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마키아벨리(1469~1527)는 500여 년 전에 죽었지만,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 정치사에서 교활함, 표리부동, 불신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셰익스피어가 ‘잔혹한 마키아벨리’라고 불렀듯이, 그는 모든 교파의 도덕론자, 보수주의자, 혁명가에게 똑같이 증오의 대상이 돼왔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혁명의 ‘민주적 전제(democratic tyranny)’가 기초로 하는 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적 정책의 가증스러운 격언들”이라고 단언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그에 못지않은 격렬한 태도로 마키아벨리주의(Machiavellianism)의 원칙을 비난했는데, 그들은 ‘마키아벨리적 정책’의 진정한 옹호자는 혁명적 격변기에 “민주 세력을 무력화시키고자” 기도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양측이 합의한 점은 마키아벨리주의가 가지는 해악이 정치 생활의 도덕적 기초에 무엇보다 위협적이라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이름에는 너무나 많은 악평이 붙어 있기 때문에 정치 논쟁에서 마키아벨리주의자라는 혐의는 아직도 심각한 비난이 된다. 예를 들어, 헨리 키신저는 1972년 <신공화국 The New Republic>지와의 유명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철학을 밝혔는데, 이때 그를 인터뷰했던 사람은 그가 대통령 보좌관으로서 자기 소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은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신 말을 듣고 있노라면 당신이 미국 대통령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보다 당신이 마키아벨리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지가 더 궁금해지는군요.” 이 지적은 키신저가 무척 애써서 부인하려고 했던 점이다. 과연 키신저는 마키아벨리주의자였을까? “아니 천만에!”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마키아벨리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추호도 그런 일은 없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마키아벨리가 얻은 악평 뒤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정말 그 정도의 악평을 받을 만 했을까? 그가 자신의 주요 저서에서 주장한 정치와 정치적 도덕에 관한 견해는 대체 무엇일까? 내가 이 책에서 밝히고 싶은 의문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군주론』, 『로마사 논고 Discourses』 및 기타 정치사상 저서들에서 그가 명백히 직면했던 문제들을 복원하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갖기 위해 우리는 이 저서가 처음 저술된 경위, 즉 고전 철학과 르네상스 철학의 지적 맥락, 16세기 초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정치적 배경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처음 형성되기 시작한 때로 되돌아감으로써, 우리는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도덕적 전제에 공격을 가한 마키아벨리의 비범한 독창성을 음미할 수 있다. 나아가, 그의 도덕적 견해에 담긴 함의를 포착한다면, 정치권력이나 지도력(leadership)과 관련된 쟁점이 거론될 때마다 왜 그의 이름이 여전히, 그토록 자주 회자되는지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외교관 마키아벨리
인문주의적 배경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사보나롤라 정권이 무너진 1498년, 피렌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산 마르코의 도미니크회 신부였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예언적 설교로 4년간 피렌체의 정치를 지배해왔지만, 4월 초 이단으로 몰려 체포됐다. 그리고 피렌체의 정무위원회(signoria, 피렌체의 최고 행정 기구)는 정부에 남아 있던 사보나롤라의 지지자들을 해임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제2서기국(Second Chancery)의 장(당시 피렌체 공화국에는 제1서기국과 제2서기국이 있었으며, 그 각각을 책임지는 제1서기장과 제2서기장이 존재했다. 그리고 제1서기국은 주로 대외 관계와 외교 서신을, 제2서기국은 국내 관계와 전쟁을 관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각의 소임은 상당 부분 중첩되었다)이었던 알렉산드로 브라체시(Alessandro Braccesi)도 포함돼 있었다. 이후 제2서기장직은 공석으로 남았고, 몇 주 뒤 무명에 가깝던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이 그 자리의 적임자로 천거됐다. 당시 마키아벨리는 29세에 불과한 데다, 행정 경험도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별 어려움 없이 임명될 수 있었으며, 6월 19일 대평의회(Great Council, 14세기 말 피렌체에 도입된 일종의 민회)는 그를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장으로 정식 승인했다.
