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편에선 되게 낮잠 자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석유를 사러
싸늘한 지폐 한 장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초단파 수신기를 타고 칼립소 뱃노래가 들린다.
그러나 여기는 추워
타오르지 않을 때는 난로마저 손과 발을 얼린다.
그럴수록 눈을 냉정히 닦고 바라보기로 해
책상 위에 하얀 타자기
자판은 고른 옥수수알같이 박혀 있고
그것들보다 더 단정한 모습으로 지폐는 누워 있다.
아침에 나는 저것으로 쌀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어떡하지 이 밤은 겨울도 참지 못해
큰 바람 소리로 신음하고
눈물만큼의 기름이 저 난로에는 없다.
점점 한기는 예리한 창을 갈아 내 허리께를 찌른다.
예수의 죽음 확인하던 로마의 병정처럼
두 번……세……번…… 나는 빨리 결정해야 한다
석유를 사기 위해 아침을 굶기로 할 것인가
굶어죽기보다 먼저 동사할 것인가에 대하여.
원래 선택이란 좋은 잔을 마련하고 결정을 요구하지 않는 것
네 앞에 놓여진 잔 가운데 최선의 것을 택하면 되리라
그렇다면, 그래, 석유를 사서 갈등이 끝난다면
당장 사버리는 게 좋지 않은가
약간의 석유가 겨울을 유예하고
따뜻함이 이 저녁의 동사를 몰아낸다면
만사 그것으로 즐겁지 않겠는가
석유를 사기로 한다. 그러자 신의 둥근 후광인 듯
얼었던 방은 생각만으로 더워지고
될수록이면 상상이 식기 전에 양말 하나를 더 신고
때 묻은 목도리를 한다.
기름통은 신발장 근처에 버려져 있었고
거미줄이 쳤다. 손잡이에 묻은 먼지를 닦고 들어올릴 때
가득 채워지기 위해 한층 가볍게 들리는 기름통의 무게
여간 즐겁지가 않다.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별들과 가로등 사이로 난 희미한 길을 더듬어
서두를 필요가 없다. 나는 주유소가 바라보이는 신작로 앞에서
지나가는 차들을 천천히 보내주었다.
좀더 오래 기다리며
가슴속에서부터 더워지는 공기를 느끼고 싶기에
느릿느릿 걸어 유리로 만들어진 집
붉다란 입간판이 주인집 문패보다 큰 주유소 마당에 서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부른다
그러면 유리에 묻은 성에보다 두터운 외투를 입은
소년이 나오지. 졸면서 기름 호스를 잡지
나는 기름이 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얼마나 빨리 소년의 작업은 끝나는 것일까
계기는 오백 원이 가리키는 숫자쯤 해서 멈추고
돈을 치른다. 하지만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유다가 스승을 팔기 위해 고심한 만큼
또한 내게 결정하기 어려웠던 몫
등을 돌리고 성에를 풀어놓은 거대한 누에 속으로
재빨리 소년이 사라지면
나는 올 때보다 천천히 걷는다
난관을 모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시도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내일 굶주린다 해도, 겨울에 따뜻해지는 일은
꿈꾸는 일보다 중요하다.
처음보다 질긴 채찍으로 바람은 내 등을 후려치지만
난로가 있어 기름통을 가지고
밤늦게 걸을 수 있는 자는 또 얼마나 행복한가?
어느 틈에서인지 한 방울씩의 석유가 새고
몇 개 전주 너머 너의 방이 별보다 밟게 반짝일 때
그때인가. 나는 끝없이 걷고 싶어졌다
끝없이 걸어,
동쪽에서 떠오르고 싶었다.
대지를 무르게 녹이는 붉은 해로 솟아나고 싶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복숭아씨 같은 입을 딱 딱 벌리며
무서운 대머리다, 불타는 기름통이다.
아아 내일 아침 내 가슴에 새겨지는 희망의 시간들을
무어라고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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