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사람
소진은 이십대 후반으로 한 공기업의 지방 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소진의 사수였다. 경력사원으로 이직하긴 했지만 어쨌든 새로운 회사였고 소진은 팀의 멘토-멘티 전통에 따라 열 살 많은 과장의 직속 후배가 되었다. 그는 종종 구내식당이 지겨우니 밖에서 점심을 먹자며 소진만 데리고 나갔는데 낮인 데다가 술을 마시는 자리도 아니라 부담을 갖지 않았다. 대체로 업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고 개인적인 주제라고는 그가 털어놓는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 정도였다. 그때만 해도 문제가 없었다. 어느 밤, 회식을 마치고 ‘내려주고 가겠다’는 그와 같은 택시를 탄 것이 시작이었다. 택시 뒷좌석에서 그가 원치 않는 신체접촉을 해왔다. 소진은 이러지 마시라고 말한 뒤 택시에서 내려 그를 따돌리고 집에 갔다. 이후로 그는 소진의 화장과 옷차림을 지적하고 모니터나 자료를 보면서, 메모를 하면서, 회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소진의 손과 어깨, 허리 등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농담의 수위가 높아지고 퇴근 이후에 자꾸만 만나자, 보고 싶다,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며 연락을 해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입사 육 개월 때였다.
소진은 먼저 팀장에게 메일로 상황을 알렸다. 증거를 남겨야겠다는 판단이었다. 팀장에게서 절대 덮으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과장을 징계하거나 격리하는 일이 쉽지 않으니 소진이 팀을 옮길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답장이 왔다. 그냥 자신이 팀을 옮길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피해자가 도망치는 것은 옳지 않았다. 법적 조치까지는 아니더라도 회사 차원의 징계 정도는 있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일을 공론화하면 자신도 지금처럼 회사를 다니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소진은 고민 끝에 과장을 다른 팀으로 보내달라고, 또 정식으로 팀장 면담을 요청한다고 메일을 썼다. 하지만 일은 소진이 예상치 않았던 방향으로 커졌다.
팀장에게서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소진은 팀장에게 두 번 메일을 더 썼지만 역시 답이 없었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찾아가자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그사이 팀장은 과장을 먼저 불러 소진이 보낸 메일을 보여주며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소진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당연히 과장이 자신의 성희롱과 성추행을 부인하고 소진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과장이 사무실 한가운데서 큰 소리로 소진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를 많이 주었고 지시 내용도 계속 바꾸었다. 소진이 의견을 내거나 질문을 하면 일하기 싫다는 거냐고 고함을 쳤다. 인사를 안 한다거나 전화를 늦게 받았다거나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소진은 화장실에서 몰래 울다가 과장과 동기인 여자 선배와 마주쳤다. 선배는 눈이 빨갛게 충혈된 소진을 토닥이고는 화장실에 두 사람밖에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두 가지를 당부했다. 녹음하고 자료를 남길 것, 문제 제기를 하려면 퇴사하지 말고 회사에 남아서 할 것. 그러고는 도울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말했다. 소진은 업무일지를 꼼꼼하게 작성하고 과장에게 보고할 때면 휴대폰으로 녹음을 했다. 그리고 인사팀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
인사팀에서는 곧바로 자체조사 일정을 잡았다. 소진이 통보받은 시간에 회의실로 갔더니 과장과 팀장, 인사팀장, 이렇게 세 명의 남자가 미리 와 앉아 있었다. 팀장은 과장이 좀 엄하게 후배들을 가르치는 경향이 있는데 소진이 그래서 힘들었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과장은 소진이 이전 회사에서 사내 커플이었던 점과 퇴사 후 밀린 임금을 노동부 진정을 통해 받았던 점을 뜬금없이 언급했다. 인사팀장은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잘 화해하라고 소진을 설득했다. 곧바로 항의하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는 못했다. 소진은 과장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축되었고 다른 두 사람도 과장 편에 있다고 느꼈다. 일단 알겠다,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고 조사를 마쳤다. 다행히 소진은 선배의 조언대로 모든 상황을 녹음하고 있었다.
소진에 대해 이상한 말들이 떠돈다고 알려준 것은 입사 동기였다. 오가다 마주치면 눈인사를 나누는 정도지 따로 연락하거나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전화가 왔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 같아 고민 끝에 연락했단다. 소문 속에서 소진의 전 남자친구는 유부남으로 둔갑해 있었다. 심지어 소진이 먼저 유혹해 가정을 깨놓았는데 회사에 알려지자 두 달가량 무단결근해놓고 노동부에 진정을 내서 급여까지 받아 챙겼단다. 소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동기는 망설이다 덧붙였다. 이번에도 소진이 의도적으로 과장에게 접근한 후 무마 조건으로 승진과 서울 발령을 요구했다는 말이 돌고 있다고.