마키아벨리가 서기국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주요 부서에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안정된 방법이 시행되고 있었다. 즉, 요직의 관리들은 외교 능력과 함께 소위 ‘인문학(humane disciplines)’ 분야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이 ‘인문주의적 학문(studia humanitatis)’의 개념은 로마 고전에서 유래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키케로의 영향이 컸다. 키케로의 교육적 이상은 14세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소생됐고, 대학과 이탈리아인의 공적인 생활양식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인문주의자의 특징은 첫째, ‘진실로 인간적인’ 교육에 적절한 내용과 관련해 특정 이론을 신봉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라틴어 습득을 시작으로 수사학 연습과 가장 훌륭한 고전 문장가를 흉내 내는 훈련을 거쳐, 고대사와 도덕철학을 숙독하는 것으로 공부를 마무리 짓도록 했다. 또한 그들은 이런 종류의 훈련이 정치적 삶을 위한 최고의 준비 과정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대중화시켰다. 키케로가 반복해서 주장했듯이, 이러한 훈련이 국가에 극진히 봉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가치관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공공선을 위해 기꺼이 사적 이익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마음가짐, 부패와 폭정에 대한 저항심, 그리고 우리 자신은 물론 나라를 위해 가장 고귀한 목표, 즉 명예와 영광을 달성하고자 하는 야심 등이 그것이다.
이런 신념에 점점 더 물들어가면서, 피렌체인들은 지도적 인문주의자를 시 정부의 중요한 자리에 앉히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치는 1375년 콜루초 살루타티(Coluccio Salutati)를 서기장으로 임명한 데서 비롯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후 급속히 하나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마키아벨리가 성장하던 무렵 제1서기장직이 바르톨로메오 스칼라(Bartolomeo Scala)에게 돌아갔다. 스칼라는 공직 생활 내내 대학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인문주의와 관련된 저서를 계속 집필했다. 그의 주요 저작은 한 편의 윤리학 논문과 『피렌체인의 역사 History of the Florentines』였다. 마키아벨리가 서기국에 몸담고 있을 때도, 스칼라의 후임자인 마르첼로 아드리아니(Marcello Adriani)에 의해 이 전통은 훌륭하게 유지됐다. 아드리아니 역시 대학 교수직에서 제1서기장직으로 전임했으며, 라틴어 교과서와 『피렌체 귀족의 교육에 대하여 On the Education of the Florentine Nobility』라는 지방색이 짙은 저서를 포함해 인문주의 관련 저작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이런 사조의 유행은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비교적 젊은 나이에 공화국 정부에서 중책을 떠맡게 됐는지 설명해준다. 그는 비록 높은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지만, 도시에서 가장 명성 있는 인문주의자 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정부 요직에 앉을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아버지 베르나르도(Bernardo)는 변호사로, 인문학에 심취한 학생이었으며 몇몇 탁월한 인문학자들과 친분이 있었다. 스칼라가 1483년 집필한 『법률과 법적 판단에 관하여 Laws and Legal Judgements』라는 소책자는 그 자신과 ‘나의 친한 친구’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 간의 대화체 형식으로 돼 있을 정도였다. 더욱이 아들 니콜로가 한창 자라고 있을 1474~1487년에 쓴 『일기 Diary』를 보면, 베르나르도는 ‘인문학’의 르네상스적 개념에 기초를 제공한 몇 권의 뛰어난 고전 문헌을 공부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1477년에는 키케로의 『필립픽스 Philippics』를, 1480년에는 수사학에서 키케로의 최고 걸작으로 뽑히는 『변론가론 De Oratore』을 빌렸다고 기록해놓았다. 1470년대에는 키케로의 가장 중요한 윤리학 저서인 『의무론 De Officiis』을 몇 차례 빌렸으며, 1476년에는 리비우스의 『역사 History』 사본까지 장만했다. 그리고 이 『역사』 사본은 40여 년 후, 정치철학에 관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가장 긴 최고의 야심작 『로마사 논고』의 기반이 됐다.
