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 하느님의 선물, 자연이에게
‘김자연 스콜라스티카’ 안녕? 너의 탄생을 환영한다! 우리 마을에 베푸신 하느님의 축복이구나. 마을의 선물을 받아라. 소백산 구봉팔문의 명경과 맑은 하늘과 공기, 구름, 이 여름 시원한바람과 봄, 여름, 가을 피어 있는 온갖 꽃들을 너에게 화관으로 준다. 모든 보이고 느껴지는 순간만은 우리 것이고 너의 것이란다. 삶은 순간이란 구슬로 꿰어져 있지.
축하금도 없고 일회용 기저귀도 없지만 우리는 ‘가짐 없는 부자’의 방식으로 너의 탄생을 축하했고 사랑하고 있단다. 너는 부잣집 딸로 태어난 거다.
네가 태어날 때 마을 가족들이 모두 걱정하며 기도했다. 보발천의 노란 생강나무꽃과 산새들이 너를 위해 노래하고 춤추었고, 마을에 첫 아기가 태어난다고 소와 닭과 염소들이 들떠서 아주 야단이었어.
땀을 훔치며 밭에서 돌아와 식당에 눕혀진 자연이의 똘망한 눈길을 마주치며 기뻐하는 가족들의 얼굴은 베들레헴의 목동의 경배고 행복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이만한 축복을 받은 아가들도 많지 않을 거야?
너는 태어나면서부터 공동체에 큰 축복을 선물하는구나. 우리 마을에서는 바오로 삼촌 같은 일꾼부터 갓 태어난 아기까지 모두 자기 밥값을 하고 산다. 공동체는 정말 신비로운 세계다! 제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옛 말씀이 맞는 거다.
스승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걱정하지 말라, 오직 하느님 나라를 찾으라” 하셨다. 가진 것을 내어놓고 공유하며 살았더니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사도행전에 기록해두었다.
우리는 말씀대로 따름이 제자의 길이라 믿었고 이곳 산 위에 우리 시대 ‘노아의 방주’를 띄웠다. 너의 엄마 아빠가 방주의 문을 열고 들어왔단다. 이제 네가 할 일은 매순간 감사하고, 가족들과 조화롭고 기쁘게 사는 일뿐이다.
너의 앞날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람들의 총애가 충분할 것이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네 인생길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시니 두려움 없이 가거라!
자연아, 너의 탄생은 하늘이 계시하시는 좋은 징조다. 인큐베이터 속의 연약했던 자연이가 이토록 무럭무럭 성장하는 것은, 주님께서 보내신 추수 일꾼들이 북적거리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희망의 징조다.
씩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올 것이다. 결혼도 하고 네 동생들도 계속 태어날 거다. 세상 곳곳에서 마음 다친 이들이 찾아와 하느님을 만나고 치유 받아 일어서는, 영적 기운이 충만한 공동체가 될 거라는 예감이다! 정말 마음 벅찬 일 아니겠니?
징조가 현실로 드러날 무렵에 자연이는 꼬뮌스쿨 빵학년에 입학해서 언니오빠, 동생들과 같이 놀고 공부하며 행복하게 지내겠지.
찬양은 큰소리로 예쁘게 하고 신발정리 잘해야 하는 거 잊지 마라. 천인결사 은인들의 공덕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을 건립의 공로자다. 타인의 행복과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천직을 가져라. 경쟁하거나 영성이 없는 직업은 불행하다.
자연아! 산 위의 마을에서 태어난 첫둥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공동체의 향기로운 꽃이 되어라. 자연이는 성년이 되면 어떤 일꾼이 될까? 농부? 수녀님? 아니면 아이들을 돌보는 선생님도 좋겠지? 진짜 그날이 올 때까지 나도 건강하게 살아 있기를 기도해야겠구나.
이 책은 신부님이 마을에 들어와 생활하면서 썼던 글모음인데, 자연이가 태어난 해에 펴냈으니 출생기념으로 삼자꾸나. 공동체 가족과 더부네들, 그리고 마을을 떠난 가족들도 함께 앉아 정담을 나누는 마음으로 읽어주면 좋겠다. 내 믿음과 숨결이 담긴 것이니 새길 것 있으면 챙겨 넣기를 바란다.
