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다룬 시대는 균등법이 만들어지고 나서 지금까지 대략 30년이다. 이 기간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추진된 30년과 겹친다. 그중에서 여성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 고용과 노동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그 이유는 직장이 없다는 것은 곧 먹고살아갈 수 없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먹고살게 해줄 만한 남자들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 여성들이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원망하려면 여성들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한 범인들을 원망해야 한다.
│ 한국의 독자들에게 │
여성들은 싸워왔습니다!
이 책은 1970년대 일본의 여성해방운동이 태동하고 약 반세기 동안 일어난 일본 여성의 변화를 논한 글입니다. 그 기간에 저는 20대에서 60대까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그때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직접 체험했고 그때그때의 사건들 앞에서 분노하고 기뻐해온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단순한 관찰자나 연구자가 아니라 시대와 함께해온 동반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지난 시간을 반추하면서 그때 그랬었구나 하는 감개무량함과 그때 우리가 그렇게 당했었구나 하는 분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약 반세기는 세계적으로 국제화와 신자유주의의 시대였습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 휘몰아친 파도 앞에서 각 나라들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그에 대응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대응은 어땠는가? 신자유주의 개혁이라 이름 붙은 대응 방식에 여성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 결과 우리들은 어떤 시대를 살았는가?
1970년대 한국은 군사정권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이 일어나고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함께 동서냉전 체제가 무너진 후에 한국은 급격한 국제화와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파도에 휩쓸려갔습니다. 시작이 늦었다고 변화마저 늦어지는 것은 아니듯 한국은 오히려 ‘압축근대’라 할 만한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러한 급격한 변화는 세대 간의 단절도 가져왔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매우 닮았습니다. 인구 추세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급속한 고령화와 극단적인 저출생률, 만혼과 비혼 현상 등이 그렇습니다. 또한 그 상황에 놓인 여성의 입장도 매우 유사합니다. 강력한 가부장제하의 가족, 딸과 며느리의 낮은 지위, 주변화된 여성의 노동. UN의 남녀평등지수Gender Gap Index에서도 다른 선진국과 달리 일본이 100위대로 순위가 떨어졌을 때 마치 어깨동무하듯이 한국의 GGI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중략)
1장
누구도 시대를 선택할 수 없다
여성의 삶, 나아졌습니까
일본에서 여성해방운동이 시작된 지 40년. 세계사에서 두 번째로 일었던 페미니즘의 물결이 어느덧 ‘불혹’을 맞이했고 내 자신도 환갑이 지나 이제 고령자의 일원이 되었다.
“지난 40년 동안 일본 여성의 삶은 나아졌습니까?” 해외 미디어나 젊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고민하게 된다.
굳이 답을 한다면 Yes or No.
어느 면에서는 좋아졌지만 또 어느 면에서는 힘든 상황이다. 아니, 예전과 다른 의미에서 지금이 더 어려운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거기까지 제시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으나를 분석해보고 싶다.
또한 여성해방운동이 탄생하고 페미니즘이 성장한 지난 40년이 어떤 시대였는지 되짚어보려고 한다. 누구도 시대를 선택할 수는 없다. 40대 이전의 여성들에게는 그간의 40년이 삶의 전부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성년이 된 후의 40년이다. 나는 그 시대의 변화에 발을 내딛고 힘을 보태면서 온몸으로 살아왔다. 그 시대의 산증인으로 관찰하고 경험한 것들을 데이터에 근거해서 세계사에서 일본이 자리하는 위치가 어디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여성들이 시대의 파도에 휩쓸리며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또 앞으로 거친 파도를 어떻게 뛰어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신자유주의와 여성 리더
지금까지의 40년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신자유주의 개혁의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오리버럴리즘neoliberalism. 신자유주의나 시장원리주의라고 불린다. 시장을 통한 자유경쟁을 가장 효율적인 자원의 교환과 분배 구조라고 보고 경쟁을 제한하는 규제들을 지속적으로 완화하려는 입장이다. 시장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승자는 보수를 받고 패자는 퇴장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경쟁의 규칙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일본에서는 ‘구조개혁’이라고 불림을 정책적으로 내세운 일본의 정권은 2001년부터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지만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일본은 신자유주의 개혁하에서 규제 완화 정책을 유지해왔고, 그보다 훨씬 전부터 고이즈미 정권이 모범으로 삼을 만한 대상이 있었다. 그것은 1980년대 영국의 대처 개혁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다. 그래서 고이즈미 정권의 개혁은 ‘20년 늦은 보수혁명’이라고 회자되었다.