베르나르도의 『일기』에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명백한 사실은, 그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항목별로 열거해가며 걱정하면서도, 아들에게 인문학을 위한 훌륭한 기초 지식을 마련해주기 위해 신경 썼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받은 교육에 대해 그의 일곱 번째 생일이 지난 직후 처음으로 듣게 되는데, 베르나르도는 정규 교육의 첫 단계인 라틴어 공부를 위해 “나의 어린 아들 니콜로가 마테오(Matteo) 선생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라고 기록해놓았다. 마키아벨리는 12세가 되자 두 번째 교육 단계에 들어갔고, 당대에 가장 걸출한 인문주의자들을 여러 명 배출한 바 있는 저명한 교사 파올로 다 론칠리오네(Paolo da Ronciglione)의 문하생이 됐다. 이러한 진전은 베르나르도가 1481년 11월 5일자 『일기』에 “니콜로는 이제 (고전 문체의 최고 모델을 모방하는 인문주의자의 표준적인 방법에 따라) 스스로 라틴어 작문을 쓸 수 있게 됐다”라고 자랑스럽게 기록한 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파올로 조비오(Paolo Giovio)의 말을 신뢰할 수 있다면, 마키아벨리는 최종적으로 학업을 위해 피렌체대학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조비오는 자신의 저서인 『금언집 Maxims』에서, 마키아벨리가 그동안 받았던 고전 수업 가운데 가장 탁월한 교육을 마르첼로 아드리아니에게서 받았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아드리아니는 제1서기장직에 임명되기 전 수년간 대학 교수직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문학적 배경은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갑자기 1498년 여름, 정부 요직에 앉게 됐는지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같은 해 아드리아니는 이미 제1서기장이 돼 있었고, 정권이 바뀌면서 생긴 서기국의 공석을 채워야 할 때 그가 마키아벨리의 인문학적 재능을 기억하고 자리를 마련해줬으리라는 추측이 가장 그럴듯하다. 아드리아니의 후원, 그리고 아마도 베르나르도와 친분 있는 인문주의자들의 영향에 의해 마키아벨리가 새로운 반(反)사보나롤라 정권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
외교 사절
공직에 앉은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1437년 신설된 제2서기국은 피렌체 영내의 행정 관련 문서를 주로 취급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 부서의 장인 동시에 제1서기장 밑에 있는 6인의 비서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자격으로 얼마 뒤 공화국의 외교 관계를 다루는 10인의 전쟁위원회(Ten of War)의 임무도 추가로 맡게 됐다. 이는 마키아벨리가 통상적인 업무 외에도, 10인의 전쟁위원회를 대표해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대사들의 비서 구실을 하는 동시에, 본국에 외교 문제와 관련해 상세한 보고를 올리는 일을 돕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종류의 외교 사절 임무에 참가할 기회는 1500년 7월에 처음 찾아왔는데, 이때 마키아벨리와 프란체스코 델라 카사(Francesco della Casa)는 프랑스 루이 12세의 궁정에 “가능한 한 빨리 이르도록” 명을 받았다(『외교문서집 Legations』 p.70). 이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피렌체가 피사와 전쟁을 하면서 겪게 된 곤경 때문이었다. 피사인은 1496년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 후 4년 동안 그들의 독립 노력을 꺾기 위한 모든 시도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1500년 초 프랑스는 피렌체인이 도시를 수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결정하고, 피사를 포위·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급파했다. 그러나 이 또한 참담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피렌체가 고용한 가스코뉴 용병은 탈주했고, 스위스 원군은 부족한 보수로 폭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탓에 피사에 대한 공격은 수치스럽게도 중단되고 말았다.