네가 이 책을 읽으며 마을의 역사와 삶에 대해 알 나이가 되면 오, 내 얼굴에 주름도 늘고 머리도 하얗게 새어 있을 거야! 흑흑! 자연아, 사랑해! 날마다 기쁘게 살자. 홧팅!
2011년 9월, 산 위의 마을에서
박기호 신부
지각 인생
능암에서 옥계까지의 길은 한적하고 여유로워서 좋다. 걷거나 수레를 끌고 다니기에 안성맞춤이다. 도로가 바뀌었지만 골동품상들은 여전하고 솟대 조각물을 무더기로 세워둔 곳도 보기가 좋다. 옥계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산 위의 마을이 있는 단양 가곡면을 거쳐서 충주호에 담겼다가 내려오는 남한강이다.
충주 근처에 이르니 내가 낚시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낚시는 생각만으로도 행복감을 준다. 진짜 꾼들은 ‘낚시꾼’이라 부르지 않고 ‘조사釣士님’이라고 존칭한다. 얼마나 품격 있는 호칭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꼭 ‘질’ 자를 붙여서 ‘낚시질’이라고 한다. 기분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낚시의 행복이 손상되는 건 아니니까.
충주호를 모르면 한국의 낚시꾼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완공된 충주호가 담수되면서 참붕어 입질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그때를 ‘충주호 시절’이라고 부른다. 충주호 시절 장호원은 낚시 가게와 해장국집과 출조 버스로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었다.
나는 충주호 붕어보다 조정지탄금호 참붕어를 더 좋아했다. 조정지의 지류인 달천강에서 밤낚시를 하면서 끌어올린 참붕어들은 거의 모두가 ‘점박이’였다. 비늘마다 까만 점이 하나씩 있어서 점박이라고 부르는데 그 붕어의 자태가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낚아 올릴 때마다 뽀뽀를 해주곤 했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미소로 준척급 붕어를 살림망에 넣은 다음, 다시 떡밥을 달아 던진 후 손을 씻고 세리머니로 담배 한 대를 뽑아 피우는 맛이란! 이를 두고 조사들은 “마누라 열 명 하고도 절대 바꿀 수 없다!”라고 말한다. 아내가 없는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한다.
낚시가 끝나면 늘 붕어를 살려주었다. 붕어는 자태만 예쁜 것이 아니라 예의염치가 있다. 낚시꾼이 살려주면 반드시 고맙다는 인사로 꼬리를 치면서 간다. 어느 훗날엔가 나는 그 강가에 나가 “참붕어야, 참붕어야! 할머니의 소원이다. 물동이 하나만 다오!” 할런지도 모를 일이다. (알아듣는 독자는 행복하다.)
갈대 사이에서 황소개구리 울어대는 가운데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 케미라이트가 스멀스멀 올라와 넘어지는 환상에 잠시 잠겨본다. 밤낚시 한번 가고 잡다!
이제 마을에 들어가면 가족들과 호흡을 맞추어 살아야 하니 밤낚시는 접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왜 나는 늦은 나이에 공동체를 찾아나서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공동체로 사는 것을 생각하고 그런 삶으로 오랜 역사의 강물을 이루었을까?
인간이란 본래적으로 공동체로 살아왔고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개인과 가족과 가정을 더 소중한 가치로 여기면서 공동체를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찾아가는 것은 잃어버린 본래의 삶으로 회귀하는 것이 분명하다. 오래전 내 스스로 버리고 떠나왔던 어린 시절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안對案이 아니라 원안原案의 삶이다. 버릴 때는 미련도 없었지만 다시 찾으려니 낯가림에 힘이 드는 것이다.
고향에서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농사짓던 친구들은 여전히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똘똘한 맹기, 순둥이 충오 등 어린 시절의 동네 친구들 몇 명이 붙박이 농사꾼으로 고향을 지키고 있다. 농약 먹고 죽은 친구 필재, 방학 때 농약 치다 죽은 희수도 생각난다.
