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담은 신발
어릴 때 아침에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 구두를 닦아놓고 용돈을 얻어내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아버지가 아침상에서 신문을 보고 계셔도 윗저고리를 입고 현관에 나오실 때까지 나는 구두 옆에 앉아 출근하실 아버지를 기다렸다.
닦아놓은 구두를 가지런히 놓으면서, 내 발을 가만히 넣어보기도 하면서. 나도 이 다음에 크면 이렇게 큰 신발을 신은 남자랑 결혼하는 걸까 하며 짜릿해하기도 했다. 형제가 많은 나는 이 중요한 수입원을 빼앗길세라 눈만 뜨면 현관으로 나가서 아침의 예식을 충실히 했다.
이제 어른이 되어 친정 나들이를 가서 아버지의 신발을 닦을 때면, 신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보다는 코끝이 찡해진다. 피곤해 보이는 구두를 만지면서, 그래도 아직 신발이 닳도록 건강히 열심히 재미있게 다니시는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남의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잠시 그 사람이 되어보는 것이다. 또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도 되고 그 애틋했던 옛날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내게는 맞지 않는 신발, 도저히 그 처지에 다시 나를 넣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도 된다.
이런 여러 가지 느낌들을 낡고 색 바랜 오래된 벽화 같은 분위기로 ‘신발’이란 상징과 함께 그려보았다. 그리움과 애잔함이 가득한 이미지들이고 아쉬움과 소망이 겹치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신발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신어보고 있는 여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달도 갈망을 더한다.
엄마 옷을 걸치고 큰 신을 신고 소꿉장난을 하던 아이가 자라서, 이젠 성숙한 몸을 강물 같은 세월로 휘감고 서 있다. 멀리 앞날을, 아니면 그 옛날을 바라보는 그녀는 아직도 맞지 않아 너무나 큰, 이제 버겁기까지 한 큰 신발을 신고 서 있다.
이 강물이 더 흐른 뒤엔 맞지 않는 신발 같은 어색함이나 애절함이 사라지고 편안한 세월이 남을까?
아! 그래도 무얼 동경하고 어떤 때를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하는 그 모든 게 다 싱싱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일 테니, 이 삶을 또다시 소중한 선물로 귀하게 여기며 두 손 가득히 받는다.
나의 50번째 생일
그때 산 페트로니오 성당 안은 내 마음만큼이나 어둡고 무거웠다. 이혼 후 웅크리고 앉아 있던 나에게 이탈리아에 사는 동생이 제안을 했다. 이제 그만하고 미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와서 좀 있어보라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몸을 겨우 일으켜 가방 하나를 싸 들고 동생이 조그만 화실까지 마련해놓은 볼로냐로 갔다. 아름다운 중세 도시 한가운데, 작은 다락방에 짐을 풀고는 그 도시를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들, 도시 가득한 훌륭한 조각들, 웅장한 건물들을 봐도, 아무리 걸어도 마음이 가벼워지질 않았다. 20년의 결혼 생활 후에 혼자가 된 것이 너무 불안하고 무서웠다.
산 페트로니오 성당은 볼로냐 중심에 있다. 아니, 볼로냐 자체가 이 성당을 중심으로 생긴 웅장하고 아름다운 도시다. 그 속엔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중세의 벽화들이 가득하다. 처음에 들어가면 컴컴하지만, 점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조용히 그리고 화려하게 드러나 보이는 벽화들에 매료되어 여러 날들을 그 그림들을 베끼면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두운 성당을 나와 눈부시게 환한 광장으로 나오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 무리의 비둘기 떼가 하늘로 솟으며 밝은 세상을 날아갔다. 매일 보던 광경인데도 그날따라, 아, 세상이 이렇게 찬란하구나, 저렇게 솟아오를 수가 있구나 하며 감탄을 했다. 그러고는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나왔는지 지금도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만, 다음엔 여기서 결혼식을 할 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그때 나의 지경으로는 “결혼하면”이란 말은 “내가 달나라에 간다면”이라는 말과 같았는데도.
