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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 구젤리미안(이하 구젤리미안) 우선 두 분에게 똑같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어디에 사시죠? 마음 편히 머무는 곳이 따로 있습니까? 언제까지나 떠돌이 인생이라고 느끼지는 않는지요?
다니엘 바렌보임(이하 바렌보임) “연주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내 집 같다”라는 대답은 너무 남용되어서 진부하게 들릴 테지요. “남용”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저와 제 동료들이 흔히 쓰는 상투적인 문구이기 때문이죠. 주로 이런 대답은 질문에 정확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할 때, 또는 매우 환대받고 있음에도 그리 마음이 편치 않을 때 사용하곤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저는,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곳이라면―가급적이면 꽤 좋은 악기여야 하죠―또는 제가 이끄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나 슈타츠카펠레 베를린과 함께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편안함을 느낍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루살렘이 고향처럼 편하긴 한데, 이때 느끼는 편안함은 단지 내가 키워온 다소 비현실적이고 시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희 가족은 제가 열살 때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정착했습니다. 따로 얘기할만한 역사가 없는, 매우 현대적인 도시지요. 번잡하고 넘치는 기운 말고는 특별히 흥미로울 것이 없는 장소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굉장히 다양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의미하는 곳이죠.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가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1950년대 텔아비브 사람들은 자신의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신이라든가, 지성, 그리고 문화적 호기심 등 모든 것을 예루살렘에 의지했습니다. 이 모든 미덕이 일부 극단적인 예루살렘 사람들이 드러내는 관용의 결핍 때문에 점점 사라지는 듯 보여 안타깝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예루살렘이라는 이상 안에서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아주 극소수의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할 때 집에 있는 듯 편안함을 느낍니다. 에드워드 또한 저와 많은 것을 공유하는 소울 메이트라는 점을 꼭 말하고 싶군요. 그와 함께라면 늘 거리낄 것이 없죠.
저는 소유에 집착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닙니다. 가구라든가 과거 회상록 같은 것에도 무심하죠. 기념품조차 수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장소에서 마음이 편해집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지 않을까요. 음악도 변하는 것 중 하나이고 말입니다. 저는 유연한 사고와 함께일 때 마음이 놓이면서 최고로 행복해집니다. 반드시 최선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뭐든 바뀌고 진화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을 풀어놓을 수 없고 제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없어서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에드워드 사이드(이하 사이드) 저의 가장 오래된 기억 가운데 하나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곳에 대한 향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제가 고향을 너무 이상적으로만 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조국’에 대해 너무 감상적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작 실제로는 그리 개의치 않으면서 말이죠. 제 삶이야말로 여기저기 떠돌이 인생이랍니다. 그럼에도 뉴욕에서 가장 행복하달 수 있다면, 그건 뉴욕이 카멜레온 같은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도시 어디서든 머물 수 있지만 결코 도시의 일원은 될 수 없는, 그런 곳이 뉴욕이죠. 어떤 점에서는 바로 그런 면을 고맙게여기기도 합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유년기를 보낸 중동 지역에 들를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는 고향에 왔다는 느낌을 도저히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온갖 훼방꾼들이 득실거리죠. 1992년에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45년 만에 돌아간 그곳은 더 이상 제가 기억하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날의 일부를 보냈던 팔레스타인 지역이 지금은 이스라엘 영토가 된 것은 물론이고요. 저는 라말라 같은 도시가 있는 웨스트뱅크에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1년 전인가 그곳 팔레스타인 음악원에서 다니엘이 피아노 독주회를 가진 멋진도시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제 고향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낸 카이로 같은 곳이 더 고향처럼 느껴지죠. 카이로에는 언제 가도 한결같을 것 같은 영원성이 존재합니다. 환상적일 만큼 복잡하면서도 고도로 세련된 도시로, 그곳의 독특한 방언은 제게 깊은 호소력을 가지고 다가오지요.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귀에 들리는 것에 더 집착하는 경향은 다니엘이나 저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저도 다니엘처럼 물질적인 것에 그리 얽매이지 않습니다. 몇 가지 수집품만 제외하고 말이죠. 꽤 많은 만년필을 수집했는데, 이건 제 아버지의 직업과 관련이 있죠. 칸트의 추종자인 저는 컴퓨터로 글쓰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그외에는 파이프 담배와 옷가지 몇 벌을 모은 게 전부입니다. 제가 가진 물건들이 예술 작품이나 집, 자동차 수집 같은 감흥을 일으키지는 못할 겁니다. 차를 50대나 가지고 있는 사람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일입니다.