루가복음에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돈 많은 집 둘째아들이 아버지께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챙겨서 도시로 떠났다가 환락에 빠져 완전히 탕진한 후 회개하고 빈털터리로 환향還鄕한다는 이야기다. 그는 도시로 나가 모든 것을 잃었다. 얻은 것은 도시의 소비와 환락이 해답도 행복도 아니라는 깨달음 하나뿐이었으니 진실한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데 너무나 비싼 비용을 치른 셈이다.
공부해야 출세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도 고1 때 서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4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생의 반환점을 훌쩍 넘어 환향의 길에 오른다. 돌아온 탕자처럼 잃어버린 아버지의 삶을 찾아간다. 그마저 바다가 있는 내 고향을 두고 산촌으로 들어간다.
회개하는 마음보다는, 죽음의 홍수와 저주의 유황불이 천지를 뒤덮게 될 그날이 두려워 살아남고자 노아의 방주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박달재 아랫마을까지 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다. 걸음이란 줄기차야 속도가 나기 때문에 무념무상이 좋다. 잡념망상의 감정 상태는 걸음에 반영되기 때문에 늦어지게 마련이다. 조금 빠른 4분의 4박자 템포의 노래가 좋다.
걸음이 느리거나 빠르거나, 앞서거나 뒤서거나 모두 같은 길 위를 걸어간다. 앞서 간 걸음을 뒷사람이 따라가야만 길이 된다. 뒷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사상도 삶도 그렇다. 나보다 앞선 삶이란 것이 있다.
한 걸음 앞선 것은 이미 검증되고 평가받은 학문과 경험을 소개하는 벤치마킹이라 할 수 있다. 두 걸음 앞선 것은 방향을 알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삶이다. 생태문제, 영성운동, 대안교육, 대체의료 등과 같이 인문학적 상상력과 대안적 가치들을 통해 미래의 삶을 준비한다. 세 걸음 앞선 것은 빛나는 이상과 의식을 실현하는 삶이다. 영성과 정신을 공유하고 통하는 이들만이 유유상종하게 된다.
누구나 한 걸음 앞서가려고 경쟁한다. 승리하려는 이유에서다. 두 걸음 앞선 행동은 매력은 있으나 관망한다.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가더라도 퇴로를 열어둔다. 세 걸음 앞선 삶은 선망은 하되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무소유 공동체의 삶은 모두 지지하고 칭송하지만 따르는 자가 적은 것이다.
너무 가까이 앞서가는 걸음은 가치가 적고, 너무 떨어져 가는 걸음은 현실성이 적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항상 세 걸음 앞서가는 사람을 두 걸음 앞선 자가 따르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일반화시키며 진보해왔다. 인문학도 과학도 모두 그랬다.
“변혁의 시대에는 이상을 외치는 자가 먼저 죽임을 당하고, 뒤따르는 자는 감옥에 가거나 불이익을 당하고, 관망하는 자가 그 열매를 먹는다”고 했다. ‘공동체주의’는 변혁의 목표성을 밝히는 삶이자 모델임이 분명하다. 무소유의 공동체는 우리 시대 순교의 삶이다. 그래서 광란의 시대에 방주로 인도하는 등대가 된다.
박달재는 천등산에 있다.
선생님이 묻는다.
“눈이 녹으면 무엇이 될까요?”
도시 아이가 대답한다.“물이 됩니다.”
산골 아이가 대답한다. “봄이 됩니다.”
선생님이 묻는다.
“이 두 마리의 사슴 그림은 무엇을 뜻하지요?”
도시 아이가 대답한다. “먹이를 두고 싸우고 있는 겁니다.”
산골 아이가 대답한다. “짝짓기를 하려고 합니다.”
전기 없는 날
거 참, 늙어가는 징조가 확연하다. 어제도 같은 실수를 했다. 여느 때처럼 새벽에 경당에 들어가 불을 켜고 잠시 기도하고 있는데, 복사하러 온 아이가 귓속말을 한다.
“오늘은 전기 안 켜는 날이에요.”
“아, 그렇군!”
‘전기 없는 날’인데도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서 불을 켜고 머리감고, 경당에 들어와 스위치를 올리고… 지난달에도 그랬는데 또 실수를 한 것이다. 기억력과 뇌 기능이 날로 퇴화되고 있는 것 같다. 늙어가니 어쩔 수가 없다.
