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사랑할까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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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주관대로 본다.
—아나이스 닌(프랑스 출신 작가)
잠시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자. 우아한 저녁식사 파티에 초대되어 갔다.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에 다른 손님들과 함께 앉는다. 방안은 따뜻하고, 크리스털 와인 잔 너머로 촛불이 깜빡거리는 가운데 허물없는 대화가 오간다. 부엌에서는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음식 냄새가 풍겨 온다. 하루 종일 굶었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마치 몇 시간이나 기다린 것 같다. 드디어, 파티를 연 친구가 부엌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스튜 냄비를 들고 나온다. 고기와 양념과 채소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한 국자 듬뿍 덜어 부드러운 고기를 몇 입 떠먹고는 친구에게 조리법을 묻는다.
“그래, 가르쳐줄게.” 그녀가 대답한다. “우선 골든리트리버(금빛 털을 가진 아름답고 순한 영국산 사냥개—옮긴이) 고기 2㎏을 갖은 양념에 재운 다음…” 뭐라고? 골든리트리버?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마도 얼어붙듯이 씹는 동작을 멈출 것이다. 내 입 속에 있는 게 개고기라고?
이런 경우 어떡할 것인가? 그냥 먹나? 속이 뒤틀려서 화장실로 뛰어가나? 아니면 고기는 골라내고 남은 채소를 먹으면 될까? 평균적인 미국인이라면 개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자동적으로 즐거움이 혐오감으로 바뀔 터이다(개고기를 먹는 일에 거부감보다는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만 미국에서 이런 사람은 소수다. 이 책에서는 일반적인 미국인의 경험을 다룬다). 스튜 속에 든 채소조차도 고기에 오염된 것 같아서 역겨워질 법하다.
그런데 당신의 친구가 웃으면서 농담이었다고 말한다 하자. 사실은 골든리트리버 고기가 아니라 쇠고기였다고. 이제는 그 음식에 대해 어떤 기분이 들까? 식욕이 완전히 회복될까? 처음 맛보았을 때와 똑같이 열심히 먹게 될까? 모르긴 해도, 설사 접시에 담긴 음식이 조금 전 맛있게 먹던 바로 그 음식일지라도 찜찜한 기분은 남아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 찜찜함은 다음번에 쇠고기 스튜를 마주했을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왜 특정한 음식들은 방금 본 것과 같은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가? 음식은 하나인데 왜 어떤 이름을 붙이면 아주 맛있다고 여기는 반면 다른 이름을 대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걸까? 스튜의 주재료가 고기라는 사실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내 한 가지, 즉 동물의 살이었다. 단지 어느 시점에 다른 동물의 고기로 바뀌었을—혹은 바뀐 것으로 잠시 생각됐을—뿐이다. 우리가 쇠고기와 개고기에 대해 이처럼 완연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인식(perception)’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종류의 고기에 대해 상이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그것들 간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달리 인식하기 때문이다.
| 개를 먹는 게 왜 문제인가 |
인식에서의 그 같은 변환은 2차로 길을 주행하다가 옆 차로로 넘어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황색 선을 넘어 역방향 차로에 진입했을 때 우리의 경험과 느낌은 급격하게 바뀌지 않는가. 인식의 변환이 위의 사례에서처럼 강력한 반응을 낳을 수 있는 까닭은 우리의 인식이 현실을 상당 부분 결정하기 때문이다.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상황에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가 결정된다. 그리고 생각과 느낌은 곧잘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개고기를 쇠고기와는 매우 다르게 인식한다. 따라서 개고기가 불러일으키는 정신적, 정서적 반응과 행동 반응 또한 크게 다르다. (특정 동물의 고기를 거부하는 관습은 세계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육류의 섭취와 관련된 금기는 다른 어떤 음식에 관한 금기보다도 보편적이다. 나아가, 육식에 대한 금기를 깨는 일은 매우 강력한 정서적 반응—일반적으로 혐오감—과 혹독한 제재를 불러온다. 세계 주요 종교들이 규정해 놓은 식사 관련 금기들을 생각해 보라. 금지가 일시적이든(기독교도는 사순절에 고기를 먹지 않는다) 영구적이든(적잖은 불교도는 채식을 고집한다), 금기의 대상은 거의 언제나 고기다.)
