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서구 역사의 창시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거리의 이야기꾼, 헤로도토스
누가 처음으로 역사를 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후세에 전해진 가장 오래된 역사서를 집필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뿐이다. 그런데도 서구西歐 지식인들은 헤로도토스B.C. 484?~B.C. 430?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한다.1 여기서 서구는 서유럽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와 북아메리카, 호주를 포함하여 기독교를 문화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문명권을 통칭한다. 그에게 이 명예로운 작위를 수여한 인물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B.C. 106~B.C. 43였다.2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정치가로 활동했던 지식인 키케로는 헤로도토스가 B.C. 425년 무렵에 쓴 『역사』를 최초의 역사서로 본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가들이 키케로의 판단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는 헤로도토스가 아니라 투키디데스B.C. 460?~B.C. 400?를 ‘역사 서술의 창시자’로 지목했다.3 두 사람이 역사의 창시자를 달리 판단한 것은 역사를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이야기’를 중시했는데 헤로도토스는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뛰어났다. 랑케는 ‘사실의 기록’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투키디데스는 사실을 검증하고 해석하는 솜씨가 빛났다. 먼저 마라톤 평원 전투를 묘사한 『역사』의 한 대목을 들어 헤로도토스의 이야기 실력을 감상해 보자.
공격 명령이 내리자 아테네 사람들은 뛰어서 돌격해 들어갔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들이 죽으려고 발광하는 줄 알았다. 수도 적은 데다 기병과 궁수의 지원도 없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훌륭하게 싸웠다. 우리가 아는 한 그들은 적군을 향해 뛰어든 최초의 그리스인4이었으며 페르시아풍의 옷을 입은 자들을 보면서도 참고 버틴 최초의 그리스인이었다. 그때까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사람’이라는 말만 들어도 주눅이 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마라톤 전투는 오래 이어졌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중앙에서 그리스 군의 대오를 돌파해 내륙으로 추격했다. 그러나 양쪽 날개에서 적을 제압한 그리스 군은 양쪽 날개를 오므려 중앙을 돌파한 페르시아 군을 공격했다. 여기서 이긴 아테네 군은 바닷가에 이를 때까지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베고 전선을 나포했다. 혼전 중에 아테네 군의 폴레마르코스와 트라쉴라오스 장군의 아들 스테실라오스가 전사했다. 에우포리온의 아들 퀴네게이로스는 적선의 고물을 끝까지 붙들고 있다가 도끼에 손이 잘려 쓰러졌으며 그밖에도 이름 있는 아테네 사람이 숱하게 전사했다. 그러나 마라톤 전투의 페르시아 전사자는 6,400명이었지만 아테네 전사자는 192명에 지나지 않았다.
─ 『역사』천병희 옮김, 숲, 2009 제6권 112~117장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마라톤 전투의 양상은 1592년 7월 8일 통영 앞바다에서 벌어졌던 한산도 대첩과 비슷하다. 그때 이순신 장군은 함선 55척으로 학익진鶴翼陣을 펴 왜의 함선 73척 가운데 47척을 격침하고 12척을 나포했다. 왜군은 패잔선 14척을 끌고 도주했고 조선 수군은 기록할 만한 손실을 하나도 입지 않았다. 헤로도토스는 아테네 시장 골목에 시민들을 모아 놓고 마라톤 전투 장면을 이야기했는데, 만약 임진왜란이 끝난 뒤 한양 종로 거리에서 누군가 같은 방식으로 한산도 대첩 상황을 전해주었다면 청중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스어 원전 『역사』를 번역한 천병희 교수는 「옮긴이 서문」에서 헤로도토스를 ‘최초의 역사가’인 동시에 ‘최초의 이야기꾼’이라고 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최초의 역사가’일 수는 있다 해도 ‘최초의 이야기꾼’이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리스 세계에는 역사를 소재로 사람을 매혹한 이야기꾼이 헤로도토스 이전에도 많았다.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독립한 문명 어디에나 있었던 ‘천지 창조의 신화’나 ‘영웅 전설’은 인간과 세계와 문명의 기원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하려고 누군가 꾸며 낸 이야기이며,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기 전에 꾸며 냈던 신화가 나중 기록으로 남은 것은 그 신화를 변주하고 각색하면서 대를 이어 전승한 이야기꾼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장편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서 트로이 전쟁의 역사와 영웅들의 행적을 이야기한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5 호메로스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트로이 전쟁의 역사를 소재로 삼아 갖가지 영웅담을 꾸며 내고 각색하고 전승했던, 우리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꾼의 집합일지도 모른다.
