 서로서로 그 생각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마도 우리 모두가 비슷한 방법을 따른다는 것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비록 나는 생명이 다른 모든 우주와 연결되어 진화했다고 믿지만, 그것의 근원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우주의 다른 부분을 형성하는 것과 같은 법칙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세상을 창조하고 형성하는 자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독일의 철학자 루드빅 퓨어백Ludwig Feuerbach에 따르면, “인간은 먼저 부지불식 간에 자기 자신의 이미지 안에 신을 만들었고, 신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이미지 안에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인간을 창조했다.” 우리가 신을 자연과 동의어로 간주한다면 자연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사실상 동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생각들이 다 한 곳을 향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자연의 서로 다른 면들 사이에 상호연관성이 형성되고 그것이 물질의 전반적인 변화에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이 책의 중요한 주제다.
과학자들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캄의 ‘면도날’의 비유는 어떤 이론을 전개할 때 가정이 필요 이상으로 여러 개여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14세기 영국의 논리학자이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인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cam의 말을 다시 정리하면, 가장 간단한 설명이 항상 더 낫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성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라고 논쟁할 수 있지만, 10장에서 나는 보편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객관적 단순성의 관점을 보여줄 것이다.
오캄의 극단적인 사고를 빌리자면, 아마도 우리는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통합적인 원리를 유추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편하게 만들지를 상상해보라. 사랑에 빠지는 일, 행성의 움직임, 주식시장의 변화,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포괄적인 원리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면… 하지만 오캄보다 한발짝 더 나아가보자. 왜 하나의 최종 원리조차도 단순화시켜버림으로써 아무런 원리도 없이 모든 것을 유추해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이는 문제를 더욱 더 쉽게 만드는 일일 뿐 아니라 오캄의 논리에 의거하면 자연에 대한 더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존 휠러John Wheeler는 (오캄을 뛰어넘는 아무런 원리도 없는 추론을) ‘법칙없는 법칙’이라 불렀다. 그는 만일 우리가 물리법칙들을 어떠한 선험적 물리법칙에 의존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일반 과학자들이 흔히 취하는 무에서의 창조라는 관점이다.
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대수학의 수학적 기술을 발명한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치Gottfried Wilhelm Leibniz는 이런 논리 자체를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사용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훨씬 더 간단한 상태라는 전제하에서도 우주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무언가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어떤 독립적인 개체가 그것을 창조했기 때문이고, 그 사실은 그에게는 외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 즉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최초에 아무런 법칙을 가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법칙이 존재하기 어려운 이유는 휠러의 제자였던 영국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도이치David Deutsch에 의해 잘 설명되었다. 그에 관해서 독자들은 다시 한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해 도이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일 과학의 방법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설명 가능한 물리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궁극적으로 과학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자연의 어떠한 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상을 아우르는 원리를 발견할 수 없다면, 과학은 자연을 설명할 수 없으며 과학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된다. 도이치는 하나의 원리 P로 자연을 설명해낼 수 없다는 것은 합리주의에 직접적으로 배치되며 이제껏 이 문제의 발전에 큰 추진력이 되어왔던 물리학이 보편적인 과학이라는 우리의 견해와도 배치되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물리학을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도이치가 지적하듯이 그런 견해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만일 물리학 내에 모든 것을 설명 가능한 원리 P가 존재한다면 그것의 기원은 영원히 풀어낼 수 없으며 어떠한 법칙도 그것의 기원이나 형성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에어컨에게 “너는 왜 의자가 아니고 에어컨이니?” 하고 묻는 것과 같다. 에어컨은 그저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명백하게 그 답은 에어컨 밖에 있다. 그러므로 모순적이게도, 물리의 궁극적 원리 P는 물리의 ‘법칙’이 될 수 없으며 그의 근원 역시 물리 밖에 존재해야 하며, 그러므로 휠러가 말한 자기모순적 표현인 ‘법칙없는 법칙’이 되어버린다.