다니엘도 말했듯이―제 회고록 『아웃 오브 플레이스』(Out of Place)의 끝부분에도 비슷한 생각을 적어놓았고,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입니다만―정체성이란 고정된 장소나 변치 않는 물건이라기보다 일종의 흐름, 흘러가는 물줄기로 생각할 수 있죠. 저는 제 정체성에 관해서 분명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바렌보임 “흐른다”란 발상은 분명 당신 삶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태어나던 때, 그곳은 당시 영국 땅이었죠. 당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카이로 또한 당시에는 영국령이었고요. 그 후 그곳이 이집트 영토가 되자 미국으로 이주하셨지요. 당신의 관심사 중 상당 부분은 유럽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가르치는 것, 알고 있는 것 모두 말입니다. 문학, 철학, 역사뿐 아니라 음악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은 유럽에서 비롯되었죠.
우리처럼 직업이 직업 그 이상의 의미인 경우, 즉 단순히 업무시간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지리적 위치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베토벤이나 브루크너를 지휘할 때처럼, 당신도 분명 괴테를 읽을 때 재미있는 방식으로 독일인을 의식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참여했던 바이마르 워크숍의 가르침 중 하나였죠. 엄밀히 말해서, 다양한 정체성은 가능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추구해야 할 대상입니다. 다양한 문화에 속한다는 느낌은 우리를 풍요롭게해줄 수 있으니까요.
구젤리미안 바이마르 워크숍 이야기를 해볼까요? 1999년, 두 분은 당시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된 바이마르에서 함께 활동했습니다. 괴테 탄생 250주년에, 괴테와 매우 인연이 깊은 도시에서 두 분은 아랍과 이스라엘, 그리고 소수의 독일 출신 음악가들을 한자리에 불러들여 오케스트라를 결성했죠. 무엇을 얻고자 이런 시도를 했는지, 그리고 그 소감은 어떤지 여쭤보고 싶군요.
사이드 어떤 면에서 매우 대범한 시도였습니다. 과거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긴 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아랍과 이스라엘 출신의 음악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음악캠프를 열고 연주회도 가진 바 있지요. 하지만 바이마르 행사는 무엇보다 다니엘과 요요 마를 비롯해 최정상 수준의 음악가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차별됩니다. 이런 모임에 이 이상 더 훌륭한 음악가를 찾을 순 없었죠. 참가자 대부분은 열여덟에서 스물다섯 살 사이의 젊은이들이었지만, 열네다섯 살쯤 된 첼리스트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리아 출신의 쿠르드 족 소년이었죠.
이벤트를 준비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오디션도 필요했죠. 그리고 몇몇 아랍 국가에서는 학생들의 참여를 허락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시리아와 요르단에서 각각 한 그룹을 보냈고, 팔레스타인 출신 한 명을 포함해 이스라엘, 이집트, 레바논, 그 외의 한두 국가의 학생들이 참여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또 다른 방식의 화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줄기차게 언급했듯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협상은 난조를 보이고 있었죠. 그렇다고 평화협상을 살리는 것만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이슬람에 관한 열정으로 환상적인 시집을 집필한 괴테의 정신 아래 바이마르에 모인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괴테는 아랍 및 페르시아어로 편찬된 문헌을 통해 이슬람 문화를 처음 발견했습니다. 19세기 초 스페인 부대에서 활약하던 독일군이 귀환하면서 그에게 가져다준 코란 한 장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었죠. 괴테는 총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진도는 신통치 않았지만, 아랍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죠. 그 후 그는 페르시아어로 된 시에 눈을 떴고, 마침내 “다른 존재”에 대한 특별한 시집을 집필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서동시집』(West-östlicher Diwan)입니다. 이 시집 자체가 유럽 문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이마르 워크숍이라는 시도의 배경에는 또 하나의 이상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 이상을 방패삼아 우리는 바이마르가 처참한 죽음의 수용소였던 부헨발트와 상당히 인접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음악가들을 불러모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부헨발트 수용소가 바이마르 가까이에 세워진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습니다. 괴테며 쉴러, 바그너, 리스트, 바흐가 살았던, 독일 문화의 절정을 이룬 낭만적인 도시 근처에 말이죠. 그처럼 숭고한 장소 바로 옆에서 그토록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오케스트라 리허설은 매일 아침과 점심에 열렸고, 물론 다니엘이 진행했습니다. 실내악과 마스터클래스도 동시에 진행됐죠. 여기에 참여한 학생들은 모두 여기 오기 전까지는 서로 얼굴도 모르던 사이였습니다. 그런 학생들이 일주일에 며칠씩 한자리에 모여 밤마다 음악, 문화, 정치 등 온갖 주제로 토론을 벌였습니다. 모두 거리낄 것 없이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워낙 출신들이 다양했던 터라 공감과 반감, 양쪽 모두의 감정이 언제나 동시에 드러나더군요. 물론 직접적인 정치적 충돌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녁 토론에서 그것만큼은 불문율로 지켜졌죠.