우리가 쇠고기와 개고기를 그토록 다르게 보는 이유의 하나는 소와 개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판이하다는 데 있다. 우리가 가장 자주, 어쩌면 유일하게, 소라는 존재와 대면하는 때는 쇠고기를 먹거나 쇠가죽으로 만든 옷이나 신을 걸칠 때일 것이다. 이에 비해 상당수 미국인들에게 개와의 관계는 여러 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우선 개를 이름으로 부른다. 집을 나설 때 다녀오마 인사하고, 돌아오면 쓰다듬어 준다. 데리고 자기도 한다. 개들과 놀고, 선물을 사주며, 지갑에 개 사진을 넣고 다닌다. 개가 아프면 의사에게 데려가고, 치료에 수천 달러를 쓰는 수도 있다. 죽으면 묻어 준다. 개들은 우리를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한다. 개는 도우미이고 친구이자 가족이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우리가 개를 사랑하면서 소를 먹는 것은 개와 소가 근본적으로 달라서가 아니라—소들도 개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있으며, 의식이 있다—단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소와 개의 고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달라진다.
고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해당 동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만 달라지는 게 아니다. 같은 고기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인식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쇠고기에 대한 힌두교도의 반응은 개고기에 대한 미국 기독교도들의 반응과 마찬가지일 법하다. 인식에서의 이런 차이점들은 우리의 ‘스키마(schema, 圖式)’ 때문이다. 스키마란 우리의 신념과 생각, 인식, 경험을 구조화하는—그리고 역으로 그것들에 의해 형성되는—심리적 틀을 이른다. 스키마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자동적으로 정리하고 해석한다. 예컨대 ‘간호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마도 흰 가운을 입고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을 떠올릴 것이다. 간호사 중에는 남자도 있고 흰 가운을 안 입는 사람도 있으며 병원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 적잖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환경에서 여러 유형의 간호사들을 자주 접하지 않는 한 우리의 스키마는 이런 일반화된 이미지를 고수한다. 일반화는 스키마가 자기 고유의 기능을 해낸 결과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드는 엄청나게 다양한 자극들을 검토하고 해석한 뒤 일반적 범주(category)들에 나누어 넣는 일 말이다. 스키마는 요컨대 정신적 분류체계다.
우리는 동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관해 스키마를 갖고 있다. 가령 동물은 포식동물과 그 먹이가 되는 동물, 유해동물, 애완동물, 또는 식용동물 따위로 분류된다. 우리가 특정 동물을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우리와 그것의(내가 인간이 아닌 동물을 ‘그것’이라고 부르는 등 흔히 ‘종차별주의적(speciesist)’이라고 규정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일부 독자에겐 언짢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용어를 굳이 피하지 않은 것은 논문 투가 아닌 일상적 구어 표현을 통해 읽는 이를 편하게 하고, 책 내용 자체에 집중토록 하기 위해서다) 관계—사냥할지, 도망칠지, 박멸할지, 사랑할지, 아니면 먹을지—가 결정된다. 이 범주들 사이에 중복이 있을 수도 있다(포식동물의 먹이인 동시에 우리의 식용동물일 수 있다). 그러나 고기와 관련해 생각하는 한 대부분의 동물은 식용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하는 스키마를 갖고 있다. (스키마는 위계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 보다 복합적 혹은 일반적인 스키마 아래에 하위 스키마sub-schema가 설정될 수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동물’이라는 일반적 스키마 아래에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라는 하위 스키마가 있다. 이 하위 스키마는 더 하위의 스키마로 나뉠 수 있으니, 먹을 수 있는 동물은 야생의 것과 가축 또는 농장에서 사육된 동물로 추가 분류가 가능하다)
먹을 수 없다고 분류한 동물의 고기를 대할 때 우리에겐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그 동물의 살아 있는 모습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고, 그걸 먹는다는 생각에 속이 메스꺼워지기 쉽다. 인식 과정은 다음과 같다.
