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적가장 끔찍한 것이 죽음의 치정이다. 그래서40년 뒤명작이 있다.여러겹 의미심장이 여러겹으로 이상하다.죽음이 발굴하는 거지 생 아닌생의 죽음을.역사 아닌 역사의 죽음을. 육체 아닌육체의 죽음을. 언어가 끝없이 (네?) 몸 향해기울고, 언어 아닌 언어의 죽음을.화 아니라 뿔 난 죽음이 자신의 죽음을.정액도 궤도를 벗어난 영롱한 슬픔이다.세고비아가 기타 이름이었나? 북한이청소년이다. 인위적이라난폭이 더 난해하지.낙화생 기름, 사탕, 낙화생, 낙화생,그게 일본말 땅콩이었나.적을 바로 마주하고 있는 전방(前方),그게 앞으로였고 미래였으니어디까지 말랑말랑해지면 생이 불길(不吉)을벗을 수 있냐고 묻는 것이 상처의 따스한낙관이었나. 죽음의 치정에 맞서지리멸렬해지는 육체의지옥은 Innamorata, innamorate, 아름다움의성욕이 그리 끈질길 수 없다. 그,뼈대가그리 노골적일 수 없다.더 노골적인 것이 같이 있을 수 없는 것들의병존이고, 그 옆에서 죽음과 음식의그것은 오히려 유구의 자연이다. 자연의자연이지. 모든 파란만장이 제 안에암전暗轉을 키우며 보통명사에 달한다는 거.흐린 열망 너머 명징한 아름다움의 현재로서 미래라는 거.이해 못하지, 죽음의 치정은 이응의 혹은 리을의 투명 밖으로설레는 파국, 내용이 다분한 창세기. 세상의 세상 밖으로뒤흔들림도 없이, 위안의 뜻을 과격하게가까스로 가누는 것이 죽음의치정이라는 듯이,‘인위적’,기악과 연기의, 그 둘의병존의.운명도, 결국 우리 살 뜯어 먹고 산다는 듯이.들숨 날숨만 남을 때까지 말이지.눈 오는 날이상하게 아름다운 근육이 있다.요람 혼자 놀고 있다. 울지 않고.생애 아닌 생의 한 장면을 아프게도려낸 광경이 있다.위에서 보면 세상의 수평 모두흰 눈에 덮였을 것. 수직은 모든 검정이권위를 잃고 축축하고 지저분하다.차가운 잠 속 슬픈 해피엔드 같다. 섹스의생애 아니라평생 같다. 두려이 기대하는표정이 없다. 1960년대 단체 관람 대한극장「클레오파트라」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50년 동안 빛바랜 교복이다.목숨이 여전히 공평하지.우리가 우리의 몸무게 100분의 1도 안되는쥐의 출몰에경악으로 나체화하는 한가지 이유. 아무리 재빠르다고하지만 말이지.오늘은 그것도 없다. 명랑한 눈발에 길고양이도복도 쥐도 나를 피하지 않고쥐가 고양이를 피하지 않을 것 같다.가정적으로 명랑한 눈발에.명랑의 노후와 여성의 이면裏面전원의 착각, 당분간은연민도 일종의 착각이다.빈 화분빈 화분이 이미 빈 화분 아니고 비로소 집이다,식물의, 식물적인 기억의.바라봄 없는 바라봄의 원형이 있다.무엇이 원圓이고 어디가 원原?질문도 그렇게 시끄러운 운명이 없고운명도 그렇게 시끄러운 무늬가 없다.도란도란이 두런두런으로 넘어가는 원형이다,신대륙의. 공간이 죽음을품기 위하여 펼쳐지려는 노력이었군.시간이 저 혼자 간절하게 이어졌어.그런 수긍도 이제 둘 다 먼저 그러지 않고너무 많은 시간과 공간의낭비도 고요한신대륙이다, 빈 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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