특히 첫 토론 때는 모두가 심정적으로 가지고 있던 긴장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대화는 누군가 모두를 향해 “이 워크숍에서 다들 무엇을 느끼시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어린 학생이 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죠. “저는 차별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즉흥연주 그룹에 끼고 싶었지만 거부당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지요?” 레바논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설명해주더군요. “프로그램이 밤늦게, 보통 11시쯤 끝나고 나면 우리끼리 함께 모여 아랍 음악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는데,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저는 처음 학생에게 무슨 문제였는지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알바니아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에 살지만 본래는 알바니아 출신이자 또 유대인이지요. 그들은 ‘너는 아랍 음악을 연주할 자격이 없어. 아랍 음악은 오직 아랍 사람만이 연주할 수 있는 거야’라고 하더군요.” 참으로 심상치 않은 순간이었습니다. 누구는 아랍 음악을 연주하고 누구는 할 수 없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던져졌으니까요.
그렇게 하나의 문제가 제기되자 당연히 다음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무슨 권리로 베토벤을 연주하지? 독일인도 아니면서 말이야.” 그렇게 토론은 도통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청중 가운데는 군복무 중인 이스라엘 출신 첼리스트가 있었는데, 영어를 잘 못해서 다니엘이 히브리어로 말하라고 했어요.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에 음악을 연주하러 왔습니다. 음악 말고 여기서 계속해서 벌어지는 문화와 관련된 토론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도 몹시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집으로 돌아가면 언제 레바논으로 파견되어 여기 있는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게 될지 모를 일이니까요.” 다니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불편하다면, 이 프로젝트를 그만두면 어떻겠니? 네게 여기 있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그러나 그는 프로젝트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듯 초반에는 서로를 상당히 거북하게 여기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나 열흘쯤 지난 뒤 아랍 사람만이 아랍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바로 그 소년이 요요 마에게 첼로로 아랍 음계를 조율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더군요. 분명 그 아이는 중국 사람도 아랍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 둘 차츰차츰 뭉치더니, 나중에는 다 같이 모여서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연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참으로 경이로운 순간이었죠.
다니엘이 모래알처럼 따로 노는 아이들을 하나의 악단으로 묶어가는 모습은 지켜볼수록 놀라웠습니다. 서로 달가워하지 않는 건 이스라엘과 아랍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어떤 이스라엘 학생들은 또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독하게 싫어했고, 마찬가지로 같은 아랍 아이들끼리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었죠. 하지만 처음 한 주에서 열흘 내내 팽팽하기만 하던 긴장을 극복하고, 이 학생들이 마침내 진정한 오케스트라로 거듭나는 과정은 정말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과정에는 어떤 정치적인 함의도 없었습니다. 일련의 정체성들은 또 다른 정체성으로 대체되었지요. 애초에 그곳에는 이스라엘 사람, 러시아 사람, 시리아 사람, 레바논 사람, 팔레스타인 사람, 그리고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순식간에 한 지휘자 아래, 하나의 오케스트라 안에서, 하나의 작품을 연주하는 첼리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 중 오보에 주자가 A장조를 연주하는 부분에서 몇몇 이스라엘 단원들이 놀라는 표정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이집트 오보에 주자 쪽으로 아예 돌아앉아 그가 A장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것을 내내 지켜보았죠. 이 연주자의 잠재력도 다니엘이 이끌어낸 것이었습니다. 이 어린 학생들의 변화는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었죠.