골든리트리버 고기(자극)→먹을 수 없는 동물(믿음/인식)→살아 있는 개의 이미지(생각)→ 혐오감(감정)→먹기를 거부하거나 주저함(행동)
당신이 먹고 있는 게 골든리트리버 고기라는 말을 들었던 가상의 저녁식사 파티로 돌아가 보자.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요리의 냄새와 맛 자체는 그 말을 듣기 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데도, 마음속에선 골든리트리버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을 터이다. 던져진 공을 쫓아 마당을 이리저리 뛰거나, 난로 옆에 편안히 앉아 있거나, 조깅하는 주인을 따라 달리는 개의 모습이. 그런 이미지와 함께 아마도 감정이입이 되어 도살된 개에 대한 연민과 그 불쌍한 짐승을 먹는다는 생각에 따른 역겨움 따위가 엄습해 올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쇠고기를 마주하고 앉았을 때 평균적인 사람은 살아 있는 소를 상상하지 않는다. 단지 ‘음식’으로만 생각하며, 그 맛과 향기와 질감에 집중한다. 쇠고기를 대할 때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인식 과정 중 고기와 살아 있는 동물을 머릿속에서 연관시키는 부분은 생략하는 게 보통이다. 쇠고기가 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먹을 때는 그 사실을 거의 생각지 않는다. 살아 있는 소를 떠올린다면 마음이 불편해질 것이며 때로는 차마 먹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내가 직업적으로나 사적으로 얘기를 나눈 수천 명의 사람이 인정했다. 차려진 고기의 모양이 해당 동물의 본디 모습을 연상시키면 피하는 사람이 많고, 따라서 머리나 다른 신체 부위가 온전히 포함되도록 조리해서 내놓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다. 하나의 예로, 덴마크에서 실시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어떤 고기가 해당 동물이 살았을 때의 모습을 닮았을 경우엔 먹기를 불편해해서 덩어리로 자른 고기보다 잘게 간 고기를 선호한다고 했다. 그러나 설사 쇠고기를 놓고 소를 의식하게 된다고 해도 쇠고기를 먹는 일은 골든리트리버를 먹는 것보다 신경에 덜 거슬린다. 개를 먹는 것은 미국의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 동물에 대한 우리의 느낌과 그들을 대하는 방식은 그게 어떤 동물인가보다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떠한가에 더 달려 있다. 우리는 소를 먹는 것은 괜찮지만 개를 먹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소는 먹을 수 있는 동물로, 개는 먹을 수 없는 동물로 인식하게 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이 과정은 순환적이기도 하다. 믿음이 궁극적으로 행동을 이끌어낼 뿐 아니라 행동이 믿음을 강화한다. 개를 먹지 않고 소를 먹으면 먹을수록 개는 먹을 수 없고 소는 먹을 수 있는 거라는 믿음이 굳어진다.
인간에게는 달콤한 맛(설탕은 유용한 칼로리원 노릇을 해 왔다)을 좋아하고 쓴맛이나 신맛(이런 맛은 흔히 독성분을 시사한다)을 기피하는 타고난 성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맛에 대한 우리 취향 대부분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미각의 폭넓고 숱한 레퍼토리 중에서 ‘좋아해야 한다’고 배운 음식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식품, 특히 동물성 식품은 매우 상징적이며, 이 상징성은 전통에 의해 더욱 강화되면서 우리의 식품 기호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예컨대, 캐비어(주로 철갑상어, 때로는 연어 등의 알을 염장 가공한 고급 식품—옮긴이)를 즐기는 게 세련되고 품위 있는 일로 간주된다는 걸 알 만한 나이가 되기 전에는 캐비어를 맛있게 먹는 사람이 거의 없다. 중국에서는 동물의 성기가 성기능을 돕는다고 믿기 때문에 그걸 먹는다.