이제 다시는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는 어리석은 세월은 살지 않을 거라고 맹세를 하며, 그런 사랑의 굴레 따위는 진정한 자유로 바꾸어서 그림에만 전념을 하기로 다짐하던 때였기에 느닷없이 떠오른 그 생각이 더욱 놀라웠다. 아직 혼이 덜 났구나 하고 광장 카페에 앉아 혼자 웃었다.
희미하던 카메라의 초점이 딱 맞춰지는 것같이, 다시 세상이 찬란해지는 아름다운 남자 토머스를 만났을 때 그 눈부시던 오후가 생각이 났다. 찾지도 않던 보물, 기다리지도 않았던 동반자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는 금방, 절대로 다시는 안 하겠다 결심했던 결혼이 하고 싶어졌으니 맹세라는 게 다 무엇인가.
내가 쉰 살이 되던 생일날, 볼로냐 산 페트로니오 성당 옆 작은 개신교회(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고로)에서 결혼을 했다. 미국과 한국에서 친한 친구들이 왔고 동생은 훌륭한 파티를 베풀어주었다. 반세기를 살아온 기념일인 50번째 생일에는 뭔가 다른, 진짜 멋진 잔치를 하리라 했었는데, 그 환했던 어느 날의 허황된 약속을 지키게 된,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날이었다.
토머스의 첫 생일파티
나는 한국전쟁 고아입니다. 전후의 폐허 속에 버려졌고 살아남기라는 게임에 열중하느라 슬픈 것도 모른 채 다른 거지 아이들과 함께 길거리를 헤맸습니다. 어느 날 한 선교사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보내졌고, 생일도 이름도 다 주어진 거기서 1년쯤 지내다가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맞은 나의 생일날, 영어를 모르던 나는 온 집 안에 풍선이 걸리고 음식이 차려지는 걸 보며 그날이 나를 위한 날인 걸 알았지요. 이웃 아이들이 손에 선물을 들고 도착했고 나는 선물 받은 장난감들을 안아 들고 너무도 기뻤고 또 슬퍼서 막 울었습니다.
고아원에서는 갖고 놀던 장난감을 다 돌려줘야 했으니까요. 나는 이렇게 신기하고 좋은 장난감들을 다 뺏길 것을 생각하니 너무 슬퍼서 방 한구석에 내가 받은 장난감들을 쌓아놓고 그 앞에서 팔을 벌려 아무도 뺏을 수 없도록 지켰습니다.
부모님은 뭐라 말씀하시면서 나를 잡아 끌어내려고 하셨지만 나는 마구 울면서 나의 보물들이 쌓여 있는 구석을 굳게 지켰습니다. 나랑은 말이 안 통했던지라, 곧 아이들은 자기네끼리 방 한복판에서 재미나게 놀기 시작했어요. 같이 놀고 싶었지만 나는 구석에서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아오면서, 내 보물 코너를 지키느라 막상 재미있는 잔치는 놓쳐버린 그날을 가끔 기억하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소유물을 간수하느라 삶에서 보람 있는 잔치들을 놓치느니 내 장난감을 갖고 나와서 같이 놀기로 결심했지요. 오늘 이 자리도 그런 잔치입니다.
우리가 의료사업 지원차 북한에 갔을 때 “당신은 왜 기부했는가”라는 어느 분의 질문에 대한 남편 토머스의 즉흥 답변이었다.
(에세이 3편 전문)
---------------------------------
작가 소개
김원숙
홍익대학교를 다니던 중 미국으로 갔다. 일리노이 주립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76년 일리노이 주립대 비주얼아트센터와 명동화랑에서 각각 첫 개인전을 가진 후 국내외에서 수십 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가했다. 1978년 ‘미국의 여성작가’에 선정되었으며, 1995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유엔후원자연맹WFUNA이 선정한 ‘올해의 후원 미술인’이 되었다. 일기처럼 숨김없는 고백체의 그림을 그려온 김원숙은 모든 그림이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말한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낸 소박하고 정감어린 그림은 한 개인의 내면풍경에 머물지 않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다가와 가슴을 울리며 따뜻한 위안을 준다. 그것은 시인 문정희가 말했듯 그가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천부의 예술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그림을 본다는 것에 앞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며, "작품이나 자기주장에 앞서 스스럼없이 걸어오는 그의 이야기는 아무런 부담도 없이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고 평했다.
--------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