우리 마을의 매월 첫째 목요일은 ‘전기 안 켜는 날’이다. 새벽미사부터 하루 동안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거창한 이유는 없고, 전기 문명에 대해 성찰하고 마을 생활의 의지를 한 달에 하루라도 다지자는 의도다. 매달 하루만이라도 자발적으로 불편함을 감수해보자는 것이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적 효과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 시작한 측면도 있다. 왜 전기를 켜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고 직접 겪어보면 그것이 곧 교육 아니겠는가.
‘전기 없는 날’은 전력을 이용한 일체의 조명과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예외가 두 가지나 된다. 주방의 냉장고와 연탄보일러다. 30여 명의 식재료를 관리하는 냉장고니 어쩔 수 없이 양보했고, 연탄보일러는 전기로 모터를 돌려주지 않으면 난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제대祭臺에서 쓰고 남은 초를 켜거나 등불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데, 아이들은 손전등을 좋아한다. 경당과 식당 등 공동 공간에는 촛불이나 호롱불을 켠다. 우리 마을에는 ‘휴대전기’라는 말이 있다. 평소에 손전등 하나씩은 가지고 다닌다. 건전지는 전기를 축전한 것이니 전기로 보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주장해서 손전등을 ‘휴대전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기 없는 날’ 휴대전기를 쓰느냐 마느냐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가장 좋은 것은 그냥 일찍 자는 것이다. 전기를 없앤다는 것은 옛 삶으로 돌아가는 가장 효과적인 문명 저항의 방법이다. 충전식 휴대전기는 말할 것도 없고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을 쓴다고 해도 에너지원의 조달 방법이 다를 뿐 기술문명에 의탁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예수살이 공동체 영성의 구체적 실천은 안티소비문화 운동으로 나타난다. 멤버들은 공동체 수행의 일환으로 소비문화에 저항하는 ‘오프Off 운동’이라는 것을 한다. 편리함을 끊어버리는 일상의 수행이다. 예를 들어 ‘쇼핑 오프’는 쇼핑을 안 하고 사는 것이다. 텔레비전 오프, 액세서리 오프, 메이크업 오프, 신용카드·승용차·휴대폰 오프 등이 있다.
‘오프 운동’에는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없애버리는 100퍼센트 오프의 멤버도 있고, 다섯 개의 신용카드를 하나로 줄이거나 아예 안 쓰거나, 승용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소형차로 바꾸는 사람도 있다. 자유로운 동조다. 하지만 최소 한두 가지는 실천하는 것이 예수살이 운동의 기본 조건이다. 가장 잘 되는 오프 운동은 텔레비전과 쇼핑 오프이고, 가장 안 되는 것이 휴대폰 오프이다.
산 위의 마을은 그런 오프 노력을 공동생활 속에서 구조화한다. 아예 돈이 필요 없는 생활 시스템을 만들어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텔레비전도 승용차도 없기 때문에 굳이 오프를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나를 포함해서 마을의 안내전화도 휴대폰을 사용한다. 책상 앞에 앉아 사무를 보면서 전화 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통신수단으로 휴대폰을 대신하는 구조를 만들어보자며, 무전기와 무선 햄 등을 도입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억지춘향’ 같아 시도하지 않았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태양열, 태양광, 풍력발전 설비는 하나씩 해볼까 했지만, 전시용이나 형식적인 시설은 없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이미 행정·교육기관들에서 나랏돈으로 시설해놓고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족하다.
가령 풍력, 태양열 등의 이용 방법을 교육하는 곳에서 정작 자신들은 일반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면 그런 생태운동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원자력발전이 안전한 클린 에너지라고 광고하는데, 그렇게 안전하다면 전력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서울·경기에서 가까운 난지도나 팔당 같은 강변에 건설해야 할 것이다. 그럴 배짱은 없겠지. 지구상에 ‘100퍼센트 안전’이란 말은 허구다. ‘고장 없는 기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보수 우익 정치인들은 비핵화 조건을 남북관계의 요체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리석은 견해다. 비핵화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하자. 북한의 미사일이 남한의 원전에 떨어지면 그 자체가 핵폭탄인데 비핵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북한의 미사일이 삼척, 고리, 영광에는 도달하지 못할까? 풍선은 들고 있는 아이의 손에서 터지는 법이다.
