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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생인
우리는 물의 세계에서 육지로 도망친 난민이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71퍼센트를 덮고 있는데, 기후가 더 따뜻해서 만년설이 녹은 시기에는 더 많이 뒤덮었을 것이다. 태양계의 ‘골디락스Goldilocks 지대’, 즉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에 위치한 우리 고향 행성의 궤도 덕택에 현재로부터 40억 년 전 육지는 척박한 돌투성이 화산성 불모지에다 공기는 이산화탄소와 다른 기체들의 유독한 혼합물이었던 때에 바다에서 생명체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후 35억 년 동안 대자연은 지구의 바다에서 새로운 생명체 형태를 찾기 위해 광범위한 생물학적 실험을 했고, 5억 4,200만 년 전에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는 유전자적 대박을 터뜨렸다.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지구의 바다에서 엄청난 생물학적 창조성이 발휘되었던 2천만 년 동안의 시기이다. 이후 5천만 년 동안 식물들이 육지를 점령하고 대기를 고등한 생명체들이 숨을 쉴 수 있는 것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육상환경은 이제 식물과 곤충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 물고기와 원생 양서류가 포식자로부터의 피난처와 식량을 찾아 물 밖으로 나오도록 유혹했다. 지리학적 시간으로서는 눈 깜박할 새인 3억여 년 전에는 동물이 식물과 곤충의 뒤를 따라 육지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며 물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완벽하게 육상생활에 적응하게 되었다.
하지만 ‘완벽한 육상생활’에는 자격이 필요하다. 파충류든 조류든 포유류든 모든 육생동물陸生動物은 살기 위해 물을 마셔야 하고, 동물의 몸무게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물이다. 육체의 생화학적 과정 모두가 물에서 일어나고, 대부분의 포유류에서 물이 계속해서 부족하며 탈수가 일어나 결국에 죽는다. 생식에서도 대부분의 동물은 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특히 양서류는 물로 다시 돌아가서 짝을 짓고 완전히 수생 알을 낳고 수생 유충기를 보낸다. 육생 파충류와 조류는 물에서 완전히 떠나긴 했지만 부화할 때까지 필요한 모든 물과 영양분이 들어 있는 방수 알에 싸인 새끼를 낳는다. 포유류는 몸 안의 수생환경에서 생식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포유류의 정자는 난자를 향해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태아는 98퍼센트가 물로 이루어진 액체로 가득한 모체의 양막 안에서 ‘헤엄’을 친다.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포유류는 먼 조상인 물고기의 육체적 흔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생애 첫 몇 주 동안 인간의 배아는 이후에 자라날 직립 유인원보다는 물고기나 양서류와 더 비슷해 보이고, 태아는 몸에 아가미의 흔적인 주름이 있다. 그러나 물고기나 올챙이와 달리 포유류 태아는 자궁의 양수에서 산소와 영양분을 얻지 않고 탯줄을 통해 태반에서 얻는다.
하지만 인간의 진화와 수생환경의 관계는 순수하게 계통발생적인 것 이상으로 우리의 생리학적·문화적 진화의 핵심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논쟁이 분분한 수생 유인원 가설Aquatic Ape Hypothesis에 따르면 우리의 초기 조상들은 수생 단계에서 핵심적인 인간의 특성 여러 가지를 발달시켰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수영과 잠수가 걷기와 달리기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 분야 연구자 대부분의 생각처럼 수생 유인원 가설이 완전한 착각이고 인간 혈통의 진화가 물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물에 적응하는 인간의 능력이 우리 호모 사피엔스속의 생존과 인간의 지구 정복, 그리고 우리의 초기 문명의 발달에 핵심 역할을 했을 거라는 점이다.
흉측한 뼈
현대 인류는 수영을 잘하며 자주 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 처음 수영을 배웠을까?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진화보다 훨씬 더 앞선다. 인간의 수영 이야기에 관한 첫 장을 살펴보기 위해서 얼마나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 나는 대학 시절 고인류학사람과科, 호미닌 화석, 인간의 진화를 연구하는 학문 지식을 떠올려보았다. 고인류학에서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현존 사촌인 대형 유인원과 우리의 최소공통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의 기원을 5백만 년 전에서 7백만 년 전 사이로 본다. 이 머나먼 인간의 조상이 남긴 것은 화석화된 뼈와 놀랍게도 지금까지 보존된 몇 개의 치아뿐이다. 뼈와 치아는 우리에게 개개인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들의 나이와 성별, 그들이 직립보행을 했는지 네 발로 걸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나무 위에서 살았는지 혹은 지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심지어는 그들의 인지능력의 정도까지도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이 유해는 우리에게 우리의 먼 조상들이 살았고 활동했고 죽은 환경의 지형이나 기후, 농경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주지 못한다.
과학계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1859과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1871를 받아들이고, 인간의 조상을 열심히 찾기 시작한 이후로도 고인류학 연구는 국가주의와 종교적 교리에 방해를 받고 문화적·인종적 편견에 제한되었다. 초기의 발견은 대부분 서유럽에서 나왔고, 그래서 많은 인간의 조상들이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Homo heidelbergensis,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의 하이델베르크에서 출토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 마찬가지로 유럽의 북부 라인-베스트팔렌의 강 유역 네안데르탈에서 출토처럼 어울리지 않는 중부유럽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훨씬 먼 지역에서도 발굴되었고, 고대 인간 혈통 여럿은 근동과 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초기 조상을 찾을 만한 가장 확실한 장소이자 우리의 가장 가까운 영장류 친척인 대형 유인원의 고향인 아프리카는 많은 유럽 과학자가 몹시 꺼리는 지역이라 거의 조사하러 가지 않았다.
