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국가와 소비로부터의 탈출
엑소더스
국가와 소비로부터의 탈출
다니엘 로이크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자신들의 공저인 『제국』에서 “인류학적 엑소더스”라는 개념을 사용한다(Hardt/Negri 2002 [2000]: 227). 이들에 따르면 이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가정생활, 공장 규율, 전통적 성생활 규율 등에 적응하기”에는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새로운 삶의 형태이다. 물론 이런 표현은 “위대한 거부”와 “새로운 감수성”이라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선언,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의 “소수자 되기” 개념, 그리고 “존재의 미학”이라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급진적 대안에 대한 꿈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주로 희망적 관측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하트와 네그리는 오늘날 일어나는 광범위한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이를 표제어로 삼기도 한다. 즉 엑소더스는 탈출자 집단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들이 탈출한 사회에 대해서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오늘날 각국에서 일어난 탈출, 퇴거와 이주를 가리킨다. 그러나 엑소더스가 공간적으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또한 비유적인 의미에서 “내부로의 탈출” 움직임 역시 뜻한다.
이런 식으로 이해된 “기획된 탈출”은 일종의 실존적 차원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즉 농촌 및 도시 공동체, 자율운영 학교와 유치원, 빈집이나 공장 점거, 생존 지향적 농업 기획, 그리고 순환적 교환, 공동 생산, 공유와 공동 소비 등과 같이 자율적으로 조직된 경제 행위, 또한 다성애, 비독점적 다자 연애와 같은 페미니즘적 실험, 공동 경작, 도시 공간의 점유와 용도 변경, 혹은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에서와 같이 점령 공간에서의 텐트촌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사례들의 이론적 틀은 직접민주주의 이론에서부터 “상호 지원”이라는 상호공생주의적 이상, 생태학적 지속가능성, 그리고 연대적 경제 모델에까지 이르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68혁명이 준 일반적 각성의 틀 속에 있던 기획들이 더 이상 매력적인 삶의 기획을 대표할 수 없게 되자, 다시 말해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대안을 제시하려는 열정을 더 이상 동원할 수 없게 되자, 최근 몇 년 전부터 위와 같은 실험들의 증가가 관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증가는, 첫 번째 가설에 따르면, 개별적인 도시나 농촌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적어도 서구 국가의 대도시에서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
이런 엑소더스 실천들은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해볼 만하다.
엑소더스 실천들은 사회적 총체성이라는 경제주의적이고 환원적인 관점과는 양립 불가능한 사회 이론적 전제들에 기인한다. 물론 공간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국가와 소비로부터의 탈출이란 생각은 자본이 점차 모든 생활 영역에 침투함으로써 봉건적 유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 방식을 자본주의 내에 존재하게 한다는 마르크스의 전제와는 이별을 고하지만, 적어도 이에 대한 포괄적인 재해석을 전제한다. 엑소더스 실천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도 비자본주의적, 또는 탈자본주의적 자유 공간, 혹은 “헤테로토피아”의 확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유토피아 이론적으로 볼 때 이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대안적 사회에 대한 묘사를 신에 대한 모사 금지 원칙과 연결시키는 부정적 비판 전략에 대한 거부이다. 지금 여기에서 대안적 사회의 제도적 구조를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포스트 68 좌파 대부분을 지배하는 회의주의는 유물론에 대한 특정한 이해의 결과이다. 즉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기 때문에 유토피아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는 무의식적으로 낡은 사회의 결함을 동반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엑소더스 실천에 비추어보면 이런 식의 유보는 혼란과 변명일 뿐이다. 엑소더스 실천의 옹호자들은 이에 반해 어떤 거대한 붕괴를 기대할 것도 없이 즉시 대안적 공동생활 형태가 토론되고, 시험되고, 수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엑소더스 실천은 도덕적 정당화뿐만 아니라, 제도 이론적 정당화 부담을 갖는다. 즉 이 실천들은 급진적 사회 변동 과정 내에서도 대안적 생활 형태를 위한 실질적 변혁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고, 또 이것이 안정되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신뢰성이란 범주를 복권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총체성이란 범주는 개개인을 도덕적 명령에 대한 복종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잘못된 삶 속에서도 올바른 삶이 존재한다).
