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회색빛에서 어느덧 연둣빛!
『아기너구리네 봄맞이』권정생 글, 송진헌 그림, 길벗어린이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나요? 귀를 열고 가만히 들어보세요.
단풍나무 가지 끝에 불긋불긋 물오르는 소리, 버들강아지 솜털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 조록조록 흐르는 개울물 소리, 바람꽃이 낙엽 사이로 고개 내미는 소리, 매화나무 꽃망울이 바스락 꼼지락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 가까이 봄이 온 거예요.
햇볕 포근한 봄날은 모두가 고루 나눠 갖는 선물이지만, 봄을 맞기 위해 견디고 기다린 시간만큼 사람마다 차지하는 기쁨은 다를 거예요.
* * *
먼 산 속 너구리네 집에 가 볼까요? 이제 막 겨울잠에서 깨어나 생애 첫 봄을 맞는 아기너구리 세 남매가 있습니다. 춥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긴 겨울을 보냈습니다. 눈을 말똥말똥 굴리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똥구멍이 간질간질해도 꾹꾹 참고 봄을 꿈꾸었어요. 기다림은 길었지만 꿈꾸는 동굴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지금 아기 너구리들이 맞이하는 첫 봄의 화사함을 이해하려면 더 먼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바람이 씽씽 몰아치는 겨울, 막내 아기너구리가 잠에서 깨어나자 모두 놀라 일어납니다. 엄마너구리는 아기너구리를 다독이며 겨울잠에 들라 합니다.
하지만 아기너구리들은 어두운 동굴이 두려워 봄이 언제 오느냐고 칭얼거리다 몰래 바깥세상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찔레꽃잎 같은 눈송이만 흩날리고 있습니다. 적막하고 고요한 겨울 숲을 내다본 아기너구리들은 봄이 아직 멀다는 걸 깨닫고 잠이 듭니다.
까무룩 잠이 들었을 뿐인데, 어느 날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과 향그러운 냄새가 몸을 깨웁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봄을 맞이하는 거지요. ‘모처럼’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아기너구리들은 비틀비틀 걷지만 시원한 개울물을 쭈욱쭈욱 마시고 기운을 얻습니다. 연둣빛 바람이 풀풀 날리는 언덕을 내달리는 아기너구리들. 긴 기다림 뒤에 만나게 된, 연노랑으로 연분홍으로 물든 산골은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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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동문학의 큰 기둥이신 권정생 선생님은 겨울잠 자는 너구리네 가족의 이야기 속에 자연의 섭리와 그 섭리를 따르는 기다림의 미학을 일러 줍니다.
무엇보다 까만 연필화가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연필로 촘촘하게 선을 그어 그린 겨울 풍경과 가지만 남은 나무들, 만지면 보들보들할 것 같은 너구리들의 털까지 글을 잘 보듬어 주고 있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스스로 몸을 맡기는 너구리들의 마음까지 느껴집니다.
이 책을 읽고 아이들에게 ‘봄이 오면 달라지는 것들’이 뭐냐고 물으면 빛깔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회색빛에서 연둣빛으로 밝아져 있으니까요. 뚜리뚜리, 조록조록 같은 정다운 표현도 소리 내어 읽어보면 마음 빛깔이 고와지는 것 같습니다.
02
아기가 꽃밭에서 넘어졌습니다
『꽃밭』윤석중 글, 김나경 그림, 파랑새
알록달록 피어난 여름채송화가 참 곱습니다. 담 밖에는 해바라기 키를 돋우고 담장 아랜 봉숭아꽃도 발갛게 얼굴 내밀었습니다. 연분홍 메꽃도 어울리게 넝쿨을 뻗어올리는 풍성한 여름. 조만간 파란 꽃잎에 노란 꽃술을 내밀 닭의장풀도 한ㄴ껏 영토를 넓히고, 하얀 쌀밥 같은 토끼풀은 아이들 손에서 꽃반지로 꽃시계로 꽃목걸이로 변신하며 화사한 날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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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중 선생님의 동시 그림책 《꽃밭》은 요샛날에 잘 어울리는 책입니다. ‘아기가 꽃밭에서 / 넘어졌습니다 / 정강이에 정강이에 / 새빨간 피 / 아기는 으아 울었습니다 // 한참 울다 자세히 보니 / 그건 그건 피가 아니고 / 새빨간 새빨간 꽃잎이었습니다’(《꽃밭》 전문). 생전에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동시로 꼽았던 《꽃밭》은 1946년 《초승달》 시집에 실렸으니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을 움직이는 맑은 느낌 때문에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조아합니다. 윤석중 선생님은 ‘퐁당퐁당’, ‘고추 먹고 맴맴’, ‘낮에 나온 반달’, ‘기찻길 옆’ 하면 ‘아하! 그 노래! 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딱 여덟 줄의 짧은 시는 오히려 강렬한 이미지를 남깁니다. 꽃밭에서 놀다 넘어진 아기가 피가 난 줄 알고 으앙 우는데 정강이에 붙은 건 빨간 꽃잎이었다는 이야기, 그 안에 담긴 아이의 천진함이 웃음을 주고, 만화풍의 그림으로 표현된 아기의 동글동글한 선과 꽃밭 가득 선명한 색채 이미지가 만나 간결하고 화사합니다.
‘아기가 꽃밭에서 / 넘어졌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꽃밭. 채송화와 꽃잔디와 딸기꽃과 토끼풀에서 향기로운 꽃내음이 나는 것 같습니다. 풀시계를 차고 화관을 쓴 귀여운 아기가 한껏 꽃밭에서 노니는 풍경이 흐뭇합니다. 그런데 아이쿠 넘어진 아기의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에 얼굴이 일순 찡그려집니다.
‘정강이에 정강이에 / 새빨간 피 / 아기는 으아 울었습니다.’ 아기는 넘어져서 정강이에 빨간 피가 나고 있습니다. ‘이런!’ 하고 달려가 일으켜주고 그 작은 정강이를 호 불어주고 싶습니다. 아기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에구~ 우리 아기 아야 했어?” 얼른 안아서 아픔을 얼러주고 싶습니다.
‘한참 울다 자세히 보니’ 폭신한 꽃밭에서 넘어졌으니 크게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한참을 우는 걸 보면 아마도 피 때문에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울다 지쳐서 조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친 부위를 보는 아기.
‘그건 그건 피가 아니고 / 새빨간 새빨간 꽃잎이었습니다.’ 아기는 새빨간 피를 보고 놀라 울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 예쁜 꽃잎이었습니다. 아아, 어느 시의 마지막 구절에 이런 깜찍하고 기쁘고 예쁜 반전이 있을까요. 아기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며 바라봤던 독자들은 ‘그런 거였어?’ 하고 웃게 됩니다. 붉은 꽃잎이 시원스레 펼쳐지는 화면과 깜찍한 반전을 생각해낸 작가의 감성에 그 누가 미소 짓지 않을 수 있을까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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