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어린 시절 M이 읊으면서 가장 의문과 불안을 느꼈던 기도문 구절
(관객을 위한 의자나 배우를 위한 무대 없이 오직 빛의 밝기로만 경계를 만드는 원형 극장 안에 서로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곳곳에 서 있다. 어두웠던 한 곳에 빛이 들어오자 웅성웅성대던 목소리들이 사그라진다.)
7월 초. 조그만 방들이 밀집한 어느 도시의 골목길. 백금처럼 쏟아지는 빛에 눈을 찡그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젊은 남자. 빛줄기에 잠시 얼굴의 한 부분이 특출해 보이긴 하지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고 낯익은 인상. 이 남자에게도 물론 이름이 있겠지만 여기에선 ‘편의상’ M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오늘은 M이 생애 마흔여덟 번째 면접을 보러 가는 날이다. 날씨는 이만하면 괜찮고 시간도 넉넉하다. 그런데 원룸을 나서 언덕길을 내려가던 M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마흔여덟 번째가 아니라 마흔아홉 번째던가? 생각해 보니 애매한 경우가 하나 끼어 있었다.
지난 3월, 한 업체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자리에 담당자가 없었다. 약속보다 30분 이른 시각. M은 여러 의자들 중 구석에 놓인, 앉아도 될 만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 담당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다들 각자의 업무에 바빠서인지 M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점심도 거르고 두 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담당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상쩍어하는 눈초리로 M 주변을 비켜 가기만 할 뿐 말은 걸어오지 않았다. 당혹. 실망. 모멸. 혹시 내가 날짜와 장소를 잘못 안 건가, 하는 불안. 지금이라도 와 주기만 한다면 모두 용서해 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자비……. M은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남자가 M에게 다가와 여기서 뭐 하느냐고 물었다. M은 자신의 사정을 설명한 뒤 “막 가려던 참이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러면 안 되지” 하면서 흔쾌히 자기가 담당자 대신 면접을 봐 주겠다고 했다. 머리에 웨이브를 준, 멋진 사장님이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인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누운 채로 전화를 받은 M은 상대방이 신분을 밝힌 순간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무릎을 꿇었다. 어제 면접을 보러 간 업체의 면접 담당자. 그는 어제는 일이 생겨 회사에 못 갔다면서 오늘 오전 중에 다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M
(의아하다는 듯) 하지만 어제 사장님께서 면접을 봐 주셨는데요. 아직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담당자
(더 의아하다는 듯) 사장님 누구?
M
머리가 길고 살짝 파마도 한 것 같은 분 말입니다.
담장자
우리 사장은 내 매형인데, 매형은 지금 지방 출장 중이라서 못 본 지가 한참이에요. 있다 해도 파마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고.
M
(잡고 있던 전화기를 다른 쪽 손으로 바꾸어 들며) 그럼 제가 만난 분은 누굽니까?
담당자
(퉁명하게) 나야 모르죠.
M
(간절히) 그 회사 직원이 아닙니까?
담당자
(퉁명하게) 나야 얼굴을 못 봤으니 모르지.
M
(더 간절히)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굉장히 눈에 띄는 분이셨습니다. 사장님이 아니시라면 이사님 정도 돼 보이는, 아니면…….
담당자
(목소리를 높여 M의 말을 자르면서) 나는 모른다니까.
잠시 뒤.
M
(기가 죽은 듯 작은 목소리, 그러나 일말의 희망이 묻어나게) 그러면 저는 누구한테 면접을 본 겁니까?
담당자
(희망을 주는 대신 기를 죽이듯) 허, 참. 내가 더 궁금하네. 젊은 사람이 정신 하나 못 차리고 말이야, 도대체 누구한테 함부로 면접을 보고 다니는 거예요?
담당자는 오늘은 꼭 자리에 있을 테니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M은 망설였다.
잠시 뒤.
M
아니요. (이런 식의 거절을 처음 한다는 것을 의식하며) 전 이미 면접을 봤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다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담당자
후회할 텐데.
담당자가 전화를 끊자마자 정말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 아니다, 이건 빼자. M은 이번 면접을 마흔여덟 번째로 결론 내리기로 하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느 모로 보나 마흔여덟 번째가 더 좋다. 이번이 마흔아홉 번째야, 라고 생각하면 결국엔 오십 번째 면접도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지하철역.
자연광에서 인조광으로 바뀌면서 사람들 피부에 적나라한 느낌의 푸른빛이 돈다. (늙은 사람은 더 늙어 보이고, 슬픈 사람은 더 슬퍼 보이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 보이도록.)
다양한 연령대의 많은 인파. 사람은 많지만 장소 특유의 우울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행인들의 보행 속도는 빠르지만 표정은 한 가지로 일관되어 있다. 서로 어깨를 부딪쳐도 뒤돌아 확인하는 사람은 없다.
전철을 기다리던 M은 곰팡이 냄새와 섞인 매캐한 먼지 냄새가 자신의 한 벌뿐인 여름 양복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체취란 눈으로 확인 가능한 정보보다 그 사람에 관해 더 많은 걸 말해 주는 법. 만약 면접관들이 자신을 지하도와 관련된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면접 평가서에 반영하기라도 한다면. M은 시끄럽게 돌아가는 환풍구 주변에서 비켜 서며 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편의점에 들러 탈취제를 사서 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면접 탈취제, 면접 탈취제, 면접 탈취제, 라고 세 번 되뇌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이 우연성이 자연스레 납득되도록)
M의 시야 안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겨울 점퍼를 입은 채 인파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넥타이만 매도 갑갑한 날씨에 패딩 점퍼라니. 머리가 이상하거나 위험한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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