윤리적으로 볼 때 엑소더스 실천은 도덕적 옳음을 행복 경험과 연결시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도를 혁신한다. 이런 실천들은 푸코 때문에 신용을 잃게 된 “슬픈 전사”의 모습과는 반대로 금욕자의 모습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런 실천들은 개개인에게도 매력적인 생활 기획을 제시하려고 한다. 실제로 이런 실천들은 정서적-물질적 차원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킨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에 대한 전망이었을 뿐이다.
변혁 이론적으로 볼 때 엑소더스 실천들은 권력 장악의 문제를 우회한다. 엑소더스 실천은 이미 정착된 권력 관계의 의미를 수행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국가에 대해 요구하지도 않으며, 다른 정치적 기관에도 의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엑소더스 이념은 혁명이나 개혁 개념의 특수한 형태이거나 그 하위 범주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이들과 경쟁관계에 있다. 여기서 엑소더스 이념은 급진적 사회 변혁이 갖는 고전적 문제 중 폭력 문제나 적-동지 구분과 같은 몇 가지 점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대답을 제공한다. 엑소더스는 국가 장악도 아니고 논증적 과반수의 획득도 전제하지 않으며, 그 어떤 명백한 붕괴 사건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바리케이트 어느 쪽에 서 있느냐 하는 이원적 결정을 요구하기보다는 점진적인 자리 잡기를 허용할 수 있다(특히 Virno 2010 [2002]; 국가 이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Loick 2014). 따라서 엑소더스의 창조성은 탈방향성에 있다. 엑소더스는 어떤 형태의 강탈도 포기하고,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남아 있을지, 함께 갈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하지만, 적이 되지 않고 남아 있을 가능성 역시 열어놓기 때문이다.
엑소더스 실천이 이런 흥미로운 점들을 압축하고 있지만, 체념적-도피주의적이란 점에서 잘못된 전략의 결과로 이해되거나, 아니면 그 자체도 개인주의와 자아진정성에 대한 자본주의적 욕구로 이해될 수 있는 일련의 난점들도 노정시키고 있다. 이러한 도전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있다.
엑소더스 실천에 대한 고전적 비판에 해당되는 것은, 이것이 자본주의의 통합력을 과소평가하고 있고, 보편적 사회변혁을 필수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최선의 경우 아무런 영향력도 없거나 최악의 경우 이데올로기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엑소더스 실천은 뤽 볼탕스키Luc Boltanski외 에브 시아펠로Ève Chiapell가 탐구했던 “예술가적 비판”, 즉 현실 참여의 실존적 차원을 중시하지만 결과적으로 비열한 자본주의적 착취 전략에 길을 닦아 주는 예술가적 비판의 계승자로 이해될 수 있다(Boltanski/Chiapello 2006 [1999]). 엑소더스 실천은, 아른트 노이만Arndt Neumann의 표현처럼 자율적 기획과 “소규모 욕심 낳은 회사”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차이가 없을 때라면 언제든지 이런 식의 결과에 빠질 것이다(Neumann 2008).
이와 동일한 방향에서 사회로부터의 엑소더스를 추동하는 욕구 중 많은 것들이 현존 사회와 대립관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로부터 등장했다는 지적들도 있다.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개인주의, 창조성, 자아진정성 그리고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들이 있으며, 이런 개념들은 신자유주의 속에서 그 의미가 변질되었고, 이러한 기존 사회로의 통합에 저항한 엑소더스 실천은 그 구조상 개인주의적 특성 때문에 단지 연약한 보호 구역만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 이론상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 탈정치화 경향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엑소더스 실천이 국가나 그 외의 다른 정치적 기관들과의 논쟁을 추구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공적 토론에의 참여를 포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를 통해 개별적 시민들의 권능이 강화되고 활동성이 증가하지만 사회적 해체 역시 조장된다. 엑소더스 실천은 일반적 관심사를 협상하기 위한 공동의 무대를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특히나 극단적인 비판에 대해서는 Mouffe 2005).
그리고 끝으로 엑소더스 실천은 언제나 개인적 관계에 대한 과잉 투자로 파열될 것처럼 보인다. 이런 붕괴의 증상들은 주로 친밀성 관계에 대한 과도한 몰두, 지나친 욕구와 정서적 과부하, 갈등의 개인화와 도덕화, 의존성과 욕구에 대한 오해 등에서 나타난다(68세대의 “인류학적 엑소더스”와 그 문제점에 대한 매력적인 기록은 Kommune 2 [1969]).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