고이즈미가 총리에서 물러난 후 고이즈미 개혁의 ‘마이너스 유산’은 격차의 확대였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실제로 개혁을 추진했던 세력들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잘못이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들의 발언들 속에는 개혁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권에서 물러나 개혁의 목표가 완성되지 못했을 뿐 조금만 더 지속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배어 있다. 그리고 당시 구조개혁을 주도했던 세력의 한 사람인 다케나카 헤이조가 또다시 아베 정권의 핵심 인물로 복귀했다. 이른바 아베노믹스라는 것도 동일한 노선의 연장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개혁’이란 과연 무엇일까?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게 된 것은 1973년의 오일쇼크가 그 계기다. 국제적인 민간단체인 로마클럽The Club of Rome에서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낸 것이 1972년. 놀랍지 않은가? 당시의 세계 지도자들과 석학들은 이미 지구의 자원과 에너지, 환경까지도 유한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수많은 파괴로부터 회복되면서 오로지 경제적 성장만을 위해 치닫던 선진공업국들이 산유국의 수출규제와 가격인상으로 에너지공급이 차단되자 엄청난 혼란에 빠졌던 사건이 1973년의 오일쇼크다. 당시 일본은 세계적인 자동차 대국으로, 석유를 거의 생산해내지 못하는 극동의 섬나라에서 석유공급이 차단된다면 자동차는 처치 곤란한 대형 쓰레기가 될 뿐이었다. 또한 전력 면에서도 중유를 연소시키는 화력발전에 의존하던 상태였다. 만약 석유가 끊긴다면! 일본의 모든 경제가 스톱하고 말 것이란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이토록 대외의존도가 높은 취약한 사회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석유공급이 차단되면 경제활동 전반에 영향을 끼쳐서 일용품마저 품귀현상을 빚을 것이라는 예측 때문에 슈퍼에서는 두루마리 화장지가 동이 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앞다퉈 사재기를 한 것이다. 당시 공동주택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두루마리 화장지가 없다는 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재래식 화장실도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 대다수 일본인들은 옛날처럼 신문지로 대용할그런 시절도 있었다! 수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원자력발전이 강력한 국책사업으로 추진되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새삼 떠올려보지만, 당시 원자력 정책은 석유를 대체하는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강했다.
리버럴리즘, 이른바 자유주의는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하나의 원리였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불황이나 실업과 같은 한계를 드러내면서, 국가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시장에 쏟아부은 재정의 투융자를 통해 시장을 통제하는 케인즈 정책 등의 수정자본주의가 이어지던 상황에 자유주의는 포장을 바꾸고 다시 등장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다.
1973년의 오일쇼크는 세계경제 질서에 변화를 가져왔다. ‘강력한 경제’를 만들기 위해서 시장을 선택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채산성이 낮은 비효율 산업은 시장에서 퇴출시키고 이익률이 높은 산업은 더욱 성장시켜야 했다. 구조개혁, 이른바 산업구조의 조정이 요구되었다. 일본을 포함한 선진공업국들은 뒤따라오는 개발도상국에게 채산성이 낮은 부문을 모두 떠넘기고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에만 중점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과거와 같은 산업 보호 정책은 폐지하고 새로이 경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효율성이 떨어지는 공공사업을 민영화철도 민영화, 우체국 민영화 등로 전환하고 복지의 확대를 줄이는 것이 정책 패키지로서 등장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한 사람이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이다. 이것만 보아도 일본의 우체국 민영화를 주장했던 고이즈미 개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이즈미 정권에 앞서 국철의 민영화를 주도한 것은 1982년에서 1987년까지 총리를 역임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이다. 그때부터 일본에서도 신자유주의 개혁이 사실상 시작되고 있었다.
대처는 ‘강력한 경제’를 만드는 데 ‘강력한 정치 지도자’였다. 대처가 영국 경제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면서 파운드의 가치가 회복되자 만성적인 ‘영국병’에 시달렸던 영국은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처는 높이 평가될 만한 정치가였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인기가 없었다.
여든이 넘어 치매에 걸린 대처를 주인공으로 한 〈철의 여인〉이라는 영화가 영국에서 만들어졌는데, 이 영화에서는 대처가 영국 국민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대처가 총리로 취임한 것은 1979년. 이후 영국에서는 실업수당과 공공복지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약자를 과감히 잘라버리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부정적 영향이 대부분 여성과 청년층으로 집중되는 현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은 모양이다. 영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총리가 등장하더라도 여성 친화적인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미국에서는 1981년에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영국과 유사한 신자유주의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것을 ‘보수혁명’이라고 부른다.
‘보수’와 ‘혁명’의 결합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수 대 진보라는 구도 속에서 혁명이라는 말은 진보에 훨씬 친밀한 단어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개혁의 깃발을 틀어쥔 쪽은 소위 ‘진보’가 아니라 ‘보수’였다. 공격과 수비가 바뀌면서 오히려 보수가 개혁을 리드하고 진보가 “지켜라”를 외치는 수구적인 입장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수비태세로 들어가게 되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잃게 된다. 이때부터 ‘진보’파는 순식간에 매력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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