미각이란 게 대체로 문화를 통해 습득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거기서 벗어난 것은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여긴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소의 젖통에서 짜낸 젖을 어떻게 마실 수 있느냐고 역겨워한다. 베이컨, 햄, 쇠고기나 닭고기를 먹는 일을 상상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달걀을 먹는 것이 태아를 먹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기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캄보디아 사람들처럼 대형 거미 타란툴라 튀김을 (털과 이빨 등 모든 부분이 온전한 채로) 먹는다고 생각해 보라. 무슨 느낌이 드는가?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즐기는 시큼한 숫양 고환절임은?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먹는 오리의 배(胚)—알이 수정된 지 좀 되어서 깃털과 뼈, 초기 단계의 날개 등 새의 형태가 부분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또 어떤가? 동물성 식품에 관한 한, 모든 미각은 후천적으로 습득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사라진 연결고리 |
개를 포함하여 먹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동물을 먹는 데 대해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은 이처럼 야릇하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소를 비롯해 이른바 먹을 수 있는 동물들을 먹는 일에 우리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먹을 수 있는 종에 관한 우리의 인식 과정에는 설명되지 않은 단절, 사라진 연결고리가 있다. 고기와 그것을 제공한 동물을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얘기다. 수만 종의 동물 가운데 우리가 혐오감 없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째서 극소수뿐인지 궁금해한 적이 없는가?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의 선별에서 놀라운 점은 혐오감의 존재가 아니라 그 부재(不在)다. 먹을 수 있다고 간주하는 극소수의 동물을 먹는 일에 우리는 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걸까?
증거들이 강력하게 시사하는 바는 혐오감의 부재가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학습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키마는 타고나지 않고 구성된다. 우리의 스키마들은 고도로 구조화된 신념체계에 바탕을 두고 진화해 왔다. 이 체계는 우리가 어떤 동물을 먹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고, 그걸 먹을 때 정서적, 심리적으로 불편하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우리에게 ‘느끼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 결과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잃어버리는 느낌이 혐오감이다. 한데 혐오감의 근저에는 우리의 자아의식에 훨씬 더 긴요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공감(共感, empathy)이다(공감이란 다른 개체의 감정이나 경험, 생각을 그의 입장이나 관점에서 이해하고 느끼는 것, 혹은 그런 능력을 말한다—옮긴이).
| 공감(共感)에서무감(無感)으로 |
도대체 이 신념체계는 왜 우리의 공감을 차단하려고 그처럼 애쓰는 걸까. 심리적 곡예까지 벌여 가면서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동물을 아끼고 그들이 고통 받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먹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치 기준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불일치는 어느 정도의 도덕적 불편함을 불러온다.
이 불편을 완화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행동에 맞게 가치 기준을 바꾸는 것, 가치 기준에 맞게 행동을 바꾸는 것, 아니면 행동에 대한 ‘인식’을 바꿈으로써 그것이 가치 기준에 맞는 ‘듯해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고기에 대한 우리의 스키마는 바로 이 세 번째의 선택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동물들의 불필요한 고통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계속 먹는 한, 스키마는 동물과 그 고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해 그것을 편안히 섭취하도록 해줄 것이다. 고기에 대한 우리의 스키마를 형성하는 신념체계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수단들을 제공한다.
가장 중요한 도구는 ‘정신적 마비(psychic numbing)’다. 이것은 어떤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정신적·감정적으로 단절시키는 심리적 과정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정신적 마비 자체는 악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삶에서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현상으로,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버티어 나가고 폭력의 먹이가 되었을 때 느끼는 고통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예를 들어 보자.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 때, 당신의 자동차가 수천 대의 쇳덩어리 차량들 사이에서 맹렬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의식한다면 몹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또한 만약 재수가 없어서 충돌사고라도 당했을 때면 아마도 곧장 쇼크 상태로 들어가 시간이 조금 지나야 현실을, 즉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충격이나 폭력에의 ‘대처’를 돕는 정신적 마비는 적응적이다. 즉 유익하다. 그러나 마비가 폭력을 ‘허용’하는 데 쓰일 때는 부적응적, 즉 파괴적이 된다. 비록 그 폭력이 멀리 떨어진 공장에서 일어나는, 동물이 고기로 바뀌는 일일지라도.
정신적 마비에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심적 메커니즘이 복합적으로 동원된다. 이들 메커니즘은 광범하고 막강하며 눈에 안 보일 뿐 아니라, 개인 심리를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작동한다. 이것들이 우리의 인식을 왜곡하고, 감정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으며, 공감을 무감각으로 바꿔 버린다. 바로 이것, 느끼지 않기를 배우는 과정이 이 책의 핵심 주제다.