소진은 잠을 자지 못했고 밥을 먹지 못했고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왈칵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사람들이 자신을 피한다고 느꼈고 그게 혼자만의 망상인가 싶어서 더 괴로웠다. 소진은 인사팀을 찾아가 화해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과장의 행동은 명백한 성폭력이며 이를 반성하기는커녕 직위를 이용해 압박할 뿐 아니라 악의적으로 음해하고 있다고 징계와 분리를 요구했다. 인사위원회가 열렸고 소진이 일기와 메모, 과장과 주고받은 메시지, 녹취록까지 모든 자료를 제출했지만 두 사람은 사내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사유로 똑같이 삼 개월 감봉 징계를 받았다. 소진은 노동청에 직장 내 성폭력으로 다시 진정을 냈다.
팀장이 소진을 불러 화를 냈다. 알아듣게 얘기했는데 꼭 이렇게 일을 키워야 했느냐고 사회부적응자, 또라이, 사이코패스라고 말했다. 이 얘기도 녹음하고 있느냐며 녹음당할까 무서워 소진 씨하고는 말도 못 하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소진이 뻔히 보고 있는데 과장을 위로했다. 어쩌다 이렇게 지독하게 걸렸니, 액땜했다, 똥 밟았다고 생각해라…… 아무도 소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어떤 일도 주지 않았다. 출근길이 지옥 같았다. 회사에만 오면 당장 몸이 터져 흩어질 듯 심장이 마구 뛰다가 어느 순간 쿵, 하고 끝도 없이 떨어졌다. 그러다 한번씩 커다란 손이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숨이 가빠왔다. 소진은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고 병가를 냈다. 과장은 전과 똑같이 회사를 다녔다.
소진은 밤낮없이 혼자 술을 마셨고 매일 울었다. 병원에서는 술과 약을 함께 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둘 중 하나라도 없이는 견딜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정식으로 문제제기 한 것도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술을 마시고 엉망으로 지내는 것도 잠깐이라면 괜찮다고 너무 길어지지만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소진은 부모님을 봐서라도 무너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이후로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갈까, 다른 지역으로 가서 다른 일을 하면서 살까, 이번 기회에 하고 싶던 공부를 더 할까, 몇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노동청 진정 결과가 나왔다. 가해자를 징계하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끝내 따르지 않았고 소진은 이기든 지든 이 싸움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진은 직장에서, 학교에서, 모임에서, 자신이 속한 크고 작은 집단에서 일어난 성폭력 고발 글들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 글들을 보며 소진은 자신도 겪었던,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거나 방관했던 폭력들을 떠올렸었다. 그때는 온라인 서명도 하고 소소하게 모금에도 동참했지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지는 못하고 살았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찾아보니 제대로 대가를 치른 가해자는 별로 없고 폭로라는 마지막 방법을 선택했던 피해자들은 명예훼손, 모욕, 무고 등으로 역고소를 당해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알면서도 소진은 포털사이트 오픈 게시판과 자신의 SNS 계정에 사건 경과부터 회사의 조치까지 모두 폭로했다. 그동안 제도, 규범, 상식 중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런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녹음을 하라고 조언했던 선배에게 연락했더니 비슷한 일로 퇴사했던 예전 직원을 설득해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선배와 팀원 한 명이 과장의 성희롱 장면을 목격했다는 진술서를 써주었다. 소진이 올린 글을 빠르게 퍼져 기사화되었다. 한 여성단체와 연락이 되었고 믿음직한 변호사를 소개받아 회사와 가해자를 상대로 민형사상 절차에 들어갔다. 얼굴과 목소리를 가리긴 했지만 언론사와 직접 인터뷰도 했다.
소진의 신상이 나돌았고 인터뷰 기사마다 심각한 수준의 악플이 달렸다. 기자가 된 대학동창이 어떻게 번호를 알고 전화를 해서 조금 짜증을 내며 말했는데 고스란히 녹음되어 뉴스에 나왔다. 회사는 그 와중에도 합의를 종용했고 과장은 고소를 준비 중이라고 전해왔다. 그래도 절대 후회하지 않느냐면 사실 아니다. 소진은 매일, 매 순간순간 후회한다. 빗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웅큼씩 빠지고 음식이 들어가기만 하면 토해서 수액과 영양제로 버티고 있다. 소진이 혹시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봐 엄마가 밤마다 소진의 침대 옆에 이불을 깔고 잔다. 소진은 변호사에게, 선배에게, 가족들에게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묻곤 한다. 모두들 피해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며 너무 힘들다면 여기서 멈추어도 된다고 말하는데 정작 소진이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같은 과장에게 성희롱 당하다 퇴사했다는 직원은 소진을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때 자신이 조용히 덮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소진도 같은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자책했다. 물론 소진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용히 덮고 넘어간 두 번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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