1아버지 혼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역사의 아버지’라는 말이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를 억압한 가부장제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 표현을 쓰는 이유는 역사가들이 그렇게 표현한 것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창시자’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로 하자.
2『법률론』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성염 옮김, 한길사, 2007, 59쪽.
3『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레오폴트 폰 랑케 지음, 이상신 옮김, 신서원, 2011, 40쪽
4‘헬라스’는 그리스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다. 독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원문의 고유명사는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것으로 바꾸었다. 예컨대 ‘헬라스’는 ‘그리스’로, ‘아테나이’는 ‘아테네’로 썼다. 뒤에서 다른 역사책을 인용할 때도 이처럼 고유명사를 우리에게 익숙한 표기로 바꾸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5『일리아스』, 『오뒷세이아』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2015 참조.
최초는 아니었다고 해도 헤로도토스가 재능 있는 이야기꾼이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B.C. 5세기 중반 눈부신 경제적 번영을 누리며 인류 역사 최초로 민주주의 정치 제도를 운영했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그는 페르시아 전쟁 이야기로 큰돈을 벌었다. 소피스트들이 철학과 논리학 강의를 해서 돈을 벌었던 시기에 ‘유료 역사 토크쇼’를 열어 한몫을 잡았던 것이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주도한 공으로 그리스 세계의 맹주가 되었던 만큼, 시민들은 기꺼이 돈을 내고 흥미진진한 마라톤 평원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가 그 이야기를 문자로 쓴 책이 바로 『역사』다. 그래서 『역사』에는 강연을 녹취한 듯한 구어체 문장이 많다. 하지만 헤로도토스가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하려고 분투했기에 『역사』는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와 달리 시가詩歌가 아닌 사서史書로 인정받았다. 천병희 교수의 평가는 조금 수정해야 한다. 헤로도토스는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이야기꾼 가운데 역사가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페르시아 전쟁과 『역사』
헤로도토스는 소아시아 카리아 지방의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으로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아테네에 정착한 이방인이었다. 할리카르나소스는 현재 터키공화국의 에게해 연안 도시 보드룸이다. 그때는 아직 투르크족이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 지역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그리스반도와 주변의 섬들, 이탈리아반도 남부, 터키의 지중해 연안이 모두 그리스 세계에 속했다.
아홉 권짜리 편집본으로 후대에 전해진 『역사』는 페르시아가 그리스 세계를 정복하려고 벌였던 전쟁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그때는 언어의 같고 다름이 곧 문명의 경계를 획정하는 결정적 기준이었다. 언어로 소통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상대를 일단 경계하고 배척하는 것이 사피엔스가 진화를 통해 획득한 생물학적 본능이자 기본적 생존 전략임을 알려 주는 현상이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 말을 쓰는 세계를 ‘헬라스그리스’, 그리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쓰던 세계를 ‘비非헬라스비그리스’라고 했다.
고대 아테네 시민들이 아는 세계는 사실상 그리스와 페르시아뿐이었지만 이방인 헤로도토스는 비헬라스 세계의 다른 지역과 민족과 문명도 알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나일강 유역 아프리카와 홍해 일대, 후일 서구 사람들이 중동이라는 이름을 붙인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반도뿐 아니라 인도에 대해서도 들은 게 적지 않았다. 지리와 산업에도 눈이 밝아 홍해 안쪽 만과 나일 하구 사이에 운하를 파면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공감을 표시했다.6 이집트 네코스 왕 통치 기간에 운하를 파다가 무려 12만 명이 죽었고, 외부 침략자를 불러들이는 통로가 된다는 비판 때문에 결국 공사를 중단했다는 정보도 적어 두었다.7 지중해–홍해–인도양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 아이디어는 2,300년이 지난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뚫림으로써 현실이 되었다.
6『역사』, 제2권 11장.
