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찌개 국물에 반쯤 잠긴 두부
“여기 언제 이사 왔어요?”
세희가 양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며 물었다. 기타 소리가 지글거렸다. 카세트테이프는 하나뿐이어서 늘 세풀투라의 노래를 듣는다고 했다. 엎드려 손가락으로 침대를 두들기며 세풀투라의 노래를 듣는 세희를 바라보다가 등에도 표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미래를 생각하게 만드는 등이랄까. 먼 미래는 아니고 한 십 년 후 정도. 그땐 우리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같은, 여자와 나란히 누워 있을 때면 곧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상적인 질문들의 목록. 그 다음에는 텐 이어즈 애프터의 노래가 떠올랐다.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어요>.
“한 달도 안 지났어. 아무리 정리해도 어수선해. 아는 사람 집에 놀러 온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기저기 제멋대로 맥주캔이며 CD를 던져놓은, 그 아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건 분명했다. 잠에서 깨어나 옆에 여자가 누워 있는 걸 보게 된 남자라면 다들 그렇겠지만, 그날 나는 내가 좀 낯설었다. 나는 바지를 찾아 입고 냉장고까지 걸어갔다. 문을 열어 물을 꺼내기도 전에 “나도요”라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 몸을 닮아 마른 목소리였다.
“생각해보면 그건 자기 집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잖아요. 여기, 그럭저럭 살 만한 집만 보면 꼭 우리 집 같다며 호들갑 떠는 사람도 있다구요.”
세희는 내가 건네는 컵을 받았다. 길게 두 번에 걸쳐 물을 들이켜더니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감쌌다. 물의 냉기 때문에 몸이 움츠러든 모양이었다.
“우리 집? 듣기 좋은 말이네.”
“뭐가요?”
“우리라는 말. 복수형이잖아. 적어도 둘 이상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지. 혼자 살면 그렇게 말할 순 없는 거겠지.”
“집이라는 게 원래 여럿이 북적대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여기가 남의 집 같았나?”
나는 방 안을 둘러봤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여자애가 내 침대에 누워 있기 때문에 그런 낯선 기분이 드는 게 분명했다. 나는 리모컨으로 라디오를 켰다. 혼자 있을 때, 라디오를 틀어놓는 건 습관이었다. 라디오는 대꾸하지 않아도 혼자 잘도 떠들어대니까. 정시가 가까워졌는지 라디오에서는 시내 교통상황을 안내하고 있었다. 여러 길들의 이름이 나왔다. 노들길, 강변북로, 동부간선도로, 군자교, 달래내고개 등등. 가본 길도 나왔고 이름만 아는 길도 나왔고, 가본 적도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길도 나왔다. 교통상황을 전해 듣고 있노라면 언급된 모든 길마다 자동차들이 달릴 뿐만 아니라 어떨 때는 주차장에 서 있는 자동차들처럼 그 길들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리포터의 목소리에서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의지를 전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마저도 포함하는 생명의 기운 같은 것. 그런 어마어마한 생기에 비하면 나란 인간의 외로움이란 참 하찮은 것이었다. 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에도 어떤 길은 소통이 원활할 것이고, 어떤 길은 자동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서 있을 것이다. 한 사람쯤 사라졌다고 해서 이 세계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나는 외롭다기보다는 고독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재현 오빠에게는 얘기하지 마세요.”
침대에 누워 나를 올려다보면서 세희가 말했다. 그건 혼자 라디오를 듣는 일보다 훨씬 더 나를 고독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무슨 얘기?”
“그냥… 이 집에서 내가 잤다는 얘기.”
고독이 먼저였는지, 비로소 그녀가 여자처럼 느껴졌다는 생각이 먼저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수면활동 같은 사생활에 대해서는 떠들고 싶지 않아.”
“수면활동?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얘기인데?”
세희는 몸을 일으켜 앉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쨌든. 내 말은, 이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뜻이에요.”
“나도 알아. 무의미한 취침이었어. 됐니?”
그러다가 나는 세희의 입술에 키스했다. 세희는 몸을 움찔거렸지만, 내 입술을 피하진 않았다. ‘이렇게 좋으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DJ와 게스트가 오랫동안 떠들어댔다. 입을 떼고 세희는 내게 지난밤에 꽤 귀여웠다고 말했다. 나는 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세희는 아르바이트 가기 전에 한 시간만 잘 테니 꼭 깨워달라고 말했다.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세희는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다. 어떻게 보면 젊은 여자였지만, 또 어떻게는 늙은 여자처럼 보였다. 눈동자가 REM 상태를 보였다. 두 눈을 감은 채로 세희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 손에 내 얼굴이 부딪혔다.
식료품을 사러 간 아파트 상가 지하 슈퍼마켓에서 나는 세희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봤다. 스물두 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중학생처럼 어딘지 미성숙한 차림새. 대를 이은 가난의 흔적이 아니라면, 불우한 환경의 그림자랄 수 있는 무표정. 이따금 만들어낸 것이라는 게 너무도 분명한 웃음. 그 모든 것들을 일거에 뒤집고 싶은 욕망이랄 수 있는 대담한 행동. 하지만 어디까지나 순수하기만 한 얼굴의 점들, 몇 개의 점들. 그리고 너무나 사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등과 가까이에서 들여다봐야만 보이는 노파의 표정. 내가 그녀를 제대로 본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그런 걸로는 세희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추측할 수 없다는 건 분명했다.