소비문화는 우리의 삶을 가장 완전하게 지배한다. ‘원전건설반대’나 ‘방사능폐기장반대’ 운동은 잘할 수 있지만 전기 문명 생활은 조금도 버리지 못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가령 신제품을 출시한 기업이 “이건 당신의 비즈니스와 가정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라고 속삭이면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없다는 말이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악령이 내 의식을 지배하고 조종하기 때문이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총리인 삼동 린포체는 말했다.
“40년 동안 중국의 군사적 점령, 통치 하에서 티베트 민중은 온갖 억압을 당하면서도 티베트 문화를 훼손하지 않고 잘 유지해왔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티베트에 불어 닥친 소비문화는 티베트의 전통문화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단 10년 만에!”
소비문화의 악령께서 말씀하신다.
“너의 생각은 고상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실천은 나를 따르라!”
두려운 존재이시다. 소비사회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허구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어느 날 지구적 재앙이 나타나 전력 보급에 문제가 생겼다고 상상해보자. 현재 상태를 몇 시간이나 유지할 수 있을까? 전력을 이용한 모든 시스템이 단절된다. 은행은 현금 인출을 거부해 내 돈이 인정받지 못한다. 통신, 가스, 난방, 엘리베이터, 수돗물, 지하철, 주유소… 모든 것이 먹통이고 멈춤 상태가 된다. 공포와 침묵의 도시가 되는 것이다. 아니면 아비규환의 지옥이 되든가… 소돔과 고모라성의 재앙은 언제든 실제 상황이 될 수 있다.
도시는 하루도 버틸 수 없지만 농촌은 살아남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이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이미 온돌이 사라지고 전기를 보조수단으로 하는 보일러 난방에 가스레인지, 전기밥솥을 사용한다.
임락경 목사의 화천 시골교회 공동체에 갔더니 겨울에 전력이 끊어질 것을 대비한 온돌과 고수위 수도시설이 있었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우리 마을도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기가 끊어진다면 우리도 당장 물을 끌어올릴 수 없어서 길어다 먹고 씻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상징으로 한 달에 하루만이라도 ‘전기 없는 날’을 실천하고 있는 것인데, 아직은 상징성 수준이다.
일본 동북부의 대지진 참사와 쓰나미로 희생된 사망·실종자 수가 공식 집계된 것만 2만 8000명이다. 그중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는 불가항력의 대형 사고를 냈다. 체르노빌 사태보다 극심한 결과로 나타날는지 모른다. 아마도 우리는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기술문명의 어떤 아바타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영혼은 소비문화의 악령에 사로잡혀 묘지 주변을 헤매고 있다.
전기 안 쓰는 날, 손에 든 호롱불에 비친 우리의 얼굴이 잃어버린 모상模像을 찾아 나선 영혼들처럼 느껴진다.
비가 오실 때면 누군가 찾아올 것만 같다.
공동체 생활유학
처음 ‘생활유학’ 학생을 몇 명이나 받을까 고민하다 우리 마을 능력으로 봐서 10명 정도는 가능할 것 같고, 그러면 분교생을 최소 15명 선은 유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활유학 설명회를 열기 위해 가톨릭 신자 가정을 대상으로 여름캠프를 하기로 했다. 생활유학이라는 목적성이 분명하기 때문에 진짜 생각 있는 사람만 참가하라는 뜻에서 13박 14일의 ‘천국의 아이들’이란 캠프를 공지했다. 멀리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참가신청을 해서 30명이 순식간에 마감되었다. 캠프가 끝나자 바로 2학기부터 유학을 하겠다는 지망생도 세 명이나 나왔다. 한 학기 워밍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3~6학년생 10명을 선발했다.