마키아벨리에게 내려진 지시는 “이 전쟁에서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은 추호도 우리 피렌체 측의 결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 가능한 한 프랑스 지휘관들이 “부패하고 비겁하게” 행동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었다(『외교문서집』 p.72, 74). 하지만 그와 카사가 루이 12세를 처음 접견했을 때, 그들은 왕이 공격 실패에 대한 피렌체의 변명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신에 왕은 잘못 통치되고 있는 것이 분명한 피렌체 정부로부터 나중에 기대할 수 있는 현실적 도움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그리고 이 접견에서 논의된 바는 이후 그들이 왕과 왕의 최고 고문인 플로리몽 로베르테(Florimond Robertet), 루앙(Rouen) 대주교와 가진 모든 토론에서 주조를 이뤘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궁정에 거의 6개월간 머물렀지만, 결과적으로 그곳에서 그가 배운 것은 프랑스의 정책이 아니라 갈수록 모호해지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입장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깨달았던 바는 근대 군주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것처럼, 피렌체 정부가 터무니없이 우유부단하고 약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7월 말에는 피렌체 정무위원회가 프랑스와 동맹 조건을 재협상하기 위한 추가 사절단을 반드시 보내야 했다. 마키아벨리는 8월과 9월 내내 새 사절단이 피렌체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고, 루앙 대주교에게 그들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10월 중순까지도 새 사절단이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대주교는 마키아벨리의 얼버무림을 공공연히 경멸하기 시작했다. 마키아벨리가 매우 비통한 어조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마침내 약속된 사절단이 오고 있음을 확언했을 때 대주교는 정확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진실이겠지만, 사절단이 도착했을 때 우리 모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요”(『외교문서집』 p.168). 더욱 굴욕스럽게도, 마키아벨리는 자신들의 도시에 대한 피렌체인의 자부심이 피렌체가 실제로 지닌 군사적 지위나 경제적 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프랑스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정무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해야만 했다. 즉, 프랑스인은 “오직 군사력이 막강하거나 기꺼이 지불할 돈이 있는 나라만을 중요시”하는데, “피렌체의 경우 이 두 가지 자격 조건 모두에 미달”한다고 믿게 됐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위대함이 프랑스 왕이 이탈리아에 소유하고 있는 영지를 안전하게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자 했지만,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프랑스인은 단지 그를 비웃었기 때문이다. 괴로운 사실이지만 “그들은 피렌체인을 별 볼일 없는 사람(Mr. Nothing)이라 부른다”고 마키아벨리는 고백하고 있다(『외교문서집』 p.126와 주 참조).
(들어가며 전문,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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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퀜틴 스키너 Quentin Skinner
케임브리지대학교 근대사 흠정강좌 담당 교수와 크라이스트대학 선임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런던대학교 퀸메리칼리지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1979년 울프슨 저작상을 수상한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전 2권)를 포함, 여러 언어로 번역된 수많은 저서를 출간했다. 『홉스 철학에서 이성과 수사학 Reason and Rhetoric in the Philosophy of Hobbes』(1996),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Liberty Before Liberalism』(1998), 『정치의 비전들 Visions of Politics』(전 3권, 2002), 『홉스와 공화주의적 자유 Hobbes and Republican Liberty』(2008) 등의 최근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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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양정치사상을 전공으로 학문의 길에 접어들었다. 최근에는 동아시아 정치사상에도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주요 저술로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2004)가 있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2008), 『로마사 논고』(2003)를 공역하였다.
김현아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에서 정치사상을 전공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민주화 이후 한국의 보수주의: 자유민주주의로의 수렴?」(공저, 2006), 「한비韓非는 전제군주제의 옹호자인가?: 군주권의 통제를 중심으로 한 『韓非子한비자』의 세·법·술론(勢·法·術論) 재해석」(2008)이 있고, 저서로는 『난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200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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