정신적 마비의 메커니즘은 다음의 것들을 포함한다: 부정(denial), 회피(avoidance), 일상화(routinization), 정당화(justification), 대상화(objectification), 몰개성화(deindividualiza- tion), 이분화(dichotomization), 합리화(rationalization), 해리(解離, dissociation) 등. 뒤의 장들에서 우리는 정신적 마비의 이 같은 측면들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동물을 고기로, 고기를 음식으로 바꾸는 시스템을 해체해 보려고 한다. 그러는 가운데 이 시스템이 무슨 특성을 지녔는지,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지속적인 지지를 확보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문화와 시대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동물을 죽이고 소비하기 위해 정신적 마비를 이용했는가 하는 점이다. 가령 부족사회의 사람들도 사냥으로 먹을거리를 확보할 때 스스로를 마비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산업혁명 이전, 자신이 먹을 고기를 직접 조달했던 미국인들도 그 동물들로부터 정서적인 거리를 두어야 했을까?
모든 문화,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현대 산업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고기가 생존에 필수적이 아닌 우리와 똑같이 정신적 마비를 활용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터이다. 고기를 먹는 데 대한 반응 양상은 대체로 상황적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이 동물을 먹는다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리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서도 달라지며, 그 가치관은 광범위한 사회·문화적 구조에 의해 형성된다. 생존을 위해 고기가 필요했던 사회에서는 자신의 선택을 윤리적으로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들의 가치관은 동물을 먹는 일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니 육식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물들을 도살하는 방식 또한 우리의 심리적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 죽이는 일 자체보다 그 방식의 잔인성이 훨씬 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고기를 먹었던 경우에도, 또 동물들을 오늘날 도축장에서 자행되는 불필요한 폭력 없이 죽였던 경우에도 사람들은 항상 어떤 종류의 동물은 먹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먹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 도살과 소비의 의미를 완화하려고 꾸준히 노력해 왔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양심을 위무하기 위한 의례와 제사, 신념체계의 예는 수없이 많다. 동물의 생명을 거둔 다음 도살자나 고기를 먹는 사람이 정화의식을 치르기도 하며, 동물이 인간의 소비를 위해 ‘희생됐다’는 관점을 취하기도 하는데, 후자는 육식하는 행동에 영적 의미를 불어넣는 동시에 ‘희생’으로 먹이가 되는 쪽에도 선택의 여지가 있는 듯이 암시하는 시각이다. 게다가 기원전 600년께 고대에도 윤리적 이유에서 육류를 먹지 않은 개인들이 있었는바, 이는 육식을 둘러싼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긴장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비록 정도와 형태에는 차이가 있지만 정신적 마비는 문화와 역사를 가로지르며 나름의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시스템의 주된 방어 수단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비가시성(非可視性, invisibility)은 회피와 부정이라는 방어기제를 반영하는 것으로, 정신적 마비의 다른 모든 메커니즘이 그 위에 서는 토대다. 예컨대 우리가 쇠고기를 먹으면서 소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바로 비가시성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은폐하는 것이다. 비가시성은 또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하여 먹을거리를 얻는 불쾌한 과정을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격리한다. 그렇다면 육류를 해체하기 위한 첫걸음은 이 시스템의 비가시성을 해체하여 시작부터 숨겨져 온 이 시스템이 무슨 원리 아래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육류를 해체’한다는 말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개념을 원용한 것으로, 육류와 육식에 관한 일반적인 논리와 통념들을 낱낱이 분석함으로써 거기에 내재한 모순들을 드러낸다는 뜻이다—옮긴이).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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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멜라니 조이 Melanie Joy
사회심리학자. 미국 보스턴의 매사추세츠대학 교수로 심리학과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들 및 동물, 환경과 맺는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학술적 연구와 그 관계를 개선하려는 사회활동을 병행하면서 식육 생산과 소비에 내재한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데 앞장서 왔다. 심리학과 동물의 권리, 사회정의 등에 관해 많은 글을 발표했으며, 다른 저서로 동물보호운동가들의 핸드북인 『동물을 위한 전략적 행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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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노순옥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한 후 <중앙일보>, <뉴스위크> 기자를 지냈다. 번역서로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두 평 빵집에서 결정된 한반도 운명』『쌍둥이 잘 기르기』『결혼하지 않는 즐거움』『베스트셀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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