도이치의 논리는 우리가 자연을 하나의 원리로부터 설명하려고 할 때 걸어야 하는 명백한 길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원리가 설명하려고 하는 자연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의자나 에어컨과 같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사랑에 빠지는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일까, 혹은 물질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와 같이 더욱더 궁극적인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물론 이상적으로야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현상을 통합하는 공통의 연결 고리가 필요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주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정보(물질도, 에너지도, 사랑도 아닌)가 자연에 가장 궁극적인 실체라 주장하고자 한다. 정보는 경제나 사회현상 같은 거시적 상호작용에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물질이나 에너지보다 훨씬 더 궁극적이다. 또한 정보는 에너지나 물질과 같은 미시적인 상호작용들의 근원과 행동 방식을 설명하는 데도 이용될 수 있다. 이 책의 각 장들은 정보가 그러한 모든 것에 공통적 연결 고리라는 나의 견해에 무게를 더해줄 것이다.
정보라는 관점은 도이치나 휠러가 논의했던 바와 같은 문제점을 우리에게 남겨놓는다. 우주의 궁극적 구성 요소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여전히 궁극적 근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에서의 유’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을, 어떻게 정보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속에서 생성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 일단 이 설명을 잘하고 나면 자연의 다른 부분을 설명하는 일은 훨씬 더 명백해질 수 있다. 물질과 에너지와 다르게 정보라는 것은 현재로서는 자연의 근원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개념일 것이다.
정보는 자연을 이해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인 반면에, 정보의 감소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돕는다. 이는 직관적으로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했을 때 몇 가지 기본적 원리들로 그것을 더 쉽게 요약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주에서 계속적으로 생성되는 정보와 맞닥뜨리고 있다. 이것은 단지 더 많은 일들이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이해했다면, 우주의 정보는 항상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더욱 궁극적인 주장이다. 이 주제는 5장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보를 압축하는 우리의 열망(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더 포괄적인 원리로 추출하는 일)과 우주에서 정보의 자연적 증가(우리가 이해해야 할 총 양의)라는 이분법만이 존재한다. 정보 압축의 열망과 우주 정보의 자연적 증가는 사실 초기에는 독립적인 과정들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일이었다. 우리가 정보를 압축하고 자연을 지배하는 궁극적 원리을 발견하고 나면, 그 원리는 얼마나 더 많은 정보가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포이어바흐가 “사람이 먼저 신을 창조하고 그리고 신이 사람을 창조했다”고 말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정보 압축은 궁극적 법칙을 밝혀내고 그러한 궁극적 법칙은 어떻게 정보가 생성되었는지를 설명하게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자연이 정보의 압축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관점이 과학의 정신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적용에도 더 다가서 있다고 믿는다. (소위 말하는 과학적 방법론은 10장과 12장에서 자세히 논의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정보는 우리의 지식 체계의 불확실한 정도를 반영한다’고 하는 정보의 과학적 의미와도 더 근접해 있다. 이는 3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아마도 여기서 이야기하는 우주에 대한 견해는 ‘무에서의 창조’와는 반대로 ‘모든 것의 소멸’이라는 말로 더 적절히 표현되며 자연을 정의하는 데 더 잘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 책의 3부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프롤로그,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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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블래트코 베드럴 Vlatko Vedral
런던 임페리얼 대학 이론물리학 학부과정을 이수하고 동 대학에서 <얽힘 현상의 양자정보이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 7월 이후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양자정보과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싱가포르 국립대 전임교수이기도 하다. 대중과학잡지와 신문매체 기고, 라디오와 TV 프로그램 출연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130편이 넘는 연구논문을 발표했으며, 주요 저서로 『현재 양자광학』『양자정보이론의 소개』『상대론과 양자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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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손원민
영국 벨파스트의 퀸즈 대학 이론물리학과 김명식 교수의 지도로 2005년 양자광학과 양자정보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리즈 대학,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 싱가포르 국립대 등에서 연구했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표한 20여 편의 논문 중 10여 편은 블라트코 베드럴과의 공동 연구인 ‘다 체계에서의 양자 얽힘 현상’에 관한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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