바렌보임 놀라운 건, 우리가 “타인”에 대해 어쩌면 이다지도 무지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학생들은 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와 암만[요르단의 수도], 카이로[이집트의 수도]에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아랍 단원들은 이스라엘에 음악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는 몰랐던 것 같고요. 한 시리아 소년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이스라엘 사람은 그저 자신의 조국과 다른 아랍 국가에 좋지 못한 상황을 만들 원흉에 불과했죠.
바로 이 소년이 이스라엘 첼리스트와 함께 한 무대에 서서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음표를 연주하고 있었죠. 똑같은 다이내믹에 일사불란하게 활을 켜고, 똑같은 소리에 똑같은 표현을 담고자 애썼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다함께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였죠. 단지 양쪽 모두 관심과 열정을 가진 어떤 대상을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뿐이었으니까요. 하나의 음표를 함께 연주하면서, 그들은 이미 서로를 더 이상 예전처럼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남이 중요한 진짜 이유입니다.
오늘날의 정계, 특히 유럽의 경우―미국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얘기하고 싶지 않군요―지도자들이 아직도 세상이 자신들의 것인 양 행동하지만, 정작 그들이 지배하는 건 거의 없다고 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대기업과 돈입니다. 제게 정치가란 본질적으로 무능력하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스스로를 과시하며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려는 존재로 보일 뿐입니다. 분명히 돈으로는 많은 것을 살 수 있고, 아주 가끔은 잠깐이나마 약간의 호의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등을 풀고자 한다면, 어쨌든 당사자들이 서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거론하는 중동은 매우 좁은 지역입니다. 서로 부대낄 수밖에 없는 운명이죠. 국경문제와 관련해서 과연 이곳에 평화란 것이 정착할 수 있는지 진짜 시험해보기 위해서는 달러나 정치적 해결만이 대수가 아닙니다. 진정한 시험은 이런 접촉이 결국에 얼마나 생산적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문화적 사안을 가지고―문학이 포함될 수 있겠고,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음악은 의견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으니 더욱 좋겠군요―이런 접촉을 활성화한다면, 사람들이 서로를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본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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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에드워드 W. 사이드 Edward Wadi Said
1935년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이집트 카이로로 이주했다. 1950년대 말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비교문학 교수와 하버드 대학교 비교문학 객원교수로 지내며 이론가, 문학비평가로 활동했다. 서구인들이 말하는 동양의 이미지가 서구의 편견과 왜곡에서 비롯된 허상임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오리엔탈리즘』을 1978년 출간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밖에 『문화와 제국주의』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문제』『권력과 지성인』『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등 여러 저술을 남겼다.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99년 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 이스라엘과 아랍의 젊은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창설했다. 1994년부터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중 2003년 9월 24일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작으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남겼다.
다니엘 바렌보임 Daniel Barenboim
1942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0년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식적으로 데뷔 연주회를 가지며 신동 아티스트로 유명세를 떨쳤다. 1952년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이고르 마르케비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나디아 불랑제 등을 사사했다. 1965년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본격적인 지휘자로 데뷔했으며, 1981년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파르지팔> 등을 지휘하며 대표적인 바그너 지휘자로 급부상했다. 1991년부터 15년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또한 1992년부터 도이치 슈타츠오퍼 베를린의 음악감독 겸 이 극장의 상주 악단인 슈타츠카펠레 베를린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창단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현재 UN 평화대사로 활동 중이다.
아라 구젤리미안 Ara Guzelimian
카네기홀의 수석감독과 예술고문으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아스펜 음악축제 및 학교의 예술 이사장을 역임했다. 비평가, 작가, 라디오 프로듀서로 활동 중이며, 위대한 음악가들과의 대담 시리즈로 유명한 카네기홀 토크의 운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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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노승림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연예술학 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8년 동안 공연예술전문지 월간 <객석>에서 음악 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성남문화재단과 대원문화재단에서 일했다. 여러 신문과 공연전문지에 공연과 음악 관련 칼럼을 기고했으며, 현재 영국 워릭 대학교 유럽문화정책 및 경영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옮긴 책으로 『페기 구겐하임』『음악과 권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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