1924년 젊은 오스트레일리아 인류학자 레이먼드 다트Raymond Dart, 1893-1988가 타웅남아프리카 킴벌리 부근에서 놀라운 발견을 하면서 이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영장류와 인간 양쪽 모두의 공통 특징을 보이면서 특히나 대형 영장류에서 보이긴 해도 주된 이동 방법은 아니었던 이족보행 특성을 가진 초기 호미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 최초의 견본으로 밝혀졌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은 420만 년 전부터 120만 년 전 사이에 아프리카에서 살았고 그 이래로 여러 종으로 나뉘었다. 가장 완전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 골격 중 하나는 다트의 타웅 ‘어린아이’가 발견되고 50년 후 에티오피아의 아파Afar 삼각지에서 발견되었다. ‘루시’라는 이름이 붙은 이 화석은 아종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로 분류되었고, 주로 이족보행을 했지만 두개골이 현대의 대형 유인원과 거의 비슷한 크기였다. 이것은 이족보행보다 큰 두개골, 즉 지능 발달이 먼저였을 거라는 이전까지의 믿음을 뒤집었다. 지금은 이족보행이 이후 인간의 특징이 되는 다른 변화들을 촉발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을 우리의 직계 조상으로 여겨야 할지 그저 먼 친척으로 여겨야 할지 아직도 약간의 의심이 있지만, 인간의 가계도에서 인간-유인원 최소공통조상과 최초의 호모속 대표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이 인간의 조상이라는 다트의 주장은 고인류학계에서 즉시 거부당했지만 강력한 증거와 수많은 표본이 나오면서 루시와 그 동족들은 마침내 1940년대 말에 정통 진화 체계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 발견은 최소공통조상과 최초의 원인 사이의 간극을 1백만 년에서 3백만 년 사이로 줄여주었다.
내가 다트와 그의 발견에 대해서 배울 무렵에는 20년 동안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을 독특한 유인원으로 분류한 노인네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지만, 다음 세대 고인류학자들 역시 그들이 진화적 정통으로 여기는 것에 들어맞지 않는 이론을 거부하고 똑같이 보수적으로 행동했다. 학부생 때 내가 사실로 받아들였던 인간 진화론은 ‘사바나-인간-사냥꾼 가설savannah-man-thehunter hypothesis’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아프리카의 기후가 변했고, 그래서 숲이 오늘날까지 동아프리카 일대에서 볼 수 있는 넓은 초원으로 변했으며,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의 조상이 빠르게 줄어드는 나무에서 내려와야만 했고, 나무 위에서 지상으로 삶의 터전이 바뀌며 육체 변화가 촉진되었다는 것이다. 이족보행은 손을 더 많이 쓸 수 있게 만들어주고 더 큰 뇌와 털의 상실, 목소리를 내는 능력의 발전대화을 불러왔으며 또한 평화로운 채식성 잡식동물에서 공격적인 육식성 잡식동물로 바뀌는 수렵 같은 행동 변화도 불러왔다.
당시에 나는 인간의 진화가 원시 인류의 절반에게만 적용되는, 뛰어다니고 창을 휘두르며 큰 초식동물을 죽이려는 열정으로 인한 것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가부장적 질서의 모든 부분에 도전하던 제2차 페미니스트 세대는 동물행동학과 고인류학에서 강조하는 생물학적 ‘필연성’이라는 당대의 성차별적 관점을 곧장 공격했다. 그들은 남성의 공격과 경쟁 성향이 인간 진화의 주된 원동력이라는 발상을 거부하고 선사시대의 가부장적 집단을 모계 혈통으로, 유혈 낭자한 경쟁을 평화로운 협동으로 대체하는 라이벌 이론을 제시했다.
진화학 학생들이 마주한 문제는 현대 인간에서 시작해서 호미닌 혈통을 따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올라가면 갈수록 사슬의 연결고리가 점점 적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객관성에 자부심을 가진 전문 과학자들도 자신들의 이론에 현재의 편견을 끼워 넣어 현재의 방식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개조할 위험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사바나-인간-사냥꾼 가설은 페미니즘 이전 남성 지배적인 사회질서를 확인시켜주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학부생 때 우리가 계속해서 주의를 받는 또 다른 위험한 행동은 세상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경험을 다른 종에 반영하는 것이다. 즉 살아남기 위해서 일 년 내내 옷이 필요한 추운 북부 기후에서 자란 사람들은 선사시대 열대지방의 전혀 다른 생활방식을 상상하기에는 좋지 않은 조건을 갖고 있다.
1년 동안 휴학을 하고서 나는 중앙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벨리즈에서 몇 주 동안 머물렀다. 어느 날 나는 수도인 벨리즈시티에서 해안을 따라 조금 떨어진 석호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얕은 물은 여행 책자에 나올 것처럼 맑은 카리브해 특유의 파란색이었고 해변에는 야자수가 줄지어 있었으며 모래는 눈부시게 하얬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것은 공기와 물의 온도가 약간 달랐다는 거였다. 해변에서 옷을 벗고 몸을 식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물에 뛰어들었는데, 물이 너무 따뜻해서 상쾌해지기는커녕 여름날 뜨거운 목욕을 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초기 호미닌 선조들이 북부 유럽이나 북동부 미국에서 진화했다면 그들은 설령 일 년 중 가장 따뜻한 시기라고 해도 물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따뜻한 열대의 바다에서는 감기 걸릴 일 없이 하루 종일 미지근한 수프 같은 물속에서 고기를 잡고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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