나는 다시 시작했다. 스물두 살. 학비 문제로 대학교는 중퇴한 상태. 카트를 밀고 가면서 일단 야채들을 담았다. 양상추, 당근, 피망, 감자, 양파, 브로콜리. 고향이 서울인데도 집을 나와서 친구 집에서 지내며 밤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생선 코너를 지날 때는 꽁치와 오징어를 집었다. 결정적으로 만취했을 때, 취중진담처럼 자신이 남자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 거짓말에 능하다는 상당히 강력한 증거였다. 그런 복잡한 추리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먹을 음식은 결정됐다.
요리는 네시쯤 끝났다. 몸을 흔들어 깨우자, 세희는 기지개를 켰다. 그녀는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던 냄비를 열어보더니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어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된장찌개 국물에 반쯤 잠긴 두부인데.”
그렇군. 그런 음식을 좋아하는군. 된장찌개 국물에 반쯤 잠긴 두부라. 문득 내가 양념치킨을 배달시켰어도 그렇게 좋아라 박수쳤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거짓말에 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밥을 먹는 동안, 그녀는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먼저, 편의점에서 함께 일하는 남자는 홍대 앞 클럽신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밴드의 베이시스트인데 성적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이면서 여자 보컬리스트와 동거중이라고. 그다음, 편의점 주인인 삼십대 남자는 주변에 주유소도 갖고 있는 알부자로, 명동의 큰손인 엄마와 통화할 때는 아기 목소리를 낸다고. 뭐, 그런 식으로 주로 다른 사람의 숨겨진 비밀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비밀이란 것들이 으레 그렇듯 그 비밀들 역시 듣고 나니 시시해졌다. 그것들보다는 아무래도 거짓말에 능한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비밀이 나는 훨씬 더 궁금했지만,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대신에 나는 소리들을 들었다. 그날의 오후에는 그녀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창밖에서 초등학생 남자애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소리, 과일의 종류와 가격을 반복적으로 떠들어대는 확성기 소리, 귀를 기울여야만 간신히 들을 수 있는 하오의 새소리 등도 있었다.
“그러니까, 뭐죠? 혼자서 사는 이 넓은 집은? 별다른 직업도 없는 것 같은데. 혹시 큰손의 둘째아들?”
세희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굳이 그 둘만 놓고 따지자면 난 큰손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성적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에 가까워.”
“거짓말. 다들 비밀 아니면 거짓말뿐이야.”
“원래는 방송국에서 일했어.”
“천재 아역배우였는데, 사춘기를 지나면서 평범해졌다, 뭐 그런 스토리인가요?”
“말하자면, 일종의, 그런 식이랄까. 누구의 인생에나 그런 일들은 일어나니까. 천재였다가 사춘기를 지나면서 평범해지는 일 말이지.”
그러자 세희가 노래를 한 소절 불렀다. 내가 어렸을 때 삶은 너무나 놀라웠지, 라고. 그다음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기적이었지, 아, 정말 아름다웠고 신기했지, 나무 위의 새들은 모두 행복하게, 즐겁게, 장난치듯이 노래하면서 나를 바라봤지.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건 된장찌개 국물에 반쯤 잠긴 두부만큼이나 그녀가 좋아하던 노래였다. 제목은 <논리적인 노래>.
“나도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피디였어. 종교방송국 라디오 피디.”
“왜 그만뒀어요?”
“계속 다니려면 세례를 받으라고 해서…”
“불교방송국이 아닌 게 다행이었네요. 자칫했으면 머리카락을 죄다…”
“…라고 말할 수는 없고, 어떤 사람이랑 싸우다가 지쳐서 그만뒀어.”
“원래 다른 사람이랑 잘 싸워요?”
“잘 안 싸우는데, 싸웠다 하면 잘 져.”
“믿을 만한 남자는 아니구나. 그럼 이 집은?”
“이건 아버지의 상속물이랄까.”
“이야, 아버지의 상속물이라니. 아직 일 년이 반이나 남았지만, 이건 분명히 올해의 말이다. 세상에 그런 말이 있다는 것도 나는 몰랐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상속물을 받을 수 있는 거죠?”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네 아버지가 잘했어야지.”
“역시… 내가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밥을 먹고 커피까지 마신 뒤, 세희는 설거지를 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극구 말리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베란다의 책상으로 가서 이미 납부한 고지서의 영수증을 정리했다. 한참 앉아 있는데 등 뒤에서 세희가 말했다.
“어, 이건 뭐예요?”
돌아보니 세희가 화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그 장면이 참 좋다. 그렇게 작고 푸른 나무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은 세희의 옆모습.
“벤자민.”
“그게 원래 이 나무 이름이에요, 아니면 지은 이름이에요?”
“원래 나무 이름이 벤자민이래. 그제 샀어.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져.”
“근데 되게 쬐그맣네. 이름을 지어주는 게 좋겠어요. 분명히 그래야 잘 클 거야. 아까 보니까 그런 제목의 책도 있던데. 『식물의 사생활』. 이름이 있으면 사생활을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을까요?”
“잠깐만. 좋은 생각이 날 것도 같은데…”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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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연수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굳빠이, 이상』으로 2001년 동서문학상을,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2005년 대산문학상을, 단편소설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2007년 황순원문학상을, 단편소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2009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장편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밤은 노래한다』, 소설집 『스무 살』『세계의 끝 여자친구』,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여행할 권리』『대책없이 해피엔딩』(공저)『우리가 보낸 순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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