생활유학이 잘 된다면 아이들은 공동체 수련생활을 통해 청정한 자연환경에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며 생활하는 경험을 얻게 될 것이었다. 동시에 이농으로 공동화된 시골마을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마을에는 아이들을 돌보는 전문가가 없다. 또 과잉행동장애나 아토피와 같은 유사 증후군에 대한 어떤 대안도 없다. 전문 프로그램도 없고, 다만 우리 아이들과 똑같이 생활하게 해주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기숙비도 저렴하고, 일과도 단순하다. 새벽미사로 하루가 시작되고 공동식사와 청소를 마치면 1.4킬로미터 떨어진 학교로 간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두 걸어서 다닌다. 해찰도 심하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유치원 아이의 손을 잡고 돌보며 학교에 간다.
돌아와서 가축을 돌보고 쇠꼴을 뜯거나 하다 보면 금세 저녁식사 종이 울린다. 저녁기도가 끝나면 숙제도 못하고 곯아떨어진다. 아이들과 밭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휴일 외에는 사실 별로 많지 않다. ‘노동과 함께 가는 교육’이라는 처음의 의도와는 달랐다.
아이들은 대부분 편식이 지독하다. 그러다가 두세 달 지나면 달라진다. 산 위의 마을 식탁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고기나 튀김, 즉석 식품류는 거의 없고, 대부분 푸성귀다. 활동량이 많아 배는 고픈데 굶지 않으려면 먹어야지 제가 어쩔 것인가. 운동화 끈을 묶을 줄 모르는 아이들 문제도 간단히 해결된다. 방법은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것이다.
처음엔 밤마다 부모님께 장문의 편지를 쓰며 훌쩍거리지만 그것도 한두 주면 끝이다. 오히려 부모가 섭섭해한다. 닭똥 냄새에 코를 막던 아이들이 닭장에 들어가 생계란을 꺼내먹고선 시치미 떼고 나온다. 담당구역 청소도 깨끗이 한다.
미사 전례 준비와 반주도 모두 아이들이 한다. 도시에서는 공부를 못해 인정받지 못하던 아이도 우리 공동체로 오는 순간 경쟁할 필요도 없이 학교에서 반장 혹은 부반장을 하게 된다. 학생회장도 있었다.
선생님과 마주앉아 공부하니 졸고, 한눈팔고, 만화책을 보거나 할 수도 없다. 익명의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이의 성격, 습관, 학습수준, 행동발달 등이 모두 파악될 수밖에 없다.
학교 선생님은 우리 아이들이 도시에서 학원을 많이 다녀서 그런지 예능도 잘하고 똑똑한데, 본토 아이들과 비교할 때 거짓말을 잘하고 선생님께 고집도 잘 부린다면서 좋게 평하진 않는다. 공동체에서도 거짓말이나 욕설, 다툼을 엄격히 금하는데 바로잡기까지 꽤 오래 걸린다.
공동체는 자기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해주는 거울이다. 익명이 불가능하고 생각과 태도가 100퍼센트 노출되는 곳이다. 공동생활을 통해 비로소 ‘공동체 생활 이전의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내 자녀가 이렇구나!’, ‘내가 자식농사를 잘못 지었구나!’ 하는 진면목을 보게 된다. 물론 숨겨진 좋은 점도 발견한다. 발견의 원리는 생활유학 어린이와 그 부모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 자녀가 실제보다 성품·성격이 좋고 친구관계도 무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욕은 할 줄도 모를 거라고 믿는다. 도시 학교의 선생님들에게는 칭찬만 들어왔는데, 작은 시골에서 잘못된 점을 지적받으면 당황하며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아이들은 그동안 도시에서 개인주의로 살아도 문제가 안 되는 생활을 했다. 오히려 개인만 생각하는 생활을 배워왔다. 우산이나 학용품을 챙겨오지 않아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공동체는 나의 생각과 태도가 공동생활에 적합한지 끊임없이 살피며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수행의 삶이 된다. 공동체로 유학 오는 순간부터 아이들이나 부모나 새 삶을 학습하기 시작한다.
저녁기도 때 찬양하는 아이들의 합창은 그대로 천사의 목소리다. 특별히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기도를 노래로 하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모두가 찬양단이 된다. 그렇지만 함께 모여 사는 공동생활은 전쟁터이기도 하다. 즐겁게 낄낄대다가도 금방 싸우고 삐지고 울고 야단한다.