7『역사』, 제2권 158장.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하드라마 같은 페르시아 전쟁의 역사를 짤막하게 요약한다. 그리스는 유럽 동부 발칸 지역에서 지중해 쪽으로 뻗은 반도의 남단에 있다. B.C. 5세기 그리스 세계는 수많은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도시국가는 저마다 왕정, 귀족정, 참주정, 민주정 등 각양각색의 정치사회 체제를 보유했다. 모든 도시국가들을 하나의 세계로 묶어 준 요소는 ‘언어’와 ‘신화’였다. 그리스 세계 내부의 패권을 두고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장기간 대립했는데, 아테네는 그리스 남단의 작은 아티카반도에, 스파르타는 아티카반도 왼편에 섬처럼 튀어나온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있었다.
8‘유럽의 화약고’라는 별칭이 있는 ‘발칸’은 ‘산맥’이라는 뜻을 가진 투르크 말이다. 이스탄불에 수도를 두었던 오스만제국이 해체 국면에 접어들었던 19세기에 발칸은 흑해동, 아드리아해서, 지중해남, 도나우강 하류북 사이에 놓인 제국의 영토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오늘날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등이 여기에 있다.
오늘날 이란이 본거지였던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는 B.C. 6세기 말엽 메소포타미아, 북아프리카, 에게해, 소아시아,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 발칸반도, 인더스강 유역을 아우르는 거대 제국을 형성했다.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복속하기는커녕 조공을 바치는 것조차 거부하자 그는 대규모 침공을 준비했다. 그러나 B.C. 492년 첫 원정에 나선 페르시아 군대는 전함이 다르다넬스해협을 지나 그리스로 항해하던 중 거센 폭풍을 만난 탓에 전투를 해 보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B.C. 490년, 이번에는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로 직진한 페르시아 육군과 해군 2만 5,000명은 아테네 근처 바닷가의 마라톤 평원에서 1만 명의 아테네 보병과 마주쳤다. 그런데 이 단 한 번의 전투에서 페르시아는 무려 30배나 많은 전사자를 내는 대참패를 당하고 물러서야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B.C. 480년,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의 군대가 마라톤 평원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하려는 결의를 불태우며 30만 대군을 일으켜 그리스를 침공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결속한 그리스 연합군이 패전을 거듭하자 아테네 시민들은 도시를 비우고 피난을 떠났다. 열세에 빠진 그리스 연합 해군은 아테네 시민들의 피난지였던 살라미스섬 근처 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 해군을 유인한 다음 전격적인 기습 공격을 펼쳤다. 때마침 거센 역풍을 얻어맞은 페르시아 해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이 전쟁을 치르면서 스파르타는 왕이 전사했고 아테네는 도시 전체가 불타는 비극을 겪었지만 그리스 세계는 페르시아의 침략을 또다시 물리쳤다. 해군의 우수한 장비와 전투력으로 승리를 주도한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의 맹주가 되어 50년 동안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 황금기를 누렸으며, 페르시아제국은 패전의 후유증과 내부 반란에 흔들리다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당했다.
『역사』 제1권에서 헤로도토스는, 페니키아인들이 저질렀다는 펠로폰네소스반도 도시국가 아르고스의 이오 공주 납치 사건과 트로이 전쟁을 거론하며 그리스 세계와 외부 세계의 적대적 관계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하고, 페르시아를 포함한 아시아 여러 민족의 관습과 왕들의 흥망성쇠 과정을 소개했다. 제2권에서는 이집트의 지리와 역사, 이집트인의 관습과 종교를 다루었다. 제3권에는 페르시아와 이집트의 전쟁,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의 갈등, 다리우스 1세의 영토 확장과 법 제도의 정비, 인도와 아라비아 등 페르시아 너머에 사는 민족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헤로도토스에게 인도는 세계의 동쪽 끝이었다. 제4권에는 페르시아가 스키타이족 영토와 리비아를 정복하려고 벌였던 전쟁의 성공과 실패 과정을 썼다. 제5권에서 헤로도토스는 이오니아, 아테네, 스파르타를 비롯한 도시국가들의 정치 상황과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둘러싼 군사적·정치적 충돌, 그들 사이의 외교적 이합집산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했다. 제5권의 이야기는 사마천이 『사기』에 서술한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국가들이 벌였던 쟁투와 합종연횡合從連橫을 떠올리게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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