툭하면 울기부터 하는 아이, 꽥꽥 소리를 질러 기선을 제압하려는 아이, 한옥 문창살을 뜯어내면서 스릴을 느끼는 아이, 밤중에 화장실 가기 무서워 세면장에 신문지 깔고 실례해서 경악하게 만드는 아이, 남의 물건을 고장내놓고 시치미 뚝 떼는 아이, 자기보다 큰 친구에게 죽어도 지지 않으려는 아이, 힘 있는 상급생에게 붙어서 보호받는 아이… 그야말로 세상살이의 축소판이다.
사람은 스스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게 되어 있어서,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자기 것을 챙기며 자신을 보호하고 사는 길을 터득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신발을 정리하고 친구를 도와주고 배려하는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도 배운다.
전쟁의 파편은 공동체에도 모진 부담이 된다. 유리창과 모기장, 장판, 장독대의 항아리와 농기구, 빗자루… 제대로 남아나는 것이 없다. 보수비용은 모두 공동체의 몫이다. 기숙비도 다른 산촌유학에 비해 절반 수준밖에 안 되는데 말이다. 그래도 아이들이 연탄재 치우기나 화장실 청소, 식사 후 뒷정리하기, 소나 염소, 닭 돌보기 같은 자기역할에 충실하니 그만하면 되었다.
애초에 아이들 10명을 우습게 알았다가 엄청난 착오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인원을 대폭 축소하여 지금은 5명 내외의 아이들만 데리고 있다.
고목나무, 기암절벽, 계절마다 변하는 산하와 농작물, 모든 것이 학습도구요 놀이터인 산골에서 아옹다옹 살다 보면 어느새 사계절을 다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마을에서는 1년을 마치고 퇴촌하는 아이들에게 졸업장을 대신하여 기능사 자격증을 수여한다. 장작 패기 3급, 쇠죽 쑤기 3급, 연탄재 버리기 2급, 기도찬양 1급…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귀하고 대단한 자격증들이다. 인생의 어려운 고비에서 스승이 되고 용기를 주는 은사恩賜가 될 것이다.
1년이건 잠시 동안이건 생활유학을 거쳐간 아이들이 모두 40여 명인데, 종종 부모와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 공동체 여름캠프나 행사에서도 자주 만나게 된다.
작은 것은 아름답고 인격적이다. 가난한 삶은 창조적 가치와 지혜를 발굴하는 밭이다. 사람은 자신이 본래 살아야 할 동산에서 살아야 내가 누군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참된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를 배울 수 있다.
이크, 기왓장이 또 떨어졌구나!
자연은 곡선의 세계이고 인공은 직선이다.
산, 나무, 계곡, 강, 바위, 초가집… 그 선은 모두 굽어 있다.
아파트, 빌딩, 책상, 핸드폰… 도시의 모든 것은 사각이다.
생명 있는 것은 곡선이고 죽은 것은 직선이다.
어쨌든 도시나 산촌이나 사람만은 곡선이다.
아직은 자연이다.
(본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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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박기호
청년시절 방황기를 거쳐 나환자와 행려자 돕는 일을 하다가, 서른을 넘겨서야 신학교에 입학했다.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신부로서 나를 필요로 하는 부르심에는 기꺼이 응답하자!” 그 약속에 순종하여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활동을 비롯해, 지금껏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1998년 소비문화시대 예수 제자의 삶을 모색하다 동료 사제들과 ‘예수살이 공동체’를 설립했다. ‘소유로부터의 자유, 가난한 이와 함께하는 기쁨, 세상의 평화를 위한 투신’이라는 예수살이의 정신으로 안티소비문화 운동을 주도했다. 온전한 예수살이를 실천하는 공동체 마을이야말로 시대적 구원의 징표로서 ‘노아의 방주’라는 생각으로 2004년 소백산 자락에 무소유와 농업노동의 ‘산 위의 마을’을 꾸렸다. 2006년 마을에 입촌하여 가족들과 함께 기도와 노동과 공생의 기쁨으로 살고 있다. ‘노동의 새벽’ 박노해 시인의 형이기도 하다. 저서에 사순절 묵상집 『십자가의 길』(1994), 루가복음 묵상집 『못다부른 님의 노래』(1997), 기고 모음집 『게는 옆으로 걷는 것이 정도다』(2005)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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